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03화 (303/653)

현주성(3)

“발포하라!”

― 콰과광

“승마! 빠르게 이곳을 벗어난다!”

다행스럽게도 산병들은 시가전에서도 제 몫을 다하고 있는 상황.

무너져버린 담벼락과 가재도구, 엉성한 장애물을 사이에 두고 총격전을 벌이던 아군 연대들 사이로 난입한 기마경포병대는, 비록 소구경이라 하나 엄연히 대포라는 것을 강조하듯 밀집된 명의 보병대에게 몇 번 포를 쏴 재껴 큰 타격을 입히고는 명군이 대응을 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얌체같이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전열의 전면에 피탄된 포탄은 기껏 서너 명을 죽이고 그 수명을 끝낸다.

하지만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나아가는 포탄은 맞기 좋게 일렬로 딱 서 있는 선형진을 꾸린 보병들에게는 실로 재앙과 같았다.

한 발의 소구경 원형탄이 거의 수십에 달하는 자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명군 또한 작은 구경의 기마포병대가 전술적으로 너무나도 큰 피해를 입히자 기겁하며 몇 번의 공격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기마포병대를 호위하는 하마기병대 또한 급조한 명의 예비대로 물리칠 만큼 나약한 자들이 아니었기에 눈 뜨고 그들의 퇴각을 허용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명의 홍이포가 마침 관리에 미흡했는지 이리저리 균열이 간 상태라 대응할 수도 없었다.

조선 기마포병대의 만행이 이곳저곳에서 몇 번이고 계속되자 웅정필 또한 결국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옥저의 기병대 증원병력이 도착했다 했지. 그들보다 먼저 기병을 선보이는 것은 느낌이 전혀 좋지 않으나, 어쩔 수가 없다.’

그동안 후미에 숨겨왔던 명의 기병을 선보인 것.

명 또한 여러 기병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전통적인 경기병 말고도 돌기니 뭐니 하는 기병들을 육성한 흔적이 여실히 느껴졌다.

명은 삼만에 달하는 기병대를 감추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영하부의 반란(발배의 난, 이 또한 몽골족의 난이라 봐야 했다.)을 진압하기 위해 꼬드긴 몽골족들의 일부 무리 또한 있었으니, 옛 구적들이 원한을 잊고 다시금 공통의 적에 맞서기 위해 손을 잡은 것이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명의 기병장이자 명 최고 용장이라 자칭해도 과언이 아닌 명성을 지닌 총병 유정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튀어나와 순식간에 하마기병대를 쫓았다.

말에 올라탄 조선의 하마기병대들은 어설프게 대응 사격을 실시했으나 입히는 피해보다 받는 피해가 훨씬 크니 심히 위태로워졌다.

이 친명 몽골부락은 아직까지 화기에 친숙하지 않은지 총기병 조금과 이제는 전장에선 정말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인 궁기병을 운용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름대로 전과를 거두었다.

그나마 여유로운 3사단이 피해를 무릅쓰고 총병대를 조금 진격시킨 뒤 대기병방진을 꾸려 적기들을 저지할 때까지, 조선의 기병과 기마포병대는 일방적인 피해를 입어야 했다.

“기다렸도다.”

허나 윤신은 오히려 적의 기병대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면의 명령을 받은 신호기가 미친 듯이 흔들렸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대지를 울리는 소음이 일어났다.

그 신호를 수신함과 동시에 7사단이 전열을 풀고 착검돌격을 실시했다.

이들을 상대하던 명의 지휘관 총병 왕선은 그 이후를 한 박자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먼지구름과 함께 이저혁이 이끄는 옥저 기병대가 7사단의 좌측에서 튀어나온 것.

이곳을 이끄는 명군의 두 장수 중 하나인 총병 왕선은 평평하고 토질이 단단한 중앙이나 조선 기준 우익에서나 기병들이 튀어나올 줄 알았지, 기병에게는 한 번 빠지면 지옥과도 같은 늪 부근의 무성한 갈대숲에서 매복해 튀어나온 기병에 놀라 대기병 방진을 꾸릴 생각조차 못했다.

조선이 심요에서 쓰던 작은 조운선들을 끌고와 자침시키고 부숴서 만든 늪지대의 단단한 지형지물에 숨어 있던 옥저 기병대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왕선과 병사들을 창과 도에 꿰어버리고는 순식간에 질주했다.

정람기를 든 창기병대의 뒤에는 다른 네 가지 색깔의 기를 든 기병대가 급히 따랐다.

그 와중에도 엽기병대와 흉갑기병대가 흐트러진 적 전열에 뛰어들어 기병도를 치켜들며 도살을 감행하니 그 광경이 실로 볼만했다.

덕분에 7사단이 조선군에서 처음으로 공세로 전환했다.

7사단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던 포병대가 적 대열의 옆구리에서 포를 쏘니, 엄청난 학살의 현장이 기병대가 지나간 이후에도 여전히 펼쳐졌다.

정황기를 든 총기병대는 학살의 현장에서 빠르게 벗어난 뒤, 사전에 명령받은 대로 천천히 기동하며 명국 기병대의 이목을 끌었다.

네 상대는 자신들이라는 듯.

옥저 기병의 등장으로 명 기병대가 조선의 기병과 기마포병대들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지자, 총병들의 전황은 이제 온전히 총병들에게 달리게 되었다.

늦지 않게 도착한 예비대와 기마포병대 덕분에 구원된 2사단과는 달리, 거의 절멸 직전까지 몰렸던 5사단은 옥저의 도움으로 인해 여유가 생긴 7사단이 구원을 오자 식은 땀을 흘리며 다시금 전열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이고 죽여대도 여전히 명군은 많았다.

* * *

그 이후에는 몇 번 공세를 거듭한 명군이 후퇴하면 조선이 반격하여 내려오고, 이에 명 또한 대응하면 조선은 다시금 뒤로 물러나니 전선의 이동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기병들의 싸움도 마찬가지.

옥저 돌기들은 명 우익을 박살 내며 뛰어나왔지만 웅정필 또한 예비대를 긴급하게 투입하여 어찌어찌 틀어막았고, 마침내 옆구리를 두들겨대는 적 포병대를 후퇴시켰다.

이에 후방으로 고립되어진 것과 같은 옥저의 기병대가 오히려 위태로울 수도 있는 형세가 되었다.

하지만 급격한 전투피로감을 가지는 쪽은 명나라였다.

옥저의 기병대는 명의 기병대보다 훨씬 더 숙련되어 있었으며, 가뜩이나 총기병대는 명의 기병대를 꾸준히 갉아먹고 있었다.

조선 또한 교환비로 따지면 명을 아득히 압도하고 있었고, 현장 지휘관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너무나 빠르게 사망하여 지휘계통이 아예 박살 나버린 제대가 수두룩했다.

그야말로 다른 명령이 없어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듯 서 있는 처지.

착검한 나무토막을 들고 있는 자들은 억지로 끌려온 자들이 대다수이니 무슨 의욕을 기대하겠는가?

오줌을 지려가며 그 자리에 멀쩡히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야 하는 것이다.

웅정필은 그나마 명군의 좌익이 적의 우익을 열심히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만 했다.

근데 적의 좌익은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았다.

‘고병을 투입해야 하는가?’

그러나 웅정필은 승기를 잡을 수 있는 기회에서 계속 망설였다.

이성으로는 고병들을 좌익으로 몰아 기세를 더해 일익포위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자꾸만 머릿속의 경종이 그 방법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다.

‘이동하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적어도 유 총병이 기병대의 우위를 다소나마 점해야 한다.’

웅정필은 계속 갈등했다.

명 기병이 옥저 기병에게 한 순간 우위에 선다고?

뒤를 둘러보아도,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빈번하지 않은가?

이런 상태에서 예비대를 돌려 뒤로 향하겠다는 것은 보병이 기병에게 등짝을 훤히 노출하는 셈이다.

애초에 이제는 더 이상 전장에 투입할 예비대가 그렇게 많지도 않다.

방금 전의 명 우익의 위기상황에서 사실 가진 패의 대부분을 소모했던 그였으니.

지금은 오직 상대의 의도를 마지막까지 헤아려 올바른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 * *

하지만 웅정필의 휘하 지휘관, 총병 두송은 도통 전 진형의 가운데에서 가만히 전력을 온존하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늘이 내린 맹장이라 장담하는 그는 자신보다 다른 초병인 유정과 마림 등을 더욱 신뢰하는 웅정필에게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항상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상관을 해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언제든지 독자적으로 행동하여 공훈을 탐하려 했지.

그동안은 지루한 공성전만 치렀으니, 장수라면 이런 야전에서 마땅히 알맞은 공훈을 세워 진급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명의 고병들을 돌려 약점을 찾으려 했다.

조선의 4사단은 병력이 열세이나 보병들이 총탄을 받아내며 극복하기 어려운 고지대 위에 자리 잡고 있어 공격이 불가능하다.

양옆의 포대에서 포탄도 아군의 선형진에 열십자로 떨어지니 영 내키지가 않았다.

허나 바로 옆의 5사단은 평지에 위치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크게 위태로웠던 곳.

이곳에 두송이 합류한다면 다시금 힘차게 몰아붙여 깨트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가 이끄는 용맹한 명의 고병들이라면 더더욱.

그렇기에 그는 웅정필의 명령 없이 휘하의 고병들을 이끌고 진형을 이탈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전열을 가다듬은 5사단은 모래주머니를 통해 나름대로의 은엄폐벽을 그 자리에서 건설한 뒤였고, 후에 근대적 야전축성술의 예시로 꼽힐 자그마한 언덕을 끼고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 * *

오후 12시 31분.

아군의 위태로움은 적이 가장 먼저 알아차리기 마련.

전황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천천히 움직이던 태양이 마침내 북쪽 하늘의 가운데에 정확히 걸렸다.

북쪽에서 비스듬히 내리쬐는 터라, 등진 조선군과는 달리 명군은 정면으로 햇살을 받아야만 했다.

‘…….’

누구에게는 그저 지나갈 수 있었던 자연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이는 이미 계산 안의 일이었던 모양이다.

명군은 사소하게 불편함을 느꼈다.

허나 그것이 부대 단위가 되어보니, 안그래도 처참한 명군의 화기 명중율은 그보다 더 바닥이 있었다는 듯 떨어졌다.

안그래도 좋지 않았던 교환비는 이제는 눈 뜨고 보기 힘들만큼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었다.

웅정필은 떨리는 손으로 지휘봉을 만지작거렸다.

생각했던 모든 수는 모조리 파훼된다.

그가 무엇을 준비하였건 간에, 이윤신은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이를 해소했다.

웅정필은 갑자기 머릿 속에서 경종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아군 지휘부를 향한 적의 전면적인 공세다.

양익포위를 유도함이 아니었던가.

병력의 우세를 위해 좌우로 넓게 벌린 명에 대응하여, 조선군 또한 넓게 진영을 꾸렸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열의 두터움은 명군이 더욱 두터웠을 것인데.

허나 지금 이 순간 웅정필은 말려들어간 적의 우익조차도 다 윤신이 의도한 전투과정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게추가 삽시간에 불균형해졌다.

도보를 통해 걸어오는 시간이 있으니,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지원병력을 보내는 것에도 시간이 어느 정도 소모된다.

이 틈을 후벼파는 듯, 조선군의 중앙에서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말 그대로 땅에서 ‘솟아나’ 전진하며 총을 쏘았다.

공세의 처음부터 적의 지휘부가 있는 방향이라 몇 번이고 뚫으려 시도했지만, 적들의 산병에 의해 그러지 못했던 곳.

그 후에는 명군 또한 은연중 조금씩 중앙의 병력을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단 두송이 자리를 비우기 전에도 웅정필은 조금씩 양 익의 위기상황에 힘을 보태 주었으니까.

제대를 갖추지 않고 조준사격을 실시하는 적의 산병들은 경사와 지형지물을 끼고 싸우니 방어에는 능할지언정 공세에는 부적합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산병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윤신의 진격은 마치 완편 연대 몇 개를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내 진격을 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가 안배해 놓은 예비대를 전부 동원하였고 심지어 옆의 연대에서도 징발한 것이겠지만, 지금까지 우익의 수적인 열세에도 기어코 많은 증원군을 주지 않은 것은 그의 초인적인 인내심과 부하들에 대한 확신을 상징하겠지.

― 타타탕

저들의 축차사격술은 마치 물이 흐르는 듯 끊이지 않았다.

보통, 소총이 열 자루가 있다면 그중 두 자루는 필히 불량하여 잘 나가지 않고, 발사된 여덟 자루 중에서도 오직 사수의 역량에 따라 두세 발이 표적에 적중할 뿐이다.

허나, 조선의 고병들은 사격에 기이할 정도로 능했으니 그 두세 발이 세네 발, 심지어 가끔은 네다섯 발로 느껴질 정도였다.

태양을 등에 업고, 적의 4사단이 가장 가까운 중앙 포대에서의 화력 지원과 합류한 기마포병대와 하마기병대 등의 전력을 총동원하여 결정적인 진격을 실시하자 명의 중앙부는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마치 파도가 갈라지듯 좌우로 쪼개져야만 했다.

화기 숙련도와 지휘계통의 부재에 이제는 햇살마저 등지고 내려오니 명군들은 그 광경에 압도당해 주춤주춤 물러났다.

웅정필은 길게 탄식했다.

“두송아! 두송아, 네 어디에 있느냐!”

적의 기세가 웅크렸던 범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데, 너는 어디에 있느냐.

적어도 곁에 계속 있었다면 어찌 저항이라도 할 법하지 않았겠느냐.

오후 1시 44분.

그토록 견고했던 중앙의 대열이 와해되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그리고, 총병들에게 와해된 대열은 곧 죽음을 상징했다.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가끔은 열 명의 신병이 한 명의 고병만 못할 때가 있었다.

그것은 애석하게도 대체로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일어나곤 했다.

“물러서면 죽여… 크윽!”

자신이 이탈된 곳이 순식간에 돌파되는 광경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던 총병 두송이 휘황찬란한 검을 뽑아 들고 명군들을 베어가며 독전을 하다, 갑자기 안면에 총탄이 날아들었는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시신이 되어 뒤로 넘어갔다.

그 꼴을 직접 본 명군 고병들의 사기마저도 완전히 바닥을 쳐 서로 자신이 살겠다고 도망가니 밟혀 죽는 자가 총탄에 맞아 죽는 자보다 많아 보였다.

웅정필이 필사로 군율을 수습하려 했으나, 이미 한 번 일어난 적의 진격은 쾌속하고 빠르게 이루어져 마침내 명의 제대를 완전히 갈랐다.

“사방에서 대열이 무너집니다!”

“적의 총공세입니다!”

“어사! 후퇴를 명하십시오!”

총병 조몽림, 우영장 교일기 등이 웅정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우익이 포위당했다! 이대로 물러서면 저들은 다 죽은 목숨이야!”

“도어사, 지금 물러서지 않으시면 우리 모두가 죽습니다! 군세를 수습하시고 훗날을 기약하십시오!”

― 두두두두

“아국의 기병대인가?”

그 와중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던 웅정필이 제장들이 붙잡은 소매를 뿌리치고 고개를 들어 남쪽의 지평선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열세에 몰려 달아나는 명국의 기병대와 완전히 사기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자신들이 왔던 초원으로 되돌아가려는 소수의 몽골 기병들이 보였다.

그러니 방금 전에 가까이 들린 말발굽 소리는 옥저의 기병대라는 것이겠지.

“명적들을 모조리 죽여라!”

4사단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튀어나온 완벽한 순간, 옥저의 엽기병대와 흉갑기병대가 후방에서 지휘부를 들이닥치니, 순식간에 우영장과 조몽림, 진왕정, 하세현, 공염수, 이희필 등 제장들의 머리가 달아났다.

이리저리 지휘부를 맴도는 적기병의 칼날을 피해 허리를 숙이며 빠져나온 웅정필이 살아남은 고병들 몇의 호위를 받으며 말에 올라 피신했다.

“금주로, 아니 영원성으로 퇴각로를 열어라!”

오후 3시 57분.

명군의 좌익이 후퇴에 성공했다.

옥저의 엽기병대와 흉갑기병대가 집요하게 추격하였으나, 웅정필은 그 와중에도 몇 개의 함정을 파 이저혁과 그의 동생 무장들의 끈질긴 추격을 저지해내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일방적인 도살이 자행된 들판은 이미 붉게 물들어 다시금 붉은 비의 장마가 온 듯 하였다.

포위된 명군의 우익은 끝까지 항전했다.

규모 자체는 여전히 명군답게 많았다.

하지만 좌측과 북쪽은 적이요, 우측은 습지며 남쪽은 바다인 상황에 그들 스스로의 지형마저도 몸을 숨길 데 없는 평야이니 총병 마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명군은 천천히 무력화되었다.

* * *

요하를 도하하여 고씨 고려를 공격했던 당태종 이세민이 마침내 초라하게 퇴각하여 요택에서 탄식을 했다는 고사는 웅정필 또한 익히 알고 있었지.

하지만 요택의 서쪽에서 그 자신이 이세민의 전철을 밟으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나?

애초에 싸우면 안 되었던 상황이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수적인 우위라는 전장의 필수 덕목을 가지고 있음에도 모든 전장에서 모조리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기본적인 전투 능력의 차이가 현격하게 컸기에 그랬을 것이다.

비록 저들의 상국, 고려에서 한물간 병기들을 수입해 쓰는 처지라지만 조선은 신뢰성 높은 수석식 소총을 이삼십만 정 넘게 보유한 국가였다.

반면 명국은 싸우다 보면 격발부가 터져버리거나, 혹은 부싯돌에 불꽃이 피어오르지 않거나, 그도 아니라면 화약접시가 휘어버리든가 하는 각양각색의 상황을 겪었다.

대포가 터져버리기도 하였고.

지휘계통은 어떠한가.

명은 적병의 저격에 속수무책이었고, 반대로 조선 측 지휘관의 저격을 잘 노리진 못했다.

상급 지휘관들은 아예 총의 사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고 하급 지휘관은 아예 병사들과 비슷하게 옷을 입어 구분하기 힘들었다.

사실 알아차린다 하더라도 명의 소총은 명중률이 형편없기도 했으니 기습이나 매복이 아닌 이상에야 힘든 것이다.

조선군의 명령 전달은 명에 비해 몹시 신속하고 정교했다.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장소를 명시하지만 전달 속도마저도 빠른 군대와 모호한 명령이 느릿느릿하게 전달되는 군대가 싸우면 대체 누가 이기겠는가.

그러나 웅정필은 그 모든 변명에도 불구하고 사실 자신의 역량을 완벽히, 아득히 초월한 적의 지휘관에게 말 못 할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경외일지도 모르는.

자신이 파직당하고 후임으로 왕화정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웅정필은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영원성의 누대에서 짧은 절명시를 뱉고는 투신했다.

[이 혼이 다시 살아나길 바랄쏘냐? 다만 같은 볕을 쬐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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