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자본가들(2)
그리고 그는 영향력을 모아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충환이 제도로 가 행동을 제시할 찰나, 동래미에서 충환이 문전박대당했던 동종업계 사장, 박 휴고(Hugo)를 위시로 한 일부 객원회사의 자본가들과 돌솜 관련 회사의 자본가들이 상무부에서 몇 가지 소식을 들고나왔다.
“협의 끝에 우리는 조정에서 받아낼 수 있는 몇 가지 보상안을 가지고 나왔소.”
산업 하나가 반쯤 사라지니만큼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 의도는 선할지라도 가히 공권력의 횡포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조정 또한 단순히 윽박지르는 구시대적 관습 말고 타협을 통해 보상안을 마련했다.
“1년 안에 현금으로 바꾸지 못하는 고정자산에 한해, 투자금의 최대 8할까지 보상할 수 있을 것이라 상무상서가 공표했소.”
“호오….”
“다만, 앞으로 행해질 기업 실사를 통해 기준이 다를 것이오. 장부상 자본잠식의 비율이 낮은 재정 우수기업이나 세금 납부의 성실성, 비사고일이 많은 기업들에 대해서는 높은 보상비율을 책정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기업은 낮은 비율을 받겠지.”
박 휴고의 말에 자본가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사실 조정이 이렇게 대책안을 앞장서서 내놓는 것만 하더라도 상당히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던 자본가들은, 튼튼해 보이는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오자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한 듯했다.
절망적일 때, 이러한 희망의 빛을 본다면 본래보다 훨씬 더 밝아 보이기 마련.
실제로 몇몇 자본가들은 나쁘지 않은 안건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우리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지요?”
사람의 인상이 선해 보이는 한 돌솜 가공 회사의 사장이 말했다.
그 또한 산업 자체를 잘못 선택했고, 또한 돌솜에 대해 무지하여 노동자들을 위험에 노출시킨 자들 중 하나였지만 사실 그가 무슨 악의적 의도가 있어 그리했겠는가.
다 먹고 살자고 그랬지.
방금 질문을 꺼낸 그는 그래도 이 자리에 모인 돌솜 관련 회사의 사업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노동자들의 운명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휴고는 그의 말에 상무상서와 토론을 하며 적은 문서들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구 돌솜 산업 종사자들은 정부에서 구조적 실업 해결을 위해 새로운 분야에의 재취업을 지원한다고 밝혔소.”
기존의 사업 규모가 100이라면, 앞으로 산업현장에서나 쓸 돌솜은 그 수요량이 20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8할 이상은 사라진다는 말.
그만큼의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나앉게 된 것.
하지만 조정도, 고용주도, 심지어 피고용인까지도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숙련노동자가 길바닥에 나앉는 순간, 그들을 탐내는 다른 자본가들이 당근을 흔들며 자신들의 공장에 오라고 유혹할 테니.
“객원 사업 종사자들도 마찬가지. 아, 아타나토스는 심지어 자신들의 피고용인들을 유지하는 것에다가, 동종업계에 종사했던 실업자들을 재채용할 의향이 있다고 하더군.”
조정이 재취업을 장려하면 구조적 실업의 여파는 상당히 줄어들 것이었다.
심지어 거대 민간기업까지 발 벗고 나선다니.
이충환은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일단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고 다음에 봅시다, 하며 제도에서 헤어진 그들은 보름 뒤에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모인 자본가들은 보상안이 적다느니 하면서 불평을 하거나 조정에서 밝힌 보상비율 책정안에 대해 궁금증을 드러내거나, 모호한 기준을 더욱 객관적으로 해 달라고 요구하자고 의견을 수렴하고 있었다.
이미 한 달 전까지의 여론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다.
대부분은 이미 조정의 정책에 홀라당 넘어간 셈.
보상안에 대한 불평조차도 타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만!”
이충환은 버럭 고함을 지르며, 회의장의 분위기를 상기했다.
“이것은 협잡질이오. 우리의 분열을 꾀하기 위해 조정에서 내놓은 당근이라는 말입니다!”
― 쾅
분노가 서린 주먹이 탁상을 내리쳤다.
겉보기에는 결의가 잔뜩 서려 있었지만, 충환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 보상안, 분명히 여러 기준을 종합하여 책정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분명히 그는 아마 최하등급의 보상안만을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재정의 건전성?
그의 회사와 거리가 멀다.
세금 납부의 성실성?
이것은 훨씬 거리가 멀었다.
비사고일?
객원 사업이라는 상대적으로 사고가 잘 일어나지 않는 사업에도 불구하고, 아마 최근의 비사고일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그로 하여금 이 타협안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쐐기와도 같았다.
그는 열심히 다른 자본가들을 충동질했다.
“돌솜의 유해성이 확실히 증명된 것이 있소? 의무부에서 공표한 엉성한 자료만 있지 않소이까? 심지어 그들의 말조차도 몇십 년이 흐른 뒤에서나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논리 자체가 모순되는 것이오!”
그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 타버린 속을 진정시킨 후 다시금 고함을 질렀다.
대다수의 자본가들은 그의 태도에 혀를 찼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수의 자본가들은 그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맞소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돌먼지들이 조금 폐에 들어가봤자 기침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것은 논의할 가치도 전혀 없는 헛소리요. 조정은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는 겁니다!”
탐욕스러운 인상의 돌솜광산 사업가 또한 성이 나서 주먹을 흔들어대었다.
“아대륙자원보호법 같은 악법이나 만들어 대는 것이 조정이오. 이번의 경우 같은 일들이 계속된다면, 이 고려제국에서 사업하기는 글러 먹겠지요.”
“중상주의를 수호한다더니!”
“우리 돌솜 가공업체는 외국으로 이전할 것이외다.”
자본가들 또한 극명하게 나뉘었다.
조정과 타협을 해 가며 보상안을 받고 정책을 받아들이자는 부류(대체로 우량기업에 속했다.)와 그렇지 않고 계속 싸워 이 만고의 악법으로 일컬어질 돌솜 정책을 아예 폐지하자는 양쪽으로.
이충환이 본래 모은 세력은 몇몇 타협적 반동분자들이 타협안 쪽으로 떨어져 나간 탓에 조금 약화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성해 보였다.
그들은 중서성 의원과 집법성 법관, 상서성의 관료들에게 ‘금칠’을 시작하고 괘서를 써 붙이며, 신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은 오히려 역효과만을 낳았지.
“제국이 너희들에게 너무 오냐오냐했구나. 그렇지 않느냐?”
비타협 불순분자들은 사회에 소요를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는 죄명으로 체포당했고, 회사는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가끔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기어오르는 자본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했던 조정은 이번 기회에 날 잡았다며 벼린 칼을 이리저리 휘둘러대고 있었고, 다른 산업의 자본가들마저도 서슬 퍼런 정부의 권력에 납작 엎드려야만 했다.
“금권은 정권을 영원토록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17세기.
유럽의 나라들은 군주들과 귀족들이 농민과 노동자들의 등에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고, 동아시아의 나라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아 조선의 사림파 지주이건, 명 지방의 토호이건 사람 목숨을 피라미보다 쉽게 취급하는 시대였다.
만약 소요사태나 폭동이 발생한다면 총과 칼로 짓이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전제군주정이 대부분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한 행동을 하다 교수형에 처해진 시신이 길가에 썩도록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니, 애초에 이런 일에 타협안을 제시한 고려의 자세는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까지 상당히 파격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노동자들은 조정에 거의 대부분 순응했다.
반면 고려의 일부 자본가들은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너무 잘나가고 있는 나머지 금권을 통해 정권에 뻗대보려고 했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시도였다.
고려제국은 미합중국이 아니다.
그보다 더 광대하지만, 그보다 더 중앙집권적이었으며 훨씬 더 강력한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자유방임주의와 야경국가론―최소정부주의―의 개념은 비록 고려의 경제학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용어였지만, 고려의 조정 성격과는 상당히 괴리감이 있었다.
언론과 여러 고발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이 시대에서, 조정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몇몇 회사의 패악질은 심심치 않게 존재했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신민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
조정은 남북려라는 광대한 국토에 숨어 행패를 부리는 자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공권력의 두려움을 심어주고자 했다.
* * *
그리고 재무부는 상무부의 일들과는 별개로 주동자 이충환을 여러 가지 경제사범으로 의심하고 벼르고 있었기에 냅다 구속시키고 수사에 들어갔다.
충환은 이 유례없을 정도로 급진적으로 돌아가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체포당했지만,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안타깝게도 이번 일은 재무부의 실무자인 원외랑급도, 낭중이나 시랑 등의 고관급도, 심지어 부의 최고 관직인 상서 선에서 내려온 수준의 문제도 아니었다.
심지어 행정부의 최고 관직인 상서령 수준의 명령도 아니었으며 고려의 최고 통치차인 시중의 명령도 아니었다.
심지어 고귀한 제국 황제의 명령도 아니었다.
그보다 위.
그야말로 실존하는 신이자, 우리와 너희들의 아버지이며, 하늘이 내린 명령이다.
충환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길하고 두껍게 깔린 하늘의 먹구름 아래에서 거대한 용오름이 불어닥치는 북려대륙 초원 한가운데에 돌아다니는 토끼마냥 무방비하고 무의미하게 자연의 재해에 휩쓸렸다.
“이놈은 파도 파도 괴담뿐이군.”
북려대륙은 개간 장려로 인해 경자유전이 남려만큼 엄격하지 않았다.
충환은 이 법의 허점을 틈타, 어디 자그마한 자영농과 목축업자들을 악의적으로 건드려 토지를 헐값에 매매하는 것은 물론, 수많은 악행을 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그것들을 어찌….”
충환은 기겁했다.
그런 사건들은 뒤처리를 정말 꼼꼼하게 한다고 했는데, 어찌 저들이 저런 소리를 하는가?
“심지어 사람을 죽였어? 광대한 토지에 죽이고 매장했다고?”
지금 시대에서도 인구밀집도가 상당히 높아, 동네 야산에 파묻으면 어찌어찌하여 시신이 발견될 수도 있는 한반도와는 달리, 고려는 범죄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되지도 않는 일이 상당히 많았다.
영토가 너무나도 크다 보니 죽이고 어디 한적한 데 묻으면 영영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두 대륙을 점유한 국가, 이는 시대가 상당히 많이 발전되지 않는 이상 잘 개선되지도 못할 것이고.
“즈… 증거가 없잖소! 이는 모함이오!”
“증인은 있지.”
“…그… 그… 사람은, 그래, 그 사람은 경쟁업체의 농간에 불과하오. 내가 사업적으로 적이 참 많소. 선량하게만 사업을 해 왔는데 세상은 이런 나를 알아주지 않더이다.”
으슥한 취조실, 절로 공포감이 드는지 이 강력한 부호마저도 덜덜 입술이 떨리는 모양이다.
“보소, 경관 양반, 내 이번 일이 잘 풀리면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훗날 내게….”
“이젠, 경관 매수까지 하려는 모양인가?”
충환은 씨알도 안 먹히는 수사관의 모습에 절망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천금을 주면 혹하기 마련인데.
하지만 충환의 수사관은 엄청나게 완고한 사람인 듯했다.
저 담당자만 바뀔 수 있다면.
그리고, 그의 희망은 이루어지는 듯했다.
다음 날, 어딘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충환의 사건을 담당하던 중앙수사국의 경관이 거칠게 들어왔다.
“난 이 조사에서 빠지게 되었소.”
“…….”
웃지 않으려 했는데,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모양이다.
우스꽝스런 충환의 모습을 바라보던 경관 또한 갑자기 비릿하게 웃었다.
“그것이 댁에게 좋은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보통은 이런 국내의 소소한 일에 그치들은 잘 간섭하지 않거든.”
중앙수사국은 고려의 경찰기구 중에서 독보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관의 능력으로 따진다면, 분명히 몇 개의 단체들보다는 아래에 있었다.
“잘해보게.”
충환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몸의 근육이 빵빵했던 중앙수사국의 무서운 경관이 밖으로 나가고 깡마르고 별 볼 일 없는 사내가 들어오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사내가 지극히 사무적인 얼굴로 입을 열자, 충환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법을 택하시오.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소. 총살, 화형, 교수형, 익사형, 그리고 이번에 새로 나온 전기의자형도 있지.”
“…….”
“깔끔한 방법은 내키지 않는 모양이군.”
새로운 사내는 탁탁 서류를 정돈했다.
“마지막 제안이 있소이다. 이것을 거절한다면, 그대는 자연적으로 우리가 내릴 결정을 따라야 할 운명에 처할 것이오.”
충환은 놀랍게도 감옥에서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가택연금을 당했다.
특수하게 건설된 이 가택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고려의 가옥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내장재는 대부분 돌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식탁과 침대, 책장과 선반, 가구란 가구는 전부 다 백돌솜인 셈.
정신 나갈 것 같을 만큼 사방이 흰색을 띠고 있었지만 10여 년간 이곳에 거주하면 시중의 권한으로 특별 사면권을 줄 수 있다는 소리에 충환은 냉큼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돌솜의 무해성을 증명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재산은 압류당하고, 남은 것은 조금의 현금과 금괴가 전부가 되었지만 그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다 보니 목숨 귀한 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그 ‘별 볼 일 없는 깡마른 사내’의 정체가 추밀원 소속이라는 느낌이 들자, 그는 자신이 저지른 여러 범죄들에 대한 은폐가 아예 소용이 없어질 것이라고 직감하기도 했다.
대체 이렇게 관대한 제안을 하다니, 당장이라도 받아들여야지.
“가택연금 동안 가족들과 같이 지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의 요청은 거절당했다.
‘정말로 돌솜이 그렇게 위험한가?’
이런 생각도 그의 마음속에 피어오르긴 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긴 한가.
충환은 이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10여 년의 가택연금 생활을 희망차게 시작했다.
의복도, 밥도 제대로 나왔다.
온몸을 감싸는 두꺼운 종이 의복과 입가리개로 무장한 괴상망측해 보이는 사람들이 삼시 세끼를 배곯는 수준이 아니라 호화스럽게 차려주니 충환은 나름대로 이런 여유를 누리는 삶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일부 돌솜 산업 관계자들도 그의 ‘용감한’ 도전을 응원했고 또한 몇 명의 다른 자본가들(충환과 같이 약점 잡힌 것이 분명해 보이는)마저도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되니 이번의 돌솜 사태는 나름대로 많은 피가 흐르지 않고 건전하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