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72화 (272/653)

맘루크의 운명

“으……으음….”

당대 최고의 벨벳 생산지인 카이로의 궁정이라고 확실히 주장하듯, 고급스러운 벨벳에 이슬람 특유의 문양이 가득히 수놓아진 화려한 침대.

그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 여인들 네 명과 남자 한 명이 있었지만, 침대 위의 유일한 남자 투만 베이 2세는 마땅히 그 가운데서 숙면을 취해야 하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드넓은 침대의 귀퉁이에서 볼썽사납게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허…헉…헉!”

격렬한 정사는 아마 어젯밤에 끝났을 텐데, 지금 그의 이마와 온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으…으으윽!”

악몽.

현 맘루크의 지휘관이자,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 중 하나이며 낮에는 그렇게 당당하고 패기로운 사내 또한 피할 수 없는 존재.

그가 가장 나약할 때, 공포는 서서히 그를 좀먹고 있었다.

“으아악!”

마침내 악몽의 절정에 도달한 그가 큰 비명소리를 내었다.

자신이 내지른 소리에 오히려 그 자신이 더욱 놀란 투만 베이 2세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났다.

술탄의 비명소리에 침대의 여인들도 동시에 깨어나 입을 틀어막고 불안한 눈빛으로 베개와 이불을 끌어안고는 상황을 살폈다.

“술탄, 괜찮으십니까!”

잠시의 시간 뒤에,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병사들이 침실의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난 괜찮다.”

투만 베이 2세는 갈라진 음색으로 멍하니 침대의 귀퉁이에 앉아 대답했다.

방금 자신이 했던 치욕스러운 행동보다도, 악몽의 내용이 워낙 생생했기에 그는 일어나면 꿈의 내용 중 절반 이상이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잔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무슨….’

투만 베이 2세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여인들에게 신경질적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새벽 기도(صلاة الفجر)를 하려 하니 너희들도 이만 나가보거라.”

“네, 술탄.”

여인들이 천으로 몸을 감싸고 방 밖을 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며, 투만 베이 2세는 방의 한켠으로 가, 그곳에 호화로운 양탄자를 깔며 새벽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토록 신실한 그도 이번 기도에는 알라에 대한 경외의 감정을 한껏 품을 수는 없었다.

* * *

현 맘루크 술탄 알 아슈라프 아부 알 나사르 투만 베이(Al―Ashraf Abu Al―Nasr Tuman bay), 줄여서 투만 베이 2세는 깐수 알 구리 사후 다른 맘루크 지휘관들의 추대를 받아 술탄에 등극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무리 그가 추대를 받았다고는 하나 맘루크 지휘관들 전부가 그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투만 베이 2세는 수도 파벌, 즉 카이로 내에 위치한 핵심 맘루크 지휘관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

반면, 비수도 파벌, 즉 카이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윘던 주요 인사들은 그러한 그들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맘루크는 오스만과의 분쟁 이전에 시리아와 레반트, 그리고 이집트 및 키레나이카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역을 자랑하는 제국이었다.

광대한 영역만큼이나 강력하기도 했다.

십자군의 잔재들을 패퇴시키기도 했고, 그 위대하며 공포스러웠던 몽골 제국의 정복전쟁을 끝내기도 했었으니.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옛 술탄들의 치세는 이제 빛이 바래졌고 이 제국은 나약하며 병든 환자와 같았다.

외부의 세력도 문제였지만, 지금 이 제국은 내부의 정치싸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

현명하고 위대한 술탄의 힘 아래에서 일치단결하여 외적을 막아내었다면 이런 꼴이 되진 않았겠지.

감히 근본도, 칼리프도 없는 저 오스만놈들은 물론이고 십자군이라는 명목은 버렸지만 여전히 탐욕스럽고 음흉한 기독교 세력들은 더더욱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시리아의 에미르, 잔 바르디 알 가잘리(Janberdi Al―Ghazali)는 이러한 현 상황을 정말 불만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알 가잘리의 영지 하마(Hama)가 지금은 오스만의 손에 떨어져 다시 귀환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불만이 큰 것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투만 베이는 술탄의 그릇이 못된다.’

전임 술탄, 깐수 알 구리는 비록 오스만 술탄이자 당대에서 상당히 천재적인 전략가로 뽑히는 셀림과 그 재능을 나란히 하긴 어려웠지만 근성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다비크(Dabiq) 전투의 패배 이후에는 전세가 확연히 기울긴 했지만, 깐수 알 구리는 그 이후에도 끈질기게 저항을 하면서 셀림을 역으로 괴롭히기도 했었지.

알 가잘리는 그러한 선대 술탄을 상당히 존경하고 있었고 오스만에게 영지를 잃은 이후에도 항복하는 대신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도망가 깐수 알 구리와 함께 저항을 택했다.

깐수 알 구리도 그러한 알 가잘리를 기특하게 여겨 이집트 내에 장원과 영지를 하사하며 달래기도 했다.

비록 옛날의 성세는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더러운 오스만 놈들에게 계속 저항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는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깐수 알 구리가, 표면상으로는 노령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다시금 지긋지긋한 정치싸움이 벌어진 것.

결국 맘루크 내에서 가장 큰 파벌을 가진 투만 베이가 술탄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미 오스만에 대한 방어전략은 완전히 무너져, 맘루크는 시리아의 함락 이후 다마스커스까지 순식간에 내어주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투만 베이 2세는 그 와중에도 레반트에서 온 에미르들(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고향을 잃고 카이로로 들어온)을 죽여 재산과 부하를 빼앗는 행동을 저지르고 있었지.

다음은 그의 차례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그가 비카이로 파벌 중 가장 강력한 성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당장은 건드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른다면 투만 베이 2세는 그를 기필코 죽일 것이었다.

깐수 알 구리의 총애를 놓고 묘한 경쟁구도를 만들었던 두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뭘 어떻게 하겠는가.

카이로의 궁정은 높고 방어는 단단하다.

친 투만 베이 파벌은 수가 많고 당연하게도 모두가 정예군이다.

반면 반카이로 파벌은 근본부터가 패잔병.

이미 그들은 목을 내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오스만에 붙으려는 자들도 있다지.’

알 가잘리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선택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그들과 싸워왔던 자신으로서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랴.

처자식은 물론이고, 그를 따르는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결국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모두 죽어 목이 잘려 전시되고 싶지 않다면.

하지만 알 가잘리가 마침내 레반트 출신의 에미르들을 따라 오스만에 투항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기 직전, 의외의 인물이 그를 찾아왔다.

라틴인 혹은 랑고바르드인의 특색이 여실히 들어나는 이 이국적인 사람은, 그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탈리아반도에 살아가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한 백 년쯤이라면, 여기가 어디라며 소리쳐 쫓아내야 했던 자들이겠지.

그러나 지금은 이들도 오스만에 대항하여 같이 싸운 자들이니, 아무리 이교도들이라 하더라도 마냥 홀대할 수는 없었다.

종교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으며 이제 황금과 무역, 그리고 그로 인한 탐욕의 시대가 찾아왔다.

맘루크의 사람들도 옛 십자군의 앙금을 뒤로하고 기독교 세력과 열심히 무역하여 상당히 번영하고 있었지.

게다가 홍해의 남쪽을 틀어막고 오스만을 괴롭히며 기독교 세력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을 불러일으키던 포르투갈 또한 요 근래 들어서 상당히 잠잠했고.

“야심한 밤에 이렇게 은밀히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이오?”

이 무관은 알 가잘리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 그는 그를 보자마자 그 뒷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총독(Nawab).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알 가잘리는 의뭉스럽게 행동하는 베네치아 무관을 바라보며 툭 쏘아붙였다.

“대체 언제까지 총독이라 부를 생각이오? 주군도, 영지도 뭣도 없는 비렁뱅이와 다름없는데. 그리고 그대도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면 알 거 아니오? 그대들도 술탄과 카이로에서 언쟁을 벌였다 하더만.”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투만 베이 2세에 대한 적개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어조를 읽은 베네치아 무관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총독, 우리는 오스만과 협정을 맺을 생각입니다.”

“……맥 빠지는 소리를 잘도 하는군.”

사실, 지난 주에 이 말을 들었다면 대노했겠지만 지금 알 가잘리에게는 그 소리도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차라리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이제 곧 투항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총독, 오스만으로 도망친다고 해서, 쉴레이만이 그대를 내버려 두겠습니까?”

“…….”

공교롭게도, 셀림은 맘루크와의 전쟁 중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다마스커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알 가잘리는 그와 맞서 싸운 맘루크의 지휘관 중 하나였고.

쉴레이만은 꽤나 관대한 성격이다.

그러나 셀림―쉴레이만 부자는 이 시대 술탄과 자식 간의 일반적인 부자관계(서로 죽여대고 반역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던)와는 사뭇 다른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를 자랑했다.

베네치아의 무관은 그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원수가 오직 알 수 없는 적 군주의 자비를 빌어 항복하여 들어간다면 어찌 되겠느냐고.

처음에는, 쉴레이만은 그의 두 팔을 벌려 알 가잘리를 끌어안고 대외적으로 선전하겠지.

나는 관대하노라, 그러니 용서하겠노라.

그렇게 말은 하겠지.

하지만 결국 그는 죽을 것이다.

자다 칼에 찔리던, 독약을 먹던.

혹은 대놓고 반역자로 몰리던.

결국 그는 평안하게 침대 위에서 최후를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알 가잘리는 그 말에 한마디 반문을 할 수 없었다.

그래, 이전 술탄에 대한 충정이건, 자존심이건 오스만에게 항복하는 것의 가장 큰 심리적 걸림돌은 바로 그것이었지.

‘남아있으면 확실히 죽고, 항복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나는 대체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베네치아의 무관은 방 안을 서성이는 알 가잘리의 모습을 바라보다,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었다.

“서신은 여기 내려놓고 가겠습니다.”

슬그머니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지도 못한 채로, 알 가잘리는 그저 서신을 뜯지도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뜯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 자가 이 방에 오는 순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저것은 이블리스(إبليس)의 유혹이다.’

아무리 맘루크의 풍토가 근래 들어 이교도들에게 관대해졌다고는 하나, 이교도들과 손을 잡고 역모를 꾀해 술탄의 자리에 오른다면 대체 얼마나 험난한 여정이 펼쳐질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또한 맘루크의 일원.

알 가잘리는 서신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 * *

국가는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21세기에도 헤드헌팅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나라는 이들을 제지하지 못하는데, 지금 이 시대에는 더 그러했다.

안면인식이나 지문 등의 첨단 전산처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출국과정에서 전자여권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니까.

막말로, 건조술이 발달한 고려답게 시장에서 쓸만한 배 한 척 구해서 바다를 넘으면 그게 출국인 것이다.

산 배가 튼튼해야 하겠지만, 오래된 협저선 급만 되더라도 원양항해는 가능하니까.

대외 교류를 하며, 고려인들 또한 많이 밖으로 나갔다.

물론 그 수는, 다른 나라들보다 현저히 적었다.

고려는 들어오는 이민자의 숫자는 거대했으나, 나가는 사람은 그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았으니.

그러나 결국은 나갈 사람은 나가긴 한다는 말.

이들의 공통점이란, 제각기 품은 야망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는 것이지.

일례로, 상인들은 이윤을 위해 가끔 외국으로 귀화하기도 했다.

북해의 상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네덜란드와 에이레, 잉글랜드 등지로.

의원들도 마찬가지.

루스 차르국의 궁정의의 경우처럼, 거대한 황금을 제시받고 새로운 주군과 새로운 나라를 섬기는 이들도 있었다.

혹은 그만큼의 황금을 제시받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이니만큼, 인연에 따라 군주를 섬기기도 하는 사람이 있었지.

지금은 훙한 네덜란드 용맹공 김홍의 아들, 기욤 드 부르고뉴김처럼.

고려인들은 대체로 주군에 대해 상당히 충직한 인물들.

종교적으론 그렇게 신실하지 않았지만, 그 말은 대체로 개종이 쉽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걸림돌도 아니었다.

물론 상인과 의원과는 달리, 장인들은 그야말로 지혜의 보고나 다름없는 고려에서 잘 빠져나오려 하지 않았다.

대우도 천지차이며, 학풍도 자유롭고, 좋은 발명이 있으면 그만큼 돈도 잘 버는 국가인데, 나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앞의 세 부류와는 다른 사람들이 이제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려의 지배계층(으로 분류되는 가문들)이, 이제 유럽의 가문들과 통혼을 시작하게 된 것.

이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 작가의 말

주말에 지도를 만지긴 했는데, 이게 작품의 흐름상 조금 뒤에 제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한 3~4화 뒤에 나올 생각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4화 뒤에는 제가 생각했던 챕터가 끝날 것 같습니다.

1부~ 2부의 구분을 딱히 두지는 않겠지만요.

상민의 삼별초 시절, 재위 시절 그리고 재상 시절을 겪으면서 가끔 시간이 스킵되었던 형식으로 한 시대를 건너 뛰고 조금 다른 시대에 진입하겠네요.

지금은 원 역사보다 일반적인 기술 진보가 한 세기 반 이상 더 빠른 상황이니 역설사에 비유를 하자면, 유로파 중후반기― 빅토리아 초기라 보시면 될 수도 있겠습니다.

ps.

금요일은 몸살감기(38.6도까지 오름)에 걸렸습니다.

코로나는 아니라네요.

방안에서 아예 나가질 않으니 당연히 걸릴 이유가 없긴 하겠지만….

이게 다 방안에 처박혀 나가지도 않고 운동도 안하는 탓에 벌어지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근데 나가면 날씨로 또 죽을거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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