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종과 연횡
[계묘(癸卯, CE 1603)년 1월.
이근수와 그가 이끄는 해적 무리가 호남을 어지럽힌 것도 모자라 이번엔 영남을 다시 범하려 들었으나, 백의종군하던 전 통제영 우후 원전이 조그마한 선박들을 가지고 거짓되게 놀라 패퇴하는 척하며 원수 이윤신이 사방에 포와 군함들을 두고 매복한 칠천량으로 적을 꾀어 들어오니 마침내 큰 피해를 입혔다.
상국에서 교육받은 적장의 능력과 판단이 실로 재빠르므로 기습당해 혼미한 와중에도 상당한 수의 병력을 보전하여 도망가니, 원수 이윤신이 아뢰기를 ‘이근수가 비록 본래의 난폭함과 자만함, 그리고 상국에서 군함을 산 아국 함대의 현황을 몰라 매복계에 걸려들어 패퇴하였으나 그들의 거점이 상한 것은 아니니 언제든지 다시금 조선을 위협할 것입니다.’ 하여 상 또한 그 말에 원정을 준비토록 하셨다.]
* * *
“젠장, 젠장!”
이근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당밀주를 들이켰다.
“씹어먹을 새끼… 끝까지!”
술이 들어가니, 왼쪽 눈의 상처가 더욱 아파오는 것 같았다.
그는 안대 밑에 붉게 핏물이 배어 나오는 상처를 거칠게 비볐다.
엄청난 격통이 몰려들었지만, 어차피 잃어버린 왼쪽 눈이니만큼 이제 이근수에겐 미련보다는 끔찍할 정도의 고통에 걸맞는 복수심만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끝까지 내 앞길을 막는구나!”
― 쨍그랑
던져진 술병이 산산조각나며 그 안의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여전히 근수의 분노는 해결되지 않았다.
전혀.
오만한 그의 성정답게 지극한 자존감이 온몸에 깃들어 있는 그로서는 자신의 인생에서 수차례 패배감을 안긴 존재를 도무지 좋게 생각할 수 없었다.
비록 자제감의 사관학교가 해군부와 육군부로 나뉘어져 있지만, 여러 이유로 매번 유학생을 보내기 어려운 번국의 사정상 두 곳을 모두 수료하는 자들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두 곳을 모두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는 자는 전례가 아예 없었지.
그래.
이근수는 그자, 조선 촌놈 이윤신을 질투하고 있었다.
비단 그 능력에 대한 시기와 질투 말고도 다른 일도 있었다.
그 특유의 도덕에 대한 집착이란.
이근수가 후배의 돈을 갈취하고 그것도 모자라 육체적인 훈육(폭행이라 부른다.)을 행사하고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를 가까이할 때마다 상부에 보고하여 계도를 하려 한 자도 그였을 테니까.
듣기로는 그놈, 이윤신은 조선의 북방에서 육군으로 근무한다 했었지.
그래서 저번에도 그랬었고, 이번 약탈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기어코 나타나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이제는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지나 흐릿하게 바래어진 과거의 생도 생활, 그 와중에 여전히 선명한 그 깐깐하고 엄중한 얼굴이 떠올라 그는 다시금 새로운 술병의 병마개를 열었다.
이근수는 조선에서 패한 뒤 그의 거점, 톤도 제도의 마닐라 항구로 돌아와 곧바로 방 안에 처박혔다.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은 술을 퍼마시고 있는 그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해적들은 단일한 위계질서에 있는 족속들이 아니다.
이근수가 수십여 척의 배를 통솔하는 해적 세력의 두목이라고 하나, 이들 조직은 마치 중세의 느슨한 봉건주의가 훨씬 더 어수선하게 결합된 형태와도 같았다.
금화와 재물 같은 이해관계에 따라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는 그런 존재라는 말이지.
이근수는 능력만큼이나 초창기의 운이 좋았다.
그가 갑자기 큰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전형적인 동아시아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컸다.
때마침 동아시아계 해적들은 서로 난립한 상황이었으나 특출난 우두머리가 없어 서양의 해적들에게 무시를 받곤 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근수는 해적들 자체의 필요성에 따라 두목으로 인정받아졌다.
그의 거점도 마찬가지였다.
마닐라의 옛 명 조공국 방가시국은 수많은 해적 세력과 그들 자체의 내란 등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제아무리 칭왕을 하고 있다 하나, 이들은 여전히 행정력도 별 볼 일 없는 토착 세력에 불과했고 화기를 잘 쓰지도 못하는 미개한 자들이었지.
명으로부터의 지원은 바닷길이 막힌 이후부터는 불가능했고.
그리하여 그 토착민들을 도륙하고 해적거점을 세운 일은 힘들었을지언정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반면 이번 패배는 그에게 있어서 상당히 치명적인 일이었다.
한탕을 하기 위해 원정을 가자고 한 것도 그였으며 패배를 한 것도 그였다.
이에 크게 동요한 부하들이 수런거리며 그를 헐뜯었다.
해적이라는 것들은 정말로 인간 말종이라 언제든지 등 뒤에 칼을 휘두를 수 있는 놈들.
유명한 해적 선장들도 선장실 안에서 잘 때마다 매번 몸을 뒤척이며 선상 반란을 염려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정도로.
70여 척 중 스물다섯 척이 불타 완파되었지.
다섯 척은 겨우 먼 바다로 도망했으나 한동안 수선을 해야 했고.
물론 전력의 과반수는 온존했으나 농사나 상업을 통해 가치를 사실상 생산하지 않아 뒤가 없는 해적들은 이렇게 한 번 세력이 위축될 때마다 다시금 재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흥, 내가 누구냐. 맨몸으로 이만큼 세력을 성장시킨 사람이다. 패배는 병가지상사라 했으니 나는 이번의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 패배는 방심으로부터 기원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닐라 항이 위치한 루손섬과 그 주변부의 복잡한 지리를 통해 고려 해군을 물먹인 이근수는, 역으로 자신 또한 복잡한 조선 남부의 지형에 물먹을 수 있다고 언제든지 생각했어야만 했다.
‘…….’
그러나 사실 그도 지금 상황이 예전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지만 같이 수학했던 이윤신이 늙은 만큼 자신 또한 젊음과 생명력, 그리고 야망이 육신에서 차츰 떠나고 있었다.
비단 그의 육신뿐인가.
세상도 달라지고 있다.
명을 비롯하여 이번에 가 보았던 조선이나 백제 등은 이제 이전과는 달리 확연하게 화약 무기를 받아들인 상태였으며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는 해적들이 전혀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그리고 국가들의 생산력이 강화되어 계속 함대를 건설하고 바다로 뻗어나가려 시도한다면 해적들의 황금기는 순식간에 종결되어지겠지.
게다가.
‘조선은 고려의 배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한 숫자의.’
과거, 그는 그것을 본 적이 있다.
외륜선(外輪船)이라 하는 그 기범선(機帆船)은 바람의 힘은 물론이고 증기기관의 힘까지 같이 쓸 수 있어 과거에 뱃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무풍지대도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었다.
비록 양측에 거대한 수차를 달고 있어 외부의 공격에 취약하여 군선으로서의 한계는 있어 보였지만, 이근수는 그 배를 처음 보았을 때 과거의 조국이었던 제국의 산업에 대한 경외의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조르제도 자신의 한계를 알아 그런 선택을 한 것이겠지.’
프랜시스 그놈도.
누산타라의 해적들은 지금 더없이 강성하지만 생각이 있는 자들이라면 이제 그 영화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동쪽뿐만 아니라 이제 서쪽에서도 위험이 다가왔다.
수에즈에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대운하가 파여진 뒤로 해적들은 예전과 달리 인도를 자유롭게 누비지 못했다.
양측에서 서서히 목줄을 죄어오는 상황.
말 그대로 교수대에 걸려 썩어가는 자신의 운명을 상상하려니 근수는 고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근수가 자신의 거처에서 두문불출한 지 사흘째가 되었을 때 마침내 일이 터졌다.
“그릇된 판단을 한 두목을 죽이자! 그의 재물을 빼앗고 형제들과 나누자! 다시금 공정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자!”
몇 명의 해적들이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밤중에 횃불과 권총, 그리고 환도를 들고 두목의 거처로 다가간 이들은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고문당한 시신 위에 주저앉아 있는 이근수와 사방에 매복한 해적들에 의해 벌집이 되었다.
다시금 휘하의 세력에 대한 장악력을 확보한 이근수.
그러나 이번의 세력 다툼으로 인해 또 한 번 손실을 입은 것은 분명했기에 그는 마침내 생각을 정리해 명의 경사로 서신을 보냈다.
두 달 뒤, 이근수를 마니왕(馬尼王)에 봉한다는 사신이 마닐라에 찾아왔다.
* * *
명.
경사.
자금성의 정전에서는 명의 대소신료들이 모여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사실 언쟁이라기엔 한쪽으로 의견이 치우쳐 있는 상황이었지만.
“황상의 결단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찌 저 악랄한 해적 놈들을 품으려 하시는지요?”
“그자들이 옛날에 관리의 목을 베어 조정을 욕보이고 능멸한 것은 잊으신 겝니까?”
“민심 또한 상당히 요동칠 겁니다. 불 보듯 뻔한 일이지요!”
“저 수적들은 백성들을 약탈하고 겁간하여 마침내 비참하게 죽이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니 실로 당연합니다.”
“양적{楊敵, 양응룡(楊應龍)}의 난이 제대로 진압되지 않고, 그 잔당들이 운남으로 도망쳤소. 운남은 패아지근 바잡랄와이밀(보르지긴 바자르오르미) 이후 아국의 조정에 매번 불만을 가지는 지역이니 양적이 그곳에서 세력을 규합한다면 운남(雲南)은 물론이고 귀주(貴州)와 파주(播州) 모두 위험할 것인데….”
“발배(哱拜, 푸베이)의 난이 일어났던 영하부(寧夏府)는 또 어떻구요!”
그러나 떠들어대던 명의 관리들은 당금 명의 천자인 주익상이 정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입을 꾹 다물고는 예를 올렸다.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주익상이 옥좌에 자리를 앉고는 말했다.
“수보(首輔)는 앞으로 나와 재신들에게 짐의 결정 사항을 알려라.”
“흠흠….”
주익상 대신 신료들의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한가득 받게 된 내각수보대학사 신시행은 몇 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포도아인 조루제(曺漏諦, 조르제)를 해남왕에, 고려인 이근수를 마니왕에 봉하니 이들 함대의 사략권을 보장하며 충의로서 조정의 군무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그 말을 듣고 엎드리며 고했다.
“폐하, 수적들을 번왕으로 분봉케 하심은 당장의 근심을 덜어내는 방책일 수는 있으나 훗날 더 크게 곪아 터질 상처를 만드는 것이옵니다.”
“…….”
주익상은 무슨 일인지 물끄러미 석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조선과 화친을 맺어 서로 해적들을 토벌하는 것에 골몰한다면 이는 훗날 황상의 대계에도 적지 않게….”
― 쾅
옥좌의 팔걸이를 내리치며 석성의 말을 끊은 주익상이 이글이글 불타는 분노를 보이면서도 입술을 비틀었다.
“화친을 주장하는 자가 간자인지 확인해 보아라, 짐이 저잣거리에서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화… 황상!”
“장거정, 그놈 또한 앞으로는 입바른 소리를 하다 뒤로는 온갖 더러운 일을 꾸미고 있었지. 네놈 또한 저 조선 놈들이나 고려 놈들에게 많은 돈을 받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렷다. 금의위!”
“예, 폐하!”
“이놈을 끌고 가라. 짐이 친히 조사할 것이 있도다.”
주익상은 성난 듯 자신의 등 뒤에 시립해 있는 금의위를 불러 석성을 끌고 가도록 지시했다.
― 으아아아!
비참한 몰골로 질질 끌려가는 석성을 바라본 대신들은 이제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뿐 아무도 나아가 말하려 하지 않았다.
주익상은 환관 하나를 불렀다.
황제의 뜻을 짐작한 환관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무언가를 공손하게 바쳤다.
익상의 손에 말려진 시가와 비슷한 것이 올려지자, 환관은 다시금 작은 가위로 그 시가의 끝을 자르고 불을 붙여주었다.
― 후우
정전에서 수많은 신하가 바라보는 와중에 연초를 피다니.
그러나 그 아무도 뭐라 하는 이가 없었다.
주익상은 몇 번 연초의 연기를 빨아들였다.
이 연초는 마는 방법은 고려의 시가와 비슷하지만 내용물은 완전히 달랐다.
이제 명인들은 고려의 담배 대신, 그들의 토종 대마잎을 이용한 연초를 즐겨 피우고 있었다.
옛 당나라 시대 승려인 잠연의 유마소기에는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었다.
주익상은 이 말을 중원에서 나온 물산이 중원인들에게 이롭다고 선전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등장시켰고 이에 익상은 그 선전으로 고려의 담배 판매로 인한 은의 유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다.
효능 또한 확실했다.
아프거나 우울하거나 할 때 이 대마 연초를 피운다면 부정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머리는 총명해진다.
지금처럼.
익상은 대마의 향에 취했는지 아니면 이제는 신료들을 달래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는지 친절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짐이 듣기론 대국의 외교란 작은 나라들의 뭉침을 와해시켜 무너뜨리는 것이라 들었소.”
“…….”
“조선은 남쪽의 백제, 그리고 북쪽의 옥저와 함께 남북으로 합종(合從)하여 우리를 위협하지.”
형세상 정말로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연횡(連橫)하여 이에 대항해야 하지 않겠소?”
명은 고려에 지극한 악감정을 품고 있는 북왜와 통하는 바가 있었으며 이제는 남쪽의 해적 세력들을 품어 더욱더 합종국들을 상대로 한 공동전선을 꾀하려 하고 있었다.
“짐이 생각건대, 지금 저들의 상국이라는 고려가 지극한 국난에 빠져 번국들에게 소홀히 하는 이 순간만이 아국에 주어진 유일한 기회이니 이때를 놓쳐 조선을 정벌하지 못한다면 아국은 천년의 우환거리를 옆에 안고 살게 될 것이오.”
그는 옥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아래로 내려왔다.
“경들은 지금이 지극한 난세임을 이해하시오. 인과 의, 덕으로 사해를 평정할 순 없소. 오로지 이해관계에 대한 지극한 성찰만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바.”
신하 하나가 떨리는 손으로 주익상이 건넨 연초를 공손하게 집어 들고는 그것을 피웠다.
“조선은 멸망되어야만 하오.”
당 고종 이치가 저 반도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것처럼 그 또한 새롭게 중화의 패권을 오롯이 세워야만 했다.
그래야만, 저 머나먼 대륙에서 용틀임하고 있는 존재를 확실히 노려볼 수 있다.
왕수인이라는 옛 학자는 명이 그 천명을 잃어버렸다고 함부로 혀를 놀렸지.
그 최후는 비참했지만 도리어 그런 충격적인 말로 인해 명의 천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낀 상태였다.
인정하지 않았지만, 전국옥새가 저들의 손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그들의 위신에 큰 흠집을 내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제 그들이 천명의 수호자가 아니라 도전자라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했다.
‘고려….’
한나라부터 존재해온 지긋지긋한 중화 천오백 년의 적.
주익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