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66화 (266/653)

지성

과거, 동양의 관습에서는 선비와 장인은 사농공상에 따라 그 지위가 명백하게 달랐다.

왕씨 고려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해씨 고려는 국초부터 인문과학도 중요시했지만 자연과학은 훨씬 더 장려하고 있었던 나라.

장인들은 어느덧 기술관료(Technocrat)라 부르는 중요한 계급이 되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기존의 학자들만큼이나, 혹은 단순히 이론만을 탐구할 수밖에 없는 그들보다도 더욱 많은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유에는 특허, 그리고 그로 인한 금전적 풍요로움도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소소해 보이지만 전혀 소소하지 않은 발명품, 즉 족답식 탈곡기(足踏式 脫穀機, 인력식 탈곡기)와 풍구를 발명한 장인 정만영이 얼마나 큰 돈을 벌었는가.

그 족답탈곡기는 기존의 도리깨와 홀태로 곡물의 낱알을 탈곡하는 것의 노력을 현저하게 줄였으며 농가의 노동력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기계가 되었다.

고려의 거의 모든 농가가 이를 필요로 했으니, 정만영이 벌어들인 돈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그뿐이랴.

탄화고무를 발명한 최찬수는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만든 회사 ‘초승달’은 이미 기능성 고무화, 축구경기에 사용되는 규격 고무공, 운동용 경기복 등을 만드는 고려 내에서 상당한 크기의 회사가 되었고.

장영실의 가문이 소유한 하나하나의 가격이 실로 배 한 척과 맞먹는다는 값비싼 시계를 만드는 회사, ‘찰나(刹那)’는 한 해 수입이 어지간한 군의 소출보다 더 높았으니까.

* * *

창양.

연서궁.

제국한림원.

장성재는 오랜만에 관복을 입고 한림원에 들어갔다.

기술선도국에 소속된 것은 비밀이었지만 성재는 나라에서 인정한 명장 중 한 명이었기에 이곳에 자유로이 오갈 수 있었다.

여전히 손자―또한 연서궁의 학자인―의 부축을 받아야 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지만, 오늘 그의 얼굴은 더 이상 그늘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연서궁의 너른 마당의 풀밭에는 돗자리를 편 채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미술가인지 학자인지 모를 괴인, 책을 머리에 덮고 햇살 아래에서 오수를 취하고 있는 자, 삼삼오오 모여 야외에 설치된 탁상에 둘러앉아 책을 펼쳐놓고 토론을 하고 있는 젊은이 등으로 꽤 북적였다.

국자감 등 3감과는 달리 각지의 대학에서 순수히 학문적 연구를 위해 한림원에 모인 학사들.

이제는 그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어졌지만 제국의 학문의 최선봉에 있는 한림원은 다른 관료적, 군사적, 대외적 기관들과는 확실히 차별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조금 괴팍하다 해야 할까.

학문적으로는 이 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더없이 뛰어난 자들이지만 어딘가 엉뚱한 구석이 한두 군데 있는 한림원의 학사들은 그네들 스스로 생동감이 넘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장성재 또한 빈 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웃음을 띤 채로 바라보았다.

창강의 뒤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낸다.

장성재는 자신의 삶에 미련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여한이 없구나.’

기술선도국의 일을 하면서도, 그는 휘하의 장인들이나 외부에서 위탁교육을 온 학자들을 가르쳤고 이제는 이곳에서도 나이 지긋한 학자들 중에 그를 알아보며 인사를 건네는 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아, 명장 어른.”

“잘 지내셨소?”

“하하, 예.”

그러나, 오다가다 인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애초부터 그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는지 안식이 있는 중년의 학자 하나가 장성재에게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소식을 늦게 전해드려 죄송합니다. 최종 결정이 난 뒤에 후보자께 연락을 드리는 것이 원칙이라….”

“이해하오.”

“감사합니다. 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뭐라도 좀 내오지요.”

그는 일어나서 직접 연서궁 마당 한 곳에 설치된 가판대(주로 커피와 차를 판매하는)에 가 커피 세 잔과 과자 등 이런저런 요깃거리를 쟁반에 들고 돌아왔다.

“설탕 드십니까?”

“음, 한 숟가락만 넣어 주시구려.”

중년인은 이번엔 장성재의 손자에게 물었다.

“학우께서는?”

“저는 괜찮습니다.”

날씨 좋은 날에 다과를 음미하던 세 사람은 가볍게 근황을 주고받았다.

“이번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창양과 해문 사이에 큰 공사가 있다고 하더군요. 어르신께서 그 공사의 총책임자라고도.”

“이미 늙어 그저 구경만 하며 훈수를 두는 것 정도요. 대단치 않지.”

“어르신께서 바로 그 철마(鐵馬)의 조물주이신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있지 않소이까.”

“아… 예.”

중년인은 노인의 고집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건에 대해서는 어찌 결론이 났소?”

[이 사람은 그렇더라도 내 친우의 이름이 호명되지 않는다면 상을 받지 않겠소이다.]

이전에 했던 말에 대한 대답을 제국한림원에서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물론 이 상에 대한 한림원의 세 원칙은 그 또한 존중한다.

그렇다지만 온전히 자신이 그 명예를 누리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한 까닭이라, 정말로 그는 이 위대한 상을 포기할 의지가 있었다.

아무리 그가 이 상이 이름을 딴 사람의 아들이라고 해도.

“음… 명장께서 말씀하신 사항은 조금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일 거행될 행사는 다른 분야의 상이니까요.”

중년인은 품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어 장성재에게 보여주었다.

이제 눈이 침침한 고로, 그의 손자가 그것을 대신 읽어내렸다.

“…따라서 귀하를 제43회 영실(英實) 물리학상의 수상자로 최종 결정하였음을 알립니다.”

장성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입을 열었다.

“증기기관에 대한 발명상이 아니오?”

“발명상 분야의 수상자는 아마 조금의 토의를 더 거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귀띔을 드리자면 어르신께서는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셔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님께서는 올해 두 분야에서 영실상을 받으시게 되는 겁니까?”

손자가 좋아라 손뼉을 치자, 옆의 탁자에 있던 일행들이 흘깃 그들을 바라보았다.

“얘야, 진정하거라. 결정된 것은 오직 하나뿐이지 않느냐. 게다가 네 증조부의 이름을 딴 상이다.”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손자에게 나지막이 주의를 준 장성재가 중년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물리학상을 받는 연유는 무엇이오?”

“명장께서 증기기관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며 쓰신 논문이 근래에 정식으로 물리학의 정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열역학의 원리에 대한 것 말이오?”

시중의 지시에 따라 기관을 개발하고, 역으로 그 기관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이론이 그의 상의 근거가 되었다라.

장성재는 어딘가 반대로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발명은 우연에 의한 것이 많고 이론은 철저한 검증이 필요한 것이니 그 순서는 오히려 거꾸로가 더 맞을지도 몰랐다.

“그래요. 그것이 있었지.”

장성재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천생이 장인이고 공학자라, 오히려 이론보다 발명품이 더 중요했던 그는 아주 약간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장성재가 살짝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 저벅저벅.

옆 탁자에서 토의를 하던 무리들 중,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명장 어른.”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 성재가 갸웃거렸다.

한림학사처럼 보이긴 하는데,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기억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예전 청해대학에서 잠시 공학을 가르치셨을 때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 그렇구려.”

한두 사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해도 더더욱 모르는 것은 오히려 미안한 감정을 그에게 불러일으켰다.

“죄송하지만, 바로 탁자가 가까이 붙어 있었던 까닭에 담화를 엿듣게 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하지만, 오로지 사과만을 하려고 온 것 같지는 않고.

“다름이 아니라….”

장성재의 손자가 그를 힐끔 보았을 때, 학사는 품에서 세필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장성재의 앞에 있는 탁자에 공손히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위대한 발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 탁

“…….”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먹에 담가 쓰던 것이 분명한 철필촉 세필(Dip Pen).

그러나 오히려 그 자신의 손에 익어 어딜 가나 가지고 다녔던 걸 놓는 행동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장성재는 학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게다가 한 명이 아니었다.

“어르신, 축하드립니다.”

― 탁

그 탁자에 있던 젊은 학사들이 전부 일어나, 품 안에서 철필촉 세필을 꺼내 장성재의 앞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았다.

장성재는 아버지를 따라 어릴 적부터 기술선도국의 일을 하는 바람에 대학도 가지 않았고, 연서궁에서 인맥조차 없었던 그저 장인에 불과했다.

반대로 학사들은 대체로 자존심이 강할 수밖에 없는 존재.

시대가 흐를수록 장인과 기술관료를 높게 쳐주고 있다 하나 이 광경은 정말 한순간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인데.

“존경합니다.”

옆의 탁자 말고도, 그 건너편에 있던 학사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의 건물에서 공부를 하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마당에 나온 학사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의아해하다가,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차렸는지 이윽고 그에게 다가와 철필촉을 내려놓는 행렬에 동참했다.

머리에 책을 얹고 자던 이도 다가와 세필을 올려놓는다.

― 탁

“깨달음을 얻으신 것, 축하드립니다.”

고맙다는 대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인파가 다가왔다.

예전, 시중께서 도가니법과 수많은 발명품들을 남겼던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그 이름을 따서 당대의 위대한 학자들에게 수여될 여러 상들을 제정하기로 결정했을 때, 학사들 중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자들도 있었다.

선비와 장인은 격이 다른 존재라고.

정말로 어리석은 소리였지만, 이 땅에 고려가 세워진 지 이백 년이 흐른 뒤에도 그런 소리가 나왔었던 것이다.

성리학이 이 땅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했더라도 동양적 사상에 의한 ‘선비’ 혹은 ‘문인’들의 특권의식은 그만큼 대단했었지.

인문과 철학을 배우는 학자는 자연과학자를 내심 깔보았으며, 학자들은 장인들을 깔보았었다.

누가 더 우월하니, 고결하니.

그것은 아마 반도에서부터 딸려온 마지막 악습의 잔재였을지도.

뿌리를 뽑으려, 뽑으려 그렇게 노력해도 잡초마냥 자라났었던.

그러나 이제는 그런 기류가 완벽히 사라진 듯했다.

기술의 발명과 공학의 발견.

학문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온전해질 수 있으니까.

이는 한 번의 발견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발견들. 발명들.

공학이 신민의 삶을 더없이 풍요롭게 만들기 시작하자 비로소 ‘순수한 학문’ 또한 실용적 학문을 그들의 동반자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이들의 눈에서는 순수한 동경과 감탄만이 보일 뿐, 그 이외의 감정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중년인은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품에서 철필촉을 꺼내 올려놓았다.

“축하드립니다.”

그의 손자는 이미 울컥하여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

장성재 또한 격동하는 턱을 애써 다물었다.

“…고맙소이다.”

* * *

연서궁.

대회의실.

박수갈채를 받으며 연단에 오른 장성재가 이번 행사에 참석한 황제 해선과 시중이 앉아 있는 자리에 공손하게 조아리고는 손자를 내려보냈다.

이어서 미리 준비해 온 꼬깃꼬깃한 종이를 품속에서 꺼내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눈이 침침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다시금 깨달았는지 쓸쓸하게 웃고는 종이를 접어 다시금 품속에 넣었다.

“이 사람은 늙은 데다가 말주변이 없어, 아마 청자 여러분들에게 못 들을 말만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청중들이 슬쩍 미소지었다.

“지난 몇십 년에 걸쳐, 우리 연방제국은 큰 위기를 맞았지요.”

장성재는 운을 띄웠다.

“이 사람은 그때 그릇된 가설과 그를 맹목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시대를 살아가며 보고 배웠습니다.”

우생학은 이제 학계에서 완전히 논파되었다.

우생학을 신봉하던 신도 중 가장 지위가 높았던 사람, 지운학은 고려,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긴 반성문을 써 시중에게 제출했다.

[옛 우리가 살던 땅의 풍습에 대하여]

자신이 현지에 가 체험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무덤덤하면서도 가감 없이 서술한 이 책은 다시금 연서궁으로 와 수많은 문인에게 읽히게 되었다.

비루하게 사는 자신들의 고향과, 글로만 읽어도 실로 혼란해 보이는 여러 나라들의 처지는 인종이라는 것이 문명의 우열 비교에는 정말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문인들에게 알려주었다.

따라서 이 자리에 있는 문인들 또한 장성재의 말을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이 노인은 잉글랜드 출신의 사람에게서 한 가지 말을 들었지요.

그곳에서는 지금 이런 말이 있다 합디다.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라고.”

토머스 모어는 그의 저서, 원제는 길지만 줄여서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책에서 어딘가 존재하지도 않을, 그러나 상당히 고려와 비슷한 이상향적인 국가를 제시하며 잉글랜드의 현실을 비판했다.

“또한, 저기 도이칠란트에선 수많은 농민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나 그들의 영주와 상인들에게 대항하고 있다고 합디다.”

개천 245년(CE1520)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가 일으킨 도이칠란트 농민 전쟁(Der Deutsche Bauernkrieg)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진리는 보편타당함의 영역에 있어 도덕이 개입될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진리란, 그저 존재할 뿐인 사실을 발견해 내는 것.

“반면 그것을 사람이 이용하는 것에 있어서는 언제나 전 상서령 이도께서 말씀하신 정언명령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 생각합니다.”

장성재는 자신의 열역학, 그리고 증기기관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 발명품이 불러올 것들에 대해서.

시중께서 지나가다 하는 말들을 들었던 이후 가끔, 그는 악몽을 꾸었다.

왜인지는 잘 몰랐다.

그래서 그는 그의 소망을 담아 말을 이었다.

“따라서 나는 나의 보잘것없는 지혜와 발명품이 사람들로부터 유격(裕隔)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제국이라는 기관이 이상향 같은 영구기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 영원불멸한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제국만큼은 앞으로도 신민을 버리지 말기를.

부디 오랫동안, 영원히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달릴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노년의 명장은 마치 유언처럼 소망을 뱉었다.

사람들이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쳤지만, 그의 시선이 닿은 자는 그저 그 자리에서 씁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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