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71화 (271/653)

오스만

지금까지 위대한 이슬람 제국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메흐메트 2세가 그들이 정말로 원하는 ‘갈망의 도시’를 점령하고 옛날의 룸 술탄국의 성세를 완벽하게 뛰어넘어 진정한 제국이라고 불릴 수 있는 기틀을 쌓았을 때만 하더라도, 그들의 앞에는 오로지 영광스런 나날만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바예지트 2세가 즉위한 후 제국에는 크나큰 위기가 닥쳐왔다.

도저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정도.

그 끝은 멸망일 수도 있었겠지.

바예지트 2세는 무능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능한 축에 속하였다.

아버지의 거대한 군사 원정은 오스만의 재정을 심각하게 파먹었기에 바예지트 2세는 즉위한 이후부터 천천히 제국의 내부를 다스리며 그 상처들을 치유해 나가야만 했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임무를 굉장히 성실하게, 잘 수행했다.

불과 이십 년 만에 그는 점령된 그리스의 땅을 안정화시키고 그 땅에 이슬람 지배를 공고히 했으며, 제국의 국고를 다시 가득 채우고 문화 또한 융성하게 만들었으니까.

그의 치세가 제대로 끝난다면 오스만은 다시금 그의 아들과 손자의 대에서 한 단계 위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에게도 참을 수 없는 역린이 있었다.

동생 젬(Cem).

빌어먹을 새끼.

이 간악한 동생 놈은, 즉위 시절 그와 내전을 벌이다 유럽으로 도망을 간 인간이다.

그것도 적 이교도의 성지인 로마로!

그리고 그 로마에서 더러운 혀를 내밀어 자신이 아버지를 독살해 죽여 제위를 찬탈했다느니 뭐니, 혀를 놀리기까지 하니 그의 뚜껑이 열리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결국 바예지트는 정말 모든 노력을 동원하여 동생 젬을 암살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젬을 후원하던 보르지아 왕가의 이탈리아와 베네치아는 그 일로 사사건건 ‘아버지를 죽인 형이 이제는 동생까지 죽였다’라며 그를 비난하며 헐뜯고 있었다.

그 비난은 명분이 되어 오스만에 실제적인 위협으로 돌아올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다고 짐이 그 동생 놈을 살려두어야 했겠느냐!”

전쟁을 원한다면, 전쟁을 해 주지.

아무리 바예지트가 내정을 탄탄히 하는 것을 지향하고 대외원정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하나, 그 또한 위대한 오스만의 술탄이니 마냥 그러한 모욕을 참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스만의 외교는 솔직한 말로 좋다고 보기에 힘들었다.

북쪽과 서쪽은 고려의 영향을 받아 강대해진 유럽 기독교 세력들이.

남쪽은 같은 이슬람 수니파였지만 원수나 다름없는 맘루크가.

게다가 동쪽에는 그들이 아마 기독교보다도 더욱 싫어하는 이단, 시아파 사파비 왕조가 집권한 대이란국(페르시아)이 존재했다.

그야말로 사방이 적인 순간.

게다가 바예지트가 원정을 준비할 당시, 아나톨리아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시아파 봉기가 일어났으니 내우외환이라는 말 또한 완벽하게 들어맞는 절망적인 시기가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북아프리카 튀니스를 위시한 자신의 거점을 팽창하며 강력한 성세를 자랑하는 베네치아.

한 치 앞의 미래를 볼 수 없었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기어코 반도를 통일해낸 이탈리아.

지금까지 종교로 개신교와 치고받았지만 그래도 아직 무시할 수 없는 신성로마제국.

이탈리아와 코르시카―사르데냐 문제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지만, 그래도 지중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아라곤.

이들 신성동맹에 속하진 않았지만 범가톨릭 계열의 국가들도 있었지.

대규모 파병을 하여 완전히 개입하기보다는 조그마한 지원을 보내는 식으로 한 발짝 물러서 있지만 수식어가 필요 없는 유럽의 절대강자 중 하나, 프랑스.

옆의 나라가 노예를 굴려 목화 좀 뽑았다고 바다의 제국에게 쥐어 터지는 것을 잔뜩 경계하며 바라보고 있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더욱 지중해와 틀렘센에 집착하게 된 카스티야.

이것만 해도 엄청난 전력이지만, 심지어 오스만의 적이 유럽인들뿐인 것도 아니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사이가 나쁘더라도 오스만과 싸워 국력을 소진시키는 것을 꺼렸던 맘루크의 술탄 알 아슈라프 깐수 알 구리도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페르시아의 이스마일 1세도 아나톨리아의 시아파 봉기를 구실 삼아 오스만을 공격하기로 했다.

군사를 모은 바예지트는, 실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해 버린 것이었다.

제국은 분전했다.

아나톨리아 시아파 봉기를 진압하여 우환을 없앴고 그들의 일차 목표였던 키프로스 공략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형편없이 밀렸다.

짧은 점령 이후, 키프로스는 다시 베네치아에게 탈환되었으며,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에게 발칸의 코소보와 비딘, 니쉬, 스코페를 빼앗기고, 소피야(София), 그리고 테살로니키를 위시한 마케도니아 전부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만약, 그때 막시밀리안이 전쟁터에서 병사한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아마 오스만은 발칸을 방어해나가다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아나톨리아 남쪽에 가까이 붙어있는 섬 로도스에서는 바퀴벌레마냥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로도스 구호 기사단이 드디어 기독교 세력의 지원을 받아 멘테셰(Menteshe)와 아이딘(Aydin)을 공격했고 오스만의 봉신인 둘카디르 베이국은 이스마일의 전면적인 침공을 받았다.

한 손으로는 열 손을 막아낼 수 없었지.

바예지트는 아버지와 자신이 크게 부흥시킨 제국이 자신의 대에 멸망하고 말리라는 비애감을 이기지 못하고 삶의 의지를 포기하며 반쯤 폐인이 되어 은거했다.

오스만은 그래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바예지트의 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 * *

술탄의 자리에 앉기 전날 밤, 셀림은 그의 외아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아버지 바예지트 2세가 동생으로 인해 나라를 말아먹는 것을 지켜봐 왔던 셀림 1세는, 그의 명석하고 사랑하는 아들 한 명을 제외하고는 하렘에서 낳은 아들들을 전부 죽여버릴 정도로 의지가 확고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잠재적 후계자들을 죄다 죽여버리는 셀림의 그런 뒤도 없는 선택 또한 근거가 있었다.

그는 그의 젊은 외아들을 자신보다 더욱더 믿고 있었으니까.

“이 기나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그 끝은 우리 오스만의 멸망으로 귀결되겠지.”

필히 자조 섞인 말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눈에서 활활 타오르는 투기를 볼 수 있었다.

“쉴레이만. 그렇다고 내가 이 나라를 포기해야 하겠느냐?”

“아닙니다. 아버지.”

“위대한 오스만의 술탄으로서, 나는 죽더라도 싸우다 죽을 것이다. 너는 내가 죽거든 지체 없이 술탄의 지위에 올라 이 나라를 견인하라.”

― 나는 이미 죽었노라.

셀림은 단도로 손바닥을 그어, 흘러나오는 피로 유서와 같은 혈서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즉위하자마자 모든 일을 아들 쉴레이만에게 맡기고 자신은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필히 죽을 전쟁터로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한 쉴레이만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오스만의 구명줄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알라께서는 돌파구를 항상 준비해두셨던 모양이다.

불과 몇 년 뒤 터져버린 독일 농민 혁명으로 인해, 가장 큰 적대세력인 신성로마제국은 아예 전투의 의지를 잃어버렸다.

쉴레이만은 대외적으로는 아버지 셀림의 이름을 써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내 긴장을 낮추었으며, 그 사후 새롭게 즉위한 알베리히와는 협상을 통해 마침내 그를 대오스만 전선에서 이탈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외교적 성과 이외에도 쉴레이만은 뛰어난 부하들도 등용했다.

에게해의 레스보스섬에는 한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일가는 보노바 마을에 조그마한 장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청년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도와 가업인 상행을 이끌고 있었는데, 어느 날 청년의 형들인 우르지와 일리아스가 해적에 의해 납치되는 일이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커세어(Corsair)는 기독교 세력에 의해 크게 위축된 상황.

오히려 이제는 로도스의 기사단이니, 베네치아니, 이런 곳들의 후원을 받는 기독교 해적들이 지중해에 날뛰고 있는 판이었던 것이다.

형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나선 청년은 마침내 몸값 협상의 단계까지 갈 수 있었으나, 기독교인들은 협상의 자리에서 그를 비웃으며 형 일리아스의 시신을 그에게 던져주는 모욕을 베풀었다.

다행스럽게도 형 중 한 명인 우르지는 탈출에 성공한 상황.

마침내 만난 우르지와 청년은 일리아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자리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둘은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는 해적 일에 투신했고, 이윽고 기독교 세력에게도 유명할 정도의 악명높은 이슬람 해적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형의 이름은 바바 우르지(Baba Oruç).

그리고 동생인 청년의 이름은 하이르 앗 딘(Khayr ad―din).

우르지가 격렬한 전투 중 전사하고도 하이르 앗 딘은 그 세력을 계속 팽창해 나갔으며 어느덧 이슬람 세력들 중 가장 강력한 커세어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지.

쉴레이만은 이의 능력을 높이 사, 아무리 강성하다 하더라도 국가적 규모로 보면 일개 해적일 뿐인 그를 회유하여 오스만 함대의 지휘를 맡기는 파격적인 인선을 감행했다.

하이르 앗 딘도 술탄 대리의 신뢰에 보답했다.

그는 세력이 크게 위축된 오스만의 함대로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무려 베네치아의 함대를 격파하는 엄청난 전공을 세웠다.

― 바르바로사, 저자는 실로 지중해의 귀신이다!

형의 별명을 물려받은 바르바로사 하이르 앗 딘은 오스만의 해상을 끝까지 수호해나갔다.

그래도 가장 역할이 중요했던 것은 쉴레이만의 아버지이자 오스만의 술탄인 셀림이다.

보통 군주의 친정이란 양날의 검과 같아, 통솔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군주가 죽으면 필연적인 사기의 하락과 내부 정치의 혼란을 맞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피로 유서를 쓰고 온 그의 필사의 각오와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더없이 훌륭한 아들의 보좌로, 셀림은 선조 무라트 2세나 메흐메트 2세에 비견되거나 더욱 특출난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낙후된 예니체리의 군제를 개혁해 플린트락 소총을 대대적으로 도입하였고 기병대의 편제도 혁신했다.

고려를 본받아 군악대를 추가해 사기를 끌어 올리기도 했으며

비록 독특한 고집은 있어 총검과 칼같은 전열보병제를 완벽히 채택하진 않았지만, 데브시르메 제도로 인해 예니체리 개개인의 용맹은 대단히 뛰어났던 상황.

아직 유럽도 고려의 붉은 제복들마냥 완벽하고 소름 돋는 전열보병을 운용하진 못한 상태이니 당대의 군사적 능력은 서로가 비슷했던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국가들의 연합으로 인해 서로 간의 이권이 약간씩은 어긋나는 대오스만군에 비해, 조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오스만은 술탄이 친정까지 하고 있는 상황.

그 결의의 무게는 분명히 오스만이 더 무거웠을 것이다.

셀림은 수많은 전선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즉위 초, 그는 아나톨리아의 시아파 봉기를 진압했던 아버지 바예지드를 넘어 오히려 대이란국을 공격해 이스마일 1세가 이끄는 사파비 왕조의 군대를 하르푸트(Խարբերդ, 엘라즈으의 옛 이름)에서 크게 패퇴시켰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멸망한 둘카디르 베이국의 영토를 되찾아 오히려 병합되는 과정을 생략하기도 했고, 남으로는 안티오키아와 알레포 등 시리아 북부를 점령해 나갔다.

“어중간하게 멈추어서는 안 된다. 우환을 제거하기 위해선 우리가 칼리파를 포함하여 이슬람의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셀림은 그가 전장에서 스러질 때까지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 핵심 요지인 베이루트와 다마스커스까지 점령했던 것이다.

* * *

맘루크.

카이로.

이 놀랍고 아름다운 도시는, 수많은 상인들이 몰려오는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맘루크의 술탄 중 하나인 바드르 압딘 하산은 그의 치세에 하산 모스크를 건설하였지.

그리고 그 모스크는 구석구석의 공간이 수많은 색의 대리석들, 그리고 금과 은으로 발라져 있는 지극하게 사치스러운 건물이었다.

그만큼, 홍해와 지중해를 거치는 동서양의 무역로를 점유하고 있는 맘루크는 번영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카이로에는 옛날의 영광과 번영보다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분노가 짙게 깔려 있었다.

“빌어먹을! 왜 약속된 지원이 없소?”

“술탄께서는 그렇다면 왜 그 돈을 뒤로 착복하여 자국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에 쓰셨습니까?”

“그걸 말이라 하오? 일단 내부의 사정이 안정되어야 외부의 적을 공격하는 것이 순리요!”

“다 잡은 저 맹수는 이제 다시금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것은 오직 맘루크가 계속 공세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시아파 놈들이 그렇게 멍청하게 밀릴 줄 알았겠는가? 그리고 신성로마제국도 이 싸움에서 발을 뺀 마당에!”

카이로에 참석한 신성동맹을 위시한 기독교계 대오스만 연합의 사절들과 맘루크의 술탄, 투만 베이 2세는 언쟁을 벌였다.

오스만을 잘 공격했던 알 아슈라프 깐수 알 구리는 여든이 넘는 나이를 버티지 못하고 죽은 상황.

그리고 그 사후에 역시나 계승으로 인해 맘루크에는 혼란이 한 번 찾아왔었다.

맘루크는 애초부터 계승법이 모호한 나라였다.

위대한 술탄, 살라흐 앗 딘 유수프가 창시한 아이유브 왕조가 멸망하고 최초의 여성 술탄인 샤자르 알두르가 맘루크 대장과 결혼하며 맘루크의 치세를 불러올 때부터.

혈연 계승은 3대를 넘기기 힘들었으며 반란과 반란을 통해 등극한 술탄들이 다스렸던 국가였다.

그마저도 옛 바흐리 왕조에서 부르지 왕조(혈연 중심이 아니다)로 교체된 이후부터는 아예 거의 대부분의 술탄이 반란과 찬탈로 즉위하는 막장스러운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쓸모없는 놈들!’

그래서 이 투만 베이 2세가 알 아슈라프 깐수 알 구리의 사후, 오스만에 대한 공격보다는 오히려 자국의 맘루크 지휘관들을 죽이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아니었다.

보라.

정말 멸망 직전까지 밀어 넣었던 저 괴물이 거의 이십 년에 달하도록 끝까지 버티고 있는 광경을.

그리고 버티다 못해 심지어 시리아까지 집어삼켜 버리는 광경을.

오스만은 필히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발톱과 이빨은 날카로웠다.

그리고 사냥꾼들도 이제는 지친 상황.

목화전쟁이 마무리되며, 프랑스와 카스티야는 포르투갈의 빈자리를 넘보며 이 진흙탕에서 발을 빼어 서아프리카로 나가려는 모양이었고, 아라곤은 여전히 이탈리아의 사르데냐―시칠리아 주장에 학을 떼며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합은 필히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탈리아의 군주 체사레와 베네치아 도제는 라벤나의 한 밀실에서 머리를 맞대었다.

“전쟁을 지속할 수는 없소. 이제는 휴전을 고려해 보아야 할 때.”

“실로 동의합니다.”

상인들이 전쟁특수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돈 나가는 전쟁은 썩 좋아하지 않았다.

셀림 1세는 이미 전쟁터에서 전사했고 이제는 그 아들 쉴레이만이 술탄의 자리에 오른 상황.

실리적인 그는 거의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이 대오스만전쟁의 여파를 수습하기 위해서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키프로스와 크레타를 포함하여 구성원 각기가 점령한 북아프리카의 땅들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면, 연합의 구성원들도 만족할 것이오.”

“휴전을 이끌어내려면 무엇을 주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리아. 레반트에 대한 오스만의 권리.”

“…….”

“그 말인즉슨….”

“도제, 저번에 그대가 했던 제의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소이다.”

그들의 주특기를 언급하는 체사레의 말에, 베네치아의 도제가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작가의 말]

사실 콘스탄티노플을 ‘갈망의 도시’라 칭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딱히 쓰이지 않았다 합니다.

유래는 필립 만셀(Philip Mansel)이라는 작가가 먼 미래, 1995년에 쓴 [Constantinople: City of the World's Desire, 1453-1924]에서 나왔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네요.

근데 너무 어울리는 표현이라 빈번하게 등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도는 주말에 작성해보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