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세기(3)
“후우… 후우…….”
― 우웨엑
중년의 남성이 도자기에 대고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보좌관이 천천히 남성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토사물 하나 없이, 그저 허공에 헛구역질을 몇 번이고 반복하던 남성은 마침내 기운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축 늘어진 채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흐으으…….”
“당하, 여기 물이라도 좀 드시지요.”
보좌관은 미리 준비시켜놓은 온수 한 잔을 그에게 건넸고, 중년의 남성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안타까운 양반이다.
보좌관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 즉 고려 황제의 밑에서 고려 제국의 모든 정무를 맡아보는 시중(侍中)이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건만 그 개인의 삶이라는 것은 썩 행복하지는 않아 보였다.
저렇게 긴장과 부담감, 그리고 피로로 찌들어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을 보라.
남들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겠지만 그렇기에 저것이 저 자리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딱 당선된 첫날에만 날아갈 듯 좋았고, 그 이후부터는 아득한 심연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는 역대 시중들의 말이 거짓은 아니겠지.
‘옛 가면정치의 시중들은 대체 어떤 위인들이셨는가.’
하나같이 전설적인 행정능력과 카리스마로 제국을 압도하여 통치한 괴물들.
다시는 그런 존재들이 이 제국을 통솔하지는 못하겠지만, 제국의 신민으로서 그들에게 경외하는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경외의 감정이 조금 커지다 보면, 뭐 제국교(시중들이 태조의 분신이라 생각하는)나 그런 것을 믿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고려의 시중은 대체로 종교색이 없는 자들이 많이 선출되고 있는 상황.
현재의 정치인들과 식자들은 가면정치가 좋지 않았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하지만 가끔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막진 못했다.
그때 시절을 경험한 사람이 지금은 거의 없긴 했지만.
보좌관의 생각을 자르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린 현 고려의 시중, 김태석이 물잔을 내려놓고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야당은 어찌하고 있나?”
“…엊그제 몇몇 의원들이 황상을 배알했으나 황상께서 직접 국난에서의 정국 불안의 위험성을 강조하셨고 또한 삼성의 결속력을 다독이신 이상, 이대로 그들 또한 내각불신임결의안을 통과시키긴 어려울 듯합니다.
당하, 어느 정도의 유예기간은 생겼습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군.”
태석은 마른세수를 했다.
정치인생이 상당히 긴 그로서도, 이번처럼 끔찍한 재앙은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뭘 어찌 예상하겠는가. 그가 신도 아니고.
태석은 상당히 독특한 가계력을 자랑하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고조부는 정말로 저 북려대륙에서 문명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레나페 부족 출신이었지만, 그의 조부는 고려로 귀화하여 진주에 자리를 잡았고, 그의 아버지는 참나무 벌목 및 조림사업이라는 가업을 크게 이루었으며 그 자신은 정계에 진출하여 중서성 의원은 물론이고 당시 야당이었던 경당의 당수의 위까지 올랐지.
솔직히 그 자신은 거기가 한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당수도 과분하다 생각했다.
탁월한 그의 국내 정치감각과 적을 잘 두지 않는 그의 성정 때문에 당수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가 소위 말하는 정치명문가가 아니었다는 이유도 약간은 있었겠지만 애초에 전통적으로 고려는 북원 원정 이후 교당의 세력이 경당보다 항상 2할은 더 강했던 것도 컸다.
그러나 전임 시중이 불미스러운 일로 사퇴하자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고려의 제12대 시중의 위에 오를 수 있었지.
‘재임 2년 만에 정치인생 최대의 위기라…….’
고약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예전 시중들이 세우고 발전시킨 국가적 재난사태에 대한 기본적인 행동수칙이 있었기에 그것을 토대로 초기대응, 즉 태동산맥 중부고원지대에 대한 구조 및 구난 절차가 나름대로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는 아직도 시중으로서의 목숨줄을 부지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정치인생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 * *
시중은 터덜터덜 책상으로 다가가 눈을 질끈 감고,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 책상은 독특하게도 원목 중간이 쩍 갈라져 있는 상태로 수리되었는데, 맨 마지막 가면정치의 시중이 후대의 시중들이 업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면 골통을 이렇게 부수어 주겠다는 의미로 내려쳤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 남북려 전역에서 이상기후가 심각해지고 있음.
4월, 아직 겨울인 6월이 오기까지는 먼 시점.
그러나 이 이상기후는 창양이라는 곳에 거의 최초로 눈이라는 존재를 보여주게 만들었다.
눈이다, 눈.
한여름에도 30도가 잘 넘지 않으며, 한겨울에도 영하로 거의 떨어지지 않는 연중 기온의 차이가 극심하지 않은 살기 좋은 창양에서 큰 눈이 내렸다.
그때 일부 몰지각한 상류층 사람들이 눈축제를 벌였지.
황상께서는 그때 감히 초유의 국난에 잔치를 벌인 그들의 몰지각한 행태에 크게 진노하셔서, 그 사람들을 죄다 공직에서 파면시키거나 특별감사를 명하셨고, 끝내는 전부 감옥에 집어넣으셨었다.
그러나 이상기후, 이상현상은 창양의 눈 정도로 끊이지 않았다.
위도가 낮아 사시사철 따뜻했던 곳도 한밤에 서리가 내렸고, 위도가 높았던 곳은 아예 폭설로 한동안 사람들이 집 밖으로 거동을 못 하게 되었던 곳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화산이 터진 직후 남려 지역의 농사는 정말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폭삭 망했다.
남려 농지 대부분을 차지하는 쌀농사, 인구부양력은 엄청나지만 태생적으로 기후에 상당히 민감한 벼는 죄다 냉해 피해를 입고 죽었다.
그렇다고 밀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북려에게 마냥 의지할 수도 없었다.
밀도 기후에 둔감한 작물은 절대 아니었기도 했고.
제국에 재난이 그동안 화산 하나만 있었겠는가?
북려는 전통적으로 대동양과 칼리나해, 마야만 부근에서 불어오는 태풍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화주와 앙주는 걸핏하면 침수되는 도시로 악명이 높았고, 진주와 택주 또한 태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남동쪽에서 올라오는 재앙 말고도 북서쪽에서의 몰려든 재앙도 있었다.
태륭산맥(로키 산맥)에 사는 이 태륭고원메뚜기(Melanoplus spretus)는 본래 건조하고 높은 고원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곤충이었으나, 고려가 원주민들을 흡수하며 북려를 개간하고 개척해 나가면서 그 반사이익을 가장 톡톡히 본 존재였다.
먹을 것 없어 허덕이던 곤충들에게, 하루아침에 광대하고 비옥한 먹이터가 나타난 것.
곤충은 번성하기가 너무나도 쉬운 존재였다.
게다가 태륭고원메뚜기는 번식력이 엄청났고 먹이를 가리지 않았을뿐더러 철새마냥 엄청난 거리를 이동할 수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그 수가 미친 듯이 불어난 태륭고원메뚜기는 개천 315년의 끔찍한 그 메뚜기 난리 때 거의 ‘3조’ 마리(하나하나 세 보지는 않았으나, 그 피해 면적을 통해 한 수학자가 계산한 바가 있었다.)가 날아와 북려 앙주와 명주, 화주 등을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이들의 득세함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부설된 철로에 곤충의 시체가 너무나도 많이 쌓여 열차가 가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나 택주와 앙주, 미주를 오가는 북려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먼저 건설된 철도 노선이 한동안 운행을 중지했었을 정도였다.
그때 이후로, 그 해충들을 전부 죽여버리겠다 하며 곤충에게 전쟁을 선포한 앙주의 주지사는 결국 한낱 메뚜기에게 패배하고 물러나야만 했었지.
그 일이 있기 전부터도 존재하긴 했지만 그 난리 이후로 메뚜기는 북려의 거대한 골칫거리로 남게 되었다.
“비축해 놓은 식량이 많아 그나마 다행이다.”
제국이 거대한 공격에도 지금까지 멀쩡히 버티고 있었던 것은, 그간 곡창이 터질듯하게 곡식을 쌓아두고 있었던 덕일 것이다.
덕분에 제국은 좋지 못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 등의 구황작물을 심을 시간을 벌었고, 큰 위기에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이냐?
제국은 자기 한 몸을 충분히 건사할 수 있었다.
인구가 많아지고, 국가 체급이 커졌지만 그만큼 체계 또한 발전했다.
핵심지역의 철도는 국가가 빚이라도 내서 이미 대부분 이어놓았으며, 바닷길 또한 바람과 증기기관의 힘 모두를 쓰는 기범선(機帆船)과 증기기관의 힘만을 쓰는 기선의 도입 이후 큰 안정성을 얻었다.
그리고 화산폭발이 터지자 민간에서의 도움도 줄을 이었다.
아주 유명한 식품회사 중 하나는 심지어 그들이 개발한 특허, 통조림을 조정에 무상으로 제공했고 몇 개의 회사들 또한 의복과 식품, 원자재 등으로 구호물품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분위기였다.
일반적인 백성들도 십시일반하여 물자절약운동을 벌였으며 사회 지도층도 기부행렬에 나섰다.
어떤 누가 배후에서 조장했는지 모르겠지만, 상류 사회에서는 이럴 때 씀씀이를 베풀지 않으면 찌질한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혔던 것.
그러나 건사할 수 있었다 뿐이지, 여전히 아프긴 아팠다.
끔찍하게 아팠다.
제국이 피해를 천천히 수습하기 위해선, 일단 그 육중한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학자들은 의견이 분분하긴 했지만 어쩌면 이 이상기후 현상이 몇 년간 더 지속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고 국가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듣기로는 후아이나푸티나 화산 대폭발 이후, 유럽과 저 동아시아에도 이상기후의 조짐이 보인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는 명백하게 고려가 분명했기에 뒷수습을 위해선 쓸모없는 국가적 지출을 줄이고, 빠듯한 재정을 통해 건전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쓸모없는 일.
물론 고려의 조정이 하는 일에 쓸모없는 일은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일단 대내적으로 가장 그렇게 여겨지는 것은 외부에 대한 개입이었다.
고려는 이미 너무 많은 곳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창 성세를 누릴 때야 별문제가 없었지만, 이렇게 위기를 겪게 되면 큰 부담이 되기 마련.
외국에의 파병은 이제 돈 먹는 하마와도 같았으며, 주둔군의 유지비 하나하나가 상당히 부담스러워졌다.
식량 반출과 수출 또한 마찬가지.
감자는 쌀보다 척박한 기후, 좋지 않은 환경에서 잘 자란다.
그러나 단위면적당 열량은 감히 쌀에게 비교할 수는 없었다.
고려의 농사구조가 일시적으로 구황작물 계통으로 바뀌면서 대외의 식량 수출은 급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고려의 정치인들이라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고려의 신민들이다.”
그 방식이 조금 잔혹하더라도, 아국의 신민을 굶겨가며 외국을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
제국은 방위비를 축소하기 위해 고려령 맨섬을 에이레에게 떠넘겼고, 카나리 함대의 규모를 줄였으며 옥저와 유구, 콩고, 무타파, 메리나 등에 대한 식량 지원 절차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과 에이레, 네덜란드, 백제 등에 대한 식량 수출도 제한을 걸었다.
첫 번째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이 사람은 시중을 이해합니다, 어쩔 수 없었겠지.”
어느 날 늦은 밤.
고려 황제 해균(解均)은 한 손님을 맞아 응접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검은 두루마기에 흑립. 어쩐지 수상함의 대명사 같은 복장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근위대장도, 호위도 전부 없었다.
“연방의 불만이 걱정되었을 겁니다. 덩치가 커졌으니 그만큼 머리가 굵어졌으니까요.”
“…군왕들이 제 할 일을 못 하고 있다는 뜻이옵니까?”
“아니에요, 황상. 통제력은 충분합니다. 다만 일방적인 지원은 항상 양측에 불만을 가지고 온다는 뜻입니다.”
해균은 어쩐지 상쾌해 보이는 그 청년의 미소가 조금은 아니꼬웠다.
“돌아오시…….”
“그만. 어찌 정착시킨 의회주의의 기틀인데, 그것을 다시 무너뜨리려 하십니까?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을 모조리 물거품으로 만들 일을 입에 담지 마세요.”
“…….”
청년은 감히 위대한 고려 황제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그러나 해균은 그다음 한마디 말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 청년의 얼굴에 큰 짜증이 서려 있었으니까.
“자, 아까 했던 말을 계속해 보자면…….”
청년은 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지금껏 남려는 북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요. 애초에 개척민 자체를 공급받았을 뿐만 아니라, 메뚜기 떼나 태풍의 피해에서도 계속 지원을 받았으니.”
이 관계는 마치 부자 관계와 같았다.
어린아이를 챙겨주는 부모.
옷도 입히고, 밥도 먹여주고.
세상의 모든 불편함과 고난으로부터 적어도 십수 년간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그러나 자식 놈들은 배은망덕하게도, 부모에게 그 효도를 다하려 들지를 않아요. 치사랑은 내리사랑보다 항상 작다는 것, 황상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
언중유골이다.
해균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돌렸다.
“앙주와 진주, 화주는 제각기 불만이 있었습니다.”
팔십 년이 넘게 직접 남북려 전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생활상을 봐 왔던 청년은 일평생 구중궁궐의 심처에 박혀 있을 수밖에 없는 황제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눈과 귀가 되고 있었다.
“그들은 독특한 기원을 가지지요. 그리고 세력도 상당합니다.”
육각형의 영토(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를 자랑하는 앙주는, 솔직히 말하면 한 세기 정도가 지난다면 옛 조상 중 하나였던 프랑스의 잠재력을 뛰어넘을지도 몰랐다.
화주 또한 카스티야를 뛰어넘을 수도 있었고.
진주 또한 먼 훗날에는 동로마의 잠재력을 추월할 수 있겠고.
연방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강력해지고 있었다.
그 성장세는 몹시 기꺼웠지만, 마냥 즐겁게 바라보기에는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강한 힘을 가지면 그만큼 요구하는 것들도 많아진다.
‘내 아들들과 내 딸들이 지배하는 곳이지만, 어디 인류 역사가 피로 이어졌으면 배신을 하지 않는 그런 동화 같은 존재였는가.’
오히려 그 반대.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죽여 제관을 빼앗는 곳이 현실의 권력 암투다.
비록, 각주의 군왕들은 처음부터 종통에 의한 임명제로 유지되고 있지만 두 주는 엄연히 세습제로 달랐으니.
그래서 고려의 조정은 원주민계의 호주(湖州 남태평양의 호주와는 이름이 같지만 뜻이 달랐다.)와 명주(溟州)를 두어 그들의 팽창경로를 막아 성장세를 제한했지.
필요한 조치였으나 그들은 당연히 화가 났고, 당연히 삐졌을 것이었다.
그런 조치를 취한 뒤에, 북려의 농작물들을 공출하고 그것도 모자라 저 대외에 식량 수출을 계속 지속한다?
농작물 공출이야 남려가 북려에게 그동안 지원해 주었던 것이 얼마인데 당연히 갚아야 하는 보은이겠지만.
외국 지원은 이야기가 다르지.
이미 고려는 영국―13개 식민지 정부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유대관계를 여(려)연방과 구축했고 자치권도 거의 주지 않았으며, 인재들의 등용 또한 고루 유지하고 있었으니(현 시중은 심지어 진주 출신이다.) 함부로 차를 바다에 던지는 행위를 하진 않겠지만, 분명히 민심은 바닥에 떨어질 것이었다.
이런 갈등이 누적되면 독립운동까진 아니더라도 ‘지역갈등’이 심해질 수는 있었다.
대륙 단위로 벌어지는 지역갈등.
해결하는 것에 머리털이 다 뽑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상민은 그런 감정의 골 자체를 만들기 싫었다.
“소손이 북려로 올라가오리까?”
“그럼, 재난이 닥친 남려를 버리시겠다는 겝니까?”
“…그게 또 그렇게 되는군요.”
해균이 머리를 감쌌다.
“시중은 선택을 내린 것이지요. 국내의 일을 우선시할지, 고려 중심의 패권을 유지해 나갈지. 비록 선택은 진작 정해져 있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지금까지 고려가 해 왔던 대외 영향력 투사는 끊길 것이고 봉신과 입조한 국가들 또한 제각기 불만을 품을 겝니다.”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황상, 생존의 시대가 달려왔소이다.”
후아이나푸티나 화산 폭발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이렇게 끔찍한 상황을 불러일으키리라고는 상상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시대, 소빙기로 일컬어지는 전 세계적 위기는 얼추 알고 있긴 했다.
그래서 대비를 해 놓았지.
그러나 인간이 대비를 해놓는다고 자연을 대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만이다.
“그들 또한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할 겁니다.”
[작가의 말]
유럽인들이 18세기, 19세기 본격적으로 북미대륙에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 로키산메뚜기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번성했습니다.
농사를 더욱 많이 지을수록 더욱 그랬죠.
그 끔찍함은 1856~1877년에 절정에 달했는데, 그때 이 메뚜기 ‘한 무리’의 숫자가 12조 마리가 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