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97화 (297/653)

중화다분지계(中華多分之計)(2)

바부얀 해전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인 계묘년(1603년) 11월.

― 땡 땡 땡 땡

멀리서 어렴풋하게 종소리가 들렸다.

최근 불안한 적의 동태에 철릭과 군화를 벗지 않고 침상에 들었던 김시민은 불길한 소리에 잠에서 퍼뜩 깨어나 권총집과 작은 화약낭, 망원경 등이 담긴 장군용 군장을 챙겨 매고 황급히 거처를 나섰다.

“무슨 일이냐!”

“장군! 명군입니다. 명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명은 그동안 계속 도발을 해 왔었다.

괜히 일단의 기마대를 총탄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오가며 신경을 쓰게 만들었고, 야밤에 징을 쳐 사람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기도 했다.

총성이 울린 적은 없었지만, 조선군은 그때마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 이러한 도발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수상쩍은 일이다.

범장이라면, 이렇게 불쑥 찾아온 고요함에 오랜만에 잠을 푹 잘 수 있다며 허리끈을 풀었겠지만, 양장(良將)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었다.

윤신이 당부한 말이 있지 않은가.

피곤이 누적된 병사들은 푹 쉬고 싶어 하는 태도가 역력했지만 김시민은 끝까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초병의 수는 항상 높게 유지되었다.

그러니 지금의 결과는 실로 다행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명 놈들이!”

그의 방으로 달려온 부관의 말을 듣자 그때까지만 해도 시민의 몸에 머물던 미약한 잠기운은 모진 겨울의 추위 속에 내어놓은 따뜻한 차의 온기마냥 빠르게 사라졌다.

“전군 위치로! 빠르게 전파하라!”

“위치로!”

묘시.

조금만 기다리면 새벽 동이 슬슬 터 오를 시간.

시계(視界)가 그리 방해받지 않으면서도 아직 잠을 자고 있었기에 기습을 하기에는 딱 좋은 시간이었다.

허나 총지휘관인 장군 또한 철릭을 입고 자는데 군의 기강이 완전히 흐트러질 리는 없어, 병사들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병장기와 군수품을 들고 지정된 보루와 성벽에 올랐다.

성형요새의 설계를 따른, 낮지만 벽이 몹시 두꺼운 전면부의 포루들에 병사가 가득 도열했다.

포루뿐만이 아니라 요새의 본 성벽과 가장 외곽에 있는 해자 앞의 둔덕까지 총병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았다.

상당한 숫자였다.

봉명관은 직접 주둔한 병사만 오만 명에 이르렀고, 후방에 이보다 작은 요새 두 곳을 두어 각 요새당 만 명씩의 지원군을 하루 내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휘관들 또한 모두 양호했다.

이윤신이 거느렸던 장수들, 즉 송희립(宋希立), 정발(鄭撥), 안위(安衛) 우치적(禹致績) 등은 엄중한 상관 밑에서 제각기 맡은 바 직무에 소홀하지 않았다.

“조란탄을 준비하라!”

“포대의 방렬(放列) 방향이 그릇되었지 않느냐! 다른 보루의 사각을 견제할 수 있도록 똑바로 방렬하거라!”

비록 김시민은 이곳에 경차관으로 와 있었지만 아직도 정식 지휘관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이휼이 잠시 심양으로 이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지만, 왕의 움직임은 시간이 걸렸고 조선 조정은 여전히 사대부들의 정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지금은 조선을 떠나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여립의 주장을 두고 일어났었지만, 지금은 더욱 확대되어 붕당을 일삼는 사대부들의 갈등 구조를 계속 증폭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조정 내 세 명의 영수인 영의정 정인홍과 우의정 이산해, 좌의정 류성룡 간의 싸움도 계속 일어나고 있었고, 그렇기에 세 명의 정승 중 한 명이 도체찰사로 이곳에 오는 일은 상당히 늦게서야 결정되었다.

결국 다른 두 명의 정승에 의해 견제 차 보내진 류성룡이 이곳에 와 도체찰사의 직무를 수행하겠지만 지금은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윤신의 신신당부가 있었는지 김시민보다 나이가 많거나 동년배였던 봉명관의 장수들은 김시민에게 지휘권을 양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방어는 굳건하지만….’

봉명관은 평지성이지만, 바다와 산을 모두 끼고 있어 실로 천하제일관이라 불러도 무방할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건축기법 또한 예전의 고루한 성벽이 아니니 이 정도의 병력이라면 실로 많은 수의 병사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허나, 정말로 명은 엄청난 수의 병사들을 동원한 모양이다.

저 멀리, 해가 뜨는 반대 방향의 지평선이 꾸물거리는 검은 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선의 빠른 대응에 이제는 딱히 급습을 노리지는 않는 듯한 명군은 아예 요란하게 군악을 불며 다가오고 있었다.

‘군악은 실로 잡스럽고 추레하구나. 상국과 같은 대국의 기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상국의 제국행진곡과 명의 행진곡을 비교하고 있던 김시민은 우렁찬 목소리로 조선의 군악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도 질 수 있겠는가! 군악대는 모두 군가를 연주하라!”

조선의 군가 중 하나인 요동행진곡이 나오자, 조선군 또한 악을 쓰고 노래를 불렀다.

김시민은 군가를 들으면서 기다란 망원경으로 적을 살펴보았다.

명군의 특성상, 개개인이 조선의 북방군처럼 튼실히 무장되어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수는 정말 무식하게 많았다.

‘힘든 싸움이 되겠다.’

하기야, 누가 저 거대한 대국과 싸워 편안함을 생각했겠느냐마는.

“영감, 적병들이 사정거리에 도달했습니다!”

“포병 지휘관의 재량에 맞추어 사격하라!”

― 쾅

조선에서 고려식 중포가 쏘아지고, 명 또한 포도아식 홍이포(컬버린)와 불랑기포로 화답하며 계묘년 겨울에 마침내 조명 전쟁이 발발했다.

* * *

명은 명백히 이번 전쟁에 국운을 걸었다.

병부시랑 양호가 조선 경략전의 총지휘를 맡았으며, 봉명관 바로 앞에 주둔해 있는 총병 유정과 더불어 총병 두송, 총병 왕선, 총병 마림 등이 일군들을 이끌고 그 휘하로 편성되었다.

그렇게 하여 봉명관을 공격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모인 병력은 무려 사십이만.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엄청난 숫자였다.

과거에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화기에 관심이 높았던 명이었고, 지금 명군은 자체적인 기술도 엄청난 진보를 한 상태였다.

본래부터 중원의 국가가 화약을 경외시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으며, 그 화약이 마침내 북원을 멸망시키고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으니까.

그동안 양이들에게서 불랑기포니, 홍이포니 하는 대포들을 구매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해적들에 의해 남쪽의 해운이 완전히 끊긴 뒤에도 명은 포기하지 않았고, 뛰어난 잠재성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양이의 홍이포를 모방하여 자체적으로 대포를 만들어내었다.

대포만 그랬을까.

노밀총이니, 조총(화승총)이니 이러한 개인화기에 대한 과도기적 진보는 전 세계적으로 선두주자에 의해 과감하게 생략된 상황.

동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라 수석식 소총이라는 확실한 화기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전술 또한 과거에 가로막혀 답보하고 있지도 않았다.

척계광이라는 뛰어난 명의 무장은 옛날 고려가 불과 일만여 명의 병력으로 엄청난 숫자의 기마병을 말 그대로 갈아버렸던 것을 꼼꼼하게 연구했고 명의 사정과 타협하여 마침내 총병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후기형 총창방진을 만들어내었다.

기효신서에는 그런 그의 절강병법이 적혀 있었다.

척계광의 총창방진으로 양이 해적들의 내륙침탈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고, 양응룡을 패퇴시키고 발배의 난도 진압했었지.

그리하여 명과 조선의 전쟁은 우렁찬 포성과 자욱한 포연과 함께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마어마한 수의 명군이 대포를 쏘며 전진해갔다.

그러나 그만큼 많은 총탄과 포탄이 요새에서 빗발치자, 수석식 소총을 들고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던 명군들은 한여름 뙤약볕을 세 시진 동안 쉬지 않고 꼬박 받은 농부마냥 픽픽 쓰러졌다.

그들의 황색 갑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공격하라!”

양호와 그 휘하의 총병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공격 명령을 계속 내릴 수밖에 없었다.

뭘 어찌하겠는가. 저런 괴상망측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요새를 공격하는 것에는 응당한 희생이 따라야 하는 법인데.

하지만 성형요새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격하는 명군의 입장에서 이 난공불락의 성채는 도무지 어떻게 공략을 해야 할지 실로 막막했다.

맨 앞, 일차로 생성된 작은 흙 제방(프랑스어: Glacis).

이곳(Chemin Couvert)에 서 있는 조선군 총병들은 수성을 하는 입장에서 적의 대포와 총탄을 맞지 않고도 일방적인 소총 사격을 적의 총병들에게 먼저 선사해줄 수 있었다.

명군이 그 모든 피해를 이겨내고 이를 악물고 그 흙 제방을 오른다면, 이미 제방 뒤에서 엄폐하여 총을 쏘고 있던 얄미운 조선군 총병들은 모두 성 안쪽으로 퇴각한 상태였고 공격자의 입장에서는 성벽의 흉벽(胸壁, Parapet) 밑에서 환하게 노출되어 성벽에서 직사로 화력을 받아내야 했다.

악질적인 조선인들은 그 사이 깊은 해자(Cuvette)를 파 두었는데 이 해자는 장애물의 역할을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앞의 흙 제방의 재료가 되었던 것이 명백했다.

어찌어찌 이 해자를 넘게 된다면, 명군은 다시금 총기의 시대에서 냉병기의 시대로 회귀한 것마냥 사다리나 포격을 맞아 깨진 벽돌 더미를 타고 보루를 올라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히죽거리며 그들을 바라보는 조선 왕립포병대의 조란탄을 바로 면상 앞에서 맞이해야 했고.

그렇게 공격자가 일제사격을 받고 늦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면, 공성자는 다시금 그 앞의 내용을 반복해야만 했다.

실로 흉악한 구조였다.

명군의 지휘관 양호는 연경으로 온 주익상에게 크게 압박을 받는 처지라 지금 당장이라도 눈에 띄는 공로를 가지고 와야 했기에 휘하의 총병들을 재촉했다.

그러나 유정 등의 총병들은 임유관 공략의 까다로움을 들며 조금 더 여유가 있는 공략법을 제시했다.

“소장들이 몇 날 며칠을 고심해 본 결과, 저 요새를 정면으로 뚫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방으로 포위하여 성의 물자를 끊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예 거용관(居庸關) 방면으로 우회하여 적을 경략해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양호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군대를 물려, 거용관으로 향한다?

거용관은 연경 북쪽의 관문.

가뜩이나 신경질적인 주익상은 양호가 군대를 뒤로 물리는 행위를 크게 싫어할 것이었고 역모와 연관 지을 수도 있었다.

“…우회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소.”

가장 결정적으로, 결국 우회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험준한 통로를 개척하여 적지에 병사들을 보내는 것이라 보급로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끊기는 것도 각오해야 했다.

그렇다면 사방을 약탈해서 군량을 조달해야 하는데, 유목민이 아니라 정주민 황조인 명에는 약탈에 특화된 경기병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옥저의 세력도 조심해야겠지.’

그래서 결국 돌고 돌아 봉명관을 깨트리는 일만 남았다.

그러나 명군의 입장에서 원리원칙에 지극히 충실한 조선군 지휘관 김시민이 부담스러웠다.

듣기로는 그는 자신감이 넘치고 다혈질적인 무장이라 하였는데, 수성에 있어서는 원리원칙에 지극히 충실한 모양이었다.

같잖은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야습을 통해 단번에 성을 떨어뜨리려는 시도도 파훼했다.

‘이윤신이 가니, 김시민이라는 놈이 나왔구나.’

* * *

결국 11월에 시작되었던 봉명관 공략은 무려 3개월 동안 진전 없이 명군에게만 피해를 입히는 형식으로 지속되었고,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주익상은 양호를 불러들여 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웅정필이라는 자를 보내 조선 경략군 전 병력의 통솔권을 맡겼다.

웅정필은 오자마자 전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고심하더니 다음 날부터 엉뚱한 명령을 내렸다.

“어사 이게 당최 무슨 명령이오?”

“다른 총병들은 이 사람을 따르시오.”

그의 생각엔, 저 요새를 정공으로 뚫는 것은 불가능했다.

저들 또한 총탄과 대포가 오고 가니 피해를 계속 입고 있긴 하겠지만, 명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현저히 작았다.

먼저 명군이 거덜 날 판.

그렇기에 웅정필은 오히려 이들에게 총 대신 삽을 들게 만들었다.

“땅을 파라! 전투적으로 파란 말이다!”

명군들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일단 지휘관의 말에 따랐다.

조선군이 봉명관 내에서 이것을 보았는지 산발적으로 별동대를 보내 공사를 방해했지만, 수적인 열세 앞에서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마침내 봉명관을 바깥쪽에서 포위하는 거대한 참호가 만들어지자, 유정은 그 참호에 들어간 뒤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 높이만 한 땅을 파내며 각기 여러 방향에서 전진할 것이다.”

그제서야 새로운 지휘관의 의도를 깨달은 총병들은 무릎을 치며 땅을 파내 진군하기 시작했다.

김시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성곽에만 의지하지 말라, 그리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구나.”

인구수가 워낙 많다 보니, 적병들의 참호를 파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비록 여전히 공세보단 수성이 유리하지만, 이제 공성 측은 널따란 평야를 무방비하게 돌격하지 않았고 공격자는 피해를 이전보다 현저하게 덜 받은 채로 흙 제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름간의 혈전을 더 치른 김시민은 마침내 너덜거리는 봉명관에서 퇴각하자는 명령을 내렸다.

더 이상 지체한다면 포위망을 뚫지도 못하고 고사할 수도 있었다.

오만, 그리고 지원군 이만을 더해 칠만으로 시작한 방어군 또한 상당한 피해를 받아 절반으로 떨어져 있었다.

공성전에 실패하여 죽은 명군의 숫자는 그보다 네 배는 더 많겠지만 명은 논밭에서 사람이라도 자라는지 금세 빈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나라였다.

가뜩이나 총병이라는 것이 궁수에 비해 조련하기도 쉬웠기도 했고.

김시민은 미련 없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

명의 기병대가 이를 뒤쫓았으나, 후방의 요새, 금주성의 지휘관 황진(黃進)과 그 밑의 정무수(鄭茂壽) 등이 구원군을 이끌고 나와 명 기병대를 격퇴하고는 그들을 무사히 성으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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