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
최초의 의무교육령은 9세기 초, 카롤루스 1세 마그누스의 교육령이라 한다.
그 후, 유럽에서는 배설이나 루터 등의 개신교 개혁가들이 의무교육을 주장하였지.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 교육령은 가장 먼저 계몽주의를 개화하고 그것을 발전시켜온 고려에 의해 선포되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천 280년(CE 1555), 고려의 3대 민선 시중 홍정의의 제국 교육령 반포를 들 수 있었고.
그 뒤 교육 정책은 보완에 보완을 거쳐, 마침내 구체적인 의무교육제도로 나타났는데, 개천 320년(CE 1595) 10대 민선 시중 박상기에 의해 세계 최초로 ‘국가적 단위’에서의 초등 기본의무교육이 고려에서 실시되었다.
그전까지의 교육은 관직이나 공직에 나아가는 자들이나 상행위를 하려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대다수 향촌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향촌의 농민들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까닭은 정부의 정책이라기보다는 그저 고려글이 읽고 쓰기 편했던 데다 조보와 서책의 인쇄가 활발했던 덕분이 크겠지.
산업혁명 이후 과학과 기술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 한번 대두되었고, 국가의 크기가 커 나감에 따라 기존의 교육 체계로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수의 인재들을 선발하지 못하는 상황.
비록 최고교육기관인 국자감이나 대학들은 존재했지만 이들은 이미 학문을 배운 자들이 더욱 깊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들이었고, 어린 꼬마아이가 학문을 배우는 기관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그렇기에 고려는 기존까지 학생들이 훈도를 구해 알음알음 행해 왔거나 종교 단체(제국교, 불교, 고려정교회, 고려성공회 등의)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 초등 교육의 현장 대신 조정에 의한 공교육제를 도입했다.
조정이 나서서 고려 전 국토의 인구 밀집도 등을 계산하여 학교를 세운 것.
교무부는 학교의 관리와 교과과정, 교수법에 대한 책임을 맡았고 지방의 행정기관 또한 학교 설치의 의무와 교육감독권을 맡았다.
고려의 정부 부처 중 가장 할 일이 없어 꽃에서 꿀을 빠는 꿀벌과 같다고 다른 공직자들에게 빈축을 사던 교무부는 하루아침에 가장 일이 많은 재무부와 내무부만큼이나 지옥 같은 부서가 되었으니 그 업무의 양을 알 수 있었지만 그만큼 의무교육은 중요했다.
예산도 엄청나게 들었다.
전 국가적 단위의 정책이다.
그리고 얄궂게도 고려는 땅이 너무나도 넓었다.
인구수도 이제는 상당하여 민선 시중 박상기의 재임인 개천 320년에는 남려의 인구수가 6,591만여 명에 달했고, 연방주들의 인원수는 도합 1,887만여 명에 달했으니 국가의 덩치 자체가 이전과는 비교하기 어려웠다.
이 넓은 땅에 파견할 훈도, 아니 이제는 선생이라고 불릴 존재에 대한 임용과 봉급을 책임져야 했고, 학교라는 시설물을 지은 후에도 그것을 유지보수해야 했으며, 교재와 기타 여러 가지 물품들도 계속 원활하게 공급해야 했다.
정말이지 돈 먹는 하마라는 해군 건함과 철도 부설만큼의 자금이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였다.
게다가 고려는 초등 교육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상교육을 추구하고 있었던 상황.
그러나 조정은 다른 분야에서의 예산감축은 있을지언정 공교육제의 기틀을 포기하진 않았다.
초유의 재난 사태가 터진 이후에도, 화산의 여파에 있는 곳들을 제외한 곳의 학교들은 쉬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아동 취학의 의무를 부여받은 국민, 즉 부모들은 아이들이 특정한 나이가 되면 학교를 보내야 했다.
반발이 없진 않았다.
자영농에게 자식들이란 가계의 귀중한 노동력으로, 고된 논과 밭의 일을 시키지 않더라도 집에서 여러 가지 일을 도와줌으로써 부모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는데 초등의무교육으로 강제적으로 학교에 보내는 것은 그들에게 상당히 불친절한 정책이었으니까.
그러나 고려인, 그리고 이민계 중 주류인 조선계 고려인들이 대체 누구인가.
삼한의 영토에 살 때부터 입신양명에 대한 아주 근원적인 욕망이 있는 자들이 아니던가.
게다가 자신의 자식들이 집안일을 하며 부모를 도와준다 하더라도 남들이 자식을 학교에 보내 잘 키우면, 어딘가 부러움이 드는 것이 부모라는 존재의 마음.
공교육은 분명히 고려의 토양에 그 뿌리를 잘 내리고 있었다.
* * *
고려의 시중, 김태석 또한 자녀를 두고 있는 학부모였다.
병무상서와 외무상서를 불러놓고 가진 사적인 식사 자리에서 태석은 한바탕 투덜거림을 뱉어내었다.
국난이라 지금 앞에 올려진 식사가 이전보다 확실히 부실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정녕당의 숙수는 고려 제일의 요리사였고 소박한 재료로도 뛰어난 맛을 낼 수 있었으니까.
소박한 두부조림과 고깃국, 생선구이 등으로도 충분히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불만은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다.
“지금 사해(四海)의 꼴은 마치 담임 선생이 없는 동안 서로 다투어 대는 사춘기 아이들이 아닌가?”
팍스 코리아나가 흔들리자, 세상은 혼란이 찾아왔다.
고려의 자의식 과잉은 아니었다.
고려가 재난에 흔들린다 하더라도, 세상의 어느 국가든 고려의 패권에 도전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마치 쥐들이 모여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걸 모략을 꾸미는 것과 같아,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행한다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 누구도 앞장서서 총대를 메기 싫어했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니까.
저기 한때는 찬란하게 빛났지만 지금은 완전히 이류 열강으로 물러난 포르투갈의 전례를 따르기 싫다면 말이다.
그래서 유럽의 국가들이 뭘 했느냐고?
태석의 표현대로, 한 명의 중요하며 권위 있던 중재자가 복통을 호소하며 변소에 간 사이, 사춘기 아이들은 서로 두 패로 나뉘어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사건의 증폭이야, 최근 이 화산 사태로 인해 전 세계적 기근이 들었던 것이 원인이겠지만 전쟁 자체의 기원은 과거부터 기원한 프랑스―신성로마제국의 전쟁이겠지.
프랑수아 1세와 마르가리트의 이혼 문제에서 시작된 전쟁은 이혼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후계자와 프랑수아 1세의 다른 후계자 간의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것에 때마침 신성로마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이 프랑스의 편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명목상은 프로이센 공국의 종주국이지만 그 봉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신성로마제국의 손을 들었으며 그 폴란드와 사이가 좋지 않은 러시아가 폴란드의 반대편에 섰다.
마찬가지로 리보니아 문제로 폴란드의 반대편에 북방의 스웨덴이 참전하였고, 스웨덴과 다투고 있었던 덴마크―노르웨이 또한 분쟁에 휘말렸다.
브리튼섬에서도 또한 분쟁이 일어났는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동군연합이 깨지며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가문과 잉글랜드의 랭커스터 가문 간의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
압도적인 열세에 놓인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야욕을 그냥 가만히 두고만 볼 것이냐’라며 에이레를 부추기니, 에이레 또한 잉글랜드에게 전쟁을 선포하며 브리튼 전쟁이 확전되었다.
이탈리아는 시칠리아―사르데냐―코르시카를 다시금 정당한 로마의 강역에 넣기 위해 아라곤을 공격했고, 아라곤과 동맹을 맺고 있던 카스티야가 아라곤 측으로 참전하면서 다시금 불똥이 튀었다.
끔찍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
사실 얼핏 들어보면 고려에게 나쁘지 않은 일,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지금 고려가 대외에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지들끼리 아귀다툼을 하는 것에서 어떤 이점을 창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고려의 동맹국들도 분쟁에 휘말린 듯싶었고.
하지만 고려는 수도가 함락되어 국체가 위험한 사태가 벌어지기 전까진 이런 동맹국들을 도와줄 순 없었다.
“그들 스스로 적당히 거리를 두며 처세술을 발휘했어야지, 그저 눈앞의 이득을 위해 분쟁에 스스로 뛰어들다니…….”
“아국의 동맹국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여전히 가문 간의 결혼을 통해 유럽 특유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왕위계승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겠지요.”
“차라리 저들이 일방적인 피해자라면, 개입에 대한 국내의 여론은 이 정도로 나쁘지는 않았을 걸세.”
저들의 이권 문제에 고려가 나서서 피 흘릴 까닭은 무엇인가?
게다가 우리 코가 석 자인 마당에.
도리어 고려는 이번 화산 사태로 인해 ‘위대한 고립주의(Splendid Isolation)’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다른 대륙에 대한 관심을 끄고 우리끼리 잘살아 보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이는 김태석과 경당(고래당, 대외온건파)의 기조와 부합되는 면이 있었지만, 사실 경당과 교당(상어당, 대외강경파) 모두 외부정책이 고립주의와는 노선이 달랐다.
교당은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을 두들겨 패 혼쭐을 내주자는 대외정책을 주장한다면, 경당은 마음에 드는 애들이랑 같이 사이좋게 놀자는 대외정책을 주장했다.
반면 이 사람들은 그냥 대인관계에서 피로를 얻을 바에 집 안에 처박혀 혼자 놀자는 대외정책을 주장하니 아예 궤가 다른 것이다.
이처럼 경당 출신 중에서 위대한 고립을 주장하는 자들은 황상께 새로운 당을 창설하겠다고 주청을 드려, 그것이 받아들여진 후 귀당(龜黨, 거북이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진 그 세력이 작긴 했지만 김태석은 어쩐지 이들의 세력이 한미한 제3당으로만 남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원 원정 이후, 중서성의 6할을 차지할 정도로 강했던 교당의 세력은 화산 폭발 이후 3할, 혹은 2할 9푼 정도로 반 토막이 나버렸고 그만큼 경당이 반수를 넘기며 강해졌지만, 아예 전무했던 귀당이 1할 중후반대를 차지하며 고려의 정계에 새롭게 생겨났으니 가장 수혜를 본 것은 귀당이 아니겠는가.
“동아시아의 정세도 심상치 않습니다.”
“알아요, 알아.”
― 탁
태석은 수저를 내려놓고 종이로 입을 닦았다.
“옥저와 러시아가 조우했고, 백제와 왜는 여전히 다투고 있으며, 조선과 명이 서로 으르렁대고 있지요.”
피로에 찌든 시중의 시선이 병무상서를 향했다.
“그리고 제국은 한낱 해적에게 치욕을 당했고.”
“송구합니다.”
“상서께서 송구하실 이유는 없잖습니까.”
이미 그 책임을 지고 전임 병무상서가 사직했으니, 지금의 병무상서는 책임보다는 대응을 논의해야 했다.
“동아시아도 유럽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일 겁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입니다.”
“그래요. 이들의 전쟁은 유럽만큼 쉽게 터지진 않겠지만, 한번 터진다면 정말로 엄청난 규모의 전쟁이 되겠지.”
태석은 하필이면 소위 말하는 대유럽대전과 대아시아대전을 목전에 두고 제국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는지 안타까움이 들었다.
“일단 당면한 사항은 그 해적무리들의 문제인데.”
외무상서가 태석을 바라보며 넌지시 질문을 했다.
“조선 조정의 요청에 대한 답신은 어찌할까요.”
“음…….”
군 감축으로 인해 이런 사달이 일어났긴 했지.
어느 정도의 배려를 해 주는 것이 상국의 품격이다.
그리고 조선의 주류 함정인 판옥선은 방어를 위한 연안 함선이지 공격을 위한 함선은 아니었으니.
태석은 다시금 병무상서를 바라보고, 병무상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해적 토벌을 위해 증원군을 보내는 것은 귀당을 제외한 여당과 제1야당 또한 반대하지 않을 터니 안건의 결의 자체는 통과할 것이오. 황상께서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시겠다 하셨고.”
이근수는 고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내었으니 보복은 무조건적으로 행해져야 했다.
“다만, 시간이 걸리겠지요?”
“그렇지. 그러니 개성과 탐라의 잔존 함선을 일단 먼저 판매하도록 하겠소. 또한 너무 오래되어 낙후된 배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신형도 아닌 전열함들의 수출까지도 허락하지.”
“…알겠습니다.”
외무상서가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가져온 조그마한 공책에 연필을 놀렸다.
그리고는 필기를 마친 뒤에야, 슬며시 질문을 했다.
“허나 당하, 안 그래도 국난 이후 전열함의 건조계획이 전부 취소되었는데 해군의 반발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유럽 각국이 전열함을 충분히 건조하고 있는 상황.
제해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고려 또한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전열함들을 만들지 않고, 심지어 팔아버리는 것은 고려의 예전 해군 정책 기조인 ‘1>2+3+4’를 심대하게 어기는 행위가 되었다.
하지만 시중은 딱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미 전 세계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있소. 상황이 변하면 대응도 바뀌어야겠지. 반발은 거의 없을 겝니다. 진행하셔도 좋아요.”
이유는 몰랐지만, 병무상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외무상서는 더 이상 꼬치꼬치 물어보지 않았다.
[작가의 말]
고려 인구는 화산 폭발 바로 직전, 개천 325년이자 서기 1600년도 1월의 인구조사결과입니다.
고려의 연평균 인구성장률은 1~2퍼센트이며, 과학과 의학, 농업의 발전과 막대한 이민의 유입으로 여전히 동시대에서 압도적인 성장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인구수가 0으로 된 것은, 정말로 다 죽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 단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멸망시켜 병합하였거나(북원의 멸망), 혹은 동군연합 상태에 들어갔거나 하여 통계에서 빼었습니다.
합병국이나 연합의 주체는 인구가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Ex, 화북을 점령한 명의 인구성장, 대오스만 전쟁의 결과로 헝가리와 일리리움을 장악한 합스부르크의 인구성장, 덴마크―노르웨이 동군연합, 모스크바 대공국(루스 차르국, 러시아)의 주변국 합병 등}
전통적인 인구강국인 동아시아의 나라들 중 조선의 인구증가율이 형편없는 것은 못된 나라 하나가 인구성장률을 죄다 빨아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꺾은선그래프는 명과 원이라는 아웃라이어를 제거하여 추이를 쉽게 볼수록 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