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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62화 (262/653)

면 산업

자영농은 농노나 노비에 비해 단위면적당 훨씬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낸다.

이득에 대한 동기를 자신들이 가지고 있으니, 당연한 소리였다.

이렇게 잉여 식량이 많이 생산되니, 주식량 걱정은 거의 필요가 없겠지.

그리고 상민은 앞으로도 큰 걱정을 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 유명한 맬서스 트랩은 기술적 진보를 전혀 상정하지 않았으니까.

당장 구현할 수 없었지만 존재하는 것이 명확할 질소고정법과 농기계의 발달로 농업 노동력 문제가 해결되면 세계 첫 번째의 곡창, 북려대평원과 세계 두 번째의 곡창 창강대평원은 비단 고려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지역으로 변할 것이다.

그때 가선, 아마 경자유전과 같은 오래된 관습은 서서히 사라지고, 전문적인 기업농이 대두되며 농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다.

체제의 안정성과, 시대의 한계로 상민은 자영농들이 그대로 이 나라를 지탱해주길 원했다.

따라서 눈앞의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묻는다면.

뭘 할 필요가 있는가?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도, 인간의 탐욕은 알아서 돌파구를 찾는다.

개인들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다른 분야로 사업을 변경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지금 그가 누리는 삶에도 증명되지 않는가?

상민은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던 그였기에, 지금 이 따뜻한 커피는 약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었지만.

대신 그 옆에 있는 조그마한 흑갈색의 물체를 들어 올렸다.

약간 말랑말랑한 느낌.

날이 따뜻하거나 오래 쥐고 있으면 검은 표면이 녹아 손에 달라붙는다.

입에 넣으니,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쇼콜라, 아즈텍어 쇼콜라틀(Xocolatl)에 의해 파생된 이 물건은 카카오 기름과 가루를 설탕, 밀가루와 함께 빚은 기호식품이었다.

누가 말하길, 카카오 지방과 카카오 가루, 설탕, 밀가루로 만든 페미컨이라는데 지금 상태론 그 표현이 딱 어울리긴 했다.

뭐 쇼콜라를 직접 먹어본 상민은 이제 이 세상에 초콜릿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고.

비단 카카오와 설탕뿐만 아니라, 이미 다른 상업 작물들도 활발하게 재배되고 있다.

포도, 그리고 와인.

포도주 말고도 차고 넘치는 주작물로 만든 술도 많긴 했지만, 일단은 수요 자체가 지금껏 유럽에 팔기에는 포도주만 한 것이 없었다.

고려의 청주도 고급문화가 되어 유럽 왕실들이 향유하고 있지만, 어디 기독교 문화의 근본인 와인만 하겠는가.

포도로 만들어진 포도주는 사실 포도가 재배되는 지중해와 유럽, 중동 등의 지역에서 골고루 발견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유럽의 보편 문화가 되어 이어져 내려온 것은 아마 기독교 로마 시대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는 프랑스 와인마냥 국가가 브랜드화된 와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후가 작살난 브리튼 제도나 도이칠란트가 아닌 이상,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자랑하는 유럽국가들은 모두 포도를 재배해 와인을 담갔고, 소비했으니까.

고려는 그런 포도주 산업의 후발주자로 출발했다.

하지만 나라 자체에 유구한 정통과 역사는 없더라도, 그러한 사람들이 이민을 왔고 또한 포도를 기르기에 실로 축복받은 남려 서해안과 미주의 기후 아래에 빚어진 고려 포도주는 느슨해진 프랑스에게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 * *

그 외에도 커피와 설탕, 담배와 목화, 고무, 키나, 카카오 등의 상업 작물도 재배면적지가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가 알아서 선택을 내리는데 그럼 뭘 걱정하냐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한계가 존재했다.

저 모든 상업 작물은 그것들을 재배하는 것에 상당한 노동력을 요구했으니까.

따라서 비약적인 생산량의 증대는 의외로 어려웠다.

품이 적게 드는 밀은 말할 것도 없고, 모내기법을 도입한 논농사가 저런 상업 작물들을 재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쉬웠다.

해결책?

상민 스스로 거부한 흑인 노예가 유일한 해결책이겠지.

그가 배워왔던 서양 문명의 ‘위대한 승리’란 대체로 피부색이 다른 이들의 피를 빨아내며 이룬 것이 맞았다.

상업 작물들 중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목화였다.

의식주는 삶의 필수요소.

나머지는 수요 자체가 적거나(키나) 아직 주목받지 못했거나(고무) 혹은 기호식품(설탕, 담배, 카카오, 커피)이라 없어도 상관없지.

게다가 목화는 적어도 고려 내에선 다른 모든 옷감에 비해 가장 우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날씨가 온화한 곳에 몰려 사는 고려인 덕분에 양이나 알파카 모직물의 수요는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목화 또한 농무부에서 앞장서 종자 개량을 하는 품목임에도 불구하고 면포의 비용이 아직도 값비싼 것은 흑인 노예의 등에 채찍을 갈기며 서둘러 목화를 따라고 윽박지르는 행위 자체가 고려에서 불법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포르투갈은 달랐다.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노예농장을 운영하여 목화솜을 재배하고, 심지어 인도의 캘리코(Calico) 면직물을 수출하니 아무리 고려의 품질 좋은 육지면(동해안 면, Gossypium hirsutum)과 해도면(서해안 면, Gossypium barbadense)이 최고의 면이라 꼽히며 유럽 왕실과 귀족들이 소비해준다 하나, 일반적인 대중의 시장에서는 가격경쟁력 면에서 형편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뭐 하나 걸리기만 해라 아주 그냥.’

처음 나름대로 우호적이었던 포르투갈과 고려의 외교 관계가 갈수록 악화되는 것엔 경제학적인 논리가 작용했다.

일단 고려는 포르투갈산 목화와 면제품에 엄청난 관세를 매기고 있었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상민은 사사건건 무타파와 메리나를 이용해 포르투갈에 시비를 걸고 있었지.

먼저 적대행위를 하면 그것을 트집 잡아 ‘마땅한 대응’을 하며 라이벌의 기간산업을 붕괴시키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독점적인 이득을 챙길 수 있으니까.

포르투갈로서는 억울하겠지만 상민이 추구하는 ‘도덕적 우위’는 이런 상황에서 상당한 명분으로 작용했다.

― 인간답지 않은 방법을 통해 이득을 누리다니, 비겁한 것은 저들이 아닌가?

포르투갈인들은 남아프리카의 두 나라가 천천히 진보하며 중앙집권화가 되고 세력을 불려 나가는 이 상황이 불편하겠지만 정말로 자세를 고쳐 앉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 덕분에 여전히 무대응이란 말이지.

아직 자신들이 면 산업에 있어서는 유리하니까.

아니, 했었으니까.

* * *

이런 해결되지 않은 가격경쟁력은, 시간이 지나며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방면에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의곤밀같이 품종 자체나 목화밭 구조의 대대적인 체질 개선은 아니었다.

원자재를 생산해내는 1차 산업의 구조가 바뀐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수확한 목화솜의 가공 방식에 대한 개선, 즉 실을 짜고 그 실로 천을 직조하는 등의 2차 산업―경공업―에 대한 개선이 생긴 것이다.

바야흐로 진정한 공업이 태동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고려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국가 전략상 중요한, 즉 유의미한 동력을 내는 외연기관에 대한 개발에 주로 집중했던 상민과는 다르게 민간은 먼 미래 말고 자신들이 지금 당장 살아가는 삶의 개선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실을 짜는 기계인 물레(방적기), 그리고 천을 짜는 기계인 베틀(방직기)을 꼽을 수 있겠다.

개천력 206(CE1481)년, 처음으로 개발된 8사물레는 말 그대로 8개의 실을 동시에 뽑아낼 수 있는 방적기(紡績機)였다.

지금껏 물레는 계속 그 구조가 진보하며 생산성이 개선되고 있었으나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낸 적은 처음이었다.

정말 물레 하나의 구조 개선으로 인해 생산량이 자그마치 여덟 배가 폭증한 것.

다른 이들보다 훨씬 월등한 생산성으로 인해 실의 가격은 몹시 떨어졌고, 8사물레의 개발자인 황덕수는 동료 방적업자에게 살해 협박까지 당해 경찰청에 의해 보호까지 받은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14년 뒤에는 최도형이라는 사람에 의해 인력을 최소화하고 수차로 돌아가는 수력 물레가 개발되었으며, 마침내 개천 230년(CE 1505)에 그 둘의 장점을 합친 통합물레가 차재곤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명되었다.

차재곤의 통합물레는 초창기엔 수력을 이용했지만, 차재곤이 상민의 투자를 받아 사업을 크게 이끌고 기계를 개량하면서 이미 장성재와 니키포로스에 의해 개발되어 있던 증기기관과 결합되자 증기 물레가 되었다.

이로써 생산성은 다시 한번 폭증했다.

실이 남아도는 순간.

면 산업이 진보되기 위해선 그걸론 부족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시기에 베틀의 진보가 일어났다.

직조기, 혹은 방직기(紡織機)라 불리는 베틀 또한 물레와 비슷하게 계속 소소한 개량을 겪어왔지만 유의미한 변화는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부품을 통해 도약했다.

개천 238년(CE1513) 농촌에 살던 젊은 청년 안흥주는 가족과 함께 근처의 도시―청해―로 나와 면포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곡식값의 폭락하여 돈을 더 벌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젊은 청년이 도시의 노동자가 되길 택한 것.

그는 직조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었으나, 다만 아내가 그에 일가견이 있었기에 뛰어들었단다.

경험은 없었으나 뛰어난 직감을 가지고 있었고, 틀에 박힌 편견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그는 당시 그의 아내가 쓰던 베틀의 구조를 어떻게 개선해보려 노력했다.

대부분은 실패하여 등짝을 몇 대 맞는 결과로 귀결되었지만, 집요한 노력 끝에 결국 그는 짜여지고 있는 날실의 틈 사이를 왕복하며 씨실을 푸는 기구인 북을 개량해 내는 것에 성공했다.

번잡하게 손을 뻗어 날실 사이로 살살 왕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한 번에 힘을 주어 북을 옆으로 툭 날리게 바꿔본 것.

이 무슨 어이없는 해결책이며, 그 효능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묻는 사람도 존재하겠지만, 이 ‘나는 북’의 등장으로 새로운 베틀 또한 엄청난 도약을 맞이했다.

남아돌던 실이, 드디어 그와 비슷한 속도로 천이 된다.

기존, 아낙과 어린아이가 방에 둘러앉아 가내 수공업마냥 지지부진하게 생산되었던 면 산업이 드디어 제대로 된 공업이 되어 날개를 활짝 펴기 시작한 것이다.

조정이나 상민 개인이 명령해서 이루어 낸 발전이 아닌 그야말로 백성들 스스로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이루어 낸 쾌거.

물레와 베틀의 진보로 인해, 면 산업이 드디어 폭발했다.

‘의류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려의 면 생산량은 날이 갈수록 그 규모가 미친 듯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면 산업에 대해 쥐뿔도 한 것은 없지만(노예제를 금지했으니 오히려 방해를 했다는 것이 맞겠다.), 직감은 누구보다 뛰어난 상민은 압도적인 자본력으로 대대적으로 증기물레와 신베틀을 사들여 공장을 열었다.

이런 개발자들을 위해 발명품에 대한 특허제도를 진작부터 제정해 놓았고, 이 특허를 자신이 사들였으니 법적으로 30년 동안은 충분한 꿀을 빨 수가 있었다.

두 기계의 개선 또한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고.

시장 또한 충분했다.

사방이 다 시장이 아닌가?

유럽, 그리고 아시아 모두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고려는 목화솜만 있다면 공장에서 미친 듯이 면제품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고려의 목화 재배지는 전년도에 비해 6배가 늘어났으나 그것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리고 생산된 면제품은 바다를 건너, 수많은 유럽의 국가들과 동아시아의 국가들에게 팔렸다.

더운 열대우림이 아닌 이상에야 어떤 사람도 옷을 입지 않고서는 대체로 생존할 수 없다.

더운 지방의 사람은 모직물을 쓸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에 비해, 면직물은 온대와 한대, 냉대를 통틀어 전 지역에 골고루 소비된다.

기본적인 의에 대한 수요는 예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테니 그저 더욱 많이 만들면 되는 것이다.

원료인 목화솜에 대해 가격우위를 점하고 있는 포르투갈마저도 고려의 면제품에 맥을 추지 못했다.

게다가 개천 243년(CE1518), 양측의 갈등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일이 일어났다.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을 위시한 세력이 남아프리카를 돌아다니다 무타파 제국의 사람들 및 만종의 선교승들과 충돌한 것.

사실 양측이 모두 강경하게 나와 치고받고 싸웠고 사상자 또한 서로 엇비슷했으니 근대적 법률로 해석해보자면 쌍방과실, 쌍방폭행으로 귀결돼야 했겠지만, 건수 하나를 물기를 고대하고 있던 상민은 그 길로 카나리 함대를 동원하여 서아프리카를 봉쇄했다.

포르투갈의 모든 항로는 서아프리카를 지나 희망곶으로, 그리고 그 희망곶에서 인도와 동인도로 가는 것인데, 카나리와 카디스를 통해 마데이라와 대동양을 봉쇄한 고려의 행패는 아예 집 현관에 대포를 겨누고 있는 것과 같아 포르투갈의 모든 대외행위를 중단케 했다.

‘보게나. 열강이라고, 부유하다고 으스대다가 저 꼴이 되어버린 것을.’

다른 기독교계 국가들에게마저도 비웃음거리가 되어버린 포르투갈은 마침내 이를 꽉 물었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건조해낸 전열함을 포함한 전 함대를 이끌고 카디스로 향한 것.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패배했다.

고려의 전열함은 운하 이동문제가 증기기관으로 인해 해결되었더라도 해양세력 견제를 위해 주로 대동양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고, 포르투갈과의 갈등이 고조되자 이들 대부분은 바다를 건너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열함과 전열함의 다툼이지만, 결국은 숫자 싸움.

고려 특유의 검은 활참나무로 건조된 전열함은 포르투갈의 전열함을 죄다 바닷속으로 밀어 넣고 유유자적하게 리스본 앞바다를 누볐다.

당대 포르투갈 왕, 아비스 왕조의 주앙 3세는 평소 선친 아폰소 6세가 가진 고려에 대한 두려움을 경멸했던 과거가 있으나, 정작 자신은 리스보아를 버리고 내륙의 요새 도시로 도망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훗날, 목화전쟁이라고 불릴 전쟁이 개막되었다.

고려는 북원에 대한 대외원정이 재정에 상당한 흠집을 내었다는 경험을 깨달은 상황.

그리고 북원과는 달리 화약 무기에 능통하면서도 성형요새를 지어놓아 공략이 쉽지 않은 포르투갈 본토에 대한 대외원정은 배제했다.

대신 해군을 통해 서아프리카의 목화 농장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전부 다 불태워라!”

가격경쟁력이란, 상대적인 것.

때로는 경쟁자의 산업을 박살 내는 것에서 기원하기도 하지 않겠는가?

[작가의 말]

8사물레 : 다축방적기(제니방적기)

통합물레 : 뮬 방적기

쇼콜라 : 초콜릿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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