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01화 (301/653)

현주성

* * *

봉명관으로부터 금주성에 이르기까지.

중원의 세력과 삼한의 세력이 서로 오가기 위해서는 얇은 발해만 가장자리의 땅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를 요서회랑(遼西回廊), 혹은 요서주랑(遼西走廊)이라 칭한다.

조선이 이 길의 주요한 길목에 성형요새들을 지은 이유도 명의 대군이 오로지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목민마냥 보존식품인 보르츠를 바리바리 싸 든 기병을 이용하거나 보급에 지장이 없고 약탈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 조그마한 별동대를 따로 꾸리면 몰라도, 어느 규모 이상의 병사들은 다른 곳을 우회하기 불가능했으니까.

하물며 정주민인 중원의 국가는 더더욱.

따라서 거의 반년이 넘도록, 이 요서회랑은 격전지였다.

금주성에 똬리를 튼 조선군은 명과 전투를 벌였고 몇 번은 크게 물리쳐 적들의 진채를 거의 오십여 리나 남서쪽으로 물린 적도 있었다.

몇 번은 성이 넘어갈 듯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했었고.

조선군은 결국 다시금 금주를 버리고 그 후방의 현주(顯州), 옛 요나라 시절 봉선군(奉先軍)이라 불린 지역의 성으로 후퇴했다.

그 이후, 늦은 장마가 요서회랑에 머물렀다.

비가 조금씩,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날씨에 조선군과 명군은 제각기 전열을 가다듬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조선군이야 병력의 열세를 화약 무기의 우세로 조금 상쇄하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습한 날씨는 주적과도 같았다.

반면, 명으로서는 이와 같은 날씨가 기회가 될 법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움직이지 못했다.

간자에 따르면 밀집한 군세의 규모와 열악한 위생환경, 미흡한 청결 의식 등으로 인해 군영 내에 수인성 전염병으로 추정되는 역병이 몇 차례 돌았던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인력열차가 지나다니는 철제 궤도가 중원의 어설픈 산업력(이라고 말하기도 힘든)을 상징하듯 이리저리 녹슬어, 짐을 실은 인차가 오갈 때마다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구부러지고 부서지는 바람에 유지보수 기간, 군수품의 수송이 정체되는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하고.

묘한 침묵이 요서회랑에 내려앉았다.

* * *

[아버지께서는 일기를 자주 쓰셨다.

본래 당신께서 직접 쓰시고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셨으나, 결국 당신 스스로가 너무나 바쁘고 건강이 썩 좋지 않으시자 갑진년 초부터 이 어리석은 아들로 하여금 일기와 장초를 모두 관리토록 하셨다.]

―갑진일기(甲辰日記) 중, 고려국 해병사령관 이면(李葂).

갑진년(CE 1604) 6월 28일.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평양행궁에 가기 전, 명령받은 바에 따라 미리 개성에 들러 상국의 연락관을 마주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눈 뒤, 개성에 주둔한 적포군 사관 백여 인의 종군을 허락받았다.

비록 그들이 지휘하는 병사들은 미주로 많이 돌아간 상태였고, 다시금 이곳에 온다 하더라도 시간이 걸린다 하였으나 남아있는 그들 또한 명령의 수신(受信)에 능하고 용맹하기 그지없기에 천만다행이었다.

적포군 사관 백여 인은 제각기 여러 군사 기술에 능하고, 또한 그중 일부는 저격병의 직무를 행하고 있었기에 전투 도중 적의 중견급 지휘관의 격살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갑진년 7월 2일.

아버지께서 상방검을 하사받으시고는 다시금 옛 수하들과 병졸들을 만나기 위해 북쪽으로 떠나실 채비를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부자가 모두 가장 위험한 전장에 나가는 것을 은연히 걱정하셨으나, 회 형님과 열 형님이 계시기에 나는 그저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맡은 직무에 종사할 뿐이다.

갑진년 7월 15일.

평양에서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니 요동반도의 끝자락인 비사성(卑沙城)을 지났다.

많은 수의 판옥선들이 이곳에 주둔하여 명의 수군을 견제하니, 그 위용이 실로 대단하였다.

아버지께선, 수군 또한 육전대(陸戰隊)를 자체적으로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상국의 편제에도 육군의 해상 지원은 있을지언정, 해군의 전투병과는 없다 그리 말씀드리니 웃으며 결국은 바뀔 것이라 하셨다.

갑진년 7월 26일.

아버지께서 현주성에 도착하셔서 전 사령관 황진에게 인수인계를 받으신 뒤 부하들과 해후를 하셨다.

병졸들의 사기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건만, 아버지를 본 뒤 얼굴의 근심이 조금 사라진 것이 확연히 보이니 자랑스럽다.

전 사령관 황진 또한 직무를 내려놓고 제장으로 돌아감에 있어 어떠한 미련도 가지지 않은 듯하였고 도리어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몇 차례 제장들을 불러놓고 군무의 일을 여쭈시던 아버지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셨는지 26일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기침하시고는 전장을 둘러보자 하셨다.

혹시나 하여 말 다섯 필을 끌고 나와 적포군 사관 셋에게 아버지의 호위를 목적으로 동행을 부탁하니 흔쾌히 들어주었다.

개경에 주둔한 상국의 무관들이 상당히 뻣뻣하다 그리 들었건만, 아버지의 이름을 대니 지원 요청에도, 그리고 이 같은 호위 요청에도 태도가 몹시 부드러워지는 것이 연방사관학교의 인연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장마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꼼꼼히 살피셨다.

비가 온 뒤 물줄기가 틀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에 이를 관측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는 것만이 아닌 그 거리를 일일이 직접 말을 타고 돌아다니시며 언덕이나 조그마한 농가들의 위치와 거리를 측정하셨으니 꼼꼼함과 섬세함이 비견할 바가 아니셨다.

심지어 직접 하마(下馬)를 하셔서 발바닥이 디디고 선 토질의 단단함 정도를 측정하시기도 하셨고, 근처에 사는 노인들을 불러 모아 일 년의 날씨가 어떠한 흐름으로 가는지 물어보기도 하셨다.

최근의 냉해와 갑진년 장마의 경우에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날씨라는 것은 길게 보면 항상 수렴한다 하셨다.

“면아, 지휘관이라는 것은 적어도 천시와 지리, 인화를 모두 아군의 것으로 돌리려는 노력을 해야 한단다.”

상국의 지휘관들조차도 극히 감탄한 바부얀 해전, 오직 방어목적이며 공격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수뢰(水雷)를 이용하여 적에게 나아가 대승을 거둔 전투에서조차 자꾸만 더 좋은 성과를 내실 수 있었다고 여기시는 당신이셨기에, 다른 말은 올리지 않았다.

장마 내 비가 내려 삽시간에 불어난 수택(水澤, 늪)과 언제든지 수택으로 변할 곳을 과거의 지도들에 추가로 기록해보니, 주요한 전장이 요하 하류의 반금보다는 현주성 부근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대릉하와 현주성 사이에는 높이가 그리 높지 않지만 길이는 상당히 긴 산맥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적군이 통과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군데가 전부인 듯하였다.

아버지께서는 특히나 구릉지의 높낮이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이유를 여쭈니, 보병의 입장에서는 야트막한 언덕의 존재가 그 어떤 것보다 신경이 쓰인다고 하셨다.

총포를 이용한 대군들 간의 전투 몇 분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장시간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날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하다 보면 아무리 야트막한 언덕이라도 이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군의 우세함을 보장할 수 있었다.

또한 여유가 된다면 그 자리에서 가벼운 포대 자루에 흙을 집어넣고 쌓아 올려 대열에 엄폐물을 만들 수 있었고, 그리한다면 서로 총탄을 주고받는 도중에 아군의 병졸들은 신체의 대부분이 가려져 피해가 격감한다 하니 이는 실로 대단한 계책이라 무릎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투 시 공병(工兵)의 효용을 몇 번이고 강조한 상국의 전술과 합치되는 부분이 있었다.

포대를 설치할 곳과 그것을 방어할 군이 주둔할 곳을 살피고, 여러 전선을 연결하니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오는 듯했다.

예상되는 전장의 길이를 여쭈니 아버지께서 농으로, 십오만여 명의 군졸들이 한 줄로 자신의 보폭만큼만 나란히 서도 그 길이는 이백여 리에 달할 것이고, 적병의 길이는 그의 배보다 더 길 것이라 하셨다.

농으로 하신 것이 분명했으나 말씀하신 길이가 끔찍하게 길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군대의 진형이 일자일 리는 만무했고, 적의 선형진과 아군의 선형진이 맞부딪힌다 하더라도, 열은 적어도 대여섯 줄에 달할 것이기에 그 길이는 훨씬 짧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전을 하면 그 군대의 규모에 따라 전선이 넓어질 것이라 하셨으니, 수기(手旗)의 해독 여부가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할 것이라는 말씀은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갑진년 8월 1일.

아버지께서는 포(砲)를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기를, ‘승리는 가장 많은 포병대를 지닌 자의 것’이라 하셨으니 그 어떤 무장들보다도 항상 장인들을 가까이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동안 여러 규격의 포를 만드셨었다.

허나 몇 개의 소구경 포는 수성전 시 딱히 쓸모가 없어, 후방의 심양성으로 운송되어 보관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부임 직후, 이 포들을 다시금 가져오라 하셨고, 기존의 하마기병대(下馬騎兵隊) 중 일부로 하여금 이 포들을 이끌고 전장의 주요한 지점에 빠르게 다가갈 수 있게 새로운 편제를 짜셨다.

이를 기마포병대(騎馬砲兵隊)라 하였으니, 실로 듣지 못한 개념이다.

제장들은 그 효용성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반문을 제기하진 않았다.

기병대의 이야기를 좀 덧붙이자면, 아국의 기병대는 화기의 도래 이후 크게 편제가 줄었다.

좋은 말들은 대체로 옥저에서 나니, 상국이 탐라부의 말을 아국에 조금씩 판매한다 하더라도 그 수가 많이 유지되기 힘들었다.

또한 좋은 말들을 선별하여 그 혈통을 보전하는 기술이 있지 않다면 말들이 다시금 조랑말이 되니 군마로 쓰기엔 부적절하다 하겠다.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으니 이제 몽고마의 지구력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 오히려 최대속력을 빠르게 낼 수 있는 돌기(突騎, 돌격기병)들을 주목하는 게 옳다.

한 차례 기총사격을 한 뒤 기병도를 빼어 들고 주살하는 과트라체식 추격기병대 혹은 두꺼운 흉갑과 기병도, 속이 빈 장창으로 기동성과 방호력의 절충지점을 확보한 앙주 장다름식 중기병대가 주류라 하겠다.

대기병 전력인 총기병 또한 중요하지만, 사격술과 기마술을 모두 충족하는 이는 항상 드물지 않던가.

애통하게도 아국은 기병대의 육성에 난관을 겪고 있었다.

십오만의 군대 편제 중에서도 고작 만 명의 기병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고 심지어 그중 대다수는 돌기가 아닌 하마기병대였다.

하마기병대라 함은, 말을 타고 다니는 병사들이긴 하나 전투 시 말에서 내려 총병으로 전환한 뒤 선형진을 꾸려 싸우는 병사들을 칭한다.

아국의 무관들은 여전히 마상재를 기본 무예라 여기고 무과 시험에도 반영하고 있으나 이를 일반 병사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

기병 또한 말 위에서 총을 쏘는 것보다 하마하여 쏘는 것이 재장전에도, 화력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니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도 이를 애석하게 여기셨다.

갑진년 8월 3일.

기마가 부족한 근심이 이틀 만에 완전히 해소되었다.

북쪽에서 큰 군세가 다가왔다.

척후가 놀라 보고하니, 아버지부터 비번이던 장수들까지 황급히 나가 누대에서 상황을 파악했다.

천만다행하게도 그 깃발은 우리가 알아볼 수 있었다.

선두에는 병조참판 윤돈이 옥저의 깃발을 들고 있는 장수와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였으니, 망원경으로 이를 인식한 아버지는 총병들에게 경계를 풀라 지시하셨다.

옥저의 지원군은 그 전부가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어 누대에 오른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들의 지휘관에는 늠름한 자들이 여럿 있어, 아국의 제장들이 제각기 호승심 있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려니 아버지께서는 이를 엄중히 꾸짖으시고는 크게 대접을 하셨다.

옥저와 아국이 그동안 과거의 일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해 사이가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번 전쟁에 옥저가 전면적으로 참전하였으니 앞으로의 관계는 사뭇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듣자 하니 미곡의 거래를 약속했다 하는데,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겪고 있는 북부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국 또한 식량이 그리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상국의 시중이 증원함대를 지원하여 합종국 수군과 함께 톤도 제도를 평정한 뒤, 아국에게 톤도의 영유권을 준다고 결정하였던 적이 있었다.

적도와 가까운 열대지방의 쌀농사는 조선반도에 비할 바가 아니니 큰 도움이 되리라.

이 말고도 양국은 왕실 간에 서로 통혼하자는 약조를 하였으니, 조정에서는 세자 저하가 옥저국의 명소옹주와 이어지는 것과 장혜공주 마마가 옥저국의 세자와 이어지는 것을 두고 한창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한다.

옥저국 총사령관의 이름은 그 유명한 한명련이라 하였으나 실제적으로 군을 지휘할 자는 따로 있었다.

그 옆을 보니 마침 생소한 자가 일어나 자신의 소개를 하였고, 성은 이가요 이름은 저혁이라 하였다.

저는 멧돼지를 일컫는 글자요, 혁은 가죽이라는 뜻이니 합치면 멧돼지 가죽일 것이다.

작명법이 특이하여 후에 아버지께 여쭈어보니 여진족의 작명법이 아니겠느냐 하셨다.

과연 옥저국 개국공신 이석보의 현손이라 하니 옥저의 명문가라 할 수 있겠다.

듣기로는 옥저의 보병대는 여러 여건상의 한계로 파병되지 못했다 한다.

그러나 옥저기병대의 명망은 조선의 장수들도 모두 아는 상황이었고 병력의 총수가 거진 삼만에 달하니 합종군의 기병대는 더 이상 약점이 아니게 되었다.

파병된 기병의 종류도 다양했다.

하마기병대는 물론이고, 패퇴하는 적을 사냥한다고 하여 엽기병대(獵騎兵隊)라는 이름을 가진 기병대와 현재의 상국 장다름 기병대와 비슷하게 흉갑을 입은 흉갑기병대도 있었다.

흉갑기병대와 비슷하게 흉갑을 걸쳤으나 기병도가 아니라 마상창을 써 충격력을 극대화한 창기병대도 있었고.

심지어 옥저인들의 대단한 기마술을 상징하는 병과도 있었다.

화력 면에서 하마기병대보다 열등하나 특유의 기동성을 토대로 하마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적 보병보다는 적 기병대를 주살하는 기마총병대.

상국마저도 그 규모가 그리 많지 않을 정도라 하니, 옥저의 최정예 기병대가 가진 그들의 자부심은 실로 대단하리라.

특이하게도 옥저는 자신들이 이끄는 기병대를 병과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단지 그들이 들고 다니는 깃발로 불렀다.

들으니 이를 팔기(八旗)라 한단다.

갑진년 8월 5일.

비가 완전히 그쳤다.

화기와 화약, 그리고 치중물자를 다시금 점검하고 있자니 명적들이 움직인다는 첩보가 들려왔다.

아버지께서는 곧바로 현주성과 반금성, 그리고 후방의 요새들에서 병력을 전부 끌어모으셨다.

옥저의 기병들까지 합친 군세는 정확히 이십일만.

적들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고, 승리는 오로지 우리의 것이리라.

[작가의 말]

작중 이저혁의 여진 이름은 여진의 작명법에 따르면 누르하치입니다.

엽기병: 샤쇠르

흉갑기병: 퀴레시어

흉갑창기병: 윙드 후사르

총기병 : 카비니어

하마기병대 : 드라군

이라고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ps.

걱정해주신 덕분인지 몸은 이제 상당히 괜찮아졌습니다.

첫날에는 열이 37.8도까지 올랐고 둘째 날에는 온몸(특히 허리)에 근육통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지금은 상당히 괜찮아졌습니다.

300화입니다.

솔직한 말로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제가 이 고지를 넘을 수 있는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죠.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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