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익선(2)
명은 수많은 국난에도 기어코 멸망하지 않았다.
다만 왕화정의 죽음 이후 명은 조선과 확고한 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요서와 봉명관에 대한 조선의 확고부동한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거기에 더해, 명은 조선에게 상당한 양의 식량을 주어야 했다.
전쟁배상금이라는 명목으로.
고려와 유럽이 최초의 근대적 국제 협약인 오르베텔로 조약을 체결할 당시 여러 가지 국제법을 제정하며 등장한 ‘전쟁배상금’은 말 그대로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전쟁으로 인한 손해를 갚는다는 의미였다.
보통은 제아무리 패배를 했더라도 상대적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배상금을 줄 리는 없지만, 옥저의 화북 약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 고고한 주익상의 자존심마저 꺾여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까지 밀고 들어온다면 화북은 다시금 완전히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니 주익상은 결국 항복의 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듣기로는 고려도 북왜를 공격하고 있다고 하고.
“산해관… 아니 봉명관과 그 동쪽의 땅을 조선에게 할양하고… 십 년간 매년 오만 석의 양곡을 조선에게, 이만 석의 양곡을 옥저에게 배상한다….”
만약 왕화정이 자신의 주제를 알고 나아가 회전을 벌이는 대신 단지 산해관을 굳게 걸어 잠갔으면 조선으로서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호를 파서 성형요새를 포위하는 전략은 대군이 그보다 열세인 병력에게 쓰는 전술이지 엇비슷하다면 상당히 위험했으니.
그야말로 희대의 졸장인 왕화정 덕분에 어쨌든 두 나라는 결국 전쟁 직전의 형세로 다시금 돌아가고야 말았다.
서로 간 흘린 피를 제외해보자면, 결국 매년 명에게 칠만 석씩 십 년간 양곡을 얻게 된 두 나라만 이 기근의 시대에 웃게 된 것이다.
사실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명은 이제 툭 차면 쓰러질 허수아비와 같았다.
행여나 황제를 잡을 수도 있으니 연경부터 털자는 옥저 기병대에게서 도망쳐 나온 주익상은 경사의 궁궐에 도착한 뒤에도 연경에 놔두고 온 인망을 다시금 되찾지 못했다.
제아무리 혈통과 성격에서 오는 선천적인 지도력이 있다 하더라도, 누적된 실패는 강고한 성벽을 부수고야 만 것이다.
아들과 남편을 잃은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느냐며 신하들도 이제는 명 황제 앞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많이 내었고, 이빨 빠진 범은 자신의 잘못을 곱씹는 대신 술과 어디서 빌어먹다 온 건지도 확실하지 않은 자칭 도사를 가까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려도 명이라는 껍데기 자체는 바꿀 의도가 전혀 없었다.
몰락해가는 나라를 몰아붙여 새롭고 신선한 왕조가 들어선다면 그것은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였으니 아무것도 변화할 여력도, 의도도 없는 우둔한 제국은 그 자리를 지켜주어야 했다.
아무리 피자를 여러 조각으로 자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종이상자 하나는 있어야 그 음식들을 담을 수 있지 않겠는가.
북왜의 백제 정벌 또한 무위로 끝났다.
비와호와 관서를 지나 당대 백제군이 많이 주둔하여 있던 오카야마를 급습하여 공을 세운 사나다 노부시게와 그의 원정군은 백제의 유력가문인 모리 가문의 근거지인 히로시마를 불태우며 주코쿠를 모두 손에 넣는 듯하였으나, 원정군은 야마구치 앞에서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관백이라는 이름값이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열 살 난 히데요리 개인의 지배력 부족과 더불어 도쿄가 완전히 불타버리고 덴노가 죽었다는 소문은 북왜군을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트리고야 말았던 것.
들리는 소문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도요토미가가 일부러 덴노를 참칭하기 위해 도쿄에 기거하던 지묘인 황통을 고려인들에게 넘겨 모조리 죽여버리게 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소문은 과장에 과장이 섞여 증폭되어만 갔고, 덴노를 떠넘긴 대가로 무려 수십 개의 은 궤짝을 받았다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보다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훨씬 괴이쩍은 소문도 있었다.
에도의 내로라하는 검호들이 죄다 정체불명의 고려 무사에게 패배하여 절반 이상이 죽고 살아 돌아온 자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더라는 그런 소문.
그들 중 하나가 치욕을 감내하지 못했는지 덴노의 복수를 하지 못해 원통하다 하며 할복하니 세간의 사람들은 완전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들과 함께, 백제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허둥대던 북왜군은 느슨한 다이묘들의 집합체답게 각자도생을 시작했다.
오봉행의 통제력은 관백에 대한 의심과 회의감이 생긴 이후부터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었으니 다이묘들이 제각기 2차 전국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주코쿠에서 필사로 탈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허나, 그 엄청나게 많았던 수군이 죄다 어디로 갔는지, 바다에 떠다니는 왜인들의 함선은 잘 보이지 않았다.
사나다 노부시게를 포함한 주요한 세력들은 그 행렬의 둔중함 때문인지 비와호를 다시 넘지 못하고 오사카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다.
이런 굵직굵직한 소문들 사이에서, 미카와를 근거로 하였던 도쿠가와 가문이 이에야스의 죽음 이후 침체한 가문을 중흥시키기 위해 새로운 가독을 맞이했다는 소문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었다.
* * *
개천 333년(CE 1608)
다바오.
“피고 이근수에 대해 사형을 선고한다.”
집법관의 말에 구형을 했던 해군 법무관 둘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바오의 법원에 참관했던 장교들도 모두 박수를 치고, 병사들도 휘파람을 불었다.
본래 법원이라 함은 정숙이 미덕이자 의무이건만 집법관 또한 군중들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별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빠져나갔다.
오산준 집법관은 밤을 지새워 벌게진 눈을 비비며 복도를 걸었다.
사실, 그를 붙잡은 이후부터는 어차피 그 극악한 악명 덕에 결론은 정해져 있긴 했지만, 죄목 하나하나를 검증하고 부여하는 과정은 지루하지만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근수가 저지른 죄가 어찌나 많은지, 세필로 간단하게 적은 요약문만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웠으니까.
그러나 침대로 가 눈을 붙이기 전, 그는 들를 데가 있었다.
무더운 열대의 날씨에 절로 흘러나오는 땀을 닦으며 산준은 법원 한켠에 마련된 고위직들을 위한 찻집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오 법관.”
“고생 많으셨습니다.”
손을 들어 달달하고 따뜻한 콜라 한 잔을 내오라 주문한 법관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고생은 장군들께서 하셨겠지요.”
법관은 기껏 재판에 앞서 사나흘 밤을 지새웠을 뿐이지만, 해군 장성들은 거진 몇 년간을 그를 잡기 위해 끙끙거렸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놈이었습니다.”
해군사령관 변진섭이 혀를 내둘렀다.
“우리의 최고급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인재이니 그럴 수밖에요.”
“이근수의 사례로 인해, 아국의 사관생도들을 다시금 재고해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정도니….”
바부얀 해전 이후로도 거의 5년간, 고려는 이 악랄한 해적을 잡기 위해 심혈의 노력을 기울였다.
해적 세력이 해전 한 방에 치명타를 입은 데다가, 영광함이 건조되어 활동하고 영광함의 이름을 따 영광급 철갑함이라 이름 붙인 군함들의 건조가 적어도 다섯 척은 넘게 예정되어 있는 이상, 전면전에서 해적무리들은 더 이상 고려와 우방국들의 전력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적들이 작정하고 누산타라의 복잡한 지리에 숨어버리니 골치가 아파도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었다.
법관은 찻집 주인이 가져온 따뜻한 콜라 한 잔을 마셨다.
이 콜라라는 것에 신귤(레몬)과 생강을 올려 마시면 고려의 전통음료인 수정과와는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매력적인 맛을 뽐내는 것이다.
“오 법관께서는 파라콜라를 즐겨 드시는 모양입니다?”
“허허, 몸이 축날 때 이런 차 한잔 마시면 정말 좋습니다.”
콜라의 발명자인 파라켈수스의 이름을 담아 만든 파라콜라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 음료의 제법은 극도의 비밀이라, 콜라를 마시기 위해선 제국에 위치한 파라콜라 회사에 주문을 해야 했다.
그러면 이 어딘가 익숙한 태극무늬가 그려진 유리병에 원액이 담겨 온다.
찻집을 운영하는 주인은 이 원액에 깨끗한 증류수를 타 재주껏 생강이나 신귤을 잘게 썰어 올려 대접하기만 하면 그만이고.
정작, 그것을 만들라 지시한 사람은 만들어놓은 이후에도 진정한 콜라의 맛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냉장고며 탄산수 제조법, 보관법 따위를 더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색다른 음료가 나온 것을 반기고 있었다.
“당하께선 조르제라는 놈과 프랜시스라는 놈은 어찌할 생각이라십니까?”
차의 맛을 음미하며 다소 멍하니 해군 지휘관들의 말을 듣고 있던 산준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 그들도 이곳에 와서 판결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아니겠지?
외국 놈들이라, 절차도 더 번거로울 것이 분명했다.
“조르제는 이탈리아가, 프랜시스는 잉글랜드와 에이레가 같이 처분을 내릴 예정이라 하시더군.”
“의외로군요. 브리튼섬에서의 분쟁이 끝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아국은 이미 랭커스터에게 두 번 경고했네. 스코틀랜드와 에이레의 주권을 위협하지 말라고. 세 번째는 관용이 없음을 저들 또한 잘 알 것이야.”
“하여간 섬나라 놈들이란….”
화산폭발의 여파를 완전히 수습한 제국은 다시금 사방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도가 심한 몇몇 나라의 멱살을 잡고 을러대기도 했지.
가장 심한 처분을 받은 북왜는 수도가 불타버렸지만, 이미 한 번 런던 대교가 무너졌던 잉글랜드는 과거의 잘못을 답습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런던 굴욕 이후, 잉글랜드는 고려와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해군 확충에 대한 꿈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다.
물론 세계 2등의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는 현재는 프랑스였고, 그 밑을 바짝 추격하는 나라는 지중해의 패자로 급부상한 이탈리아였지만 잉글랜드는 그 밑의 카스티야와 베네치아 등을 맹렬하게 추격하여 지금은 그 두 국가를 추월했다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열거한 국가들은 1등의 자리를 넘보지도 못했다.
고려, 이 배에 진심인 제국은 다른 나라들이 갤리온을 겨우 만들 시기부터 전열함을 도입하여 세계에 진정한 포함외교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제시한 나라였다.
그 이후에도 이들은 처음으로 가급이니 나급이니 다급이니 전열함의 구분을 지으며 거함들의 시대를 열었고, 이제는 심지어 작열탄과 철갑선이라는 병기들로 기존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의 해군력을 바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대서양 진출?
유럽의 국가들에게 적어도 50년, 길게는 한 세기를 주어야만 어찌 고려에 대항해 봄 직하겠지.
다른 말로, 지금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을 의미했다.
자연재해마저도 고려를 흔들지언정 넘어뜨릴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자, 잉글랜드는 결국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에의 야욕을 단념했다.
“마가렛 여왕 전하 이후로 랭커스터의 혈통에도 쌍용지손의 피가 흐르고 있건만….”
“아류는 어디까지나 아류일 뿐. 그들의 핏줄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지는 마시오.”
“알겠습니다, 사령관.”
혹시나 논의가 종통에 대한 언급으로 비칠까, 변진섭은 해군 장성들을 입단속시켰다.
“그래도 랭커스터의 잉글랜드는 의회와 국가의 재정이라도 제대로 굴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륙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말이지요.”
“그렇긴 하지….”
재정건전성에 대한 고려인들의 집착은 꽤나 대단했다.
긴급하게 건설을 필요로 했던 철도사업을 제외하면 굵직한 국책사업에도 나랏빚을 잘 내지 않았으니까.
어느 정도의 국가부채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빚은 신민들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 양극화와 그보다 더 심한 사회 문제들을 연쇄적으로 일으키게 될 것이니 절대 좋은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대양이라는 천연방벽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어 북려에 남아있는 원주민들과의 소소한 분쟁을 제외하면 전쟁이랄 것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 나라니 더더욱 국가부채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 내륙국들은?
* * *
군무의 일에나 통달했지, 재정의 일에는 썩 관심이 없었던 해군 장성들마저도 이러한 소리를 할 만큼, 유럽 내륙국들의 상황은 빈말로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남의 나라 속사정은 일반적인 대중들은 알기 힘들다.
하지만 이러한 외국의 상황이 고려의 상류층들에게 꽤 자세히 퍼지게 된 것은 하나의 회보 덕분이었다.
[기업인들을 위한 경제동향]이라는 회보는 처음에는 청해의 주식거래소에 등록된 우수 회원들에게 발급하는 경제학적 내용을 담은 간행물이었다.
그 내용이나 파급력이 몹시 대단하여, 경제인들에게 열화와 같은 인기를 얻다가 나중에는 따로 독립하여 회보 대신 잡지로 바뀌었고 그 잡지마저도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된 덕에 아예 하나의 회사로 분리되었다.
‘사해’라는 사명을 건 이 회사는 매월 잡지를 통해 제국과 연방의 경제의 흐름이나 상장한 기업들에 대한 평가를 시작했다.
이후에도 막대한 투자를 받기도 하며 규모가 더욱 커지니, 사해는 화산의 피해가 수습된 개천 330년 이후부터는 정말로 사명답게 사방의 외국에 대한 정보를 실어다 나르기도 했다.
최초로 행해진 국가신용평가였다.
이 회사의 실질적 주인인 상민은, 사해사를 집어삼키기 이전에도 재무부에 의해 발행하는 여러 조보와 관보들의 객관성을 염려하고 있었다.
그러니 미국의 S&P나 무디스처럼 신용평가회사의 전신이 나온 것을 기꺼이 반겼다.
사해를 인수하는 것에 성공한 상민은 재무부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고려의 재정건전성을 외부에서 비판할 여지를 남기는 것에 상당히 기뻐했다.
하지만 고려를 비판하기에는, 그가 설계한 고려는 이 시대에서 너무나도 윤택하고 반짝거리는 존재였다.
‘프로파간다가 따로 필요가 없다. 다른 나라들 꼬라지가 프로파간다 그 자체인데 대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