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다분지계(中華多分之計)(4)
* * *
그러나 주익상이 북왜의 영웅이라 칭한 남자, 일본의 젊다 못해 어린 관백은 잠시도 여인의 치마폭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키가 크고 덩치 또한 그만큼 큰, 마치 곰 같은 사내가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불안에 떨었다.
평소 그는 아버지 히데요시와는 다르게 성품이 점잖고 학식이 있었으며, 고로 덕망이 있다 평을 들었지만 이런 위기에 대한 관리능력은 자신의 아버지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히데요시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죽기 직전까지도 잠재적 정적들을 숙청하거나 공격했다 하나, 관백이 된 히데요리 본신의 나이가 열한 살에 불과했으니 정확한 판단은 불가능했다.
“관백, 안심하세요. 이 어미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반면, 그의 옆에 앉은 중년의 여인 차차(茶茶)는 그녀의 어린 아들을 달래기 바빴다.
어린 나이에도 덩치는 웬만한 무장보다도 더 큰 아들이 마침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잠에 들자, 차차는 그녀가 믿을 수 있는 다섯 중신들을 불러들였다.
“고부교(五奉行, 오봉행)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히데요시가 히데요리를 위해 남긴 다섯 명의 충신들이 서로를 바라보다 차차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들은 히데요리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가 어린 만큼 사실 지금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자는 주군의 어머니인 차차였으니.
“선태합께서 남기신 유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온전히 차차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것이었고.
한낱 계집… 이라고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녀자가 정권을 쥐고 흔드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좋지 못했다.
묘한 긴장이 그들 사이에서 감돌았다.
차차는 이를 해소하려 손을 흔들었다.
“유지에 얽매이지 말아요. 지금 그대들의 주군이자 새로운 천하인, 새로운 관백에 무엇이 도움이 되느냐 그것을 잘 따져보라는 이야기예요.”
“…….”
오봉행 중 가장 충직하며 가장 많은 신뢰를 얻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그녀에게 말했다.
“도노, 선태합께서 남기신 유지를 따르지 않는다면 일본의 모든 무사들이 격분할 것입니다.”
차차는 죽기 직전까지 잠꼬대인지 악몽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던 남편 히데요시의 모습을 떠올렸다.
매일 밤, 그는 백제니, 조선이니 정벌을 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저 늙은이의 노망이라고 생각했건만, 유지로까지 이를 남겨 무사와 다이묘들의 감정을 자극한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오봉행 중 도요토미 정권의 재정을 관리하고 있는 나츠카 마사이에가 고했다.
“다이묘들은 백제의 석고를 분할하여 나누어 주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백제 정벌을 하기도 전에 그 콩고물부터 먼저 논하는 것인가요?”
다른 중신인 마시타 나가모리가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도노. 전국의 모든 무사들이 선태합께 고개를 숙여 보인 것은, 선태합의 위대한 통치에 감복했던 것도 있었겠지만 선태합께서 일본의 적을 명확히 지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차차가 화를 냈다.
일곱 살 난 아이들도 아는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지 않는가.
“덴노를 쫓아낸 배신자와 그가 이끄는 도래인들이 일본의 적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에요. 내가 모르는 다른 것도 있나요?”
“…도노. 전쟁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 그들의 칼날이 어디로 향하겠습니까?”
“…….”
그제서야 현 상황을 인지한 차차가 신음성을 흘렸다.
아시카가 막부의 혼란기에 시작된 일본의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라는 희대의 영걸과 그의 죽음 이후 권력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영걸 덕에 일본의 난리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자식 운이 심각하게 없었던 히데요시가 마침내 그의 어린 아들에게 정권을 물려주자, 일본은 순식간에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아시카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훙한 지가 아직 십 년이 채 넘지 않았다.
게다가 정권을 틀어쥐며 도요토미가를 만든 히데요시의 본래 신분이 정말 이례적으로 천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치세 내내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쇼군’의 명칭을 쓰지 못하고 관백이니, 태합이니 하는 명칭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들 히데요리 또한 관백의 호칭을 쓰고 있으니 마찬가지였고.
다섯 중신은 묻고 있는 것이다.
여러 이유로 누적된 다이묘와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적절한 장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백제의 석고는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제물이었고.
“전쟁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군요?”
이시다 미츠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미 일본, 아니 지금의 일본을 이끄는 도요토미 가문은 다른 선택이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차차는 심각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백제 공격?
좋다.
그러나 그 뒷감당은 어찌할 것인가.
제아무리 일본이 지정학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그동안 내부의 난리에 외부 일을 신경 쓰지 못했던 상황이라 하더라도 태평양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제국의 소식을 완전히 듣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북왜 자체가 고려와 단 한 번도 싸워보지는 않았지만, 소문만 들어서는 그들은 마치 인세의 거대한 악몽들이 실체화한 것만 같았고, 재앙과 파멸을 몰고 다니는 흉신악살과도 같았다.
지금도 성 밖의 저잣거리에 나가 떠도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어본다면, 그중에는 필히 고려인들이 저 몽골인들 수괴의 목을 잘라 제사상에 올리는 일화가 껴 있을 터였다.
백 년이 다 되어가는 먼 과거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와미… 이와미에 제국군이 있잖아요. 이와미는 어찌 피하면 되지 않을까요?”
다섯 중신은 내심 어이가 없어 굳은 표정으로 서로를 둘러보았다.
이와미야말로 수많은 다이묘들이 탐내는 곳인데 어찌 피해갈 수 있겠는가?
“도노, 그렇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일본의 무사들과 도요토미의 무사들은 전부 저 포도아와 명이 쓰는 무구들로 충실하게 무장하여 있습니다.”
“수군 또한 저 백제와 고려가 쓰는 배에 대항하기 위해 세키부네(관선)와 아다케부네(안택선)을 더욱 개량하였으니 능히 견줄 만합니다.”
“맞습니다. 도노.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백제의 함대는 강하다.
초계함이라 불리는 백제의 ‘거함’은 일본의 주력함인 세키부네보다 훨씬 강했다.
일본인들이 떠다니는 성이라 부르는 아다케부네 또한 몹시 커다란 함선이었으나 초계함을 정면에서 이기기는 힘들었다.
이에 경각심을 가진 오다 노부나가는 무려 ‘철갑선’이라는 뜻을 가진 텟코센―아다케부네의 개량형을 건조해 이를 견제하고자 했다.
뜻에서 알 수 있듯, 상부 구조물에 얇은 철판을 덧대어 적의 화살 공격이나 소총 공격을 차단했다.
화포를 쓸 수 있게 갑판 자체의 크기를 키우고 견고하게 만들기도 했고.
위대한 일본의 전통적인 선박 건조기술이 집대성된 것과 다름없었으니 확실히 함선의 체급 자체는 커져 초계함을 능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쥬인센(朱印船, 주인선)이라는 실험급 선박도 있었다.
저 명나라까지 갈 수 있어, 해금령을 내린 명의 얼마 없는 항구에 입항할 수 있는 붉은 직인(朱印)을 받을 수 있는 배라는 뜻이었다.
저 양이들의 갤리온을 모방하여 만든 이 선박은 기존의 화선(和船, 세키부네를 포함한 일본의 전통적인 선박)과는 구조 자체가 달라 건조하기 상당히 힘들었지만, 그렇기에 일본은 기존 화선의 틀에서는 불가능한 대형함을 건조할 수 있었다.
물론 백제의 괴물 같은 군함, 감히 대적할 수 없다고 그 위명이 자자하여 바다 위의 공포라 할 수 있는 순양함이 나온다면 쥬인센으로도 상당히 무리가 되었지만, 백제 또한 순양함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수적인 우위로 어찌 대적 가능했다.
차차는 불안한 속내를 감출 수는 없었으나, 이를 고부교들에게는 보여주진 않았다.
* * *
“뭘 보고 있느냐, 덕천신강(徳川信康).”
미주 군항의 부두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의 해군 장수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을 바라보고는 이내 군례를 올렸다.
“제독.”
“모국을 잊지 못하겠는가?”
“…….”
고려국 해군 대장 변진섭은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자신이 이끌 함대의 선장이 바라보고 있는 군항의 부둣가로 다가갔다.
저 멀리 바다 위에는 어선들이 해가 지기 전에 부랴부랴 철수하는 모습이 아련히 보였다.
“귀관의 나라는 해가 뜨는 곳에 있다 하여 스스로를 일본이라 부른다지. 비록 고려와 세계는 북왜나 왜로 부른다만.”
덕천신강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변진섭의 말을 정정했다.
“제독, 제 나라는 고려입니다.”
“그렇다면 귀관의 얼굴에 근심이 져 있는 까닭은 무엇인고?”
덕천신강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가문의 은원… 실로 잊어버리기 힘들지.”
“저는 고려의 사람입니다.”
덕천신강은 두 번째로 아까와 비슷한 말을 내뱉었다.
변진섭은 피식 웃음 짓고는 단어를 정정했다.
“그러나 보게. 이곳 고려에서 본다면, 귀관의 고향은 해가 떠오르는 곳(日本)이 아니라 해가 저무는 곳이지.”
“일말(日末)이라….”
농담 따먹기를 시도해보려던 변진섭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피가 많이 흐를 것이다. 고려는 이번 전쟁에 주도적인 역할이 아니니, 백제가 북왜에게 가진 감정을 생각해 본다면 많은 백성들이 상할 게야.”
덕천신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독, 저들은 제 아비와 제 가문의 원흉입니다. 제가 어째서 저들의 피를 걱정하겠습니까?”
“왕조만 그랬던 것이지. 왕조와 국가는 엄연히 다르네.”
“종통과 제국은 하나가 아닙니까?”
“그래 보이는가?”
변진섭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제국의 신민들은 황상과 종통에 무한한 지지를 보내지. 그러나.”
백발의 해군 대장이 중년 장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우리 제국군이 충성하는 대상은 엄연히 신민과 신민의 뜻을 받드는 조정이다.”
옛 시중들이 황권과 주권을 분리시킴에 따라 고려의 군인들은 신민에 충성했다.
근위여단이나 근위함대가 아닌 이상.
“귀관의 고향은 잘못되어 있어. 잘못되어 있어도 한참을 잘못되어 있지.”
덕천신강은 부정할 수 없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게.”
그는 화들짝 놀랐다.
“…어찌 아셨습니까.”
아버지 덕천가강은 비록 풍신수길에 의해 숙청당했지만, 잠자코 죽음을 받아들인 덕천가강 덕분에 그의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진 않았다.
풍신수길이 죽은 이후, 기회가 왔다 생각한 덕천 가문의 일부 사람들은 덕천의 적장자이자, 옛날부터 고려로 망명을 간 신강을 다시금 불러들여 가독으로 삼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 서신은, 옥저와 예맥해를 오가는 고려 상인에 의해 전달되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해군정보국이겠지.’
덕천신강은 가공할만한 방첩력을 자랑하는 고려의 정보조직에 소름이 우수수 돋는 것을 느꼈다.
고려는 추밀원 산하의 가장 강력한 정보총국 말고도, 육군과 해군 내의 자체적인 군 정보기관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적어도 군 내부와 대외 군 첩보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력한 정보력을 발휘했다.
“고려를 배신하는 행위가 아닙니까?”
“그것은 귀관이 돌아가서 하는 행위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변진섭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군정보국에서는 덕천신강이야말로 북왜에 심을 최고의 적임자라 여기고 있었다.
‘다이묘가 되어 도요토미를 견제할 수 있는.’
혹은 그보다 더 대단한 존재가 되든가.
“조금 더 생각해 보아도 좋네. 다만 출정하기 전에는 알려주어야 해.”
“…알겠습니다.”
* * *
웅정필은 과연 명의 명장다웠다.
인력열차로 인해 한결 안정된 보급을 받을 수 있자, 그는 금주성을 공격했다.
밧줄을 답으로 받은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오직 전장에서 죽거나 혹은 목을 매달거나 둘 중 하나뿐.
인력열차에는 보급품뿐만 아니라 가끔은 증원 병력까지 왔다.
전국 각지에서 징집된 이들은, 조금은 어이없는 일이지만 철도가 부설된 곳 근처에 살던 이들이었다.
뜬금없이 길 근처에 철로 된 궤도가 생기자, 무지렁이나 다름없는 명의 농민들은 이 철을 뜯어가기 시작했다.
철은 이 시대에 몹시 귀한 것.
근대적 제철법과 교련법으로 연철을 대량생산하는 고려가 아닌 이상에야 철을 보면 눈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다고 내구성과 견고함이 확연히 떨어지는 목궤를 쓸 수는 없는 노릇.
곳곳에서 궤도가 소실되는 사실을 보고받은 주익상은 정말로 철혈의 군주답게 해결책을 제시했다.
목숨으로 죄를 갚으라고 한 것.
누가 뜯어갔는지는 수사할 수 없으니, 도난당한 철도 근처의 남자들을 죄다 잡아 올려 꽁꽁 묶은 뒤 실어서 북쪽으로 나르게 하고, 여인과 노인들은 철로를 유지하게 노역을 부과했다.
북쪽으로 간 남자들은 숙련병들이 쓰는 제대로 된 총 대신 대충 총의 생김새만 가진 나무토막을 들고 진군을 하는 입장, 즉 총알받이의 상황에 놓였다.
철로는 그 옆에 거주하는 주민의 접근성을 현저히 높이 만들었지만, 도리어 그 옆의 주민들은 철로가 깔린 지역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누가 했는지도 모를 죄를 공동으로 갚아야 한다니.
을씨년스럽게 버려진 마을이 드문드문 생겨나기 시작했다.
철도로 대표되는 산업화는 시작부터 민중들에게 반발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작가의 말]
전편 히데요리의 키를 6척 반에서 ‘어린 나이에도 키가 크다’로 수정했습니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아직은 190cm 후반에 육박하지는 않겠죠.
차차는 요도 도노의 본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