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농산물
안흥주는 남려 온현 사람이다.
고려의 전형적인 농촌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온현은 건양 북쪽에 위치했다.
처음 이 온현에는 여러 사람들이 이주하여 온현 안씨를 비롯하여 온현 정씨, 온현 박씨 등의 집성촌들이 생겨났다.
그 이후에 주변 남려의 원주민들이 정착하는 등의 외부 인구도 유입되었지만 여전히 중앙보다야 희박한 인구밀도를 자랑하고 있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그래도 이 지역은 상당한 곡식들을 산출해내는 곡창 지대 중 하나였다.
온현의 날씨는 연간 항상 따뜻하고 토지 또한 창강 주변부에 비해 그렇게 꿀리지도 않을 만큼 비옥했다.
남려대륙의 북쪽, 즉 적도와 가까워지는 내륙지역이니만큼 연간 항상 따뜻한 날씨를 유지하면서도 대평원 서쪽에 비해서 비도 잘 내려 쌀농사도 잘되었다.
저수지를 확보하면 현 고려의 농법인 모내기법을 충분히 실시할 수 있었으니.
“아버지,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하거라.”
“예.”
이제 마흔이 되시는 아버지 대신, 열아홉의 젊은 청년 흥주는 형들과 함께 수레에 쌀자루를 싣고 온현의 중심지로 향했다.
온현의 크기가 워낙 크다 보니, 중심지로 가는 것도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이제는 온현 또한 쇄석으로 만든 길이 깔리니, 수레로 오가는 것의 번잡함이 이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잘게 부순 돌을 이용해 만든 도로는, 오가는 사람이 많을수록 박살 나는 다른 판석이나 벽돌로 만든 포장도로보다도 오히려 더욱 견고해지는 데다가 비가 내릴 때의 유지력 또한 괜찮았다.
흥주로서는 정확한 원리야 영 알기 어려웠지만, 저 도로 만드는 것만큼은 정말 탁월한 진주 출신 사람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모든 길은 제국으로 통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사람이니까.
실제로, 이 길을 타고 하염없이 걸어간다면 마침내 제도에 도착할 수 있으렷다.
‘둘째 형님이 보고 싶구나.’
어릴 적부터 무재가 출중하여 제도로 올라가 숭무감 입학시험을 본 흥주의 둘째 형은, 당당히 시험에 합격하고 숭무감을 수료해 지금은 고려의 무관으로서 복무하고 있었다.
가문의 영광이라고, 아버지는 둘째 형의 소식을 들은 날에 동네 어르신들과 친지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벌였지만 어머니는 그 이후 매일 밤 부처님께 형의 안위를 기원했지.
게다가 이번에 저기 서벌군에 참전해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니 어머니의 근심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비록 전쟁은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둘째 형은 귀국하지 않았고 오히려 형수와 조카들을 자신의 복무지역으로 불러들였다.
개성, 모든 고려인들의 고향에.
‘하필 격오지도 그런 격오지에 근무하다니.’
이전까지 격오지 파견이라 불리는 곳은 고려령 맨섬(에이레와 잉글랜드 사이의 섬), 고려령 카나리―카디스 지역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태평양에 진출해버린 덕에 다바오, 탐라, 개성, 이와미 등의 끔찍할 정도로 먼 곳들이 추가된 것이다.
흥주로서도 우정국을 통해 아무리 빨라도 사 개월에 한 번씩밖에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는 둘째 형이 가끔은 그리웠다.
어릴 적엔 그렇게 치고받고 싸웠던 형제이건만, 막상 떨어져 보니 생각이 달리 들…기는 개뿔.
생각해보니 이제 고려의 무관이라 더 이상 대들지도 못하겠네?
헛기침을 한 흥주가 수레의 뒤를 바라보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쌀 포대 위에서 첫째 형이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좀 형님! 교대 좀 합시다!”
― 드르렁
흥주는 욕을 뱉으며 애꿎은 말 채찍을 휘둘렀다.
쌀의 무게가 상당한 탓에, 수레는 거의 기어가듯 움직였다.
* * *
온현의 관아가 있는 곳 앞에는 관아보다 더 큰 창고들이 한두 채가 아니라 수십 채나 늘어서 있었다.
세곡을 보관하는 건물.
이 벽돌 건물들은 모두 곡창인데, 유사시의 화재나 그런 것들을 방비하기 위해 건물 간의 이격 거리를 최대한으로 지켰으며 주변에는 쥐나 해충에 대한 방비를 위해 쥐덫을 깔거나 고양이를 기르고 제충국을 심는 등의 소소한 대비책이 있었다.
익숙하게 그곳으로 마차를 몬 흥주는, 곡창 단지(團地)의 정문 앞에서 서류를 작성하는 관리들에게 다가갔다.
“…어디서 오셨소?”
“동진군에서 왔습니다.”
“그래요? 신원부와 구비된 서류를 제시하세요.”
“예.”
수레 뒤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첫째 형은 진작 일어나 있는 모양이지만, 동생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가만히 관찰할 모양이다.
책임관리의 부하 관리로 보이는 자가 사무소에 들어간 뒤, 몇 분이 지났을까.
다시 나온 부하의 말을 들은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경비병에게 눈짓하여 곡창 단지의 문을 열도록 했다.
“따라오시오.”
― 이럇
부하 관리가 말에 올라 천천히 먼저 인도했다.
지정된 창고에 다가선 그가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창고 내부가 보였다.
그곳에도 엄청난 수의 쌀자루가 쌓여 있다.
“보관할 만큼 보관하시오.”
흥주와 첫째 형이 수레에서 쌀자루들을 내리자, 그것을 하나하나 확인한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무언가를 적었다.
“확인했소이다. 매매를 원하시거든 환미소로 가시구려.”
“감사합니다.”
가장 귀찮고 가장 힘든 일을 끝마친 흥주와 첫째 형이 허리를 펴고 땀을 훔쳤다.
“어후, 힘들구만.”
“형님, 온 김에 맛있는 것도 좀 먹고 그러죠.”
“맛있는 거 뭐, 또 거북열매 피자 같은 것이나 먹으려 그러느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형제는, 그러나 환미소에 들어간 이후부터 얼굴이 조금씩 굳는 것을 느꼈다.
환미소는 고려의 관청이다.
농무부 소속으로, 미곡을 화폐로 교환해주는 장소.
그 성질은 약간 독특했다.
미곡의 특수성으로 인해 반쯤은 시장 논리가, 반쯤은 정치 논리가 적용되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수요와 공급이니, 쌀 가격의 변동에 대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대체로 풍흉이이겠지만.
환미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아니, 미곡의 가격이 또 떨어졌소?”
들려오는 소리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쌀 한 자루에 열 동이라니! 이 무슨!”
제국화폐 체계인 상평보에 의하면, 1은환은 100동전(동냥이라고 하기도 한다)이며 1금원은 10은환이다.
상대적으로 제국에 은이 많은 까닭에 은환이 많이 유통되지만 동전도 그만큼 많이 돌아다니는 상황.
흥주는 그 말을 듣고 눈을 치켜떴다.
과거엔 꽤 오랫동안 은환 1개 정도로 양질의 쌀 3포대를 살 수 있었다 한다.
한 번 은의 가격이 폭락하여 화폐경제가 뒤숭숭해진 경우가 있었지만, 시중께서 포토시를 막아버림으로써 그 현상은 다시 재발하지 않았다.
그 뒤로는 대충, 33전이 쌀 1포대의 가격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요즘 들어 이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그는 열아홉 살에 불과했기에 과거의 일을 많이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형이나 아버지,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보면 현재 이 가격은 솔직히 말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열 동이라니. 그렇다면 1환으로 열 포대를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의 입장에선 열 포대를 팔아야 1환을 번단 말인가?
흥주는 환미소 관리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환미소 관리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옆에서는 농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이해가 되지 않소! 올해가 유난히 풍년이었던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반면 최근에 발간된 조보를 들고 있는 한 농부가 그것을 흔들어 보이며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북려의 밀 농사가 엄청난 소출을 걷었답디다….”
“허어….”
“조보에 따르면, 심지어 10전도 나라에서 농민들의 생계에 타격을 주지 않기 위해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라 하더이다.”
“…외국에 팔면 되지 않겠소?”
“외국에 파는 것도 한계가 있잖소. 배로 실어나르는 시간도 고려해야 하고.”
“이미 거의 헐값에 저기 저, 어디냐, 옥저? 그런 곳에 식량을 팔고 있다오.”
농민들이 탄식을 흘렸다.
“도정을 최대한 미뤄야지요.”
“그런 말 마시오, 도정하지 않고 묵힌 작년 쌀도 얼마나 많은데….”
“낸들 더 떨어질 줄 알았나.”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흥주가 맏형에게 말했다.
“이거 큰일 난 거 아닙니까? 우리 면포도 사야 하는데요. 그냥 쌀을 시장에 팔아볼까요?”
“…아서라, 환미소라서 이 정도의 동전을 받을 수 있는 게지, 시장이었다면 대여섯 동을 받고 팔 각오를 해야 할 게다.”
맏형은 입술을 짓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나이 지긋한 다른 농부들도 미곡 시장에 가서 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할 때, 이미 한 번 들렀거나 들르지 않더라도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겠지.
“형님, 나 장가가야 한단 말이오!”
흥주가 발을 동동 굴렀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열아홉, 나이가 충분히 찬 흥주는 저기 온현 바로 옆 지역, 상명에 사는 전씨 가문의 열여덟 살 난 여인과 예전부터 교류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마음이 맞아 혼례를 결심하니, 양가의 부모들은 서로에게 할 패물들을 마련하고 있는 단계였다.
그중, 옷감은 정말로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흥주는 지금 가져온 이 미곡들로 면포들을 사야만 했다.
맏형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수는 없었다.
면포는 여전히 비쌌고, 쌀가격은 확 떨어졌으니까.
그리고 떨어진 쌀가격은 금방 오를 것 같지도 않았다.
사실 떠오르는 수가 있긴 하지….
맏형은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내 모아놓은 돈이 좀 있으니, 그걸 보태보마.”
“혀… 형님.”
“다만, 이번에는 우리가 뭐 맛있는 것이나 재미있는 것들을 할 여유가 되지 않겠구나.”
“…죄송합니다 형님.”
“네 잘못이 뭐가 있겠느냐.”
농사를 열심히 짓고, 심지어 하늘도 그들을 버리지 않아 곡식의 산출량은 이전보다 살짝 나아졌는데 벌어들이는 돈은 더욱 떨어졌다.
먹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어찌 먹는 것만이 전부겠는가.
먹고 ‘사는’ 것이 문제이지.
두 형제는 어쩔 수 없이 환미소에 곡식들을 전부 매각하고, 그 금액에다가 형의 돈을 보태어 포목점에서 면포를 산 다음 수레에 싣고 집으로 떠났다.
형제의 어깨가 가라앉아 있었다.
* * *
산업화를 위한 사회적 배경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산업화를 하기 위한 기본적인 인구와 그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풍부한 농업생산물의 존재 유무를 꼽을 수 있겠지.
전자는 지금까지 장애물이 되었었다.
하지만 근래에 북려의 해안가를 대부분 장악하여 활발한 개척사업을 위해 오지로 사람을 내몰지 않게 되자, 인구의 수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개척이란 많은 희생을 필요로 했었으니까.
동화되는 인구수도 있었지만 역병과 적대적 원주민, 그리고 범죄와 기타 여러 가지 재난들로 인해 꾸준한 인구의 손실이 있었던 것.
허나 이젠 해안가를 전부 다 연방의 구성원들이 장악한 상태였고 외세는 고려의 외교전으로 사실상 북려에 대한 침탈 의지와 시기 또한 놓쳐버렸으니 이제는 숨을 돌릴 기회가 있었다.
그렇다면 농업생산물을 보자.
일단 세분화된 작물들은 강수량과 토질, 그리고 기후 등에 의해 골고루 나뉘어 재배되었다.
고려 토종의 작물들 말고도 구대륙에서 들여온 작물들도 있었지.
날씨가 추운 곳에서는 감자나 호밀.
날씨가 더운 곳에서는 벼와 고구마.
강수량이 풍부한 곳에서는 벼.
적당히 내리기는 하는데, 벼농사를 짓기에는 부족한 땅에는 밀을.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콩과 땅콩, 클로버와 기타 작물들.
기후에 대한 경험적 자료도 이백 년이 넘도록 관측하여 기록한 결과 충분히 쌓여 있었고 상황에 따른 작물도 충분하니, 하나의 식물에 번지는 식물 돌림병도 예방이 가능했다.
이토록 발전한 농업기술에, 종자 자체의 개량 기술도 큰 몫을 거들었다.
농무부 관료 김의중은 농무부의 중요한 과업이자, 그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업인 주작물의 종자를 개량하는 일(육종학)을 맡고 있었다.
벼의 내한성을 개선하는 품종을 만들기도 했고, 또한 감자와 고구마의 크기, 옥수수 낱알의 크기 같은 작물 자체의 생산성을 개선하는 업적도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효과를 내었던 품종은 벼도, 감자도, 고구마도 아닌 밀이었다.
어떤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단지 표본의 자료들을 수집하기 위해 고려 토종 품종인 앉은뱅이 밀과 유럽의 밀을 교접해 보았던 김의중은 그 결과물로 얻은 잡종 품종이 이전의 품종들보다 훨씬 더, 실로 엄청나게 개선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밀에, 조부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의곤(依坤)밀이라 이름 붙였다.
기존의 고려 밀 품종인 앉은뱅이 밀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낱알이 작아 소출이 형편없다는 것이지.
반면 유럽 밀 품종은 생산성은 고려 밀에 비해 빼어났으나 키가 너무 높아 바람에 잘 쓰러지고 벌레에 약하며 덩치가 큰 만큼 지력을 많이 소비하면서 광합성 또한 많이 요구했다.
그러나 둘의 잡종인 의곤밀은 그 둘의 단점은 없애고 장점만을 가져왔다.
즉, 앉은뱅이 밀이 가진 강력한 생명력과 식물 신진대사에 더해 유럽 밀이 가진 생산량을 얻게 되었으니 실로 완벽한 조합이라고 할 수 있던 것이다.
“키는 낮고, 토지가 썩 좋지 않음에도 낱알은 아나톨리아의 품종보다도 우월하니, 과학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이더냐!”
의중은 자신의 발명품을 찬탄했다.
보고를 들은 상민 또한 실로 기뻐하며 엄청난 포상을 내렸다.
이후, 남북려에서 밀을 재배하는 기후에 있는 농가들에게 이 품종을 보급하니 정말로 아무런 변동이 없었음에도 의곤밀을 재배한 농가는 전년에 비해 무려 2할 4푼의 추가생산량을 거두었다.
의곤밀도 계속 개량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실로 놀라운 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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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위 그림은 앉은뱅이 밀과, 서양밀의 교접이 어떻게 녹색 혁명을 이끈 소노라 64호까지 갔는지에 대한 도표입니다.
의곤밀은 아직은 여러 가지 밀들의 교접 결과물인 소노라 64호에 비견되진 않겠지만 서양밀과 고려밀의 장점을 취합한 품종이니 노린 10호쯤에 비교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