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와인, 그리고 포도(2)
목화전쟁은 완벽히 끝이 났다.
서로의 영토에서 일어난 싸움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오직 바다에서만 서로 포탄이 오고 갔던 전쟁이지만, 덕분에 포르투갈은 그 알량한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려고 20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당연히 그동안 포르투갈의 국력은 박살이 났다.
본토의 생산력보다도 인도 무역과 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을 돌려 얻는 이익이 더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포르투갈은 그 국토의 잠재력이 형편없었던 것.
상민은 이를 보고, 꼭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도핑한 양심 없는 운동선수와 같다고 혀를 찼을 정도였으니까.
외부에서의 스테로이드가 끊긴 순간, 이들은 자연스럽게 몰락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도와줄 이웃들도 딱히 없었다.
이미 프랑스와 카스티야는 고려와 모종의 협약을 체결하고는 포르투갈이 원래 점령했던 지역을 빠르게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기니와 가나, 상아 해안 같은.
이들은 과거의 전례를 타산지석 삼아, 엄연히 흑인들을 노예가 아닌 ‘노동자’, 혹은 ‘소작농’으로서 대우를 해주겠다는 선언을 했고 심지어 고려가 요구하는 몇 가지 품목―목화와 사탕수수―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세로 공급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
또한 콩고와 무타파의 주권을 존중하겠다는 말까지.
가톨릭 이웃들이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몰락을 기회 삼아 그들의 옛 영역을 집어삼키자, 마침내 포르투갈은 저항의 의지를 상실하고 고려에게 항복을 원한다는 서신을 보내었다.
포르투갈의 사절들은 비참하게 그들의 옛 땅 마데이라, 지금은 고려령 마데이라가 된 섬으로 와서 조약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조약서의 내용은 많았는데, 앞으로 대들지 않겠다는 가장 핵심적인 조항과 더불어 마데이라 제도, 그리고 아소르스 제도를 고려에게 넘긴다는 것이 주요한 골자였다.
이 두 섬은 1420년 항해왕자 엔히크에 의해 발견된 이후로 엄연히 포르투갈의 영토였었다.
그러나 엔히크의 발견 전까지는 기록은 있었을지언정 사람은 살지 않는 무인도였고 ‘적법한 본토’라고 보기에는 시기적으로 무리수가 있었지.
따라서 고려는 이 영토를 조차지의 개념 없이 아예 흡수해버리고자 욕망을 품었다.
보라, 아소르스와 마데이라, 카나리로 이어지는 대유럽 가두리양식장을.
이 세 섬을 연계한다면, 더욱더 견고한 대동양 방위선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침을 뚝뚝 흘리고 있던 고려는 머리를 굴려 이곳을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먹기 적법하게 보일까 생각을 하다가, 마침내 새로운 국제법을 제시했다.
― 이 땅이 포르투갈의 영토가 된 지 백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적법한 영유권을 주장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닌가?
항해왕자 인판테 엔히크가 이 섬을 발견한 시기는 서기 1420년.
그러나 고려가 이곳을 실효지배하게 된 것은 개천 243년(CE1518), 즉 목화전쟁이 터지고 난 뒤 1년 후인 1519년이었지.
그러니까, 고려는 포르투갈이 이곳을 100년이 아니라 99년 지배했기 때문에 두 제도가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지 못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소리였다.
포르투갈인들로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소리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전까지 영유권에 대한 아주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국제법은 없었기에, 다른 국가들은 그런가? 하며 멀뚱히 두 나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과거 카스티야로부터 카디스를 조차할 때, 99년의 효력을 정해놓은 고려였으니 이와 같은 주장은 어쩐지 일관성 있어 보이기도 했고.
결국 고려는 다른 나라들에게 적당한 기름칠을 하여 마침내 이곳들을 꿀꺽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때 고려 조정이 자신들의 근거의 타당성을 들기 위해 들먹거린 ‘백년 실효지배법’은 이후 본토가 아닌 해외 식민지의 영유권을 주장할 때, 표준적인 국제법이 되었다지.
막상 고려의 지배를 받게 된 거주민들의 민심도 썩 나쁘지 않았다.
일단 고려령이 되면 세금이 덜 거둬진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
아무리 근래에 포르투갈과 고려 간의 안좋은 민족적 감정이 커져 있었다 해도 세금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였다.
또한 아소르스는 오히려 앞장서서 고려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리스보아에서 남아프리카로 가는 항로에 위치하여 몹시 중요하게 여겨지던 마데이라와는 달리, 아소르스는 그 북서쪽에 위치해, 고려와의 대서양 무역이 아닌 이상에야 각광받지 못했으니까.
인구의 구성원 또한 본국에서 도망쳐온 망명인들과 빈농들이 주류였으니 애초부터 본국에 썩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본국에 충성하던 사람도 있긴 있었지.
주로 지주들과 귀족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들은 대부분 아소르스 제도의 거점 역할을 하던 상 미구엘섬(São Miguel Island)의 빌라프랑카(Vila Franca)에 살고 있었는데, 1522년에 빌라프랑카에 지진이 일어나자 큰 피해를 입고 많이 죽거나 다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자들이 신벌을 받았다고 떠들었다.
게다가 고려는 책임을 느낀다며 오히려 지진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구호물자를 보냈으니, 일반적인 백성들이라면 당연히 고려를 지지하지 않겠는가.
* * *
그리고 아소르스 제도는 목화전쟁이 끝나자 고려의 치세에서 훨씬 더 번영하게 되었다.
제도의 중심지는 동쪽의 상 미구엘 섬의 빌라프랑카에서 고려에서 더 가까운 서쪽 피쿠섬의 마달레나로 옮겨졌다.
한적한 섬마을에는 큰 항구가 생기고 요새와 대포가 설치되었으며 마침내 관아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규모 교역소까지 완공되며 방점을 찍었다.
안 그래도 카나리제도는 위도가 너무 아래였고 항로상으로도 해류와 바람이 잘 따라주지 않아 이리저리 불편함이 많았는데, 아소르스 제도는 북해의 유럽국가들과 교역하기 위해 가는 중간기착지로 위치나 바람이나 딱 적절했다.
유럽인들에게도 이곳은 접근성이 좋아 마달레나에는 고려인들과 유럽인들이 자주 오가게 되었고 삽시간에 북적북적해진 감이 있었다.
영토욕인지, 혹은 다른 무슨 이유가 있는지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고려는 옛날부터 북려에 유럽인들이 함부로 발을 디디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다.
과거에는 허가받은 상단은 직접 테르샤로마나 정앙에 가게 되었는데 근래에 들어선 그것도 금지한 것 같고.
이후로 대고려 무역은 고려인 상단이 유럽에 방문하거나 카나리나 아소르스 등 이렇게 중간기착지에서 하게 되는 관습이 생긴 것이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 또한 비용일진대, 굳이 그렇게 고집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유럽 상인들은 거리가 가까워진 것을 환영했다.
보르도 출신의 이 중년의 상인도 본래라면 그 먼 대양항해를 할 엄두가 없었을 것이나, 이렇게 가깝게 교역소가 만들어졌으니 집안의 가산을 박박 긁어모아 무역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마달레나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제 기쁨을 감추지 못해 술을 퍼마시다 토악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로 술을 사랑하는지 다음 날 아침부터 주류를 파는 교역소에 도착해 서성이고 있었다.
이곳도 고려글, 저곳도 고려글.
아직 언어가 익숙지 않은 상황.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물건을 둘러보다 품속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자, 보자. 무슈 양이 원하는 술의 품목들이….’
뭐 이름이 이렇게 어려워?
그는 주류교역소 주인이 하루 일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자 재빨리 다가가 고려글 밑에 프랑스어로 발음을 적어놓은 것을 따라 읽었다.
“아안서엉소쥬, 켱워언주, 워얼로, 호옹매쥬로 주시구려.”
“안성소주, 경원주, 월로, 홍매주 맞습니까?”
네 술 모두 소주의 한 종류들이었다.
당연했다.
일반적인 곡식(주로 쌀이 쓰였다)을 이용하여 밑술(청주와 탁주를 구분하지 않았다)을 만든 뒤, 그 밑술을 증류하여 만드는 소주는 주정 30도 이상으로 상당히 도수가 높았으며 따라서 일반적인 술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여 수출품에서의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으니.
“…그게 맞을게요.”
주인의 몇 번 발음을 곱씹어 보는 프랑스 상인을 놔두고 장부를 뒤적거리던 교역소 상인이 입을 열었다.
“수량은 얼마나 원하시는지요,”
“각기 서른 통으로 주시오.”
“앞에서 말씀하신 네 가지 품목의 술들은 참나무통으로 운반되지 않습니다. 상자로 서른 상자를 드릴까요?”
교역소 상인의 말에 프랑스 상인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일꾼들이 창고로 가는 것을 본 이후에야 프랑스 상인이 의아하다는 듯 교역소 상인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그럼 그 술들은 대체 무슨 상태로 운반한단 말이오?”
일꾼들이 해답을 가져왔다.
나무로 이어 격자로 만든 상자에는 나뭇조각과 비슷한 것으로 봉인된 유리병들이 일정하게 수납되어 있었다.
프랑스 상인은 펄쩍 놀랐다.
“어떻게 이 많은 술을 죄다 유리병에….”
석탄과 해탄의 도입 이후, 제철의 기술이 도약한 것과 같이 유리산업 또한 도약의 기회를 잡았다.
높은 온도로 원료를 균질하게 녹이는 기술은 유리세공에서도 필수적 요소였으니까.
이제 고려는 투명한 유리병 정도야 손쉽게 척척 만들 수 있었다.
반면, 유럽의 술들은 지금까지 보관을 전부 참나무통, 즉 오크통으로 하고 있었다.
병의 개념이 없고, 다만 통에 간이 수도꼭지를 박아 잔에 따라 그 자리에서 마셔버리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 통념으로 알려져 있었다.
“상하지는 않았겠지요?”
프랑스 상인이 병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는 광경을 웃으며 바라보던 교역소 상인이 고개를 으쓱해 보였다.
“시음해보시겠습니까?”
“그… 그럴 수 있다면 나야 좋지만.”
프랑스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교역소 상인은 마치 말린 수염처럼 생긴 독특한 송곳을 가져와 나뭇조각에 밀어 넣고는 마침내 나뭇조각을 병에서 뽑아냈다.
― 뽕
소리가 요란하다.
“그건 또 뭐요?”
“연참나무 병마개(코르크 마개, Quercus suber)입니다. 뭐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교역소 상인의 대수롭지 않은 말과는 별개로, 이 연참나무 병마개는 이 시대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졌다.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 발명 이전의 술과 이후의 술은 차원이 다른 존재였으니까.
동양의 술은 대체로 항아리에서 숙성하고 보관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쓰기가 불편했다.
기존의 항아리는 아무리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밀봉을 한다고 해도 입구가 커 오염물질이 오가기 쉬웠다.
또한 결정적으로 덩치가 너무나도 무겁고 크다 보니 외부 충격에 취약하여 깨지기 쉬웠다.
바다를 오가는 힘든 여정에는 썩 좋지 못했다는 말이다.
한두 개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견고하게 결박시켜 놓아도 배가 출렁일 때 무거운 항아리들이 서로 춤을 추다 결국 깨지는 일은 정말 빈번하게 일어났었으니까.
이런 일로 골머리를 앓던 고려 또한 유럽을 따라 참나무통(오크통) 숙성법을 도입해 보기도 했었다.
유럽인들이 쓰는 오크통 보관법은 보관성도 괜찮고, 보관되는 내용물을 숙성시켜 그 특유의 나무 향과 함께 풍미를 더해주고 내용물이 빠르게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가장 결정적으로 나무라서 어느 정도의 충격에 저항력이 있다는 점도 있었고.
소주도 참나무통에 보관하여 보니 그 맛과 향이 기존의 항아리 소주와 비교해서 조금 달라지긴 했다.
참나무에 있는 특유의 성질로 인해 맛과 향이 조금 더 진해지고 색깔이 황금빛으로 바뀐 것.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해결책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참나무통의 술도 계속 내버려 둔다면 과하게 숙성되고 결국 상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수량의 술이 식초로 변해버렸던가.
반면 근래에 나온 유리병과 연참나무 병마개는 항아리나 오크통에서 꺼낸 숙성된 결과물을 이상적인 환경으로 보관하여 오랜 기간 잘 부패하지 않고 맛을 유지하게 될 수 있게 만든 혁신적인 발견이었다.
“이게 달이슬, 즉 월로입니다.”
투명한 액체.
마치 넥타르를 마시는 것처럼 프랑스 상인이 잔에 코를 가져다 대니, 독한 소주 특유의 알싸하고 풍미가 짙은 향이 올라왔다.
‘술 상태는 정말 끝내주는군.’
프랑스 상인은 술을 입에 대자마자 너털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황홀한 느낌.
소주와 같은 증류주가 대체로 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목 넘김은 정말로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확신이 서는구려. 이건 프랑스에서도 없어서 못 구하는 그런 술이라고.”
프랑스 상인은 가지고 온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그런 말을 했다.
마달레나에 온 것은 정말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거래 성사로 나름대로 화기애애했던 그들의 분위기는 교역소 상인의 말에 깨져버렸다.
“포도주는 안 사십니까? 좋은 것들이 많이 있는데.”
프랑스 상인의 얼굴이 팍 구겨졌다.
“이보시오. 내 이렇게 귀한 술을 경험해 보아 한껏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그 무슨 막말이오.”
“……?”
의문 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교역소 상인을 향해, 프랑스 상인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내가 보르도 사람이오. 내 앞에서 좋은 포도주를 논하다니, 그건 정말 우리 프랑스에 대한 모욕이오.”
창양에 사신단으로 갔다 온 유럽인 사절 중 하나가 말했다 한다.
고려의 포도주는 이미 유럽의 수준에 도달했거나 혹은 오히려 능가했다고.
그러나 그 화자가 비열하고 쪼잔한 네덜란드인임을 고려해보면, 그것은 단순히 프랑스를 헐뜯기 위해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로마 이후 와인의 중심지는 다른 어떤 곳도 아닌 프랑스였다.
백년전쟁에 국토가 다 박살이 나도, 그래도 와인만큼은 꿋꿋하게 그 명맥을 보존해 내려올 수 있었지.
당연히 프랑스인이라면 그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교역소 상인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짓다, 이윽고 그에게 몇 개의 병을 덤으로 건네었다.
“그대 나라의 자부심을 건드리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정말 좋은 물건이 나와서 그랬으니 한번 드셔보시지요.”
공짜라니 어쩔 수 없지.
프랑스 상인은 시큰둥한 얼굴로 병들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