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18화 (318/653)

혁명

정여립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디 그는 자학파의 일류로서, 당대 조선 유학의 거두 중 하나인 이이의 문하에 있다, 후에 그 생각을 바꾸어 남학파로 당적을 옮겼다.

모든 남학파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구분한다면 남학파는 확실히 사대부들에 의한 정치, 즉 재상정치론을 주장했고 자학파는 전통적 군주 중심의 정치에 충성해야 한다는 충의론을 고수하였다.

정여립이 조선의 왕들에게 꽤 밉상이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조선 역사상 최초로 제대로 된 민의, 즉 의회를 언급하여, 조선 또한 고려와 마찬가지로 중서성을 가져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국왕과 사대부들 모두를 자극하는 주장이었다.

안 그래도 당적을 옮긴 일로 이런저런 홀대를 받던 정여립은 그 후로는 아예 출사하지도 못했고 동료 문신들에게도 박대당했다.

그 또한 딱히 벼슬길에는 미련이 없었는지 젊은 나이에도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더 큰 꿈을 꾸고자 고려에 가 유학하기로 마음먹었고 개성을 통해 고려로 건너가는 것에 성공했다.

처음 그가 고려에 와 느낀 것은 다른 조선인들이 느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가 올 적에는 고려는 아직 남려 일부분에서만 철도를 운용하고 있었을 뿐, 완벽한 철도 세상이 도래하여 내지에서도 자유롭게 이동하는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크나큰 충격을 느꼈다.

‘이런 세상이 어찌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곧 이 환상적인 나라에 엄청나게 매료되었다.

누가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느냐마는.

정여립은 고려의 수많은 문인들과 이야기를 하며 현대적 정치와 국제정세, 그리고 철학과 자연법 사상, 심지어 약간의 자연과학적 지식까지 탐구했고 서서히 그의 정치적 주관이 자리잡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의문이 들었던 것 같았다.

이 제국은 오로지 인간이라는 존재의 밝은 희망만을 집대성한 나라와도 같았다.

그가 지금껏 보고 들으며 겪어 본 곳, 즉 조선과 명은 사회가 이렇게 굴러가지 않았다.

비록 고려와 접촉한 병인몽란 이후의 조선은 이전보다는 더 나은 길로 나아갔지만, 그래도 난이니 농민 봉기는 걸핏하면 터졌고 지도계층 또한 그런 민란들을 잔혹하게 때려잡을망정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본질을 바꾸려고 들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상해.’

절대적인 군주가 이렇게 선의를 보이며, 유능한 신료들이 이렇게 매번 나오는 나라가 대체 어떻게 존재한다는 말인가.

지금이야 중서성을 통해 민의를 수렴하고 그에 따라 정치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영광스러운 과거의 군주들과 정치인들의 너무나 이타적이라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권력 양보 행동들은 대체 어떻게 일어났는가.

‘내가 예전에 말한 재상정치론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북왜의 쇼군은 재상이 아니니 언급할 가치가 없다.

그 남쪽의 백제는 도래인들의 관습도 많이 들여오고 있지만, 옛 왜의 관습도 많아 왕권이 강하지 못했다.

따라서 백제인들은 고려와 약간 비슷한 재상중심체제를 실행하고 있었지.

그러나 백제는 죽었다 깨어나도 고려와 같은 건전한 정치체제를 이룩하지 못했다.

통치자들끼리의 암중 모략은 여전했고, 백성들의 삶 또한 극적으로 개선되지는 못했다.

원래가 그래야 한다.

권력이란 양보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람들은 영원히 그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살아갈 테니까.

정말로 영원히 살고 정말로 지고한 자리에 올라 더 이상 그것에 미련이 없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에는.

허나 진시황조차 그것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런 자가 세상에 있겠는가?

정여립은 그 생각이 들자, 고려를 떠났다.

고려에 실망했거나 혹은 학문이 미흡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려가 일반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그의 생각을 뒷받침해줄 사례들을 찾기 위해서.

평화보다 전쟁이 더 많다는 유럽은 그의 가설을 검증하기에는 완벽한 장소였다.

그리고 몇십 년 뒤, 정여립은 이베리아와 이탈리아, 오스만과 프랑스, 잉글랜드와 신성로마제국을 돌아본 뒤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 군주와 귀족은 본질적으로 의롭지 않으며 설령 의롭다 하더라도 그 행설(行說)마저 의롭기란 지난한 일이다. 설령 행설 또한 의로운 자가 있더라도 그 후손마저 그렇다 말할 순 없다.

― 고려의 사상가 손우경에 따르면,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위정자는 사회의 이익을 추구하여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해서 위정자를 바꾸어야 한다.

― 고대 로마의 공화국은 비판받을 것이 많지만 가장 아름다운 체제에 근접해 있다.

그는 여러 여행에서 사귄 벗들이자 과분하게도 자신의 제자를 청하는 몇 명의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국가는 공공의 것이니, 위대한 공화정(Res Publica)이야말로 우리의 이상이오.”

* * *

천하공물(天下公物), 하사비군(何事非君).

정여립에게 학문을 배운 자들은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그의 이상향을 완벽히 공유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대동계(Daedonggye)라 불렀다.

이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단순히 기존의 식자 계층, 즉 성직자나 학자, 귀족 등뿐만 아니라 모자와 신발을 만드는 자들, 대장장이들, 상인들과 농민들도 있었다.

이 시기의 대동계 제1계는 시조 정여립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운명한 뒤부터 주로 그 세력이 독일 남부에 있었기 때문에 바이에른, 혹은 뷔르템베르크 대동계로 불리기도 했다.

양백현의 손자, 아드리안(Adrian) 양은 상당히 젊었으나 대동계 중 정여립이 가장 총애하던 제자였다.

조부가 고려인이었을 뿐이지만, 그 생김새가 영락없는 조선인과 비슷하여 정여립의 향수를 유발시켰던 것 같았다.

아드리안 또한 왕정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면서도 더없이 영특하였기에 스승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나를 도와주시오.”

“형제여, 기꺼이 스승의 뜻과 우리의 이상향, 그리고 그대의 투쟁에 동참하겠소.”

정여립이 노령의 나이로 마침내 프랑크푸르트에서 운명하자, 아드리안은 뷔르템베르크에서 사실상 대동계의 지도자가 된 뒤 이들을 이끌고 활동을 개시했다.

당시 그의 곁에는 대동계의 동지인 톰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가 있었다.

남이탈리아에서 출생한 톰마소는 원래는 나폴리의 산 졸조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인문학적으로 상당히 독특한 지역이었다.

이탈리아 자체가 가장 유럽에서 학문적으로 진보된 지역이었으며, 나폴리 또한 베르나르디노 텔레시오(Telesio, Bernardino)의 감각주의 인식론과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등의 유물론 따위가 고려의 영향을 받아 빠르게 개화한 곳이었다.

당대 유럽을 여행하던 정여립도 이곳에 와 나폴리를 떠나려던 조르다노 브루노 등과 논쟁을 했었을 정도였다.

그때, 톰마소는 정여립에게 감화되어 그의 문하를 자청하며 수도원을 떠났었다.

이후 여러 나라를 정여립과 함께 돌아다녔던 톰마소는 정여립의 사상 등과 톰마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몇 권의 책을 썼다.

[태양의 나라]는 비록 공상적 소설이었지만 최초의 공산주의적 이상향을 적은 책으로서, 생산수단의 사유를 폐지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뜻에 의거해 집단의 정책을 결정하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이론을 제시했다.

진취적이며 개혁적이고, 상당한 카리스마를 가졌으나 아직 젊은 탓에 경험이 적은 아드리안 양이 노련한 톰마소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그가 그의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드리안 양과 톰마소는 의기투합한 뒤, 당대의 바이에른 지역에 주목했다.

뷔르템베르크도 그러했지만, 바이에른 또한 계속되는 전란으로 몹시 황폐해져 있었고 분위기는 지극히 흉흉했다.

게다가 이곳의 종교는 가톨릭보다도 오히려 북독일이나 네덜란드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의 세력이 컸다.

뮌처의 도이칠란트 농민 공화국이 세워진 곳은 뮐하우젠이었으나 그 영향력은 명백히 바이에른 지방의 뉘른베르크나 뷔르템베르크의 슈투트가르트까지 뻗어나갔으니, 이미 백 년도 전에 개신교의 세력이 심어져 있던 것이다.

바이에른 왕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합스부르크는, 그들의 본거지인 오스트리아와 이곳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바이에른은 때때로 상(Upper)오스트리아라고 불렸다}, 이단과 불순한 사상이 번창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는 신민은 통치자의 종교를 따르라는(Cuius regio, Eius religio) 명령을 내려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라고 지시했다.

당연히 이러한 개종에는 피가 따르기 마련이다.

신앙의 시대가 지나고 이성의 시대가 왔지만, 여전히 종교는 중요했고, 더군다나 합스부르크의 세금은 실로 끔찍하기 그지없어서 농민들은 여전히 가축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종교 문제는 기름통에 불을 붙인 것과 같았지.

그렇기에 1626년에 일어난 상오스트리아 농민전쟁(Oberösterreichischer Bauernkrieg)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문제였을 것이다.

처음 바이에른 지역의 농민들이 봉기했을 때, 합스부르크 황실은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무력으로 진압하면 그만이니 병사를 보내라 한 것.

합스부르크의 꼭두각시인 바이에른 왕국은 사실상 합스부르크의 스타트허우더(Statthalter, 총독)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당대의 바이에른 총독 아담 폰 헤르베르스토프(Adam von Herberstorff) 또한 합스부르크의 황실에 자신만만한 태도로 농민봉기군들을 안전하게 진압하겠다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삼백칠십 명의 바이에른 진압군이 못 살겠다며 들고 일어난 바이에른 농민들을 정말 삶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 나아간 뒤 희소식만을 기다리고 있던 아담은 역으로 그의 군대가 몰살당했다는 끔찍한 소식만을 전달받았다.

“그놈들은 농부고 모자 만드는 놈들이다! 그딴 인간들에게 진다고?”

아담은 납득할 수 없었다.

적의 수괴는 스테판 파딩거(Stefan Fadinger)와 크리스토프 젤러(Christoph Zeller), 마르틴 아이힝거(Martin Aichinger)라는 농부 나부랭이들.

제아무리 수가 그리 많지 않다 하나, 삼백칠십 명의 총병이 그들을 제압하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직접 가겠다! 군대를 더 긁어모아라!”

“…빈에 지원을 요청할까요?”

만약, 아담이 이때 어떤 위기감을 느끼고 수도 빈에 지원을 요청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바이에른은 신성로마제국의 핵심 지역으로, 그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를 담당했던 레겐스부르크가 속한 지역이었으며, 티롤의 인스부르크와도 가까웠다.

합스부르크는 옛날, 뮌처의 선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강력한 군대로 이들을 진압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은 그러지 않았다.

* * *

그리고, 바이에른의 농민들은 귀인들을 맞이했다.

바로 옆에서 건너온 자들이긴 했지만, 사상적 기반이 없는 단순한 봉기 세력에 불과한 그들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았다.

“우리는 우리의 역량이 역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헤어(Herr) 양,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여러 농민군들이 밀집한 광장에서, 일단의 무리가 무릎을 꿇었다.

농민의 지휘부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들의 한계를 깨달았다.

분노로 일어난 자들이라고 해도, 그 분노가 항상 유지되지는 않는다.

전투에서 도망치는 이들은 지극히 많았으며 욱해서 일어난 뒤 훗날의 결과를 두려워하여 밤마다 겁에 질려 우는 자들도 많았다.

대의명분 없이, 농민군의 사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졌으니.

옛, 이 땅에서 일어난 뮌처의 봉기는 그의 이상향과 농민군 조례를 지켰기에 몇 년이나 유지되었었지.

그러나 그런 특출난 자들도 결국은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과연 이들이라고 다르겠는가.

반쯤 사실과 같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지도가 없었다면, 그들은 삼백여 명의 총병 앞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렸을 것이니.

아드리안 양은 무릎 꿇은 이들을 일으켜 세웠다.

“동지들이여, 일어나시오. 나 또한 헤어(Herr)가 아니오.”

그는 단검을 꺼내, 그 자리에서 손바닥을 갈랐다.

고려의 의술에 의해 파상풍이라는 개념이 생긴 지 오래였지만, 그는 감염의 위협조차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보시오. 나는 푸르지 않고 다만 적색의 피를 가지고 있소이다.”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사람을 사로잡기란 지극히 힘든 법이다.

외지인들은 더욱더.

아무리 아드리안이 독일어에 유창하다 하나, 그는 약간은 이색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 전형적인 고려인의 피부.

비단 피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신과 다른 모습을 지닌 자가 있으면 약간 마음이 멀어지기 마련이다.

듣기로는 고려인들은 부유하고 청결에 고집스러우며 재물을 밝힌다 하지.

그러나 그는 일반적인 고려인들에 대한 상상과는 조금 동떨어진 듯했다.

농민군들은 그의 손바닥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동주의에 따르면 그대들의 주인(Herr)은 그대요. 그 누구도 그대를 예속하진 못하오. 오로지 위대한 주님 이외에는!”

“…그렇습니까?”

“그대들의 고결한 뜻은 우리의 뜻과도 같으니 오늘 이후 그대들 또한 대동주의를 따르는 형제들이외다.”

농부들, 수공업자들, 노동자들, 그리고 빈민들.

대부분 문맹들.

글자조차 읽지 못하는 자들.

그러나 이것이 온전히 우둔함과 멍청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는 자의 진실성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집중하고 있는 여러 형제들 앞에서 말을 이었다.

“백 년 전, 이 땅에서 위대한 개혁가가 피를 흘렸소.”

“…….”

“그러나, 그 이후 너무도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그의 희생을 헛되이 했지. 귀족이란 족속들의 행패에 그저 침묵하고, 과거의 결의와 비극을 잊어버림으로써 현재의 안위를 챙겼던 것이오.”

불과 이십 대 후반의 검은 머리 청년.

그러나 그는 무시무시한 연설력과 웅변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좌중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아귀가 그들의 목젖을 틀어쥐고 있는 것마냥 숨이 막힌 채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참을 만큼, 참지 않았던가?”

어쩌면, 뮌처는 지금 이 순간을 볼 수 있다면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대들의 부모와 가족이 굶어 죽는 그 순간을 우리는 이미 많이 참아왔지 않는가?”

“우으으….”

군중들은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어느 누군가가 그의 말에 울음을 흘렸을 때에도, 그 울음조차 사방으로 전파되지 않았다.

“그대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전처럼 비참하게 죽는 것을 원하는가? 혹은 무엇이라도 하기 위해 나아갈 것인가?”

마르틴 아이힝거가 말했다.

“불행과 불행 속에서 있으니, 행복을 바랄 뿐입니다(Herzlich tut mich verlangen nach einem seligen End, weil ich bin umfangen von Trübsal und Elend).”

아드리안 양은 대동계 동지(Kamerad) 하나하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군중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펼쳐진 그들을 바라보았다.

세력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사기는 어느 순간부터 다시금 차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주는 것은 오직 희망뿐.

근원은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대동의 이상향이 펼쳐질 이곳에.

“만국의 농민들이여, 단결하라(Bauern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그는 마치 선포하듯 고함을 외쳤다.

마치 화약고가 폭발하는 듯, 천지가 떨리는 어마어마한 함성이 뒤를 이었으니.

바이에른 혁명공화국(Bayerische Revolutionsrepublik)은 마침내 백여 년의 세월을 딛고 그 자리에 우뚝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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