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불꽃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종교개혁이 한창 활발할 시기, 신성로마제국 스톨베르크(Stolberg, Harz)에서 태어난 뮌처는 나름대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영특한 신학생이었다.
스톨베르크는 껍데기뿐인 신성로마제국보다는 오히려 그 북부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대공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곳이었고, 작센과 튀링겐 지방의 영주들의 성격도 개혁동맹에 속한다 말할 수 있는 곳.
따라서 뮌처 또한 어릴 적부터 개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커가며 신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대학을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고향에서 가까운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다니게 된 그는 마르틴 루터, 즉 북도이칠란트에서 가장 유명한 신학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이는 불과 여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처음, 사제관계는 돈독했었다.
루터는 자신의 제자를 아껴 뮌처를 작센의 츠비카우에 있는 교회의 목사로 부임토록 추천서를 써 줄 정도였으니.
하지만 애석하게도, 츠비카우로 간 뮌처는 루터가 믿는 배설주의와는 다른 길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 지방은 대세 개신교파인 저지대 중심의 배설주의와 잉글랜드의 롤라드주의, 보헤미아의 후스주의에 모두 영향을 받고 있었던 상황.
거기에 더해, 그들 말고도 서서히 새로운 개신교 교파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시대의 과도기적 특수성으로 인해, 그중 대부분은 대충 만든 교리로 민중을 현혹시켜 금전적 이익을 갈취하려는 사이비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중에서도 재세례파 등 꽤나 종교적으로 묵직한 교파들 또한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뮌처는 재세례파의 영향을 받았다.
추천서를 써준 루터의 꾸지람과 여러 갈등 속에서 결국 츠비카우에서 추방당했지만, 그는 그 후로 알슈테트와 비텐베르크, 프라하 등을 여행하며 그만의 특수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기독교 사회에서는 너무나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의지가 없는 상황에서 실시되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재세례파의 주장에다가 더하여, 기존의 종교적 관습을 부정하는 그의 주장은 카톨릭은 물론이고 다른 개신교 교파들도 자극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양측에게 이단으로 몰려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을 운명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침내 뮐하우젠(Mühlhausen)에 도달했을 때 뮌처는 드디어 어떠한 운명적 계시를 받았다고 스스로 느꼈다.
* * *
당시 뮐하우젠은 극심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비록 오르베텔로 조약이 근래에 선포되긴 했었지만, 그것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이제 종교적으로 싸우지 말자는 선언이었지 국왕과, 영주, 농민들 사이에서의 종교적 자유까지 의미하진 않았다.
군주들은 여전히 개인의 신념(혹은 개인의 이권)에 따라 자신의 왕국에서 이단을 공공연하게 토벌하곤 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가 자국 영역 내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고 있는 것처럼.
독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주가 합스부르크 충성파인지, 혹은 개혁동맹의 일원인지에 따라 영지 내의 개신교와 카톨릭이 박해받는 상황.
농민들은 그 와중에 종교적으로 박해를 받는 것에 더하여, 경제적으로도 착취당했다.
심각할 정도로.
이것은 전 유럽의 공통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서유럽의 국가들이 15세기에 들어서 공통적으로 자유도시로 사람이 몰리고, 절대왕정으로 인해 중앙집권화가 되며 국왕이 의도했든 아니든 농민의 권리는 이전보다는 향상되었다.
농노제의 완전한 폐지가 이를 상징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와 그만큼의 자유민들,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던 서유럽은 고려의 등장 이전에도 여러 이유로 농노제를 폐지한 상태였다.
고려의 등장 이후에는 고려와의 무역으로부터 식량을 수입할 수 있게 되면서 식량의 가치도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였다.
대서양 너머의 고려에서 펑펑 팔아치우는 밀의 가격은, 운송비를 고려해봐도 상당히 저렴했으니까.
즉, 이제 서유럽은 전통적 식량 생산 말고 다른 일―목축이나 상업, 광업 그리고 공업 등―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려는 마치 플랑크톤을 빨아들이는 고래처럼 목화를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에 모자라, 양모와 나무, 석탄과 철 등의 1차 원자재까지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고 있었으니까.
서유럽인들도 수요가 많이 생긴 품목이 돈이 되는데 수출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비록 고려의 면제품과 모직물제품이 유럽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고려는 그 대가로 부를 빨아들이고 있었지만, 무역이라는 것이 보통의 경우엔 경제학적 논리―비교우위―로 양측의 후생을 증진시키는 것이기에 서유럽 또한 그 혜택을 쏠쏠히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현상은 서유럽 유산계급의 성장 또한 불러왔다.
전통적 유산계급이 오직 지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이들 국가에서는 자본가가 자라나게 된 것.
반면 독일 동부와 동유럽은 여전히 전통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농노제가 폐지된 곳이 있다고 해도, 결국은 지주와 소작농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농업 중심의 사회였던 그들은 서유럽과는 달리 상업의 기풍을 많이 가질 수 없었으니까.
독일 서부 혹은 발트해나 북해에 맞닿은 한자의 지역이 아닌 이상, 당연한 소리였다.
이곳의 영주들과 지주들은 종교전쟁과 기타 여러 가지 전쟁들로 황폐화된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소작농과 농노를 더욱 극심하게 착취하곤 했다.
기본적으로 부과하는 정기세인 전(田)세와 사람 수에 따라 징수하는 인두세, 보호를 구실로 뜯는 보호세, 죽을 때 내는 사망세, 결혼하면 내는 결혼세, 사치품은 농민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내는 사치세, 심지어 카톨릭의 영향권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존재하는 교회세까지.
한스라는 불쌍한 농민을 예를 들어본다면, 그는 수확한 밀의 구 할을 영주나 지주, 성직자에게 바쳐야 했던 것이다.
사람은 소출의 일 할론 절대 살 수 없었다.
그러니 한스는 다시 영주에게 밀을 빌려야 했다.
고리대금업까지 하고 있었던 영주는 그렇게 다시 한번 그의 가축이나 다름없는 농민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불쌍한 한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굶주리다 죽어간 아내와 자식들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데.
살아갈 이유를 모두 잃어버린 그에게 대체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가 무엇을 하겠는가?
* * *
뮌처는 신성로마제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농민과 농노들의 끔찍한 현 상황에 개탄하다가, 마침내 뮐하우젠에 정착해 이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교회의 목사 일을 하면서 지역 공동체의 수장이 되었다.
그 후에는 하인리히 파이퍼(Heinrich Pfeiffer)등과 힘을 합쳐 지역 사회를 장악해 나갔다.
1520년경, 마침내 상당한 명성과 영향력을 가지게 된 뮌처는 농민들에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주님이, 저 영주들과 지주들에게 그대들을 핍박할 권리를 내리셨습니까?”
몰려든 거대한 수의 군중 앞에서, 토마스 뮌처가 주먹을 쥐고 고함을 질렀다.
―아니오!
그리고 군중들은 화약이 폭발하는 듯한 고성으로 호응을 한다.
“주님이, 저 돼지 같은 무리들이 그대들의 아내를 겁탈하고, 그대들의 곳간에서 일용할 양식을 빼앗고, 그대들의 부모와 자식이 죽은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확인해 사망세를 징수하고, 또한 죽지 않은 그대들의 자식을 전쟁으로 내몰아 마침내 죽이도록 그리 허락을 하셨습니까?”
― 그렇지 않소!
뮌처는 손을 뻗어 분노한 군중들에게 말했다.
그 손은, 해가 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서쪽의 위대한 제국을 보십시오! 그곳에서는 모든 농민이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주도, 지주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있습니다. 예, 바로 그렇습니다.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그런 나라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단 말입니다!”
― 실로 그렇소!
피를 토하는 듯한 분노 섞인 절규들이 농민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주님의 시대를 위해서는, 그대들이 압제자에게 해방된 신정정치를 구현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는! 오로지 우리 같은 농민들만 서서 존재할 것이고, 영주와 지주의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 와아아아!
거대한 함성이 하늘을 울렸다.
뮌처는 마지막으로 그의 구호를 하늘 높이 외쳤다.
“모든 것을 공공의 것으로! 또한 필요에 따른 분배를(Omnia Sunt Communia)!”
― 농민을 위해, 공동체(Commune)를 위해!
“혁명하라! 도이칠란트의 농민들이여! 이것은 주님의 뜻이니 무기를 쥐어 지주를 죽여라!”
도이칠란트 농민 전쟁(Der Deutsche Bauernkrieg), 혹은 도이칠란트 농민 혁명으로 불리는 사건이 유럽을 뒤흔들었다.
이는, 실로 유럽 모든 이들의 상상 밖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토마스 뮌처를 따르는 뮐하우젠의 수천 농민들은 낫과 쇠스랑을 들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수천 농민들은 수만의 농민으로 바뀌었다.
뮐하우젠이 속한 튀링겐의 영주들은 크게 놀라며 부랴부랴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병사들을 내보내고 진압을 시도했지만, 처참하게 박살이 났다.
그때는 이미 수만의 농민들이 정말로 수십만의 농민들로 바뀌어 있었던 것.
영주들은 자신의 성 밖에서 빼곡하게 횃불을 들고 오는 농민들을 보고 공포에 질려 성을 탈출했으나, 금방 사로잡혀 마을 안으로 끌려왔다.
영주를 죽인다.
귀족을 죽인다.
지주를 죽인다.
그 가족들까지 모두.
그들이 호화로운 염료로 염색한 옷을 입은 채로 고려산 도자기와 유리잔에다가 와인을 따라 마시고 밤마다 성안에서 음탕한 파티를 벌이고 있을 때, 밖의 농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한 명씩 죽어 나가고 있었지.
우리들의 손으로 묻은 가족의 수가 몇 명이었는지.
우리는 기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들의 차례.
저들을 산 채로 불태우고, 항문에서부터 입까지 튀어나오도록 꼬챙이에 끼우고, 가죽을 한 포 한 포씩 벗기고, 사지를 토막 내라.
그들에게 당한 대로, 그대로 갚아주어라.
* * *
농민들의 숫자가 심대해지자, 사방의 영주들은 당혹스러운 것을 넘어 공포까지 느끼고 있었다.
개신교와 카톨릭 모두.
알베리히(Alberich) 1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카이저이자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 그리고 오스트리아 대공의 자리에 올랐지만, 제위에 오른 나이는 겨우 열다섯 살의 나이에 불과했다.
이런 중요한 사건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터라, 그저 당황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쉬이 진정될 것 같지가 않았고, 오히려 독일 농민혁명이 작센과 튀링겐을 넘어 프랑켄과 바이에른까지 위협하자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우리 신성로마제국은 빠지도록 합시다.”
신성로마제국은 교황청과 이탈리아가 주도하는 신성동맹과 같은 노선을 취하며 오스만을 압박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 스스로는 예전부터 그리 의욕적이지가 않았다.
바예지드 2세는 자신의 역린(동생 젬)을 건드린 베네치아에게 굉장한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 안 그래도 사사건건 오스만의 지중해 영향력을 제한시키는 키프로스와 크레타를 공격했다.
이에 기존의 약속대로 베네치아의 대오스만 동맹들, 즉 이탈리아와 프랑스, 아라곤, 카스티야와 신성로마제국은 다 같이 오스만에게 대항하여 군세를 일으켰지.
그러나 막상 국경을 가장 첨예하게 맞닿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은 남의 땅에서 전쟁을 벌이는 속 편한 신성동맹(교황령, 이탈리아, 아라곤, 베네치아)과는 달리 가장 손해를 볼 당사자였다.
오스만은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괴물 같은 존재였다.
제아무리 막시밀리안 1세가 공고한 합스부르크의 치세를 오스트리아와 남독일, 일리리아에서 넓혀놓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메흐메트 2세 이후 한창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는 오스만과의 일전은 극히 두려웠던 상황.
처음, 막시밀리안 1세는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의욕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장남이 전쟁터에서 병사해 죽고, 그로 인해 상당한 상실감을 느낀 이후에는 오히려 소극적으로 돌변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앞에서는 싸우는 척을 하면서도 군대를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요새 안에서 서로를 노려보는 것으로 그쳤다.
오히려 바예지드 2세 사후 즉위한 셀림 1세는 편지와 선물을 보내 그를 위로하기까지 하는 묘한 상황이 일어났다.
그 이후, 전쟁은 오히려 맘루크의 영역에서 일어났지.
그렇게 소극적이었던 나라가 이제는 타당한 이유까지 생기게 된 상황.
알베리히가 즉위한 신성로마제국은 자국 내에서 벌어지는 농민 봉기를 이유 삼아 아예 대놓고 오스만과 단독평화협정을 체결하고는 병력을 뒤로 돌렸다.
개신교 세력들도 이들을 마냥 좌시할 수 없었다.
처음, 루터는 농민들에게 약간의 동정적 마음을 가지고 있긴 했었다.
영주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조금 내릴 것을 권고하기도 했지.
그러나 그는 무장투쟁적인 잔혹한 봉기에 대해 극히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인 옛 제자이자 이제는 이단의 성직자인 토마스 뮌처에게는 배신감과 더불어 훨씬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상황.
뮐하우젠에서 혁명이 일어난 직후, 뮌처는 관계가 나빠졌더라도 옛 스승인 루터에게 그래도 편지 한 통을 보내 농민들을 지지해달라 호소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일갈했다.
“그대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다(Unchristian)!”
공과 사, 그리고 이단과 비이단을 넘어 농민에 대한 상황을 헤아리고 적어도 개신교 지방에서는 가혹한 세금을 폐지하며 농민들의 권리를 신장시켜 달라는 뮌처의 요구는 루터와 영주들에게 완벽하게 거절당했다.
루터 또한 결국은 개신교 영주들의 목사.
그가 왜 농노의 편에 서겠는가.
오히려 그는 세속에는 질서가 있어야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오히려 신앙적으로 이 농민들의 행위에 맞서 싸울 근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두 강대한 적에게 포위된 상황.
그러나, 뮌처는 이전까지의 어중간한 농민 봉기의 지도자도 아니었고 신학의 논리를 들면 어물쩍 말을 흐리는 사이비 목사도 아니었다.
그는 그만의 신앙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었으며 주변인들을 감화시켰고 급격히 그리고 과격하게 세력을 확장하는 농민 봉기에서도 실질적인 개혁을 이루어냈다.
뮌처가 이끄는 영원한 의회(Eternal Council)에서는 농민들의 자치조합(Werrahaufen)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주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농민들도 난폭한 봉기 속에서도 완전한 혼돈으로 빠져들지는 않았다.
뮌처를 중심으로 봉기의 수뇌부가 제정한 12개의 규약들을 지키도록 스스로 노력하기 시작한 것.
이 모습에, 의외의 우군들도 생겼다.
유틀란트반도 남부에 위치한 조그마한 농민 공화국, 디트마르센(Dithmarschen)이 지지를 표명하며 군사적 원조를 주기도 했고, 심지어 귀족들 중에서도 농민의 편에 선 자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귀족, 신성로마제국의 플로리안 가이어 폰 기벨슈타트(Florian Geyer von Giebelstadt)는 직접 가산을 털어 군사를 모집하고 농민군에 투신했다.
비록 그가 이끄는 중기병은 처음에는 정말 몇십 명에 지나지 않았고, 뮌처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확대 편성한 이후에도 수백 명에 불과했지만 정예군이라는 것이 존재치도 않은 농민군들에게는 큰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그들에게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지만, 저기 저 멀리 있는 고려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농민들이 추구하는 바가, 정말로 터무니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 * *
1520년부터 1525년까지 5년 동안.
이 도이칠란트 농민 공화국은 튀링겐과 작센을 넘어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 헤센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1526년.
카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이라는, 실로 믿기 힘든 조합에 의해 결국 도이칠란트 농민 공화국은 멸망했으며, 그 수뇌부와 농민군 병사들까지 거진 삼십만에 달하는 농민들이 학살당했다.
농민군의 주동자이며 카톨릭과 개신교 사회 모두에게서 파문을 당한 토마스 뮌처는 사지가 조각조각 잘리는 형벌을 선고받았음에도 멍들어 새파란 입술을 억지로나마 끌어올리며 웃었다.
“내가, 나 혼자가 이들을 선동했다고 생각하나?”
아니, 오히려 농민들이 뮌처라는 사람을 만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단지 불꽃에 불과했고, 이미 거대한 기름이 쌓여있었던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다른 누구라도 그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기서 내가 스러지고 내 피가 대지를 물들인다 하더라도.”
나는 웃겠노라.
그러나 너희들은 웃을 수 있느냐?
“나는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이.”
이 대륙을 휩쓸 위대한 혁명의 미래가.
목으로 파고드는 도끼날이 마침내 그의 목뼈를 부수고 그 머리를 땅으로 떨어뜨리는 순간까지.
토마스 뮌처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군중을 응시하며, 피로 물든 붉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