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63화 (263/653)

콩고

개천 244년(CE1519)

포르투갈 보병연대가 카디스를 향해 진군했다.

심각할 정도의 전력 차로 인해 말 그대로 개박살이 난 포르투갈 해군과는 다르게, 육지에서는 현지 보급이 편한 포르투갈군들이 우위를 점하는 것이 명백했으므로 예견된 수순이었다.

당대 열강의 한 축답게, 포르투갈의 육상병력도 상당했다.

일단 인도에 손을 뻗어 약한 지역 세력을 공격해 거점을 마련하고 초석을 캐왔던 이들은, 남려의 천연 초석 광산을 독점한 고려만큼이나 상당히 풍족한 화약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웃 나라의 곤잘로 데 코르도바가 ‘현대전(근대전)’의 개념을 제시한 이후로 포르투갈 또한 전열보병 전술을 빠르게 도입하고 있었다.

게다가 기병대 또한 예전의 히네테들이 대부분 추격용 경기병과 총기병으로 변하여 체질이 개선되었고, 그들의 국토 특유의 구릉지 환경과 어울려 상당한 전력이라 평가할 수 있었다.

일단 그 공포스러운 아브리고 로호(Abrigo Rojo, 레드코트, 고려군)와 제대로 맞붙으면 어찌 될지는 예측할 수 없겠지만, 포르투갈은 적어도 무력하게는 지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고 있었다.

고려 또한 포르투갈의 전력을 마냥 경시하진 않았다.

국가가 점유한 면적의 차이는 정말 심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상황이지만, 해상왕국은 그만큼의 돈을 외부에서 유입시키는 존재였기에.

굳이 원정을 갈 이유도 없었다.

북원 원정의 재정 후유증도 후유증이었지만 포르투갈은 화약과 대포가 부족하여 회수 방어선을 뚫지도 못하는, 명백하게 시대의 흐름에서 뒤처졌던 북원이 아니다.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가는 상황이니 성형요새의 효과적인 공성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재화가 필요할 것이다.

전장은 기술과 전술에 현격한 차이가 없는 이상, 너무나도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곳.

그곳에서 패배한다면?

그러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지.

대전략상으로 해군 우위 전략을 꾀한 이상, 고려는 그저 바다에서 포르투갈의 목줄기를 움켜쥐고 질식하는 것을 서서히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카디스로 진군한 포르투갈 또한 멍청하게 눈앞의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사는 고려인들과 무역을 하는 상인들을 전부 포로로 잡아 압박을 행사하려고 생각했었다.

미개함에서 근대성으로 도약하고 있는 순간이라도, 제네바 협약과 비슷한 조약은 아직 등장하긴 멀었으니.

그러나 도시의 성문에는 이미 카스티야의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 조차를 조기 종료하겠소.

― …제국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고려는 먼저 카스티야에 카디스의 조차를 예정보다 이십 년은 일찍 종료하고 토지를 돌려준다는 결정을 내렸다.

카스티야 또한 자신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고려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기에 포르투갈이 우엘바와 같은 자국의 영토를 침입해 진군하는 것을 묵인했지만, 정작 고려가 도시의 반환을 제시하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카디스의 자산을 온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카디스는 다시금 적법한 카스티야의 땅이 되었고, 두 나라 간에 체결된 사전의 약속대로 카스티야의 왕실의 보호 아래 포로들은 무사히 카나리로 피신했다.

“젠장!”

닭 쫓던 개가 되어버린 포르투갈은 크게 분노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아프리카는 이미 꽁꽁 묶였다.

포르투갈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 푸에르토리코(카보베르데의 현재 포르투갈 이름)와 마데이라, 아소르스 제도에는 이미 고려의 해룡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꽁꽁 묶인 것은 전술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외교적으로도 그러했다.

고려는 과거의 경우가 있었던 만큼, 유럽 내의 세력이 단일하게 뭉쳐 대고려연합을 형성하는 것을 극히 경계했다.

실행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지만,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국 패권은 심각하게 도전받을 것이었고 제아무리 고려라도 먼 거리에 있는 연방국들을 전부 보호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해상십자군은 유럽이 고려에 비해 항해기술이 뒤처졌던 80여 년 전의 일.

그러나 이제는 필요한 자본이나 그럴 동기를 전혀 논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아래 서유럽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충분히 고려로 올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100년이 지나면 또 다르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제국의 인구성장률은 유럽 평균의 다섯 배에서 여섯 배에 달한다.

게다가 이제는 산업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상황이었으니 고려와 유럽 개개의 국가들의 차이는 더 벌어지겠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따라서 상민은, 눈물겨운 노력을 했었다.

믿지도 않는 종교에 관한 장신구를 착용했으며, 괜히 유럽의 상권에 이리저리 발을 디뎠고, 개신교와 카톨릭 양측에 줄을 대면서도 서로에게 적대적으로 보이지 않게끔 뒤처리를 했지.

명과 오스만을 샌드백으로 던져주기도 했고.

그 결과는 보답받았다.

유럽은 포르투갈의 불행을 비웃을지언정 제각기 고려와 대적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려가 이베리아에 억지로 발을 디디지 않고 오히려 기존의 카디스 조차를 조기 종료하며 유럽대륙 내의 영토에 대한 탐욕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자 경각심은 수그러들었다.

또한 포르투갈의 공백기에 서아프리카의 이권을 다른 유럽에게 나눌 수 있다는 노골적인 고려의 제안은 프랑스와 카스티야, 잉글랜드 등의 국가들에게 군침을 흘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이탈리아가 주도하는 신성동맹은 또 입장을 번복했다.

교황의 칙령이 후대에 들어 바뀌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노예무역에 관한 칙령은 상당히 자주 바뀌는 감이 있었다.

이번 니콜라오 6세 또한 그랬다.

그는 펠릭스 5세의 노예 허가 칙령 대신, 노예 제도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교황다웠던 옛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오래 전의(Sicut Dudum)] 칙령을 다시금 대외적으로 선포했다.

그 이유는 발칸과 키레나이카, 그리고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성동맹―오스만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현 상황과 무관하지 않겠지.

이는 독실하게 카톨릭을 믿고 있던 포르투갈에게는 참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포르투갈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사방에 듣지도 않을 하소연을 하고 다니는 사이, 고려는 은밀히 사절들을 불러모아 음습한 뒷거래를 하고 다녔다.

시중은 어떻게 하면 포르투갈을 엿먹일 수 있을지, 하루 종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 이렇게가 포르투갈의 영역이었으니 참고하시구려.”

접시 위에, 아프리카라는 군침 도는 음식을 바라본 유럽인 사절단들을 지켜보며 고려인 사절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최우선 지역, 푸에르토리코를 명확하게 점령한 이상 나머지 지역은 상관없었다.

뭐, 노예무역과 노예농장을 벌일 것도 아니고.

‘대신, 그대들은 앞으로가 상당히 골치 아프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시중의 생각은, 비단 포르투갈인들뿐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지구 반대편의 누산타라는 너무 멀어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나든 고려 중앙조정에겐 무관심한 사항이었던 것과 달리, 서아프리카는 비록 포르투갈에게 내주었으나 그곳에 유럽인들이 둥지를 트는 광경은 항상 미묘한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유럽인들은 어이가 없겠지만, 이리저리 대양을 제집마냥 오고 가는 고려의 기준에서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으니.

그럼 어찌해야 하겠나?

또 이간질을 시키는 것이 정답이겠지.

유럽인들은 빠르게 바뀌는 기술적 혁신과는 달리, 이런 면에서는 금방 바뀌지 않을 것이다.

교황이 다시금 예전의 먼지 묻은 칙령을 꺼내 들어도, 이미 교황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황.

그리고 유럽인들에게 도덕적 논리는 경제적 이권에 비해 딱히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자성의 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오기에는 아직 대부분의 나라는 포르투갈이 했던 달콤한 아프리카 착취를 해보지도 못했으니 요원한 일이었다.

꿀을 빨아 봤어야 당뇨니 뭐니 그런 소리가 나오지, 입도 못 댄 상황에서 꿀은 그저 동경의 대상이니까.

반면 고려는 연성권력에 따른 도덕적 국제관계를 지향하니 항상 도덕이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그들을 괴롭힐 참이었다.

* * *

고려는 기니와 말리 등지의 포르투갈 거점들을 공격하고 목화밭을 불태우면서도, 이곳에서 노역을 하고 있던 흑인 노예들을 전부 풀어주어 고향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이주 열의가 넘치는 일부는 직접 배를 태워 남쪽, 무타파 제국을 소개해주기도 했고.

유럽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겠지. 저것들이 다 재산일 텐데.

물론 고려도 그 생각은 했다.

[저들은 전략적 자산이다.]

조금 성격이 다르긴 했지만.

아프리카 또한 그 대륙의 크기에 걸맞게 엄청난 수의 부족들로 쪼개져 있었다.

흑인들은 피부색과 외형이 비슷하게 생겼으니 다 비슷한 부족일 거라는 생각은 상당히 오만한 생각이다.

이들은 수천 년의 역사 동안 다른 부족과 투쟁해왔으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포르투갈과 유럽인들의 행패로 인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대륙 내부의 부족들은 아직 포악한 유럽인들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근래의 유럽 침입을 남의 일로 여기고 있었겠지만, 이번 일로 대량의 난민들이 발생하여 드디어 경각심을 가질 것은 틀림없었다.

난민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농법(플렌테이션도 엄연히 ‘진보’한 농법에 속했다.)을 배운다면 현지 세력은 더욱 강해지겠지.

아무리 어중이떠중이 부족들이 대부분이라고 하나, 이 중에서도 특별히 큰 성세를 자랑하는 부족 왕국들이 있었다.

서부의 송가이, 말리.

중부의 카넴 보르누와 콩고 왕국.

남부의 무타파 또한.

송가이와 말리, 카넴보르누는 수니파 이슬람권. 실로 폐쇄적인지라 고려가 상대적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었다.

반면 이번에 새롭게 인연을 맺은 콩고 왕국은 달랐다.

콩고 왕국의 마니콩고(국왕), 은징가 은벰바(Nzinga Nbemba)는 상당히 이색적인 사람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이 땅의 해안가를 비집고 들어와 총구를 들이밀며 협박을 할 때, 그의 아버지인 은징가 은쿠와는 어쩔 수 없이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주앙 1세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은벰바는 달리 생각했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문, 즉 머리를 다 밀고 다니는 승려들이 앞장서 유럽인들을 저지하며 남쪽에 위치한 무타파의 번영을 돕는다는 소문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바람을 통해 초원과 강, 숲을 넘어오고 있는 상황.

또한, 포르투갈과 교류하던 중 이 절대적인 무력을 가진 괴물 같은 흰 피부의 사람들조차 몹시 두려워하는 어떠한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은벰바는 아버지에게 대양을 넘어 고려에 가 교육을 받겠다 청했다.

괴상한 요구였지만 아들의 뜻이 몹시 강력하여 은쿠와는 포르투갈의 상인에게서 배 한 척을 사 그를 연방에 보내었다.

고려 조정은 이 사실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상민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가지 않았을 정도.

대고려에 유학을 오는 원주민 부락의 자제들이 어디 한두 명인가.

콩고는 조금 큰 모양이지만, 그래도 정말 ‘제대로 된 중앙집권국가’라고 보기엔 상당히 미흡했으니까.

그래도 교무상서는 그 열의가 기특하다 판단해 저 앙주 수도 동래미에 설치된 자제감에 입학을 허락했다.

처음, 원주민 청년들에게 문명이라는 이기를 강제로 불어넣는 기구였던 자제감은 시간이 흐르며 그 성격이 바뀌었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 상당히 엘리트적인 교육기관으로 변모한 것이다.

교육기관이 감(監)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지방으로 점차 번져나가고 있는 대학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되었다.

물론 대학도 황립, 국립, 사립 등 세 가지 요소가 있었지만, 엄연히 감의 이름을 쓰는 것은 국자감과 숭무감 그리고 자제감밖에 없지 않은가.

국가 최고의 인재들을 기르는 앞의 두 개와는 그 성격이 달랐지만, 자제감은 자제감 나름대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즉, 이곳에 와 교육을 받는 자들을 정말로 친고려파로 만드는(세뇌시키는) 역할.

앙주와 화주, 진주의 유력가는 물론이고 마야와 중려의 2왕3공국, 자치령들, 이미 거의 흡수합병된 ‘문명화된 다섯 부족’ 말고 이로쿼이와 치누크, 피마와 일리노이, 쇼니와 호와탄, 서스쿼헤녹, 레나페, 아파치, 심지어 적대 세력인 누무누 중에서 고려에 투항한 부족들의 자제까지.

수많은 세력들의 청년들이 와서 학문을 배우는 요람이라는 소리였다.

은징가 은벰바는 이곳에서 유학을 하며 큰 영향을 받았다.

아무리 남북려의 원주민들이라고 하나, 피부가 정말로 완전 흑색인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원주민들 중에서도 피부색이 옅은 사람은 언제든지 존재했고, 이들은 이곳에 온 초기의 고려인들과 지금 바다 건너편에서 오고 있는 조선인들과도 피부색을 구분하기 힘들었으니.

반면 아프리카 중부의 토착인인 은벰바는 정말로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자제감의 사람들은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수많은 곳에서 온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다른 존재라 인지하는 덕분에, 오히려 이들은 피부색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집단과 집단이 뭉치기엔 유럽인들끼리와 남북중려의 토착세력들끼리도 심히 이질적이었고.

게다가 절대 주류인 반도계 피부색이 아닌 이상에야 다 똑같은 것 아니겠는가.

유럽인들이 명예 황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이미 북려인들은 우생학과 싸우고 있는 처지였다.

말하는 원숭이나 침팬지를 보듯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을 바라보았던 포르투갈인들과는 다르게, 자제감에서는 표면적으론 어떠한 차별이 없었다.

차별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이해관계가 없거나 몸담고 있는 국가나 세력의 성세가 모자라 관심을 못 받은, 즉 ‘소유한 피부’가 아닌 아주 일반적인 경제적―정치적 논리에 의해서였을 것이었다.

드넓은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고, 문명에 대한 이해를 정립한 은징가 은벰바는 자제감을 수료한 뒤, 만종 교국에 들러 그들의 지원을 확답받고는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갔다.

기독교를 선택하였으나 토착세력의 반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은징가 은쿠와는 아들의 만종불교 수용과 더불어 친포르투갈이 아닌 친고려 정책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그를 유배했다.

하지만 은쿠와는 아들을 유배 보낸 뒤 얼마 가지 않아 죽었고, 전통적인 선출 승계 대신 만종교국의 무승들의 후원을 받은 은벰바는 성공적으로 보위를 이었다.

다만, 은벰바는 그 이후로 친고려 정책을 탄 탓에 포르투갈과 상당한 마찰이 있었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때마침 목화전쟁이 일어난 것이지.

고려 또한 자국의 자제감에서 유학하며 친고려파로 거듭난 은벰바를 밀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에 약탈한 현지의 물자들과 난민들을 그에게 보내 그의 저항운동을 후원했다.

비록 유럽인들은 또다시 이곳에 발을 디디겠지만 이제 상황은 이전과도 또 달라지겠지.

남아프리카에 뒤이어 중앙아프리카의 대지 또한 이제 유럽인들을 거부하기 시작할 것이다.

[작가의 말]

사실, 원역사에서 은징가 은벰바는 포르투갈에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걸 알았던 아버지에 의해 포르투갈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아폰소 1세라는 세례명까지 받으며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화에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시대적 한계로 인해 그의 개혁은 한계가 있었지만 그 정세를 보는 시야와 개혁 노력 자체는 꽤 대단하게 평가해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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