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보(2)
개천 375년(CE 1650) 3월, 무선 사업을 위해 고려통신회사(KT; Korea Telecom)라는 자그마한 회사 하나가 창양과 청해에 세워졌다.
철도 산업은 상민이 시중에 있을 적부터 오랫동안 충분히 그 기틀을 다져놓았었고, 마침내 기술이 얼추 축적되자 과감하게 대규모의 국책사업을 일으켜 정착시켰기에 그가 퇴임한 이후 민선 시중들에 의해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그 후로 국가 재정으로 만든 국철은 전 고려를 가장 앞서서 달려 나가게 되었고.
하지만 통신 산업에는 이와 같은 사례가 적용되지 않았다.
일단 기술력의 최첨단을 달리는 이런 산업은 그 성격상 국가라는 단체가 하기에는 너무나 골치 아프고 빠른 일이었다.
제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았더라도 태생적으로 관리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민간보다 명석하게 알아차리기 힘들다.
상민처럼 미래를 보고 온 정치인이야, 굳건한 믿음이 있기에 여러 번의 실패에도 인내를 계속하며 후원을 해줄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이미 통신 체계를 진보시키고자 하는 예전의 시도들은 죄다 무위로 돌아갔고, 그동안 획기적인 돌파구도 없었으니 조정이 이런 산업에 다소 흥미가 떨어진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통신회사는 거의 대부분 상민의 자본으로 설립되었으며 그 미미한 시작을 청해신보의 주간 경제지에 조그맣게 이름을 남겼을 뿐이었다.
상민은 이런 무관심에도 전혀 괘념치 않았다.
솔직한 말로, 상민이 지금껏 일구었던 어떠한 산업들 중에서도 이보다 더 큰 성장잠재력을 가진 산업은 거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통신 산업은 미래를 바꿀 운명을 가졌다.
그렇기에 그는 얼마의 비용이건 시간이건 앞장서서 투자를 할 수 있었고.
게다가 가장 큰 난관들은 이미 마주하기도 전에 돌파구를 찾은 상태였다.
일단 처음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 즉 전선에 전류가 흐를 때, 자기장을 띤다는 사실은 밝혀져 있었고.
나머지 하나인 송수신 방법의 간단화 또한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상민은 원래라면 여러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머리를 빠지게 했었을 과제인 의사 전달을 효율적인 이진법적 부호로 대신하게 제시했다.
짧은 점(dot)과, 그보다 긴 선(dash).
원리는 몹시 단순하지만, 파격적이며 엄청난 발견이었다.
고려의 수많은 자음과 모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눈이 캄캄했을 기술자들에게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길을 제시한 이 방법은 무슨 글자 돌림판이니, 5개 나침반 구조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부가적 발명조차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모스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는 고려식 이름인 표준전보부호 혹은 짧은부호라 칭해질 것이다.
통신선을 까는 일도 이제는 쉬웠다.
제아무리 고려가 넓다고 하더라도 남북려 및 외국의 광산에서 들여오는 구리는 이미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으며 기술적 난관 또한 철도를 부설하면서 한 차례 진통을 미리 겪었던 상황이었다.
이제는 그저 닦인 철로 옆에 통신선을 부설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상민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인재들을 뽑고 통신사업을 일으킨 지 거의 5개월 만에 고려통신의 수석 연구진 중 하나인 한광호는 선륜(코일)을 이용하여 전자석을 만들었다.
만드는 방법이야 정말 어린아이라도 만들 수 있을 만큼 쉬웠다.
하지만 원리는 당대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것 중 하나였으니 선륜을 만들어 놓았던 한광호는 무려 5년에 걸쳐서 전자석의 기본 원리인 해인규―한광호 법칙을 재정립해야 했다.
그 덕에 영실상을 받는 영광을 누린 그는 그 후 동료 과학자인 안승겸과 함께 검류계(Galvanometer)와 계전기(Relay), 정류자(commutator) 등을 만드는 것에 크게 기여했고, 수백 번 이상 시행착오를 겪은 이후에 마침내 개천 387년(1662)에 첫 번째 ‘상업적인’ 전보 기기의 발명에 성공했다.
― 딱, 따악, 딱, 딱, 따악
창양에서 전보 송신기를 두드려 본다면, 거대한 규모의 닫힌 회로의 개폐를 통해 공백의 길이와 점, 그리고 점보다 긴 선을 이용한 이진법적인 신호를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 신호는 회로를 흐르고 있는 전류에 담겨져 창양과 해문 사이에 설치된 길고 긴 절연전선(소재는 구리, 피복은 고무였다)을 통과한다.
신호의 끊임없는 전달을 위해 창양과 해문 사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어진 여러 통신소들을 거친 전보는 마침내 해문의 전보소에 도달하고.
마침내 전류가 도착지의 수신기에 설치된 전자기석을 통과하게 되니, 전자기석은 회로 개폐의 신호에 맞추어 외부에 힘을 투사한다.
그 일정하고 규칙적인 힘은 용수철과 철 막대기 등을 건드리고, 유성 먹이 그 신호를 기록하게 됨으로써 전보소의 사람에게 점과 짧은 선, 그리고 공백 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은 능숙하게 그 신호를 해석하여 옮겨 적는 것이고.
일련의 과정은 실로 장황해 보였지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전보를 이용한 인류 최초의 통신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선조들이시여, 우리 황제를 보우하소서.]
이는 철도 이후로 신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가 되었다.
소문은 입과 입으로 번져나갔고, 그 소식에 신기해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전보소로 달려가 통신을 주고받길 원했다.
“세상에나, 이렇게 빨리 소식을 전할 수 있다니.”
“어머나, 마침 창양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들내미가 독감에 걸려 몸이 좋지 않다고 하네요, 어서 가서 간병이라도 해야겠어요.”
지금까지는 해문에서 창양까지 소식을 전하려면 직접 우정국 사람이 편지를 한 아름 안고 중간의 작은 역들에 정차하지 않는 급행 기차를 타고 와야 했다.
해문이 창양의 외항 노릇을 할 정도로 가깝지만 그 길이는 오직 이 범상치 않은 대륙의 기준에나 가깝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로 따지면 서울과 대전 간의 거리보다도 더 기니, 사람이 하루 종일 걸으면 무려 나흘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급행 기차를 타더라도 네다섯 시간이 넘게 소모되었다.
그 우정국 사람이 집집마다 편지 배달을 가는 것은 열차를 타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소요되었으니, 다른 곳에 있는 지인의 소식을 받아보기 위해서는 상당히 긴 인내심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선이 깔린 이후, 서로 다른 두 장소 간의 통신은 네다섯 시간에서 무려 사오 분으로 바뀌었다.
이 사오 분이라는 시간마저도 초창기의 전보 기계가 아직 느릿느릿하여 그랬기에 더욱 빠르게 개선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과거와는 궤를 달리하는 급격한 통신의 발달이 실로 충격적이었는지 전보를 쓰길 원하는 고려인들의 수는 정말 엄청나게 많았다.
전보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풍경은 몇 명의 화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을 정도니까.
전보의 공급은 제한적이었고 수요는 아득히 높았으니 초기의 전보 가격이 높게 책정된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을 테다.
“기본이 열 자라고?”
“한 자가 추가될 때마다 돈이 더 비싸진다고 하더이다.”
전보는 아주 원시적이며 기초적인 전기 통신 수단이니만큼 긴 문장을 전달하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따라서 고려인들은 최대한 말을 줄이고 줄여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가령, 형이나 누나가 동생에게
‘부모님이 널 보고 싶어 하시니 이번 추석에는 집에 오거라.’
는 문장을 보내고 싶다 한다면,
이는 [부모보고싶추석집와]로 적혀 보내어졌다.
한자를 이용한다면, 부모견망추석속래(父母見望秋夕速來) 등으로 적히겠지만, 고려에서는 학계가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이미 한자의 영향이 꽤 많이 사라지고 있는 덕에 이 줄임말들은 꽤나 요상한 통신체의 조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당사자가 추석 때 망운지정을 잠시나마 해소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전보는 이 넓은 대륙을 우정국의 설립 이후 다시 한번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었다.
언론사들도 돈을 많이 쓰더라도, 이런 전보를 통해 소식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었다.
비단 민간의 효용뿐이랴.
전보는 군사체계와 기타 다른 정부 조직에도 더할 나위 없는 기능을 선보였다.
비록 전선이 깔려 있어야 한다는 기본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했지만 한번 그런 기반시설이 깔린 곳에 주둔한 군부대와 경찰은 어떠한 상황에도 이전이라면 거의 생각지도 못할 만큼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한번은 고려의 경찰이 창양 근교의 불량한 인원―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던 적이 있었다.
사회가 경제적으로 복잡해지고 그 구성원이 부유해진다면 필연적으로 범죄 조직 같은 단체 또한 곰팡이마냥 피어오르기 마련이다.
고려는 약점이 많았다.
부유했고, 교통이 발달하여 밀수산업을 하기도 좋았지만 땅이 넓어서 숨기에도 적절했다.
예전, 칼리나 해에서 날뛰었던 고려 해적들만큼의 성세를 자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범죄조직은 가끔가다 특출난 지도자를 만나 구석에서 세력을 불리기도 했다.
비록 국가라는 거대한 공권력이 진심으로 작정하고 이들을 짓이긴다면 이런 바퀴벌레는 금방 터져 죽겠지만, 바퀴벌레의 무서움은 하나하나의 개체가 가진 강력함이 아닌 끈질긴 생존력에 있었다.
그러나 그 생존력마저도 통신이 발달하며 크게 도전받게 된 모양.
이 범죄 조직의 두목은 별일이 일어나겠느냐며 다소 느슨해진 마음으로 열차를 탔을 것이다.
사실 검표원에게만 대충 신분을 속여 넘기면 해결될 문제였고, 기차 내의 경관의 눈만 잘 피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창양에서 숨어있다 배를 타기 위해 해문으로 떠났다 하더라도, 도착지점의 경관들은 그 소식을 알 리가 없었고 알더라도 이미 그때가 되면 그는 배를 타고 북려로 이동했겠지.
하지만, 그 두목은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광경을 해문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에워싸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전보는 열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고 그제서야 이 어마어마한 혁신의 효용성을 제대로 알게 된 내무부와 그 휘하의 우정국은 고려 통신과 협상을 통해 제국 전역의 통신망을 갖추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상민은 이 조그마한 통신 회사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공룡 회사로 바뀔 것이라 믿으며.
* * *
상민이 한창 통신과 기타 여러 가지 사업들에 집중하는 동안, 콘스탄티나는 명령받은 사항들을 하나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일단 행동에 앞서 몇 가지 단계를 계획했다.
마지막 목표는 상민이 말해주었듯, 사해의 모든 국가가 참여하는 이 지구의 최고 축제이자 건전한 경쟁의 장이 될 것이지만.
지금은 한계가 많았다.
이 순간, 전 세계에서 타국과의 전쟁과 이권 다툼에 딱히 관심이 없는 나라, 그러면서도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는 고려가 유일했다.
다른 나라들은 이런 평화의 ㅍ자도 느끼지 못하는 진흙탕 같은 상황에 빠져 있으니 그러한 자들에게 무슨 평화며 운동경기를 제안할 수 있겠는가.
다만 콘스탄티나는 고려 내에는 이와 비슷한 경기를 충분히 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이미 지금도 전국적인 규모의 축구대회나 정구대회가 열리고 있는 상황.
그녀는 세계 올림픽에 앞서 첫 목표로 고려 내에서의 전국체전, 즉 코리아나 올림피아드를 먼저 열 계획을 세웠다.
나중에 제대로 된 올림픽 경기가 열린다면 고려 연방은 하나의 팀으로 참가하겠지만, 사실 고려는 연방의 구성원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의 경쟁력있는 팀을 몇 개나 꾸릴 수 있었다.
이들의 열정은 전국체전에서 표출될 것이었고.
콘스탄티나 콤니니와 그녀의 가업을 물려받을 젊은 아들 티베리오스 콤니노스(아버지가 불분명했다)는 각지의 명사들을 초청해 최초의 올림픽 준비 위원회를 꾸렸고 이윽고 대중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받으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황실 또한 올림픽 준비 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고려 정교회의 보호자이자, 헬레나 이후 로마의 마지막이자 진정한 핏줄을 이어받았다 대내외적으로 인식되는 현 황실의 종통은 고려인들의 통합을 위해서라도 로마 황제 제관 정도야 충분히 쓸 용의가 있었다.
머리에는 월계관을 쓰고 손에는 전국옥새를 든 쌍두룡의 기괴한 모습은 처음에만 썩 어색할 뿐 나중에는 익숙해지겠지.
올림피아 제전의 부활은 국제적으로 대단한 상징성을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합스부르크니, 오스만이니, 이탈리아니, 그 모든 나라들의 자기주장이 어떠하건 위대한 헬레니즘의 정신적 계승자는 대서양 건너편의 나라라는 것을 의미하니까.
전국체전의 종목은 다양했다.
고려 내에서 하더라도 그 모티브는 여전히 올림픽인 만큼 고대 올림픽의 종목들이 포함되었다.
육상,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마라톤, 레슬링, 멀리 뛰기와 승마 등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한 7개 종목은 그 근본력이 충만하므로 당연히 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회의를 거쳐 열 종목이 추가로 합세했다.
궁술, 사격, 수영, 검술, 체조, 역도, 수박(手搏), 조정, 정구, 축구.
궁술과 사격이야 전쟁에서 널리 쓰였고, 쓰이는 종목이자, 제전이라는 성격을 대변할 수 있는 종목.
수영과 체조, 역도, 조정 등은 인간 신체의 한계를 잘 드러내기 적합한 종목.
정구와 축구는 고려 내에서 인기가 많은 종목.
수박이야, 삼별초 시기부터 이 나라 땅에 자리 잡은 격투기였으니 비록 분파에 따라 다양하게 갈려진 규칙을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하겠지만 넣지 아니할 수는 없었다.
이 종목들은 모두 더없이 잘 선발되었다 평가받았기에 후대에도 규칙이 바뀔지언정 종목이 위협받는 일은 잘 없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추후에도 다른 종목들이 참가할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이렇게 열일곱 종목으로 구성된 초기의 전국체전이 개천 375년(CE1650) 창양에서 처음으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