혁명(2)
아담 폰 헤르베르스토프의 2차 농민 진압군은 기존에 불과 사백 명도 되지 않는 1차 진압군이 몰살당했다는 것을 감안했는지 그 규모가 거의 열세 배는 더 증가했다.
비록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하며 국가의 병력들은 증가 추세에 있었지만, 그래도 오천 명의 병사는 결코 만만히 볼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총병.
신성로마제국의 전열보병은 유럽에서는 상당히 알아주는 강력한 군대였다.
프랑스가 유난스레 강했던 것이지, 신성로마제국과 외부개입 없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벌여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조차 그들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해져, 이교도 프랑스와의 연대를 더욱 돈독히 하고 있으니.
비록 바이에른 총독이 다루는 병력은 합스부르크 카이저의 병력들에 비해서는 썩 정예하지 않았지만 아예 머저리들을 프랑스와의 접경지나 다름없는 남도이칠란트 핵심 지역에 박아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농민군들은 자그마한 무기고와 1차 원정군에게서 노획한 칠백여 정의 수석식 소총과 몹시 부족한 화약으로 오천 명의 정규군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1차 진압이 수포로 돌아가고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새롭게 합류하여 농민군들의 기세가 바짝 올라 그 세력이 삽시간에 불어났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른이 아이의 팔을 비트는 것보다 쉬울 전쟁이었다.
아담은 승리를 장담하며 그의 본거지인 그문덴을 떠나 북쪽으로 나아갔다.
진압군의 세력이 농민군과 마주한 곳은 린츠 북쪽의 작은 마을 키르히베르크.
봉기의 시발점이자 농민군 지휘관인 크리스토프 젤러와 그의 매형 스테판 파딩거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키르히베르크는 거의 훈련을 받지 못했던 만 천 명의 농민군과 준수한 무기를 지니고 약간의 경험이 있는 오천 명의 정규군이 맞붙는 전장이 되었다.
그리고 토벌군의 어느 누구도 정규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농민군은 수적인 우위 말고도 결정적인 이점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평생 살아온 농민들이 자신들의 고향이 어떤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같은 남독일이라고 해도, 이 차이는 극명하게 다가갔다.
지휘관의 차이도 있었다.
아드리안은 농민군 지도자 크리스토프와 스테판을 대동계 핵심 간부로 끌어들이면서 중용했다.
새롭게 세력을 확장하며 기존의 지도자들에 대한 인정의 목적도 있었지만 이 둘이 비록 일자무식인 농민이었더라도 명망 높은 귀족 못지않게 상당히 용맹하고 번뜩이는 전술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실제로 삼백칠십 명의 병사들을 물리친 전공은 허투루 볼 것은 아니었다.
아담은 농민들을 과소평가했으나, 일신의 고귀함은 역량과 꼭 비례하지 않았다.
카리스마 넘치는 아드리안이 스스로 미끼를 자청하여 온갖 잡동사니들로 요새화시킨 키르히베르크에 틀어박혀 저들을 유인한 뒤 집중 공격을 버티고 있을 동안, 크리스토프와 스테판은 지리를 이용하여 진압군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숲과 구릉지 너머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몰래 다가가 진압군의 후미를 들이쳤다.
적을 확실히 공격하기 위해 보병대를 분산시켜 키르히베르크를 공격하던 아담은 삽시간에 후미에 있는 포병대가 몰살당하자 크게 당황했다.
포술 자체는 엉성했지만 사방에서 농민군들이 대포와 활, 그리고 약간의 총을 쏘아대자, 진압군은 크게 동요했다.
구원을 가기 위해 등을 돌리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가전을 벌이고 있던 농민군들이 죽기 살기로 육박전을 걸어오니 곧바로 포병대를 구원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무능력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총지휘관인 아담이 활에 맞자, 나머지 지휘관들은 아예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추태와 추태의 연속.
두 번째 진압군마저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하고 퇴각한 것이다.
― 와아아!
“혁명 만세!”
들판에는 진압군과 농민군들의 피를 머금은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 * *
이 상징적인 전투 이후, 바이에른 대동계는 파사우 주교령과 데겐도르프, 슈트라우빙, 심지어 자유도시 레겐스부르크(Regensburg)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레겐스부르크는 의외로 큰 저항 없이 농민군의 손에 떨어졌다.
그곳에 허울뿐이긴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제국의회(Reichstag)가 위치하고 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억압받는 자가 비단 농민들뿐이었겠는가.
레겐스부르크는 제국자유도시(Freie und Reichsstädte)로 내륙지방이지만 산업혁명의 물결이 빠르게 영향을 미치며 막대한 부를 거머쥔 곳이었다.
더불어 소상인들과 공장 노동자들도 많았다.
산업혁명이 진행될수록 이런 하위 계층들이 자본가 및 귀족들과 다투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미 이전부터 뤼베크니, 슈베비슈 할이니 프랑크푸르트 같은 도시에서는 폭동이 일어나 노동자와 영세 상인들이 자본가, 귀족과 대립하는 일이 일어났었다.
레겐스부르크도 마찬가지.
레겐스부르크 자유도시의 성문은 어느 날 밤, 사전에 작당했던 몇몇 노동자들에 의해 허무하게 열렸고, 불한당들이 위풍당당하게 도시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그날 밤 말을 타고 다른 성문으로 도망가거나, 고분고분히 새로운 지도층을 위해 재산을 내어놓고 복종하거나, 혹은 죽음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겐스부르크를 점령하는 것은 기존까지의 농민군이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유도시 내부에 있는 공장(군수공장마저도 포함되어 있었다)을 돌릴 수도 있었으며, 다른 자유도시들로부터 식량을 사 올 수도 있었다.
장기적으로 계속 그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지만 레겐스부르크의 도시를 점령하며 부가적인 수입(즉 자본가와 귀족의 재산)을 얻은 바이에른 대동계는 일단 재정의 숨통은 트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제국.
아드리안은 큰 승리를 얻었음에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왕국의 선제후왕이 개입할 것이다.
황제에 의해 꼭두각시로 바뀌었다 하나, 그는 여전히 유럽의 명문가 중 하나인 비텔스바흐 가문이었으며 독자적인 병력 또한 상당히 많았다.
빈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그들의 기준에선 개신교 폭도들이 난리를 일으켰으니, 합스부르크는 그들의 명장, 요한 체르클라에스(Johann Tserclaes)에게 충분한 병력을 딸려 보내 이 미천한 농민들에게 제 주제를 알려줄 수도 있었다.
밤새 고민하던 아드리안은 결국 대국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가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며, 레겐스부르크를 점령한 뒤 이 농민군 떨거지를 정말로 사상적, 정치적 혁명의 기수들로 탈바꿈할 수 있는 발군의 행정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의 위기를 넘기지 못한다면 애써 피어난 불꽃은 사그라들 것이다.
“이 서신을 가지고 파리에 가시오, 동지.”
“…아드리안 동지, 정말로 파리에 말입니까?”
“그렇소. 그들의 왕에게 주시오. 우리의 뜻을 분명하게 적어놓았으니 그들은 반드시 화답할 게요.”
양씨 가문의 원수, 발루아는 단절되었고 부르봉이 그 자리를 차지했더라도 그들 또한 대의의 적이며, 결국에는 때려눕혀야 할 존재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는 영리했으니 그 적의를 충분히 숨길 줄 알았다.
일단은 공동의 적인 신성로마제국을 겨냥하고 있으니, 지금은 가장 큰 힘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기에.
* * *
“으하하하!”
바이에른 대동계가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을 선포하긴 했지만 그 사실은 기차도 없는 남독일 촌구석에선 사방으로 완전히 퍼지지도 않았다.
대동계 혁명 동지들의 생각과 목적도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며, 추후의 파급력 또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상황.
신성로마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농민 봉기 사태에 가장 크게 기뻐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의 왕이었다.
가스통 1세는 계가 단절된 발루아 이후 프랑스의 왕좌를 차지한 부르봉 왕가의 두 번째 왕이었다.
위그노 내전과 합스부르크와의 전쟁 이후 바닥난 국력을 재건했던 그의 아버지 앙리 3세 이후, 바야흐로 프랑스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는 그는 이번 일로 신성로마제국이 시끄러워지자 앓던 이가 빠진 것마냥 좋아했다.
“추기경, 그들의 요구를 들어줍시다!”
하지만 가스통의 총신이자 프랑스의 명재상인 추기경 리슐리외는 그의 직설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안건에 대해서는 어딘가 상당히 머뭇거렸다.
“추기경, 이번의 일은 저 신성로마제국을 분열시키기에 딱 좋은 상황이지 않소? 비록 저들이 농민 반란군에 불과하나, 앞으로 보헤미아의 후스파 놈들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잖소?”
후스 전쟁 이후 보헤미아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했고, 지금까지도 신성로마제국의 근심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빌어먹을 개신교며 이단이긴 하지만 프랑스의 전략적 동맹.
그래도 가톨릭 성직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상당히 적절하지 않은 이야기였으나 가스통도, 리슐리외도 모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국가이성(Raison d'État)적 외교관에 따라 프랑스의 국익을 최우선적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리슐리외는 딱히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도이칠란트의 통일은 프랑스로서는 무조건적으로 피해야 할 상황이다.
하나가 된 도이칠란트의 잠재력은 상상만 해도 두려울 것이며 그렇기에 위대한 프랑스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가스통도, 리슐리외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번의 일은 썩 좋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리슐리외는 이상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뮌처의 일은 백 년도 더 넘은 과거의 일이었고 그들의 최대 성세조차 오륙 년을 넘지 못했지.
또한 리슐리외 자신은 프랑스 땅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둘 사람이 아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능적인 위기감에 등골이 오싹하고 몸에 소름이 돋았다.
“추기경. 짐이 그대를 신뢰하여 항상 귀를 기울이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소.”
리슐리외는 충분한 시간을 더 두고 그들을 살펴보고 싶었다.
하지만 주군 가스통 1세는 그 시간 동안 합스부르크가 저들을 쥐어 터트릴 것을 걱정했다.
농민군들이 다 죽어버린다면 ‘어쩌면 쓸 만했을 수도 있던 패’를 무의미하게 낭비하는 꼴이니까.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리슐리외는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군주의 지시에 따랐다.
그 자신도 딱히 무슨 확신이 든 것은 아니었으니.
그리고 제아무리 지원을 보낸다 하더라도 저 떨거지들이 얼마나 버틸지도 의문이었다.
“총과 화약을 적당히 보내면 되겠지요.”
“조금 더 늘려도 좋소. 그 총들이 결국 프랑스 사내의 피를 흘리지 않고 저 멍청한 합스부르크 주걱턱 놈의 개들을 사냥하는 데 쓰일 테니 넉넉하게 챙겨도 좋소이다.”
예전―발루아 시절―에는 프랑스 국왕마저도 총사대의 총을 사주기 위해서 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총기가 많이 보편화되고 증기기관과 공장이 많아지는 유럽에서는 지금 머스킷의 가격이 이전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전쟁도 잘 하지 않는 주제에 무기는 수상할 정도로 많이 발명하는 고려는 일정 주기마다 자신의 옛날 군수품과 치장물자들을 동맹국들에게 헐값에 팔아넘기고 있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와 에이레는 철 지난 고려군 무기를 거의 제식과 다름없게 쓰고 있었고.
그것조차도 무기만 보면 유럽에서 일류나 다름없었지만.
어쨌든 지금 무기의 가격은 싸고 가스통 1세는 자신의 관대함을 보이길 원했으니, 상당량의 군수 물자가 프랑스를 떠나 레겐스부르크로 향했다.
* * *
시기적절한 프랑스의 지원 덕에, 농민군은 그 해와 그다음 해의 혹독한 시험을 버텨냈다.
농민군은 그다음 해에는 이단에게 그 끔찍한 악명을 선사하던 가톨릭의 수도사이자 이단도살자인 요한 체르클라에스를 전장에서 죽이고는 정식으로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들의 사상적 스승이 되는 두 사람, 즉 토마스 뮌처와 톰마소 캄파넬라의 영향을 받아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은 기독교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념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며, 같은 대동계의 무리 중에서 이와 딱히 동의하지 않는 무리들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은 여러 가지 타협을 시도해 보다가 가장 큰 개념에서의 의견 수렴(무신론, 계급론, 사유재산론 등)이 되지 않자 형제들과 작별하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일부 지도층이 이탈해도 아드리안이 이끄는 바이에른 혁명 공화국의 성장세는 전혀 주춤거리지가 않았다.
1638년 무렵 공화국은 뉘른베르크와 안스바흐, 로텐부르크를 손에 쥐었다.
“잃을 것은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모든 것이다! 농민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1640년, 공화국은 오버팔츠와 린츠후트, 잉골슈타트로 세력을 확장했다.
1645년에는 바이로이트와 밤베르크를 점령하였으며 그다음 해에는 뷔르츠부르크, 슈투트가르트까지 삼켰다.
1650년에는 또 한 번의 확장을 꾀하니 뮌헨, 잘즈부르크, 하이델베르크와 마인츠, 팔츠와 아우구스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바이마르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뮌헨에 있던 비텔스바흐가의 바이에른 선제후왕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을 느끼고 티롤을 통해 빈으로 도피했다.
붉은 물결은 공화국이 흘릴 피, 공화국의 적들이 흘릴 피처럼 붉은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었다.
혁명 공화국의 행보에 그야말로 전 유럽이 경악했다.
신성로마제국에 똥물을 부어보겠답시고 바짝 마른 들판에 불을 붙여놓은 프랑스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놀랐고, 개신교계이니 같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싸우자고 꼬시던 보헤미아마저도 경악할 만큼 그 세력은 미친 듯이 자라나고 있었다.
당사자인 합스부르크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집안이 다 타버리는 광경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토벌군이 몇 차례나 대패한 이상, 도무지 뭘 할 수가 없어 보였다.
작은 나라.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인민들의 역량을 온전히 쓸 수 있는 혁명 공화국은 국민개병제를 실시한 이후부터는 도리어 합스부르크의 병력이 열세에 놓일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웬만한 일로는 도저히 통합이 불가능해 보였던 자유시들과 주교령, 백국들은 드디어 제 시기를 찾은 거대한 이념 앞에 순식간에 무릎이 꿇려졌다.
그것뿐이랴.
신성로마제국의 혼란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알바니아 등의 제국 내부의 구성원들의 동요가 극심해졌다.
“아….”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 알베리히 3세는 침음성을 삼켰다.
후대에는 허울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신성로마제국의 역사이며 중요한 기구 중 하나였던 제국의회가 혁명군에게 함락된 지금, 그들은 심지어 외교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명칭에 대한 도전마저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본국과 길이 끊겨버린 도이칠란트의 선제후들은 대부분 혁명군에 의해 죽거나, 복종하거나, 혹은 아예 옆 나라에 붙어 연명하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곳은, 아예 중부지방 북쪽에 위치한 도시와 백국, 주교령들을 낼름 삼켜버린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그에 비해 전통의 선제후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신성로마제국이 감히 뻔뻔하게 로마를 칭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제국의회는 빈에서 열겠다.”
알베리히 3세는 잠시 침묵하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국을 유지해 나가야만 했다.
그것이 많은 것을 양보하는 타협일지라도.
“그리고 헝가리의 지도층들을 불러라. 그들의 협력을 구해야겠다.”
마침내 1662년, 합스부르크는 그들의 주요 작위인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이름을 빌려 국호를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선포하니 서기 962년, 독일 왕이었던 오토 대제가 신성로마제국을 선포한 이후 정확히 700년 만에 이름부터 맞는 것이 단 하나도 없던 거짓된 제국은 세상에 종말을 고했다.
[선조들이시여, 우리 황제를 보우하소서]
고려가 전보통신을 개발하여 창양에서 해문의 전보소에 세계 최초의 전보를 보낸 해에 일어난 일이었다.
[작가의 말]
실제로 일어난 상오스트리아 농민반란에서 아담 폰 헤르베르스토프는 스테판과 크리스토프 같은 농민군 지도자들에게 기습 매복 공격에 박살이 난 뒤 체면을 구겼습니다.
이후 증원군으로 느슨해진 농민군들에게 곧바로 설욕을 하긴 했습니다만….
오늘 나온 앙리 3세는, 원역사의 앙리 4세입니다.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앙리 2세의 아내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메디치 가문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메디치가 이탈리아의 권력 분쟁에서 패배하고 고려로 가 상민의 밑에서 은행 가문이 된 이상, 결혼 구도는 바뀌었으니 후대 왕의 이름들도 바뀌었겠죠.
가스통 1세는, 그전까지 프랑스에 가스통이라는 국왕의 휘가 없었기에 당대에는 1세라는 것을 붙이지 않겠지만 프랑수아 1세와 비슷하게 편의를 위해 쓰기로 하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 또한 진작부터 바뀐 지 오래니 고려와 유럽, 동양의 왕사를 나중에 한번 정리하여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