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수도(2)
* * *
고려의 함대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보다는 일단 적 군사시설물과 관청, 항구 등의 공격을 이어갔다.
하지만 작렬탄의 효과는 기존의 원형탄과는 완전히 달랐다.
20세기 이후의 고폭탄과 그 폭발력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서도.
기록관은 서둘러 보고서를 작성했다.
― 본국 목조 선박과 목조 건물에 대한 안전기준을 다시금 재설정하기 바람.
― 작렬탄 이전과 이후의 전쟁 상황은 완벽히 달라질 것.
화재는 인구수 삼십만이 가뿐히 넘는 이 대도시 전역으로 서서히 번져나갔다.
이 시대 동아시아의 나라들이 그러하듯, 북왜 또한 석조건물이나 벽돌 건물보다는 목조 건물이 많은 나라였으니 당연한 일일 테다.
요란하게 타오르는 건물이 주저앉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밤이 지나, 다음 날 동이 터 오를 때쯤 북왜의 수도는 거의 대부분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그나마 화재를 진압하여 그을음이 있더라도 멀쩡히 서 있는 에도성과 다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외곽의 민간인 마을 등만 남아있었을 뿐.
고려 북왜원정사령관이자 태평양함대 전체를 통솔하는 함대사령관 변진섭이 쌍안경을 들고 에도를 바라보자, 그의 뒤로 다가온 덕천신강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공격이 너무 과했다 생각합니다.”
“포격은 군사시설물에 먼저 떨어졌을 테니, 민간인들이 대피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가산을 서슴없이 버리고 도망갈 수 있다면 그렇겠지요. 허나 그런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겠습니까?”
부하의 항의에 진섭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까지 아국이 고려할 여유와 이유가 모두 없지 않겠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이네. 게다가 저들이 먼저 시작하였으니 그에 따른 응당한 분노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덕천신강은 제국군 내부에 퍼져 있는 북왜에 대한 비정상적인 혐오감을 약간 이해할 수 없었다.
명이야 주제도 모르고 천명을 칭한다 하니, 얄밉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북왜에 대한 적대감은?
다른 나라들과는 사뭇 다른 이 적대감은 만약 지금 고려가 여전히 반도의 나라였다면 이해가 가능한 범주였을 터.
하지만 이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번영하며 사해의 패권을 장악한 상황에서는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덕천신강으로서는 죽지도 않는 어떤 노괴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러일전쟁과 진주만을 기억하여 ‘과거부터 왜라는 나라는 하극상이 전통문화나 다름없고 그 사람들의 행동을 전혀 신용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압도적인 무력으로 짓눌러버리자’라는 대왜(倭)정책기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는 없을 테다.
그렇게 ‘신용할 수 없는 나라, 눈여겨봐야 할 나라’ 목록에 항상 자리를 잡고 있는 국가들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잉글랜드요, 다른 하나는 북왜였다.
고려에선 둘 모두를 간교한 섬나라 놈들이라 칭했다.
변진섭이 덕천신강을 달래듯 말했다.
“오히려 이곳을 불태우고 왜왕과 정이대장군을 잡음으로써, 북왜가 전쟁 수행 의지를 잃는다면 더 많은 자들을 구할 수 있겠지.”
수도강습을 통한 참수작전이야말로 이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더없이 효과적인 전략이 아닌가.
오히려 가장 인도적이기도 할 것이고.
* * *
파병된 고려국 육군들은 해군들을 제외한다면 이천오백 명,
그리 많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잿더미가 되어버린 도시 하나를 들쑤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 삐이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적포군 병사들이 마침내 에도성에 다가가다가 그곳을 필사로 수비하는 병사들에게 가로막혔다.
정이대장군은 맹렬한 포격과 그보다 더 강했던 화마에 채 도망을 가지 못한 모양이다.
사실 화마의 기운은 너무나도 강해서 에도성 주변의 해자에 물이 가득 들어차 있지 않았더라면 목조 건물이 많은 에도성도 불타버렸을 테니까.
천수각의 겉면에도 그을음이 잔뜩 있는 것이, 날아다니는 불씨가 성 내로 진입해 화염으로 번지려다가 가까스로 진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적포군은 총을 들고 성큼성큼 에도성에 가 사방을 포위했다.
어차피 이들이 나갈 곳은 없다.
고려군 육군 장교와 병사 서른 명 정도와, 해군 함장이긴 하나 왜어에 익숙한 덕천신강이 항복이라도 권유하기 위해 견고한 오테몬(정문) 앞으로 나섰다.
방위에 신경을 써 건축하였다 하나, 사실 작렬탄 포격 몇 번이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박살 날 것이라는 것은 고려인들도, 안의 왜인들도 잘 알겠지.
덕천신강으로서는 도요토미 가문의 구성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찢어 죽이고는 싶었지만, 지금 이들의 항복을 받아야 왜인들에 대한 부가적인 피해가 없다는 것은 동의하고 있었다.
기회는 나중에 올 것이고, 지금은 왜왕의 안위를 확보하자.
“네… 네놈들이! 덴노를 죽였다!”
하지만 왜졸들의 말에 굳세게 다물려 있던 덕천신강의 입이 벌어졌다.
육군 병사들이 왜졸들에게 소총을 겨누고는 옆에 서 있는 덕천신강을 흘깃거리며 물었다.
“덕천 부령님, 저놈들이 지금 뭐라 하는 겁니까?”
“…….”
“이 요괴 같은 고려인들! 너희들에게 항복할쏘냐?”
언어는 이해할 수 없어도, 왜인들이 발작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려군들의 눈에도 명확해 보였다.
“…잠시만, 일단 물러나자. 보고할 것이 생겼다.”
참수작전이 정말로 왜왕의 모가지를 날려버리는 결과로 귀결되었음을 알게 되자, 고려군 수뇌부는 상당히 당황했다.
일단 고려도 제국이니만큼 일국의 군주를 포로로 잡지도 않고 그냥 죽여버리는 것은 상당히 꺼려했던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별문제가 아니었다.
왜왕을 죽이는 것은 신민적 감정을 자극해버리는 것과 같았으니까.
유럽의 군주들이 걸핏하면 죽어대도 신민들의 동요가 크지 않은 것에 비해,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상징성이 지극히 컸다.
제아무리 쿠빌라이의 동국정벌이 성공으로 끝난 이후 천황가의 위신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왜왕은 심지어 고려의 충(忠)계 왕들보다 한 등급 떨어진다는 경(敬)계 왕에 봉해졌더라도, 그들 사회 내부에서는 대원대몽골국이 멀쩡했던 오십여 년을 제외하고는 그 이후로 다시금 왜왕을 덴노로, 왕궁을 황거로, 존칭을 폐하로, 기타 여러 가지 호칭을 중국 천자와 동일하게 놓고 쓰고 있었다.
남왜왕을 폐하고 백제왕에 오른 대내씨, 즉 부여씨가 무려 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 왜왕가를 기억하는 세대들이 모두 죽어 더 이상 없을 때까지 끙끙거리며 국내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다이카쿠지 황통을 폐한 그들의 업보였다.
북왜 또한 이 원한을 적어도 백 년 동안은 잊어버리지 않을 테다.
“그, 고의가 아니었다고 말을 전할 수 있겠는가?”
“…들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시도해보겠습니다.”
고려로서는 정말 드물게도 전쟁 중인 나라에게 미안함을 표명했다.
운도 지지리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도 운이 좋았던 건지.
경험 없는 포격수가 그날따라 신이라도 들린 듯, 주요 목표를 지정한 포술장의 명령에 쏜 작렬탄이 에도성 앞 황거의 어소(御所)를 단번에 정타하여 왜왕은 물론이거니와 같이 기거하던 왕비, 포성에 놀라 그들의 안위를 여쭈러 온 태자마저도 시신도 찾을 수 없이 산산조각 내버렸다니.
그러니 에도성에서 돌아온 대답은 명백했을 것이다.
보원살려(報怨殺麗).
피가 뚝뚝 떨어지는 혈서.
그 주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고려인들이 혈서에 담긴 감정조차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 고려를 죽여 원한을 앙갚음하겠다.
“북왜인들이 미친 듯이 저항하겠군.”
변진섭은 한동안 혈서를 응시하다, 이윽고 무감각한 어조로 휘하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비록 예상외의 비극이 일어났지만 엎어진 물을 담을 수는 없는 법, 이렇게 된 이상 에도성을 완전히 파괴하여 정이대장군을 사살하라.”
에도성을 완파하여 쇼군을 위한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주겠다는 명령에, 덕천신강이 앞에 나와 무릎을 꿇었다.
“사령관!”
변진섭이 그 모습에 크게 호통을 쳤다.
“경은 대체 왜 이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가? 제국의 군인은 성상과 태자 전하를 제하면 무릎을 꿇지 않아!”
그러나 덕천신강은 요지부동이었다.
“명령을 철회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을 옥쇄시키면 더없이 큰 실수를 하는 것이옵니다. 정녕 저들을 순국시킬 요량이십니까?”
덕천 가문의 원수이자, 신강 개인의 원수인 도요토미의 목숨을 구원하라는 의외의 말에, 변진섭은 화를 내는 것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있다면 저들의 복수는 고려가 대신해 줄 텐데.
끔찍한 포탄 세례는 히데요리의 시신조차 제대로 남길 수 없도록 만들 것이었다.
덕천신강은 비록 고려인들의 손을 빌려서라지만 개인과 가문의 복수를 완벽하게 할 수 있을 것이었는데.
“저들을 살려주십시오.”
“…제정신인가?”
“소장이 어찌 사령관께 망령된 청을 드리겠습니까?”
저 안에 있는 무고한 신민을 생각하는 정신인가?
변진섭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대가 왜의 신민들을 생각하는 것은 갸륵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덕천신강은 고개를 흔들었다.
“신민들의 목숨 또한 중요하지만 지금 그것이 최우선의 목적은 아니니, 단지 소장은 제국에 최대한 도움이 되는 계책을 드리고자 합니다.”
“…계속하라.”
“도요토미는 이미 그들의 본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저들을 살린다면 비록 북왜인과 다이묘들은 처음에는 제국에 분노하겠지만, 곧 쇼군에게 왜왕을 지키지 못했던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또한 왜왕가는 방계로 많이 뻗어나가 있어 새 왜왕을 옹립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도리어 너무 그 뿌리가 많아 사방에서 수많은 왜왕을 등에 업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니 필히 또 하나의 혼란이 생겨날 것입니다.”
“…….”
“허나 옥쇄를 허하신다면, 저들은 전례 없이 강력한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굳게 단결하지 않겠습니까?”
변진섭은 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한참 뒤 완전히 침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실로 이치에 합당하다. 박 참령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해군정보국 소속의 참령 한 명 또한 덕천신강을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을 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천 부령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해군정보국에서도 계책을 승인하지요. 허나, 조금 더 가다듬어야 할 것 같습니다.”
* * *
고려의 함대는 도쿄를 전소시키고 다음 날 오후에 모두 물러났다.
흰 연기는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피어오르고 불씨는 곳곳에 남아있지만, 사방으로 도주했던 북왜인들은 눈치를 보며 천천히 되돌아왔고 이내 가산이나 가족들을 잃고 서글프게 울거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실종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남겨진 남성들 몇 명은 식구를 건사하기 위해서라도 거의 유일하게 멀쩡한 건물인 에도성을 바라볼 수 있었다.
행여나 쇼군이 성내에 비치한 무슨 지원 물품이라도 내리지 않을까 몇몇은 그 근처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과연, 에도성의 오테몬 정면 긴 다리 앞에 큼지막한 궤짝 두어 개가 있었다.
이에 난민들이 행여 지원물자가 아닌가 기대하며 몰려들었고, 그제서야 필사의 항전을 다짐하며 포탄에 대비해 단단히 웅크렸던 에도성에서도 뒤늦게 병사 몇 명이 나와 인파를 헤치고 그 궤짝에 다가갔다.
“물러나라!”
병사들은 행여나 화약이 가득 담긴 무서운 무기가 아닐까 저어하며 터진다면 막지도 못할 창과 칼끝으로 이리저리 견제하였지만, 이내 담력이 있어 보이는 무사 하나가 나막신을 성큼성큼 떼며 궤짝에 다가갔다.
― 끼이익.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한 채 위험이 들어있는 함정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열어젖힌 무사는 목숨이 위협받지는 않았지만 일생일대의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화약이나 목이 잘린 시체, 혹은 뭐 비슷한 끔찍한 무엇인가가 들어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무사는 번쩍거리는 은괴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히려 크게 당황하여 서둘러 궤짝의 문을 닫았다.
“…….”
난민들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바뀌었고, 사방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 조용하라! 너, 어서 병사들을 더 불러오거라. 이 궤짝을 안으로 옮겨야 한다.”
에도가 전소되고 사방이 박살 난 상황, 재정에 크게 도움이 될 은괴가 가득 찬 궤짝을 차마 버리진 못하겠는지 무사들과 병사들이 그것을 끙끙대며 옮기는 것을 에도의 백성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 *
산해관 서쪽.
사방에 명군의 시신이 널려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조선군들은 이제 익숙해져 버린 듯 헛구역질도 하지 않은 채 적병들의 시신을 한데 모아 불사르고 있었다.
조선군의 시신은, 이번 전투에서는 아예 찾기조차 힘들었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중년의 장수 하나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크흑, 분하다.”
“웅 어사에게 배운 것은 없는 모양인가. 그대와 같은 자가 명의 총사라니, 대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이윤신의 방금의 말은 거짓에 가까웠다.
비슷한 경우는 본 적이 있긴 했다.
원가의 균이라고, 비슷한 졸장이 있었지.
다만 그와 달리 눈앞의 명군 장수는 자신의 업보를 치워 줄 훌륭한 동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잔말 말고 목을 치거라.”
들어주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윤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 하나가 왕화정의 목을 잘랐다.
“고생하셨소이다. 이 원수.”
그 모습을 보던 한명련이 다가와 이번의 승리 또한 축하했다.
옥저인들의 목적을 알고 있는 윤신이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조선은 대군을 운용하기에 이미 너무나도 많은 군량을 소비했습니다. 또한 주상께서도 봉명관만을 점령하라 하셨고 우리 또한 보군이 대부분이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겝니다.”
이저혁이 다가왔다.
“원수의 조선은 너무나도 인과 예와 같은 허례허식에 몰입하는 듯합니다. 저놈들이 다시금 예맥한에 이빨을 들이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자근자근 밟아 놓아야 하는 법이지요.”
그게 또한 초원의 법도이기도 하다고.
윤신은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원수의 공으로 봉명관을 탈환하여 화북이 실로 무방비하게 놓였으니, 우리 옥저는 기마를 휘몰아 우리의 응당한 권리를 취할 것입니다. 좋은 물건들을 얻으면 심양에서 거래하도록 하지요. 그럼 이만.”
옥저인들이 기마에 올랐다.
이저혁이 고함을 질렀다.
“팔기!”
사내들이 우렁우렁하게 대답했다.
“예! 장군!”
“연경을 불태우러 가자꾸나!”
“따르겠나이다!”
어마어마한 기마의 군세가 제각기 총과 도를 꺼내 고함을 질렀다.
질린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시민과 안위를 비롯한 조선군 장수들은 내심 옥저를 적으로 돌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