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익선
“실로 대단한 위인이군요!”
어린 소년이 마침내 이야기를 끝낸 자신의 궁정교사에게 거듭하여 찬탄을 날렸다.
“동방의 국가들이 원래부터 국력이 강대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말로 그렇게까지 강력한지는 몰랐어요.”
“제국의 고향이지 않습니까?”
소년은 아직 열한 살에 불과한 자신의 나이답게 신이 난 듯 외쳤다.
“국력뿐이 아니라, 그들의 위대한 장군들도! 저 시나(Kina, 중국)의 황조들은 예전부터 세상에서 가장 강력했었는데 단 한 번도 예맥한반도를 넘지 못했죠. 대체 어찌 그런 엄청난 전략가들이 그 땅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거죠?”
“전하, 역경은 위대한 인물들을 만듭니다. 예맥한반도 또한 이곳 스칸디나비아만큼이나 강건한 인물들이 살아가는 땅인 거지요.”
“과연…!”
궁정교사의 조국, 네덜란드는 동서양의 정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와 같아 세계의 소식들을 이곳저곳으로 나르는 역할을 하였다.
두 대양을 가로막고 있는 고려 제국과 상당히 친근하여 니카라오 운하의 통행권도 구입할 수 있었고 파푸아라는 동방식민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계속 관심을 보이고 있는 나라였기도 했다.
유럽의 나라들도 고려의 소식을 모으는 데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수에즈 운하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베네치아와 이베리아반도의 왕국과 같은 가톨릭계 국가들의 전유물과도 같았기에, 개신교도 국가들은 북유럽회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스웨덴 또한 구스타프 1세 바사 이후에 완전히 개신교 국가로 바뀐 상황.
작년에 즉위한 칼 9세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네덜란드의 학자를 초빙해서 제왕교육을 시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현주 대회전이라, 사십만과 이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대전투… 대체 어떻게 군대를 운용하고 그것을 보급했죠?”
궁정교사는 자신이 말을 하여 얕은 지식을 전달하기보다는 소년 스스로가 생각하여 답을 도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교육자.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계속 생각해보라는 몸짓을 하였다.
이 어린 소년, 아니 공작은 가정교사인 자신보다 수십 배는 더욱 영특한 인물이니.
소년은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마치 혼잣말을 하는 듯 중얼거렸다.
“코네타블라(Connétable, 원수) 이는 정말 전술의 모범과도 같다 들었어요. 상세한 전투 현장을 그리거나 묘사한 것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 이휼이라는 조선의 왕도 대단하지 않나요? 기근 중에 거의 이십만을 양성해 내다니.
동양의 중앙집권적 행정이 대단한 이유가 그것이죠. 영주들의 권한이 아예 없는 정도니까. 제대로 된 국가의 ‘상비군’이 모이면 엄청난 숫자가 되는군요.”
보통의 열 살 남짓한 꼬마 아이들은, 쾌활하게 웃으며 골목골목을 쏘다니며 목검을 휘두르거나 귀족가의 자제라면 시녀들과 하인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기에 바빴다.
하지만 소년 공작은 그 나이대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조숙함과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총력전(Totalt krig)… 우리 스베리예(Sverige)가 나아갈 길….”
한참 동안 무엇을 중얼중얼거리고 있는 소년에게 오늘의 수업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린 궁정교사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 전하, 소신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고민에 빠진 젊다 못해 어린 사자의 앞에서, 궁정교사는 천천히 물러났다.
* * *
전국시대부터 북왜의 평민들이 가장 출세하기 쉬운 경로는 이름난 검술가로 막부에 선택되는 것이었다.
백제는 조선의 성리학은 물론이고 상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중앙집권을 꾀했고 도래―내지인 간의 분쟁을 억누르기 위해 폐도령(廃刀令)을 시행했다.
이와는 달리 아시카가부터 오다, 도요토미에 이르기까지 난리 통에 무를 비정상적으로 숭상하는 북왜의 풍습은 여전하여 에도는 수많은 검호(劍豪)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 덴노를 죽이고 도쿄를 불태웠던 침략자들이 물러나기 전, 이런 내용이 적힌 방을 붙여놓은 것은 아마 전 북왜 무인들의 혈기를 폭발하게 하기엔 실로 충분했을 것이다.
― 고려의 무장에게 복수할 자, 나오라.
몇몇 경계심이 강한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로라하는 검의 달인들이 방에 서 있는 장소인 조가시마(城ヶ島)로 가기로 결의했다.
그 면면은 실로 화려하여, 히데요리의 녹을 먹고 있는 자들도 많았고 낭인들조차도 각자 이름난 이들이라 어중이떠중이들은 감히 끼지도 못했다.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실로 죽어도 상관없다!”
몇몇은 차라리 함정이었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겠지.
적어도 고려인들에게 비겁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말로 고려의 함대는 이미 이와미를 수복하고서는 백제를 공격하는 북왜의 함대를 박살 내기 위해 떠난 상태.
조가시마에는 단 세 척의 배만 정박해 있었다.
물론, 그 배들이 순양함 두 척과, 전열함만큼 포를 가득 실은 것은 아닌데 덩치만큼은 그에 견줄 만한 크고 화려한 함선 한 척이라는 사실은 절로 주눅이 들게 만들었지만.
대련장이라 해야 할까.
혹은 생사를 결정짓는 시합장이라 해야 할까.
모래가 가득한 해안가를 피해 단단한 땅에 만들어놓은 장소에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었다.
조각배들을 타고 조가시마에 도착한 북왜의 검호들은 그곳 정중앙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사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
그 뒤에는, 검은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함정인가.’
비열한 고려인들, 감히 그 간교한 성정에 무사의 흉내를 내다니!
그러나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기도 전에 뒷짐을 지고 있는 자가 자세를 풀고 손을 들어 올려 축객령을 내리자 검은 제복의 병사들이 하나같이 총을 내렸다.
“통역관 하나를 제외하고 전부 물러나라.”
그 말을 잠자코 그들을 응시하는 남자는, 얼굴에 영 익숙지 않은 서늘한 백금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나와 다수.
총병들이 멀찌감치 물러나자 삽시간에 형성된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가면의 남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그 기세와 위엄은 제아무리 흉악한 고려인이라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규칙은 적어놓은 것을 보아 알고 있겠지?”
통역관이 전달한 말에, 북왜인들이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모여있는 검호들 중 하나가 그 태도에 참지 못한 듯 앞으로 나섰다.
“건방진… 그렇게 죽고 싶다면야, 그 소원을 들어주겠다! 스승님, 먼저 저자를 단죄하여 다른 이들의 노고를 없애고자 하는 제자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노년기에 들어선 듯 머리가 희끗한 노무사 하나가 혈기가 들끓어 보이는 제자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 이내 그만두고는 단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 자리에 도착한 다른 검호들 또한 별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이미 그 사내의 실력을 충분히 알고 있는 듯했다.
혹은 그 기행이나.
“본인은 오노 타다아키, 유파는 일도류며 관백의 무사다. 네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흐음….”
“설마 비겁하게 가면을 쓰는 것도 모자라 정체조차 밝힐 자신이 없느냐?”
고려인 무인은 그 도발적인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가면을 천천히 벗었다.
“내 정체를 아는 것은 딱히 그대에게 좋은 것은 아닐 테지만.”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단지 북왜의 검술을 견식하기 위해 이곳에 왔건만, 대적한 상대의 목숨을 무조건 앗아가야 한다니.
동시대, 무도라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입장에서 이는 실로 비극이 아닌가.
‘하긴 에도와 왜왕을 박살 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저 정도의 격분은 당연할 터.’
그러나 남자로서도 타다아키처럼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된 자는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고려의 김상민이다.”
상민의 간단한 자기소개로 원하는 대답을 얻은 타다아키가 여전히 빈정거렸다.
“본인의 검은 오로지 상대를 죽이는 무기이니 패자에게 자비란 없을 것이다, 고려 무사 기무산민. 지금 포기한다면 네놈의 목숨만은 살려주지.”
살기등등한 그의 말에 오히려 상민은 기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가 내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좋으련만.”
통역관은 이번에는 상민의 말을 번역하지 않았다.
타다아키는 어딘가 기분 나쁜 미소에 모욕을 당했다 여겼는지 격분하여 진검을 빼 들고는 검집을 버렸다.
“덴노의 원수! 이 자리에서 설욕하여 조금의 한이라도 풀겠다!”
상민 또한 검집을 버리니, 타다아키가 서슴없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좋구나.
그래, 그런 투쟁적인 태도야말로 무술가의 본분이지 않겠는가.
그가 북왜인들을 여러 이유로 썩 좋아하지 않더라도, 지금 눈앞에서 번뜩이는 왜도를 들고 귀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는 실로 마음에 드는 존재였다.
죽이기에.
달려오는 타다아키를 바라보던 상민의 얼굴에도 섬뜩한 미소가 어렸다.
이미 그의 몸에도 지나칠 정도의 아드레날린이 분출되어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는 상태.
머리가 웅웅거리고 시야가 어쩐지 붉게 물드는 듯하다.
연례적으로 고려의 내로라하는 선인들에게 1패를 선사하며 무사들의 자존심을 꺾어대었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욕구불만에 빠져있었다.
사실 과거, 에티엔을 패던 그때부터 패배란 경험해보지 못한 과거의 단어가 되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검술로 수많은 유파를 만들었다는 너희들의 검술을 견식해 보자꾸나.
이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주어다오.
* * *
또 저러신다.
“위험한 상황에 처하신다면 어찌합니까?”
비슷한 말은, 처음 한주에 가신다고 하셨을 때도 했던 것 같았는데.
“즐기시게 냅두거라.”
여의국 요원들은 태조의 수많은 기행에 이미 반쯤 체념한 상황이었다.
한주의 오지를 여행하질 않나, 그곳에서 때려잡았다는 곰과 호랑이의 가죽을 말려 바닥의 깔개를 만들질 않나.
인간이 삼백 년 동안 살아가게 된다면 어딘가 한구석은 멀쩡하지 않을 테니 이해가 가긴 갔다.
그래도 할 일이 많으신데.
하지만 의외로 태조는 빨리 귀환했다.
석양이 질 때, 피칠갑을 하고 들어온 태조는 새벽호에 간단하게 준비된 물로 목욕을 하고는 축축한 머리에 수건을 가져다 대어 물기를 흡수시켰다.
“어떠셨습니까?”
대부분은 적의 핏물이 분명했지만 본신의 강건한 육신에서도 핏물이 조금씩 흘러 나오는 것이, 피륙에 적지 않은 검상을 입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작은 상처들에 의한 고통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몹시 홀가분해 보이는 상민은 침상에 앉아 흠뻑 피를 머금은 그의 검을 닦으며 드물게 만족스러운 얼굴을 짓고 있었다.
“현란함으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왜인들이 검의 민족이라는 것은 정말 허언이 아니더군.”
그러나 갑자기 상민의 표정이 바뀌었다.
하루 종일, 그야말로 원 없이 싸웠음에도 아쉬운 구석이라도 생겼는지.
자신의 이름을 물어본 일곱을 베고, 물어보지 않은 다섯은 베지 않고 돌려보냈음에도 괴물의 굶주림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이다.
“다만 왜인들은 그 작은 신체만큼이나 근력이 허술하였다. 내 검을 제대로 정면에서 받아낸 자가 그리 많지 않았으니 아쉬울 따름이야. 이토 잇토사이라는 자가 그랬지. 제아무리 나이가 좀 있다 하나, 단 한 합에 검을 쥔 엄지손가락이 부러지다니.”
시중의 자리에서 은퇴한 후 여유가 생긴 상민은 심신을 단련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했고 덕분에 온몸에 쩍쩍 갈라져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근육들을 달고 있었다.
회복력이 탁월하여 근성장 또한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졌다.
늘어나는 수치가 객관적으로 보이니 매일매일의 헬스가 너무나도 즐거운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정말 부러운 일일 것이다.
이 시대, 기본적으로 엄청난 장신인 것에 더해 근육마저 붙으니 훤칠하여 뭇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과거의 시중은 이제는 아예 짐승과도 같은 남성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루크레치아는 지금의 모습을 더욱 좋아했을 것이다, 장담할 수 있다.
그러한 육신임을 미루어 볼 때, 화려한 기교도 인간의 원초적인 힘 차이 앞에서는 딱히 소용이 없는 듯했다.
사실 애초에 기교마저도 왜인들이 삼백 년 묵은 노물을 능가할 수 있을 리가 있었겠는가.
“…….”
“너무 검술의 허식에만 가득 찼더구나.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지 않아 육체적 강건함도 없으니 젊다는 몇몇 무사들만 그 혈기로 손맛이 있었다.”
무사시, 그자는 키와 체격도 상당히 좋아 때리는 맛이 있었지.
장도와 더불어 소도 한 자루를 더 쓰는 그의 무예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폐하의 괴물 같은 힘 때문이 아니겠습니까라는 대답 대신 잠자코 주군의 환도를 받아들어 진열장에 수납한 부관이 여쭈었다.
“어디로 가옵니까?”
“어차피 조선과 옥저가 제 할 일을 해 준 이상, 그곳에 다시금 갈 필요는 없다. 변진섭 사령관이 태평양함대를 잘 이끌 테니 우리는 다바오로 먼저 떠나자꾸나.”
“예.”
“아 참, 언어학자들은?”
“이미 지나의 방언들에 대한 조사를 얼추 마쳤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글자도 분화해야 한다. 북왜의 가나와 백제의 내지인들이 쓰는 글자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니 명의 각 지방에도 적용하기 쉽겠지.”
“일러두겠습니다.”
중원에 심을 씨앗은 준비되었다.
“양응룡은?”
“자신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명의 통제력이 완전히 무너질까에 대해서는 일말의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무너질 수밖에 없지. 그러기 위해서 내가 이리 온 것이 아니냐.”
오만한 말에도 부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조선 수군통제사 원전은 바부얀 해전으로 얻은 수군의 우위를 잘 지켜 톤도 제도에서 해적의 영향력을 많이 걷어내었다.
이제는 다바오에 가서 이근수와 조르제의 처분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사방에서 싸워대는 유럽이라 할지라도 누산타라의 해적들을 토벌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을 테지.
상민은 이번 기회에 해적들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기로 마음먹었다.
국가의 산업력이 발휘되는 증기선의 시대에 이 악질적인 무뢰배들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으리라.
그리고 중화다분지계를 통해 명을 쪼개버리기 위해서도.
중국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
‘주익상, 천하에 둘도 없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군.’
한번 양이들에게 ‘분봉’의 형식으로 토지를 내린 이상, 유럽인들은 그 전례를 통해 상당한 명분을 가질 것이었다.
조르제는 비록 해적이고 스스로 왕국의 왕이라 했으나, 이는 단지 참칭이며 포르투갈의 국왕에게 그 독립을 허락받지 않은 상황.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가가 바스쿠와 그 후손인 조르제의 주군임을 들며 마카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명은 대체 어찌하겠는가?
또한 전성기가 강제로 닫히고 그 후로 쭉 국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포르투갈이 일정한 대가를 받고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이탈리아나 프랑스 같은 강국들에게 팔아넘기면 또 어찌할 것이고.
나라의 일을 외부에 맡기는 것은, 지극히 좋지 않은 결정이다.
그 결정은 응당한 대가를 가져올 테니까.
세상을 바꾸는 일들은 죄다 이 함선에서 일어나지 않느냐는 여의국 요원들의 말대로, 전 세계에 악몽을 선사하는 함선이 돛을 활짝 펴고 굴뚝에서 연기를 피워 올리며 남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