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부얀 해전(2)
가혹함은 군대의 선결 조건이다.
먼 훗날에는 그렇지 않게 될 수도 있었으나, 지금 시대에는 일고의 여지 없이 그랬다.
서로의 화력을 바로 코앞에서 주고받는 상황에 간다면, 사방에 대포를 맞아 육편이 비산하고 총탄에 피보라가 터져나가는 그 상황 속에서 멀쩡히 정신을 유지하는 자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너도나도 정신줄을 놓고 있으면, 결국 그때 신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몸에 새겨진 기억들이 전부겠지.
그리고 그 기억들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상국 고려도 전열보병의 시대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병들의 대열을 유지시키려 노력했다.
전열을 피치 못할 이유(부상)가 아닌 순전히 겁에 질려 이탈한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자는 교수형이나 총살에 처했다.
채찍 말고 당근도 있었다.
애국심과 전우애를 고취하고, 그리고 그 감정을 증폭시키는 군악대를 이용한다든지.
같은 전열전술을 쓰는 해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선장들은 제독의 지휘에 따라 전열을 유지해야만 했고, 배가 박살이 나 조함능력이 상실되어 버리지 않은 이상 사사로이 배를 돌리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저기 가혹하기로 유명한 군대 기풍을 가지고 있는 유럽 국가들(예를 들면 프로이센)마냥, 동료들이 병사 하나를 자신들의 대열을 통과할 때까지 채찍이나 곤봉을 때리는 곤틀릿(Running the gauntlet)까지는 아니었지만, 태형 또한 필수 불가결했다.
그것은 조선도 마찬가지.
그러니 이윤신이나 원전 같은 장수들이 병마를 잘 조련하는 것도 조련당하는 병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가혹하다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전투에서의 부드러움과 유함이 필요가 있는가.
병사들보고 평소 그들을 다독이기만 하다, 군대가 무너져 병사들이 잡혀 죽거나 필사로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내버려 두는 지휘관과 칼날 같은 성격을 가진 지휘관이지만 그 칼날이 기어코 적의 숨통을 끊어버릴 수 있는 지휘관 중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백 명 중 백 명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승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존중받는 지고의 가치이며 다른 것은 오로지 부차적인 일일 뿐이다.
따라서 조선의 지휘관들과 수병들은 이미 단종진을 펼치고 있는 적 함대에게 단횡진을 펼치다 선두의 기함이 가장 빨리 나아가며 후대의 범선들은 추행진을 이루어 돌격하라는, 사실상 자살 행위인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도 덜덜 떨면서도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래도, 선두에는 기함이 있었기에.
기함, 고려국에서는 불굴함이라 명명된 가급 전열함은 이윤신의 기함이 된 후에는 충무라 재명명되었다.
칠십여 문의 대포를 장착한 충무함의 선미루에는 여전히 이윤신과 이순신이 꼿꼿이 서 있었다.
― 뿌드득
이순신은 군화 밑에 마찰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미리 깔아놓은 모래가 밟히는 감각이 들었다.
잠시 후에는 저 모래가 피로 물들 것이다.
― 몸을 고정하라!
갑판장이 소리치고, 병사들이 밧줄이나 난간 혹은 튀어나온 물체를 잡았다.
곧 있으면 적의 포격 사정거리에 들어온다.
대놓고 단종진을 짜고 있었던 저들의 화망에 먼저 다가가는 만큼, 추행진을 짜고 돌격하는 조선 해군은 한 발의 포탄도 쏠 수 없을 테고, 저들의 함대는 조선의 함대를 먼저 일방적으로 포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은 힐끗 이윤신을 바라보고는 다시금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이윤신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았다.
그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고, 섬길만한 주군을 만나고, 우수한 성적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유학을 떠나 최고의 사관학교에 다니고, 그곳을 엄청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하더라도.
다시 돌아와 주군에게 신임을 받고, 조선 최고 서열의 무장이 되었더라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맹신하지 않았다.
그는 남에게 엄한 것 이상으로 자신에게 엄했으며, 모든 면에서의 완벽을 추구했다.
그래야만 저들이 산다.
사로(死路)를 찾아 들어가는 듯한 선두의 전열함에서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더블린 해전 이후, 전열전술은 몇 가지 개량이 있을지언정 여전히 최고의 전술로 여겨졌다.
그러나 제아무리 전투의 형식이 전열을 이루어 싸우는 것이라도, 그 전열을 이루기 전까지의 행동은 모두 지휘관의 재량이었다.
어떤 전열을 이룰지에 대한 판단도.
적이 함대의 수적 우세를 가진 이상, 일반적으로 주도권을 내주고 흘러가는 전술은 아군의 패배를 담보하는 것과 같았다.
그는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일부러 풍상(風上)의 위치를 내주었다. 저들은 풍하(風下)에서 단단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측풍의 방향(Weather Gauge)은 거의 대체로 풍상이 유리하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등지는 것은 공격의 주도권을 점유하는 것이며, 아군 포격 시에 생기는 포연을 상대적으로 빠르게 없애 재조준 시의 정확함을 올리며, 함체를 직접적으로 타격하여 피해를 입히고자 하는 교리(주로 고려)에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이윤신은 고려에서 육해군 교육을 모두 받았고, 따라서 공격적인 해군교리에 의해 풍상을 선호하는 지휘관이라 분류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적이 대놓고 바람을 내준 상황을 보고 든 생각은 오히려 경계심이었다.
‘이근수, 조르제. 저들은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다.’
저들은 분명 이윤신의 선택을 강제하려 들고 있었다.
풍상이라는 먹음직스러운 미끼와 함께.
풍상이 일반적인 경우에 전열 전투 시 유리하다고 했지만, 풍하가 모든 면에서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함체 말고 돛대를 공격해 적의 기동성을 묶고 포격을 가하고자 하는 교리(주로 프랑스)에서는 풍하를 선호했고, 풍하의 위치가 풍상보다 상대적으로 전열을 더 잘 유지할 수 있었으며 위험하다면 적의 기동성만 저지하고 도망가 결전을 회피할 수 있는 선두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사공이 많고, 서로를 믿지 못한다. 수적 무리의 한계는 제아무리 저들이 많은 배를 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시간에 극복하지 못할 터.’
앞으로도 극복 가능한지도 의문이긴 했지만.
다원적 지휘체계, 그리고 해적이다 보니 해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허술한 진형 유지, 마지막으로 도망갈 곳을 찾는 본능 등의 이유로 저들은 풍하에서 전열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할 것이었다.
그러니,
[작계로는 모든 것을 가정할 수 없다. 전장의 상황은 가변적이니 판단은 빨라야 하고, 결정은 민첩해야 한다.]
휘하의 지휘관들에게는 교범을 준수하라 그렇게 명을 내렸지만, 그 최고 지휘관은 항상 유동적이어야 했기에 이윤신은 적의 진형과 기세, 그리고 여러 가지 자연환경에서 순식간에 전술을 생각해 냈다.
그는 이곳까지 오며 안고 있던 바람을 한 줄기도 버리지 않고 도리어 닻을 전부 올려 속도를 더 내며 거의 돌격하는 단종진에 가까운 추행진을 펼치고 적들의 단종진에 달려들었다.
* * *
“…이 무슨?”
망원경으로 적을 바라보던 해남왕 조르제 다 가마(Jorge da Gama)는 의문을 내뱉었다.
이미 짜 놓은 전열에 전열을 짜지 않고 들어오다니.
“병신같은 짓!”
보통은 저들도 서서히 속력을 감속하고 길게 늘어선 단횡진에서 진을 구성하는 개별의 함선이 한 방향으로 선회하여 단종진을 이룬 뒤, 그 상태로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왔을 것이다.
그다음, 사실상 큰 피해를 주기 어려운 중포나 컬버린 대신 옹포나 카로네이드가 맞을 만한 거리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렸을 것이었다.
그게 고전적인 전열전술이다.
종사 대형을 피함으로써 일방적으로 공격(Raking fire)당하는 상황을 지양하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연횡국이 유리하긴 했다.
아무리 소선이라도 저들의 대형선을 못 잡을 이유는 없었다.
대포의 문수와 함체의 크기는 훨씬 차이가 나겠지만 대포의 위력은 동일했으니까.
두 개의 배가 하나의 배를 선박의 좌현과 우현에서 포위한다면,
소위, 고려의 음식인 겹빵(샌드위치와 버거류를 총칭)마냥 빵이 고기를 위아래로 내리누르는 형세가 된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너무나도 빠르게 다가왔다.
오히려 뾰족한 진을 펼치며 다가오니 정말, 일고의 고민조차 없이 돌파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조르제는 서둘러 휘하의 함선들에게 포격을 명령했다.
“쏴라!”
저 반대편의 해적들에게서도 포연이 뿌옇게 바다를 메우는 것이 보였다.
일방적으로 포격이 가능한 상황.
저들의 선두 전열함은 이제 수많은 컬버린의 포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파괴되지는 않을 것이다.’
둥근 쇠구슬에 불과한 포탄으로는 정말 화약고에 운 좋게 들어가지 않는다면 사실 함대함전에서 곧바로 효과적인 피해를 주기 힘들다.
상대방이 대형함일수록 더더욱.
한 개의 포탄으로 저 거대한 덩치를 어떻게 제압하겠는가.
그렇다면 도망가면서 사거리로 농락해 가며 피해를 누적시키거나, 지금처럼 상대방이 속도를 품고 돌격해와서 도망이 불가능하다면 최대한 많이 쏠 수밖에.
그리고 그는 선두의 기함을 거동 불가로 만들면 사기적 측면에서나, 진형적 측면에서나 저들의 돌진을 저지할 수 있다 판단했다.
“뭣들 하냐! 어서 손을 움직이지 않고?”
조르제는 미친 듯이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풍하를 점한 이상, 포각은 미묘하게 상승해 있었으니 해적들이 잘하는 방식을 써야만 했다.
“돛과 삭구(索具, 로프나 사슬)를 겨냥하라, 쏴!”
그러나 원형탄(Round Shot)으로 돛과 삭구가 잘 맞겠는가.
한차례 눈먼 탄들이 허공을 휘젓자, 조르제는 곧바로 지시를 다시금 수정했다.
“사슬탄(Chain Shot)! 봉탄(Bar Shot) 전부 가져와!”
― 콰광
조르제의 명령에 특수탄들이 화약에 의해 점화되어 날아갔다.
모습으로 인해 원형탄보다는 그 속력이 느리고 공기저항 또한 상당했던 지라 위력 자체는 약화되었지만, 특수탄들은 특수탄들만의 강력함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돛대를 부수지는 못했다.
최고의 전열함들은 그만큼 큰 덩치를 운행하기 위해 돛대의 둘레가 엄청나게 넓었고, 계속하여 더 넓어져 왔기에 현재에 이르러서는 밑동에 원형탄 수십 발을 맞아야 쓰러질 정도였다.
특수탄 정도로 이것에 효과적인 피해를 줄 순 없었다.
게다가 고려에서 만든 명품 군함들은 돛대에 철제로 보강을 하기도 했으니 더더욱.
그렇다면 돛과 삭구가 남지 않겠는가.
“와아!”
운이 몹시 좋았다.
두 번째 발사한 사슬탄과 봉탄에 의해 돛이 찢기고, 줄이 끊어지자 선두의 전열함의 돛이 바람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하고 아랫부분이 요란하게 펄럭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르제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근수가 그렇게 경계를 하는 놈이라더니.
지금 보니 육지에 있어, 바다를 잊은 놈이 아닌가.
“네놈, 건방진 선택을 하였구나.”
* * *
적의 사격 실력이 꽤나 출중하다.
그리고, 자신들은 최선두에 있어 모든 피해를 가장 많이 입고 있다.
“…….”
두 번째로 발사된 특수탄의 피격으로 인해 돛이 손상된 것을 바라본 이윤신은 그러나 별 동요가 없었다.
선미루에 있던 이순신은 갑판으로 내려가 정말로 온 사방에서 날아오는 듯한 포탄과 그에 따른 파편을 피하려 선박 바닥에 엎드린 수병들을 격려하고 다시금 돛의 밧줄을 교체하여 대에 매달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 콰드득
사슬탄이 바로 옆에 위치한 목제 난간을 부수고 지나갔다.
나무 파편이 튀어 홍철릭의 옷자락을 살짝 찢는 것이 느껴졌다.
두어 걸음을 서둘러 냈다면 분명 죽었을 수도 있을 만큼의 상황이었지만 이윤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원수, 어찌하오리까?”
수많은 포탄이 이윤신 근처로 날아드는 광경을 보며 모골이 송연해진 이순신이 거의 박살 난 계단을 겅중 뛰어오르며 물었다.
“도달 가능하겠는가?”
“예… 하오나 대감, 충분한 속도를 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가 후열의 속도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 찌이익
그 와중에도 다른 사슬탄 하나가 돛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순신의 절박한 목소리에도 이윤신은 담담하게 내뱉었다.
“괜찮다. 예상하고 있었다. 도달 가능하다면 되었다.”
맙소사, 그 초연함이란.
입부 이순신이 처음 이윤신의 작전을 바라보았을 때는 일견 무모해 보였다.
단종진을 가른다.
그리고 그 가른 절반을 먼저 상대한 뒤, 다른 제대를 상대한다.
적 전열의 붕괴를 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수적 열세를 순간적으로 없애는 국지적인 전략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작전이 온전히 펼쳐졌을 때의 형세는 정석적이라 평가할 수 있었지.
하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렇게 일방적인 포격을 얻어맞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무모하다고밖에 형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처음 피해를 누적당해 사람이 상하고 범선의 선체가 뚫리더라도 속도만큼은 잃지 않고 저들의 가운데를 창날처럼 가르고 들어갔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의 형세는 창 끄트머리가 무뎌진 것과 같지 않은가?’
이렇게 기함이 얻어맞고 있는 상황.
다른 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이순신은 후미의 선박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
바로 뒤의 배는 적들의 인식과 화력이 선두 기함으로 집중되는 바람에 오히려 덜 상했지만, 그 뒤의 배들은 마찬가지로 이곳저곳에 피해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아는 것을 이윤신이 몰랐겠는가.
끝까지 포격을 몸으로 받아내던 전열함이, 드디어 관성이 느려지는 탓에 속도가 현저히 떨어질 조짐이 보이자, 이윤신은 명령을 내렸다.
“신호기를 올려라! 아직 난전에 들기 전이니 충분히 인식할 터. 서둘러라!”
포효와 같은 목소리에, 수병들은 이를 악물며 몸을 움직였다.
[함대 분리.]
[빠른 것은 그대로 찢으며, 느린 것은 나를 따르라.]
* * *
선두 기함으로부터 두 번째 뒤에 위치한 전열함, 충의호는 수사 이운룡이 탄 배였다.
함대가 둘로 나뉜다면, 둘밖에 없는 고려의 전열함 사정상 부기함으로 활약할 운명을 지고 있었다.
제대 분리에 대한 원칙은 이미 이윤신이 쓴 교범을 통해 달달 외우고 있었다.
신호기를 매단 기함이 왼쪽으로 꺾었다.
속도가 확연하게 느려진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 함과, 그 건너의 뒤 함들이 대열에서 이탈해 제대를 꾸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홀수 번의 배가 따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진작부터 자신의 함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피해를 객관적 수치로 파악하라고 누누이 교육받은 덕에, 원래의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은 아직 돛이 상하지 않은 이들이요, 기함을 따라 새로운 진형을 짠 자들은 돛이 상해 느려진 이들이었다.
두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그러나 바다 위라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몹시 빠르고 신속하게 제대가 둘로 나뉘는 장엄한 광경에, 이운룡은 온몸에 전율이 돋았다.
그동안 했던 모든 훈련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열을 유지하는 것도 아닌, 전열을 흐트러뜨리는 것도 아닌, 정확히 피해를 입은 함선만 따로 제대를 꾸린다니.
강력한 규율과 훈련, 그리고 끔찍할 정도의 자기객관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예 불가능한 전술.
적 함대는 멀리서 보아도 얼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해적들은 절대로 불가능한 전술이니까.
누가 전열에서 이탈하여 포탄을 덜 맞고 싶지 않겠는가?
저것은 지금 이 거리까지 모든 피해를 홀로 서서 받으며 앞으로 나아간 지휘관이 명령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절박할 정도로 설득력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본제대의 최선두에 놓인 이운룡은 지금까지 올곧이 피해를 받으며 버티다가, 드디어 이탈한 지휘관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윤신은 서서히 함대 진행 방향에서 왼쪽으로 제대를 이끌며 왼쪽에서의 포격을 대신 맞아주지 않는가?
속도를 잃은 우리들은 이렇게 천천히 맞으며 나아갈 테니.
너희들은 적의 중앙을 찢어다오.
― 까드득
이미 신호기가 매달릴 자리가 사슬탄으로 인해 박살 난 상황, 기함에서는 더 이상의 명령이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상관의 마지막 명령에 이운룡은 이를 악물었다.
적 카로네이드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괜찮고 말고, 이제 다 왔으니 조금만 참아라!”
― 콰앙
― 으아악!
갑판 위, 수병 하나가 포탄에 직격당해 죽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불운한 그를 제외한 피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대구경의 화포는 몹시 아프지만, 이미 돛이 멀쩡한 전열함은 딱 한 차례의 카로네이드 포격만 받았을 뿐 속도를 거의 잃지 않았으며.
곧바로 적의 허리를 갈랐다.
“꽉 잡아!”
충각을 실시한 것은 아니었기에 배의 중앙이 아니라, 선수를 박살 내고 들어오는 우락부락한 전열함은 단순히 체급 차이로만 적 슬루프 앳 워를 단번에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반파시키고는 곧바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감, 이 광경을 원하셨습니까?’
이운룡은 맞은편의 이윤신이 탄 충무호를 찾았다.
저 너머, 잘 보이진 않지만 반대편 전열함의 선미루에서 잘했다는 듯한 미소가 보였다고 그리 생각이 들었다.
이운룡은 군례로 화답하고는 휘하의 수병들에게 목청을 높였다.
“복수의 시간이다!”
정확히 일치한 사선.
그 사이에 불운한 적의 프리깃을 두고, 두 전열함이 나란히 전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