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보
현재 점수(포인트) 넷 넷
상황(게임) 아홉 여덟
묶음(세트) 하나 하나.
통상적으로 묶음 점수 5점 중 3점을 득점하면 승리하는 남성과는 달리, 묶음 점수 3점 중 2점을 득점하면 승리를 가져가는 여성 정구대회의 규칙상 지금의 광경은 끔찍할 정도의 숨 막히는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상황 점수가 다섯 다섯부터는 동률을 해소하기 위해 연장전에 돌입하는데, 이미 그로부터 양측 모두 삼 점 이상의 상황 점수를 획득한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은 방금 전까지의 동률 상황이 깨졌고 시합 결정 점수에 들어간 상황.
“하아앗!”
차림권을 가진 선수가 이번 묶음을 따내면, 이 대회는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우렁찬 기합과 함께 한 선수가 새처럼 뛰어올라 강하게 공을 차렸다.
다른 선수는 공의 낙하지점을 계산하는 즉시, 바로 내달려 받기에 성공했다.
― 탁
― 탁
또다시 길고 긴 이어짐.
지금 정구채의 재료는 동물의 창자와 나무로 만들어져 있지.
케블라니, 탄소섬유니, 세라믹이니 하는 재료들을 쓰는 21세기의 테니스마냥 라켓의 반탄력이 강하지는 않아 공은 상당히 죽은 채로 날아갔지만, 그 덕에 이어짐(랠리)은 정말이지 길고 길어 의외로 볼만한 광경을 많이 만들곤 했다.
단단한 고무공은 쉴 새 없이 그물 위를 오갔고 선수들은 자신의 뺨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의 존재를 전혀 느낄 수조차 없는 극한의 긴박한 상황에서 미친 듯이 발을 놀려 어떻게든 공을 때려대었다.
― 후우, 후우.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이곳까지 들렸다.
상민도 정구를 능숙하게 하는 입장에서, 저 때의 기분을 알…지는 못하지만 이해하고 있었다.
몸에서는 엄청난 열량을 소모하고 있고, 선수는 가진 힘을 완전히 쥐어짜 내어야 하는 상황.
머리는 핑핑 돌고,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입 안에서는 쇠 맛이 느껴지지.
이제는 오직 정신력과, 무의식 속에서 그간 해 왔던 훈련으로 근육에 저장해 놓았던 기억에 의존해야 할 순간이다.
― 와아아!
팽팽한 균열이 깨졌다.
모여있는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사방을 둘러봐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한 관객들이 많다.
이 넓은 대륙에서 오로지 결승전 하나를 보기 위해 긴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올만큼 금전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
상류층의 스포츠이니만큼 경기장 안에는 축구경기마냥 우렁찬 고함과 괴성, 날카로운 휘파람 등은 많이 들리지 않았지만, 대신 천둥과도 같은 박수 소리가 그 공백을 메웠다.
하지만 이긴 선수는 환호를 지를 기력도 아끼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혹은, 다음번에도 자신의 차림권 공격이 적중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든가.
그리고, 마침내 검은 머리의 남려 출신 여인이 허공에 손을 들었다.
* * *
4대 정구대회의 위용은 허황되지 않아 이번 7회 진주 대회 우승자인 송경아는 무려 값비싼 금으로 된 작은 정구채 모양의 우승물(트로피)을 받고 기뻐했다.
상금은 그 우승물의 가치보다도 많아, 사실상 이런 대회를 한 번 우승하고 나면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고생했어요. 축하해요.”
“멋진 경기였어요, 언니.”
경아는 이후 말 그대로 무릎에 피가 튀길 만큼 격렬한 경기를 치른 경쟁자이지만 그래도 같은 고려인 선수인 최 비비엔느(유럽식 이름이라도 성을 이름보다 앞으로 쓰는 경향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와 포옹을 나누었다.
“다음번엔 이길 거예요.”
씩 웃음을 지어, 그녀와 작별을 고한 경아가 사방에 손을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회의 격렬함, 즉 무시무시한 공격과 환상적인 수비가 오가는 볼 맛은 솔직히 남자부가 더 많을 것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관중 또한 그러했고, 그렇기에 상금의 규모도 차이가 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숨 막히는 미인 두 명이 싸우다 보니 그에 결코 못지않은 관심을 끌어 상금의 규모가 역대 최소차이를 기록하니, 이번 대회는 아마 종합적으로 본다면 대회 주최 측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을 결과를 낳았을 것이었다.
경아는 이곳까지 와 참석해준 관중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고, 지친 와중에도 서명 등으로 답례를 해 주는 시간을 가지다 결국 지금까지 몸을 지탱하던 동력이 끊긴 모양인지 반쯤 부축을 받아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물론 밖에도 경기장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기자들이란 사람들 손에 대포처럼 생긴 사진기는 없는 모양이다.
“송경아 선수, 고려대륙 방방곡곡에 쓰여질 우리 신문을 위해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예맥한신보입니다! 선수!”
난리도 아니었다.
인파를 제지하기 위해 사전에 묶어놓았던 끈 기둥은 이미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사방에서 아우성이 지친 선수에게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로 보이는 자가 딸의 앞을 가로막고는 외쳤다.
“이미 제국신문과 청해신보와 약속을 잡아 놨어요! 기자분께서는 나중에 논의해보시지요. 제 딸은 충분히 지쳤으니 이만 길을 열어주세요!”
들을 리가 있겠는가.
시대 발전에 따라 언론은 그 규모가 커지고 있었지만, 아직 그 의식은 그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모양이다.
― 삐이익, 삐익
“물러나시오! 물러나시오!”
하지만 군중이 운집하여 안전사고에 경계하고 있던 기마경찰 무리가 말을 타고 다가와 그들에게 경고하니 기자들이 그 위세에 놀라 마침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진주의 주지사는 이번 대회에 엄청나게 큰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대회장 근처의 주경관들의 숫자는 상당히 많았다.
경아는 미리 불러 놓은 부름차에 몸을 실으려다, 이윽고 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대회장 가장 가까이에 있는 큰 객원 건물을 바라보았다.
8층의 거대한 건물.
오래전에 지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건물의 외관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묘한 기품을 만들어내는 객원.
최근, 더 진보되고 화려해진 요즘의 객원 건물들이 돌솜인지 뭔지 때문에 여러 수모를 겪는 와중에도, 저렇게 오래된 건물들은 오히려 돌솜을 쓰지 않아 그 풍파를 비껴나간 모양이다.
손등으로 햇빛을 가린 채, 저 제일 높은 노대(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인영을 바라보려니 그 남자는 금방 그 자리를 떠났다.
‘…….’
누굴까.
송경아는 그 남자의 시선에 딱히 이질감이나, 경계심이 들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 * *
[테우엘체 출신의 남려 소녀, 제국 정구의 여왕이 되다!]
생각해보면, 제아무리 입헌군주국화 되었다고 해도 고려는 여전히 황제국이었다. 그런 만큼 테니스 황제니, 테니스 여제니 그런 말은 못 쓸 수밖에 없지.
왕과 여왕에 만족하려무나.
상민은 이 테우엘체 출신 소녀에게 말하듯 뇌까렸다.
이미 핏줄은 상당히 멀어졌을 테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과 연화의 손녀였으니.
말년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그녀의 임종을 함께한 뒤, 시집 보낸 딸들을 다시 본 적은 한두 번 빼고는 더 이상 없었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날수록 결혼한 그녀들의 자식의 성씨는 각기 다르게 변했지만 그래도 여의국은 그 위대한 정보력을 통해 그 후손들을 기록해 놓고 있는 모양이다.
쓸모없는 짓이라 여겨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하필이면 그 목록에서 경아의 이름까지는 봤었고, 그는 마침내 호기심에 못 이겨 이곳까지 와 그녀 인생 최고의 순간을 지켜보는 것에 성공했다.
상민은 이레니아 객원 객실 맨 위층의 화려한 방에서 신문들을 펼쳤다.
그리고는 어제저녁인지, 오늘 새벽인지 어찌 급하게 쓰인 테르샤로마 지역지들의 머리기사가 죄다 비슷한 단어들의 나열인 것을 보고 피식 웃었고.
일보의 수는 아직 많지 않았고 주보가 대부분이며 월보도 상당히 많았지만 그 월보와 주보마저도 특별판을 발행한 모양이다.
신민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며, 과거보다도 운동 경기의 황금기가 도래한 모양이다.
이번 대회의 특징이라고는 다른 것도 꼽혔다.
제아무리 신문사의 사람들이 이 특수한 대목을 위해 미리 대기하고 있었고 당일 밤을 지새웠을지라도, 어제의 일이 이렇게 다음 날 아침 신문에 받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빨리 발간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발전이 전제되어야 했다.
고려는 인쇄술의 발전이 이전보다 급격히 진보했고 제지의 기술 또한 재료가 대규모의 목재 섬유로 넘어가기 시작했으며, 연속식 초조기(抄造機)와 환망식 초지기(抄紙機) 등의 발명으로 비약적인 도약을 하는 것에 성공한 상황이니 드디어 하나의 지역 안에서 정보가 훨씬 빠르게 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민은 아쉬웠다.
이런 소식이 더욱더 빨리, 거의 실시간과 가깝게 전파되는 환경에서 살던 그는 이 정도의 정보 전달 속도를 항상 애석하게 느끼고 있었다.
교통은 철도의 도입 이후에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먼 미래에도 철도보다 운송효율이 좋은 것은 의외로 찾기 힘들었으니.
다만 정보전달체계는 무조건적인 개선이 필요했다.
그는 전보(電報, electrical telegraph)를 원했다.
* * *
통신속도 향상에 대한 욕구는 먼 과거부터 있었을 것이다.
주된 목적은 당연히 외적의 침입에 대한 소식을 빠르게 보고받는 것일 테다.
옛날 고씨 고려의 시대나 대씨 고려, 왕씨 고려의 시대를 생각해보면 말을 탄 유목민들이 황급히 조정에 보낸 파발과 거의 비슷한 속도로 진격을 해 오는 일이 드물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니, 삼한부터 써 온 봉화의 역사는 실로 유구했다.
비단 한반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역시도 마찬가지.
유럽도, 중원도, 그리고 심지어 이 남북려대륙의 원주민들 또한 불을 피워 신호를 전달하는 식의 시스템은 가지고 있었지.
그러나 통신체계는 이 이후에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예를 들면, 봉화 빛 대신 거울을 이용하기도 했고.
유리 산업이 발전한 고려에서는 봉화대 비슷한 것을 설치해 망원경을 통해 수기를 흔들어 신호를 전달하는 것(아주 멀리 떨어진 해군 함선들의 신호 전달처럼)도 시도되었다.
하지만 이는 한계가 있었다.
시계(視界)가 명확하게 확보되지 않는 이상, 이런 원시적 통신은 걸핏하면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고 비나 안개등의 현상은 생각보다 자주 발생했다.
봉화 같은 시설을 유지하는 것도 힘들었다.
누가 아득히 외진 곳에서 사회와 가족과 단절되어 홀로 쓸쓸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사방이 흑표니 뭐니 하는 야생동물이 있는 상황에서.
그렇다고 범죄자를 쓸 수도 없으니 이들의 임금 또한 상당했으며 그 건강의 안위를 매번 살펴야만 했다.
그다음의 발전은 이제 눈으로 보이는 것 말고, 매질을 이용하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아주 먼 옛날, 추밀원 소속의 몇몇 요원들은 자그마한 잔과 실로 소리를 파악한 적이 있었지.
어린아이의 신기한 장난감과 같은 것이었으나, 당시로서 공기가 아닌 실이라는 매질을 통해 통신을 전달하자는 생각은 꽤 혁신적이었다.
이후 이것은 더욱 발전하여, 설화루에 설치되기까지 했고 이 원시적인 도청 장치는 도청의 개념이 없는 이 시대에는 불법도, 합법도 아닌 무법의 개념 아래에서 고려 추밀원의 대내 정보력에 한 근원이 되었다.
이 생각은 계속 발전했다.
철갑함을 계속 만들며, 노하우를 쌓은 고려 조선소의 장인들이 함 내에 기다란 금속관을 설치하여 명령체계가 더욱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전성관(傳聲管, voicepipe)을 설치하여 당대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고려에게 또다시 사기적인 통신체계를 선사해 주었고, 이 같은 기술은 심지어 고급 저택에도 스며들어 집주인이 고용인들을 호출하는 경우에도 쓰이곤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먼 거리에서는 불가능했다.
실과 금속관은 장거리 통신에는 무용지물과 다름없었다.
다음으로는 피뢰침의 원리를 이용하여, 번쩍이는 전기를 고체 금속 선에 불어넣어 보자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그것의 촉발 기전이 정전기인지, 화학적인지는 다양하게 시도되었지만.
이 또한 모조리 실패했었다.
실과 금속관보다는 멀리 그 에너지가 전달되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 이상은 순식간에 금속 선에 흐르는 힘이 관측 가능한 범위 이하로 떨어졌지.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완전히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그다음의 혁신적이고 유의미한 발명에 앞서 징검다리의 역할은 충실히 이행했다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고려는 길버트와 해인규의 시대에 들어와 전자기학을 발견하게 되며 통신에 대한 돌파구를 찾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