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의 유럽
처음으로 개최된 전국체전이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는 성공을 거둔 이후, 올림픽 준비 위원회는 이런 대회의 운영에 대해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세계의 이곳저곳에 참가 의사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테르샤로마에서 열리는 첫 번째 올림픽에 참가하겠느냐고.
“당연히 참가해야겠지요.”
중려 군소국들과 마야, 자치령들은 고려와 가깝기도 하고, 영향력도 커서 고려의 권유에 별다른 군말 없이 따랐다.
“상국이 원하신다면….”
“이번 기회에 청년들끼리의 재주를 겨루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동아시아의 예맥한계 3개국과 유구는 다소 입장 차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참가 자체에는 동의했다.
다만 조선은 상의를 벗고 경기를 치러야 하는 레슬링이나 수영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상금을 많이 주신다 하니, 원하는 자들을 뽑아 보내겠습니다.”
발전 속도는 꾸준했지만 이제야 겨우 제대로 된 봉건국가로 진입한 무타파와 콩고, 이메리나조차도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고려를 제외하면 가장 빨리 발전하고 있는 대륙인 유럽은 에이레와 잉글랜드 등 섬나라들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그만큼의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나라가 없어 보였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모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덕분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점유하고 있는 그리스의 옛 땅에서 열어보자는 선택지는 채택할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심지어 네덜란드마저도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그동안의 우리의 우애에도 불구하고, 아국이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리하여, 첫 번째 올림픽은 전국체전이 처음 일어난 지 십 년이 지난 개천 385년, 서기 1660년에 불과 20개국만 참여한 채로 진행되었다.
고려.
마야와 중려5개국, 그리고 니카라오와 미쉬키트의 8개국.
조선, 옥저, 백제, 유구와 마긴다나오 보호국(다바오) 등의 5개국.
콩고와 무타파, 그리고 메리나.
에이레와 잉글랜드, 어쩌다 보니 참가한 스코틀랜드까지.
비록 이들은 초청을 받은 뒤에 나름대로 경기의 종목을 듣고 연습을 해 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미 십 년 전부터 두 번의 전국체전을 겪어 선수들을 육성한 고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인구수와 국가 체급의 차이도 있었으니, 많은 종목에서 금메달(그리스어의 메탈론(μέταλλον)에서 기원했다)을 쓸어 담는 나라는 오직 고려뿐이었다.
전국체전도 아닌데, 자국만의 축제가 될 것 같은 상황이 확실하자 고려는 눈치를 보다가 은과 동메달을 얻은 다른 나라의 선수들에게도 파격적인 금전적 대우를 보장했다.
그제서야 올림픽은 불이 붙었고, 그 후로 고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라이벌리를 불태우며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저 아일랜드 촌놈들에게 질 수는 없지.”
“멍청한 앵글로색슨 놈들…!”
경쟁 구도가 비단 에이레와 잉글랜드만 있을까.
중려대륙 군소국들도 국민적인 험악한 감정이 여전했고, 동아시아 3개국도 미묘한 경쟁심리를 불태우고 있었으며, 심지어 아프리카의 국가들 또한 그러했다.
과열된 분위기는 의외의 결과도 일으켰다.
고려는 놀랍게도 궁술에서는 단거리 구간에서 단 하나의 은메달만 수확하며 그 체면을 구겼다.
궁술의 길이는 오로지 개인전에 장거리, 중거리, 단거리로 구분되어 있었으니 확보할 수 있는 금메달의 개수는 총 3개였다.
하지만 그 모든 종목에서 옥저와 조선, 그리고 웨일즈 장궁병으로 이름 높은 잉글랜드가 고려를 위협하는 구도로 나왔다.
궁술이야 조선에서는 육예 중 하나로 꼽힐 만큼 중요한 종목이었으며, 옥저 또한 그 풍습을 나누어 가진 데다가 북방 초원의 피에 이어져 내려오는 놀라운 시력을 자랑하니 이들이 올림픽 궁술의 패권을 서로 다투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조금 낯부끄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성적을 내었다.
상민이 또 우생학 어쩌고저쩌고하는 무리들이 생겨날지 조금 걱정할 정도로.
그러나 다른 참가국들은 어차피 이길 생각도 없었던 것인지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아 보였다.
은메달과 동메달을 얻은 자들의 상금이 많아진 것으로 만족한 모양이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잘 즐기다 갑니다.”
운동을 통하여 여러 나라들 간의 우정과 연대감, 공정한 정신을 함양하고 세계 평화에 공헌한다는 올림픽의 정신이 과연 잘 실행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했든 385년 테르샤로마 올림픽은 그렇게 종결이 되었다.
고려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유럽이 대대적으로 참가를 해야 이 올림픽의 흥행이 보장된다는 것이겠지.
그전까지는 올림픽의 재미가 전국체전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고려는 후아이나푸티나 화산이 폭발하며 유럽에 대한 관심을 끊었었다.
또한 피해를 복구한 이후에도 위대한 고립을 주장하게 되니 외부에 잘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그저 무역만을 이어갔다.
유럽은 그들 스스로가 원하는 대로 서쪽의 거대 제국의 영향에서 한숨 돌릴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혼란은 여전했다.
아니, 이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소빙기의 영향은 여전했고 각지에서는 흉년이 일었으며 도적들이 횡행했다.
게다가 프랑스와 같이 여전히 내부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다투는 나라들도 있었고.
네덜란드와 같이 과도한 경기 호황에 튤립 파동이라는 경제학상으로 최초의 거품경제라 기록될 사건을 겪은 나라도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의 바이에른과 같이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린 나라도 있었고.
심지어는 아예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곳도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처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고려에서는 이를 줄여서 폴리투라 불리는 국가는 당대 유럽의 초강대국 중 하나였다.
연방의 기틀을 다졌던 야기에우워 왕조가 위대한 왕 지그문트 2세 이후 직계가 단절되어 왕위 계승에 혼란이 찾아왔더라도, 연방은 세임(Sejm, 폴란드 의회)의 통제 아래 독특한 입헌군주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입헌군주정이야, 고려가 이미 증명하고 있는 효율적인 정치체제.
세임은 외부의 꼭두각시 왕을 데려오면서도 그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다루길 원했다.
정치체제가 어떤 모양을 가졌든, 이 세임 주도의 폴리투 연방의 초기 모습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동유럽의 강력한 깡패국가.
기병대인 후사르를 중기병화시킨 윙드 후사르와 카자크 부대는 총의 시기가 만연한 이후에도 공포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심지어 루스 차르국의 기틀을 다진 경외제 이반 4세마저도 폴리투 연방에 수차례 물을 먹고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정도였다.
또한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이라는 폴리투의 봉신국이 감히 자신들의 종주국에게 이빨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웨덴 같은 나라 또한 감히 그들을 넘볼 수 없었을 테고
하지만 1648년 이후, 불과 이십여 년 만에 이 위대한 연방은 위용을 잃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시작은 으레 그러하듯 내부의 모순이었다.
카자크의 봉기에 폴리투 연방이 허덕이자 동쪽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북쪽에서는 스웨덴 제국이, 서쪽에서는 봉신국인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남쪽에서는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가 이빨을 들이민 것.
사방의 칼날 앞에서는 제아무리 폴리투라는 연방이 맹수와 다름없더라도 무용지물이었다.
파탄 난 외교관계와 내부의 갈등이 국가의 종말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몸소 보여준 이 국가는, 불과 한 세기의 영광을 누리지도 못한 채, 순식간에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폴리투의 몰락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놀랍고 대단한 일이었겠지만, 어찌 보면 예측 가능한 부분도 있었다.
일국의 흥망성쇠야 세계의 역사에서는 보기 드물지 않으니 당대에 전략적 식견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어느 순간부터 그 필연적인 흐름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일은 그러한 전략적 식견을 가진 이들조차도 완전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벌어진 것은 그러한 종류의 일이었으니까.
* * *
그의 스승은 머나먼 땅에서 왔다.
대체 조선에서 이곳, 신성로마제국까지는 어찌, 왜 온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스승께서는 말년에 유럽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기를 원하셨던 것 같았다.
1620년, 스승께서 노령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는 십여 년간 그의 문하에서 많은 것을 듣고 배웠다.
― 천하는 공물이니, 누가 그 주인을 자처할 수 있겠느냐?
― 내가 이곳에 와 보니, 양이들은 임금이 누가 되었든 모시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 허나,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임금에 대한 충의겠느냐, 혹은 다른 무엇에 대한 충의겠느냐?
― 나는 조선에서 나고 자랐으며 고려에서 내 학문을 완성하였으나, 비로소 이곳에 와 확신이 들었다.
― 내가 보았던 고려는 위대하지만, 그 체제는 다른 나라로서는 너무나 이루기 힘들다. 인과 의와 예와 지가 모두 더없이 뛰어난 군주가 스스로의 한계를 알아차려 신민과 시중에게 그 권력을 나누는 아름다운 광경이 과연 다른 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겠느냐?
― 또한 그의 사후에 후손들이 그에 불만을 가지지 않고, 선제의 명령에 오로지 복종하여 선제의 아름다운 위업을 물리려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또한 그들이 선택한 과거의 그 시중들이 모두 오로지 현명한 선택으로 제국을 이끌어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
― 그러니 세상에 천만 개, 아니 일억 개의 나라가 있다면, 고려는 그중 오로지 하나일 터이니, 이는 하늘이 내린 나라요, 감히 다른 나라로서는 그 이치를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스승님, 이곳은 어찌 바뀌어야 합니까?
그는 비록 생김새는 그의 조상을 닮아 고려인과 비슷했지만 자신 스스로는 프랑스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 조국 프랑스는 어찌해야 합니까?’
비록 스승은 마지막 말씀을 주진 않으셨지만, 그는 자신이 스스로 답을 구해냈던 것 같다.
[…토마스 뮌처가 옳았다.]
주먹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때부터 뜻을 품고 열정적으로 뷔르템베르크와 바이에른 지역에서 활동했다.
이 남독일 지역은 이혼 문제와 계승 문제에서 촉발된 신성로마제국―프랑스 간의 유구한 분쟁이 있었던 곳으로 몇십 년에 걸친 다툼 끝에 지나칠 정도로 황폐화가 되어 있었다.
만약, 신성로마제국이 이를 알아차려 이곳 지역의 민심을 다독여 달랬으면 그는 자리를 잡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농민들은 단순하여 그런 가벼운 손짓에 금방 적의를 잃곤 했으니까.
하지만 과거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는 또 한 번의 실수를 계속 유지했다.
농민들이 단순한 만큼, 귀족들은 그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다.
농민들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를 동안, 세금은 별로 경감되지 않았고 심지어 합스부르크의 군주는 엄청난 거금―농민들을 충분히 달래고도 남을―을 들여 그의 정부에게 비자야나가르에서 구한 옐로우 다이아몬드(피렌체 다이아몬드)를 사 주었다.
과거, 토마스 뮌처가 이 땅에 씨앗을 심은 지 백 년이 흘렀다.
너희들은 그 씨앗들이 전부 죽었다고 생각했겠지.
과연 그럴까?
* * *
양백현이 프랑수아 1세에 의해 억울하게 옥살이하다 마침내 교수형을 당해도, 그의 자손들은 연좌를 겪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로마법의 영향인지 연좌의 개념이 동양만큼 잔혹하지 않았고, 심지어 왕을 시해해도 그 가족들이 국외추방을 당하는 처분 정도만 받을 정도였다.
양백현의 가족들 또한 전부 국외로 추방되었는데 형편상 먼 곳으로 가기도 힘들어 뷔르템베르크에 머물러야 했다.
그나마 양백현의 아내는 프랑스 귀족의 딸이었고 어찌어찌 입에 풀칠할 만큼의 재물은 있었으니 연줄이 있는 뷔르템베르크에서 작은 농원 하나를 운영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고려로 가고 싶은 생각도 했으나, 이제 고려는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꿈과 희망의 동산이 아니었다.
설령 고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하더라도.
게다가 조부 양백현에겐 횡령과 배임 같은 죄목도 존재했기에 비록 그것이 누명일지라도 증명을 하지 못하는 이상, 고려에서는 양씨 가문의 귀화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를 속 깊이 꿍쳐놓고 있던 인물이었으니 누명은 영영 벗겨지지 않을 테고.
하지만 그 이후, 양씨 가문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그들의 작고 새로운 고향이 프랑스―신성로마제국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것.
할머니가 운영하던 장원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와 그의 부모는 다시금 전란에 이리저리 떠돌아야 했다.
마침내 그가 장성하여 장원에 돌아왔을 때는, 그는 정말 여느 농민과 다름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진저리를 느낀 그는 그곳을 헐값에 처분하고, 수도사의 길을 걷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교회에 투신하려 했으나 그때 운명적으로 스승을 만났다.
스승의 존함은 정여립이라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