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73화 (273/653)

Vague Koréenne

시작은 김씨였다.

사실, 해씨이면서 쌍용지손이었던 해영이 에드워드의 비로 들어간 적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특수한 경우이니 제외를 해야겠지.

그 이후, 부귀공 마리와 결혼했던 김홍은 일약 저지대의 대공이자 네덜란드의 부왕(夫王, King Consort)이 되면서 고려 내에서 엄청난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셰피 해전은 패배 아닌 패배를 겪었지만 그는 아내의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세습제 공작이 되어 영원토록 그의 후손들에게 땅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지.

물론 군주의 남편인지라 별 의미는 없었다.

고려인들은 그를 부러워했다.

세습제 영토와 작위라니.

고려엔 이제 신분제도 없었고 농토는 말할 것도 없이 자영농이 아니면 승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실 그런 항구적인 것에 대한 소유를 동경하는 존재다.

대대손손, 후손이 자신으로 인해 금전적 이득과 명예를 누리다니.

그것은 가정을 꾸린 사람의 근원적인 욕망이었다.

부모로서 당연히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부러움을 산 김홍도 잃어버린 것이 있었다.

고려의 국적.

그리고 그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것들.

* * *

원래 봉건주의적 사상이 지배되는 시대, 유럽은 국적의 기준이 실로 희미했다.

프랑스의 귀족이 타국 승계법에 따라, 카스티야의 영지를 가질 수 있었으니까.

이와 같은 사상은 민족적 국적, 후천적 국적과는 달리 개인과 개인 간의 충성(Allegiance) 서약이라고 봐야 했다.

물론 이 사례들은 푸른 피를 가졌다는 귀족에 해당할 뿐이지 일반적인 농노는 아예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아마 십자군 참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흑사병으로 인력의 가치가 상승하고, 무역으로 사회가 바뀌며 백년전쟁 등의 긴 전쟁을 치르기도 하여 마침내 절대왕정이 들어서자 국적의 개념도 같이 등장했다.

이들도 이제 동아시아만큼의 민족국가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 것.

활발히 발달하는 자유도시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국왕들은 신민들에게 민족성을 불어넣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진 국적의 개념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지극히 폐쇄적이었다.

귀족도 마찬가지.

이제 국왕의 봉신이 가진 작위는, 국왕의 봉역 밖 인물에게 상속되지 않았다.

국왕 자신이야 다르겠지만, 어찌 되었던 이제 프랑스 왕의 봉신이면서, 카스티야의 영주가 되지는 못한다는 말이었다.

자유도시의 상인들은 물론이고 농노가 폐지된 뒤 그 자리를 메운 소작농들도 함부로 국가를 떠나지 못했다.

― 국적을 바꾸는 것은 국가와 군주에 대한 반역이다.

당연스럽게 고려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뮌처의 독일 농민 혁명 이후에 이민자의 숫자를 상당히 줄였다고 하더라도 이민자들을 받아 성장하는 고려의 도덕적 명분이 훼손되는 셈이었으니까.

그리고 여전히, 조선과 같은 봉신국에서는 고려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반역자들을 모아 만든 나라라니, 이 무슨 끔찍한 말인가.

따라서 이는 반박될 필요성이 있었다.

손우경이라는 한림학사가 있었다.

훗날, 법사(法史)나 철학사를 공부하게 될 학생들에게 뭐 이리 많이 뭘 주장했느냐며 암기하기 어렵다고 욕을 거하게 먹을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만큼 철학에서 그의 학문적 영향력은 사유원, 안현록, 민정산, 이도 등의 거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우경은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기틀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맹자(孟子)와 순자(荀子), 중세 유럽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참고로 하여 근대적 자연법의 체계를 다졌다.

그는 당시로는 상당히 대범한 주장을 펼쳤는데, 그의 저서 ‘사회계약론’을 통해 인간이 이기성을 통해 원시 사회의 무질서함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사회 전반에 질서―황권―를 형성했다고 주장했다.

우경은 약간은 금기시되었던 삼별초 초기 역사에 대한 탐구라던지, 남북려의 원시 원주민들이 어떻게 고려에 동화되었는지의 경우를 자세하게 살펴보며, 사회의 계약을 통해 통치자의 권위가 형성되었다는 이론을 이어나갔다.

―삼별초 내에서 그렇게 큰 기반을 가지지 못하셨던 태조께서는 초창기 세력을 일구면서 강력한 행정능력으로 자신의 영역, 즉 초기 창양에 질서를 불어넣었고 이민족을 통합하였으며 고려의 통일을 이룩할 기반을 마련하셨다. 이때, 태조와 동등한 위계에 있던 무장들, 즉 고려의 초기 공신들이 태조께 복종하고, 나중에는 사방의 원주민들마저도 태조께 복종을 청한 것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지극히 합당하며 당연한 이기적 본성으로, 당시 혼란스러운 삼별초 고려의 사회에서 아주 강력한 힘과 지혜― 그리고 그 결과로 따라올 ‘질서’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실제로 초기 공신 영녕공 박량과 충정공 이문경 등은 당시 삼별초 낭장 출신이었던 태조에 비해 속하의 인원들이 뒤지지 않았으니···.

우경의 발언은 분명히 국가 권력을 옹호하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의외로 군주 자체의 절대성에는 꽤 큰 의문을 제시했는데, 결국 군주의 권력이란 하늘이나(天命) 신(Divine)이 내린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기원한다는 것이었으니.

따라서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상당한 비평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극도의 군주파, 즉 황권신수설(皇權神授說)을 주장하는 이들은 태조 해민께서는 삼별초의 낭장 김상민 시절부터 적법히 이 땅에 올 운명― 즉 이미 완전무결하며 천부적인 천명―을 타고 난 군주라 여겼다.

마야의 신학자들도 비슷한 논리를 펼쳤는데, 그들은 쿠쿨칸의 재림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법칙과 같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사실 당시에는 이 같은 논리가 흔했다

고려에 삼별초가 온 원리를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은 학문에 무척이나 커다란 영향력을 주고 있었으니까.

바야흐로 태평양을 오가는 시대가 열리다 보니, 오히려 그 광대함과 대단함은 더욱더 강조가 되는 면이 있기에 고려인들은 어떻게 초기 삼별초가 건양에 도달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것을 오로지 이적(異蹟,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였고, 이적을 넘어 기적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심지어 성공회조차 이의 해석에 의견이 분분했으니까.

후에 일어날 고려 내의 종교적 논쟁은 대부분 이에 기원했다.

물론 당사자는 이를 싫어했고 오히려 우경을 옹호했다.

상민 자신의 거부감도 있었지만 마냥 그것 때문에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이민 정책은 물론이고 근대성으로 대변되는 모든 합리적 사상의 기틀로서도 지극히 필수적이었다.

상민은 자신과 후손들이 만든 황실을 피바다로 만들며 사회 구조를 순식간에 바꾸는 혁명은 극히 싫어했고 두려워했지만 그렇기에 사회가 조금씩 바뀌어나가야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경의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어차피 사회 사람들의 계약을 통해 군주권이 형성된다면 그 계약을 파기하면 새로운 군주권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종래의 유럽이나 동아시아의 난민들이 국적을 옮겨 새로운 군주를 섬기는 것은 그들의 적법한 자연권이라는 근거가 되는 셈.

이는 고려가 ‘구원의 나라’ 혹은 ‘해방자’로 인지되는 것에 아주 강력한 요소가 되었으며, 근대적 주권의식, 즉 인간의 천부권과 침해돼서는 안 될 자유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김홍 같은 이가 외국에 가는 것을 명목상으로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는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김홍은 부르고뉴에 귀화할 당시, 명백한 타국인으로 분류되어 고려 내에서 어떠한 경제활동을 허가 없이 하지 못했으며 그의 고려 내에서의 자산(고려의 치안권과 방위권을 누려 얻은)에 대한 권리도 국가에 반환해야 했다.

김홍의 가문은 썩 대단치는 않았고 김홍 또한 재정적으로 썩 여유롭지는 않았기에 반환한 것은 별로 없었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즉 군의 지위는 완전히 사라졌지.

그러나 상민은 김홍에 대한 그 이상의 처분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가서 살거나 결혼한다? 그러면 오히려 인정을 해주어야겠지.”

저지대가 프랑스를 견제해 주면 좋겠다는 그의 대전략도 대전략이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상민은 동화되지 않는 화교와 유대인 같은 민족을 꺼리며 고려에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실 고려인들도 그들만큼이나 잘 동화되지 않는 민족 중 하나였다.

고려시기, 몇 번에 달한 외적의 침입으로 다져진 삼한의 민족성은 이 땅에 와서도 유지되었고 오히려 자긍심과 함께 범고려주의니 뭐니 하는 이론적 사상의 근간이 되었으니까.

지금 이들을 외국에 나가 살게 한다면, 마치 타국에 거점을 둔 네덜란드의 괴젠과 같이 친고려적 성격을 가진 집단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차이나타운마냥 코리아타운이 세상 곳곳에 뿌리내리게 된다는 것이지.

실제로 이는 고려에게 오히려 무형적 이득을 가져오게 되는 하나의 범세계적 영향력이 되었다.

고려의 명문가 출신의 사람이 타지에 나가 결혼한다?

비록 그는 자신의 가문의 혜택과 고려인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누리지 못하겠지만 오히려 외국에 나가 고려를 위해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설령 당사자가 자기중심적이라 그럴 생각이 별로 없더라도.

* * *

상민이 살던 세상에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표현이 있었다.

유럽이 아편전쟁으로 대변되는 서세동점이 본격화되기 이전 중국을 바라보며 느꼈던 서양인들의 동양 문화 동경 중 가장 대표적인 현상.

막말로, 근대에 있었던 중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후대에 자포네스크(Japonesque)라는 것도 있었지.

이는 일본에 의한 문화 영향을 뜻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국력이 상당히 강해진 일본은 문화적으로 꽤 오랫동안 서양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자포네스크는 후대의 서양인들이 가진 일본의 동경, 즉 와패니즘이 되어 강력하게 이어져 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문화들은 아마 새로 생겨나기 어려울 듯싶었다.

생겨난다 하더라도, 동경적 시선은 얻지 못할 가능성도 많았다.

남명은 회수 이북을 다시금 회복했더라도 남쪽의 치안은 바스쿠 다 가마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는 배에 헛바람만 잔뜩 든 두꺼비와 같은 존재였다.

북왜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하지도 않았으며 중요할 것도 아니라서 아예 존재조차 모르는 나라가 훨씬 많았다.

아마 훗날에도 딱히 중요한 나라가 되지 않을 가능성도 컸으니까.

게다가 유럽은 그의 완벽한 대체제이자 상급재가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16세기에 널리 퍼진 현상, 고려풍(高麗風).

프랑스어로는 바그 코히엔(Vague Koréenne, 현 로망스어에서도 고려를 뜻하는 단어는 고려의 요구로 K로 시작한다)이니 외국에서는 고려파(波)로 번역하고 있는 셈이었다.

고려풍 가구.

도자기.

나전칠기(자개박).

고려식 정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연극.

소설과 시.

미술품.

음악과 악기.

하다못해 젓가락과 같은 식기 도구까지.

유럽의 군주들이 자신의 부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은 바로 고려의 상류 문화였던 것이다.

이제 고려의 대귀족들은 젓가락도 못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공공연히 비웃기도 했으며 고려의 술을 마시지 못했으면 문화를 논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토마스 뮌처의 농민군이 튀링겐 영주들의 성을 불태울 때, 그곳에서 고려의 도자기들과 미술품, 술, 은화, 의류들이 무더기로 나온 것은 상당히 유명한 일화였으니까.

외국으로 결혼한 고려인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 같은 문화의 선봉장이 되었다.

서로에 대한 동경의식을 따져보면 고려인들이 유럽인들에 가진 환상보다 유럽인들이 고려에 가진 환상이 훨씬 높았으니.

사랑의 열병에 걸려 프랑스 귀족의 딸과 결혼을 한 고려의 청년 양백현은 가문에서 물려받을 모든 것을 포기하며 아내를 따라 프랑스까지 왔었다.

초창기, 그는 가진 것이라곤 장인이 못마땅해하며 조금 건내 준 돈이 전부였다.

귀족치고 먹고 살기도 어려웠던 형편에 빠진 것.

그러나 그는 곧 그가 가진 문화력을 통해 생존을 모색했고 생존을 넘어 자아실현까지 할 수 있었다.

“예술의 전당, 정말 죽기 전에 가 보고 싶어요.”

양백현은 언어적 능력이 뛰어나 프랑스어를 쉽게 배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하나는 청산유수로 잘 했던 덕분에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져나갈 수 있었다.

지금 프랑스는 종교적 억제가 많이 사라진 유럽에서도 가장 먼저 절대왕정이 대두된 곳이었으며 당대 유럽의 군주들 중 어떤 누구보다도 유행에 민감한 프랑수아 1세에 의해 한창 격변하는 문화의 중심지.

옛날부터 위상이 떨어지고 있던 라틴어는 이제 거의 신학자들만 쓰는 고리타분한 말이 되어갔고, 대신 널리 쓰여지던 프랑스어가 유럽의 공용어로 완벽하게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프랑수아의 업적 중 하나였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썩 훌륭한 군주는 아니었지만 프랑수아 1세의 치세에서 프랑스 특유의 화려한 사교계-살롱(Salon)으로 대변되는-는 바야흐로 꽃을 피웠던 것이다.

양백현은 이런 살롱의 인기인이 되었고 가진 세력과 재력, 관직도 한미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초청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그대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짐이 친히 불렀네.”

프랑수아 1세 본인마저도 그를 호출했다.

그 이후, 이 고려의 풍운아는 프랑스 궁정에서 국왕을 보좌하며 제국의 예법은 무엇인지, 황가의 사람들은 어떻게 입고 어떻게 걷고 어떻게 먹는지 조언을 해주는 ‘문화조언가’가 되었지.

훗날 그는 파리에 오가는 북유럽회사 상인을 통해 고려풍으로 정원을 가꾸기도 했고, 궁 근처에 팔작지붕 청기와 건축물을 짓는 책임자가 되기도 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어 아무 영지도 없었지만 무려 궁정백의 위치에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외국에 나가 사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이 연성 권력을 통해 고려의 이익을 불러오는 것이다.

괜히, 바그 코히엔의 유행 이후 고려의 주류와 의류가 엄청나게 소비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름다움과 화려함.

우아함과 고풍스러움.

이 모든 것은 날카로운 총칼보다 훨씬 강력하게 적을 고꾸라뜨렸다.

그리고 이에 쐐기를 박는 현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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