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58화 (258/653)

조천사(3)

태조 시절, 한바탕 내전을 겪었던 내성은 이제 외성이 생기며 창천궁의 황성이 되었다.

즉, 이제 창양 도성 바깥에서 황제를 알현하려면 제1외성과 제2외성, 그리고 내성(황성)과 궁성의 순을 지나쳐야 하는 것.

내성 안으로 들어오면 가히 새로운 도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광대한 면적이 다시금 펼쳐진다.

태조가 창업한 이후, 첫 도읍을 정할 때 수도의 기능을 수행했던 창양 내성부는 이미 백칠십 년도 전부터 많은 민간 건물들이 밖으로 이전하고, 오로지 창천궁성만이 서서히 덩치를 불리며 그 안쪽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선으로 치자면 성저십리라 일컬어지는 도성의 외곽이 외성이 둘러지며 성내가 되었고, 기존의 성내는 경복궁이 팽창하며 영역이 좁아진 것.

그렇기에 내성 내에는 이제 신료들이 정무를 보는 관아와 구궁궐 연경궁성, 그리고 시중의 궁이라 불러도 무방한 정녕당과 창천궁성밖에 남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궁성 안쪽도 필수적인 건물이 상당히 많았다.

황제와 황실의 종통이 기거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당연히 제국의 태묘와 사직이 있었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이제는 잘 쓰이지 않았다.)과 시중이 정무를 보는 정식 집무실도 있었고, 제국회의가 열리는 정전인 태성전과 의회가 열리는 호민전(護民殿)도 이 안에 있었으니.

처음에 건축할 때에도 장기적인 생각으로 그 터를 넓게 잡았다는 감이 있었는데, 상민은 원래의 생각과는 다르게 공사를 하면 할수록 무언가 궁성이 더욱더 커져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설해보니, 이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한 것 같고.

적어도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크기 하나는 대국에 걸맞게 컸으면 하기도 했고.

광해군의 궁궐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궁궐에 대한 자존심은, 설계자 상민조차도 차마 숨기기 어려웠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에게 시간과 돈이란 차고 넘쳤다는 것이지.

그래서 처음 이 궁궐을 설계했던 순간부터 창천궁은 재정에 무리를 가하지도 않는 선에서 계속 천천히 커져만 가 마침내 공사의 완공을 공표한 지금에 이르게 된 것.

이곳을 처음으로 오게 된 외지인, 카나리 대공 후안의 일행이 보았던 창천궁은 지금의 규모의 오직 사분의 일밖에 안 되었을 정도였다.

상민 나름대로 측량한 기록을 살펴보니 처음 삼별초가 이 땅에 자리할 때 동고려 건양에 위치했던 궁궐, 흥평궁이 24만 제곱미터, 자신의 태조 시기 동안 궁궐의 역할을 했던 연경궁의 면적이 30만 제곱미터 정도였다면 확장된 창천궁 궁성의 면적은 그의 네 배, 즉 120만 제곱미터 정도였다.

놀라운 것은, 그것이 오직 궁궐이 점유한 면적만 계산했다는 것이다.

궁성 방어시설의 너비는 따로 계산해야 했다.

성벽의 넓이가 넓으면 얼마나 넓겠냐마는, 창천궁은 태생부터 전통적인 성벽과는 아예 궤를 달리하여 설계되어 있었다.

세계 최초의 성형요새(星形要塞),

창천궁을 둘러싼 궁성은 그 특유의 기하학적인 보루로 인해 아름다운 오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성벽은 높고 얇다.

성벽에 타격을 주는 것은 투석기가 전부였고, 투석기조차도 대체로 성벽이 무너질 정도로 쏠 수 없었고 공성전 시 적 보병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선 오로지 높게 쌓는 것이 미덕이었지.

그러나, 화약의 시기엔 그런 성벽은 쓸모가 없다.

얄팍한 성벽은 너무나도 빨리 붕괴된다.

또한 산탄이라는 근접에서 가히 파멸적인 화약 무기의 공격 방식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병사들에게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재해와 같으니, 애써 기어올라도 수성 측에서 빠르게 진압할 수 있다.

높이는 여전히 중요했으나, 이제 그것이 전부는 아니게 된 것.

따라서 상민이 개념을 제시하고 후대의 도시설계자들과 기술자들이 만들어 낸 이 성형 요새는 그야말로 당대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평지 요새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완전히 벽돌로 지어진 두툼하고 뾰족뾰족한 포루는 사각이 없이 교차사격을 공성자에게 퍼부을 수 있었으며 적의 포격에도 붕괴와 같은 유의미한 피해를 잘 입지도 않았다.

하나의 온전한 돌로 만든 성벽과는 달리, 벽돌 성채란 포탄에 맞은 부위만 깨지고 나머지 벽돌들은 온전한 경향이 있었고, 설계된 포루 자체가 두터우니 충격을 흡수하는 성질도 있었다.

게다가 해자를 파내고 그 흙으로 앞에 다시 새로운 둔덕을 쌓는 등 계속 방어 시설물들이 보강되니 이곳을 방비하는 근위여단 이만여 명의 병력으로 물자만 충분하다면 실로 제국 전 병력과 싸워 십 년을 버틸 수 있다는 근위대장의 자신감은 그 근거가 있을 것이었다.

이런 성형요새의 축성기술은 이미 표준화가 되었으며 고려 각 지방의 주요한 요새에는 모두 적용이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유럽도 고려와 교류를 하며 이 축성기술의 효용성을 깨달았다는 것.

사실 상민이 없었더라도 유래 자체가 15세기 후반, 딱 지금의 이탈리아였을 테니 언제고 만들었기야 했겠지만, 화약을 자유자재로 쓰는 고려국에 큰 위협을 느낀 유럽의 군주들이 그네들의 국토에 조금 더 빨리, 더 많이 성형요새를 짓기 시작한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크게 짓지는 않을 테다.

동아시아 4개국과 중미 여섯 나라의 조천사 행렬, 그리고 유럽에서의 사신단들이 도착한 궁성은 이례적으로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시무시하군요. 이 거대한 궁전을 위해 그만큼 거대한 성형요새를 만들 생각을 다 하다니.”

이것과 비교하면 유럽의 방어용 성형요새는 작고 귀여웠다.

“허나 고려가 이것을 쓸 일이 있을까요?”

유럽의 사신단들은 누군가의 질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안 그래도 태후 헬레나는 삭막한 요새를 미관상 좋게 만들기 위해 시야를 가리는 나무는 아니더라도 꽃과 낮은 관목들로 이루어진 정원을 만들기도 하였다.

유사시엔 저것들에 불을 질러 적의 발목을 묶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된다면 태후의 영령이 가슴 아파하겠지만,

아마 저 정원은 웬만해선 불타지 않으리라.

* * *

궁성 안으로 들어온 사신단들은 영빈관에서 몸을 풀다 마침내 황제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했다.

굳이 불러놓고 기다리라 한 이유는 아마 공교롭게도 이번 조천사의 왕래가 때마침 황제의 서른다섯 살의 만수절(萬壽節, 황제의 생일)과 가까웠고 또한 새롭게 태어난 둘째 아들의 탄일(誕日, 태자가 아닌 황자의 생일)과 겹쳤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핑계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황제 해선은 이런 행사를 통해 위신을 진작하고, 새롭게 얻은 봉신국들과 기존의 봉신국들과 자치령들의 충성심을 재고하고, 동맹국들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국가들에게 제국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 위압감을 선사해 주기 위해 진작부터 이 대대적인 행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조선과 옥저, 남왜조와 유구의 동아시아 4개국은 물론이고 마야와 퓨레페차, 틀락스칼라와 칼리스코, 요피진코와 투투테펙, 미시퀴트와 니카라오의 중려 군소국들과 자치령들.

네덜란드와 에이레, 마라케시의 우방국들.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잉글랜드, 베네치아, 아라곤,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의 통상관계국들.

심지어 저 동쪽의 아프리카에서 만종 교국을 통해 온 무타파의 사절도 있었다.

사절들은 이 상황에 놀라면서도 이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로 열심히 교류를 나누었다.

대항해시대를 맞은 유럽인들은 제각기 중려 및 동아시아의 국가들과 잠재적 무역로를 만들어두길 원했으니까.

카디스 조약에 의거하여 나누어버린 누산타라와는 다르게, 내륙의 주권국들은 이에 상관이 없었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서 고려와 옥저, 왜남조 및 유구까지도 고려에 입조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니 무역 이외의 영향력은 행사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것이 어딘가.

게다가.

‘적어도 왜북조와 남명은 남아있다.’

해선의 의미 모를 말 또한 그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겼다.

연회 자리에서 대외적으로 다시금 서벌의 승리를 선언한 해선은 조부에게서 받은 선물을 자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부가 그러라고 등을 떠밀었다고 해야 하겠지.

“중화였던 곳의 천명이 마침내 짐의 손에 들어왔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소이까?”

그 말을 들은 유럽의 한 사신이, 남곤에게 어설픈 고려어로 질문했다.

“천명이 대체 뭐요?”

양이가 상국의 언어를 하고, 그 상국의 언어를 자신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이 상황을 정말 묘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남곤이 한 박자 늦게 설명했다.

“…천명이라 함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운명이며, 이는 덕이 있는 군주가 세상을 통치하는….”

줄줄이 나열되는 설명을 전부 이해하기란 어렵다.

그 와중에도 유럽인 사절은 자신이 알아듣는 단어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하늘? 하늘이라 함은, 거룩한 주님을 일컫는 것이오?”

“…뭐 그렇겠지요.”

남곤은 시간상 이들이 믿는 종교를 심도 있게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며 가며 대충 들은 바로는 비슷할 성싶어 대충 긍정했다.

그의 눈에는 저 멀리 옥저의 사신단이 황제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왜 옥저가 조선보다 먼저 인사를 드리는지, 그 순번이 심히 신경이 쓰이는 남곤은 양이의 질문이 그저 귀찮았다.

“그러면 기존의 천명을 가졌다는 명은 그 천명을 잃어버린 것이오?”

그러나 양이는 집요했다.

질문의 의도가 궁금했으나, 물음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북원에 패하고, 황제도 납치당했다 풀려나고, 기존의 봉신국들마저 잃어버리니 남명이 천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어쩌면 사실이 아닐까.

남곤은 그 순간에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다.

* * *

사실 대부분의 사절들은 황제에게 인사를 드리며 성절을 축하하고 음식과 술을 마시기만 할 뿐 공식적인 외교 일정을 가지진 않았다.

물론 시중과 비공식적으로 접촉을 희망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시중은 이곳까지 오면서 새벽호 내에서 동아시아 4개국의 사절들과 환담을 나누고 일을 사전에 처리했기에 이제 쌓인 유럽의 일은 곧 방문할 로마에서 다루자고 공표한 상황이었다.

중려의 상황이야 대체로 긴급한 일이 없었고.

몇 번 온 적이 있는 유럽인 사신들이 연회장 안에 비치된, 고려 서해안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마시고 놀라 찬탄할 때 동아시아 국가들의 사절들은 눈이 핑핑 돌아가는 화려한 궁성과 연회장의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선보이는 창천궁은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아왔던 유학자들에게는 실로 적응하기 어려웠다.

남명의 경사를 가본 사람들마저도.

고려 궁궐 대부분의 건물 외형은 전형적인 주심포 양식을 따랐다.

왕씨 고려 초기부터 등장했으나 흔하게 쓰이지 않았던 팔작지붕이 해씨 고려에 와서는 보편화되어 궁궐의 지붕에 쓰인 것이 보였다.

이는 조선 건축의 발달사와 유사하여 보기 좋은 익숙함이 있었다.

다만 엄청난 수의 청기와가 이 넓은 궁성 대부분의 건물 지붕에 올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청기와 자체야 조선 또한 쓸 수 있긴 했다.

그러나 기껏 기와를 굽는 데 화약에 쓸 귀중한 염초를 허비해야 하는 까닭에 경복궁의 주요한 전각에만 올릴 수 있었지.

반면, 이곳에는 모든 전각과 심지어 궁성의 누각까지 청기와로 덮으니 햇살과 반사된 청기와가 사방에 번쩍여 실로 아름답고 찬란했다.

거의 대부분의 건물에는 목재 또한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벽 자체가 두텁고 견고한 석재와 벽돌, 그리고 견회(시멘트)로 지어져 있었다.

지붕의 무게를 견디는 공포와 기둥 또한 마찬가지.

흰개미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고려의 건축이었으나, 내구성과 불연성 또한 석재와 벽돌이 더욱 출중하니 궁궐은 사람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화재사고에도 큰 피해를 받지 않았으며 금방 복구를 해낼 수 있었다.

고려의 건축기법은 자체적인 토목기술과 공학기술, 재료의 발전으로 인해 크게 발전해 있었다.

창천궁 전각들 대부분은 건축물의 높이와 크기가 일반적인 조선의 단층 전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드높은 천장은 아마 돌을 수직으로 던져도 도달할지 의문이 들 정도.

낙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피뢰침의 설치가 필수적이었던 이유가 있었지.

자체적인 발전도 매우 컸지만, 동로마의 난민들을 받은 이후의 고려 건축은 훨씬 더 진일보했다.

두 문명권의 건축기법은 서로의 장점은 살리고 부족함은 보완하는 쪽으로 발전했고, 지금의 연회가 열리는 함녕전(咸寧殿)에 이르러서는 아름다운 이국미의 절정을 뽐내었다.

외부의 기둥에 엔타시스(Entasis, 동양에선 베흘림 기법이라 칭한다)를 적용한 함녕전은 그 내부에는 동로마 특유의 그릭 크로스와 그 위에 펜던티브(Pendentive) 돔을 올려 실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예순이 넘었던 헬레나가 쿠스코의 별궁에서 훙하고 고려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시복, 시성받은 이후에는 이 함녕전은 성 헬레나의 바실리카(St. Helene’s Basilica)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건물 자체도 웅장할진대, 그곳을 장식하는 것들도 몹시 화려하다.

함녕전의 천장 위에는 거대한 벽화가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그렸다고 했는데, 그 그림을 그린 자의 이름은 기억하기 자못 어려웠다.

‘미… 미개라재노라 하였던가.’

발음하기 어렵고, 기억하기도 어려운 그 이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이 젊은 피렌체의 조각가는 평소 메디치가에서 먹고 자며 심지어 후원을 받아 생활했었지만, 메디치가가 몰락하며 카디스를 통해 고려로 망명할 때는 가족과 생업으로 인해 함께하지 못했었다.

그 일로 큰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고려에서 다시금 은행가로 가문을 일으킨 메디치가의 가주 줄리아노의 초청을 받아 고려 황제의 궁성 중 일부를 꾸미게 되었는데, 늙어가며 기력이 쇠한 부모님을 위해 함녕전을 꾸며달라는 황제 해선의 부탁에 따라 거대한 천장화를 함녕전에 그리게 되었다.

기독교적 색채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다만 황제를 상징하는 신비로운 용을 비롯하여 여러 영물들이 뛰노는 것을 표현한 그림은 기독교 세상에서 살아왔던 미켈란젤로가 고려에 와 느낀 동양적 신비로움과 불교적 극락정토를 표현한 유일한 그림으로 기록될 것이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회화만큼이나 조각 또한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해선이 부탁하지 않아도 황제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과 자신에게 준 막대한 재물에 감동받은 미켈란젤로는 헬레나의 젊은 시절을 성모 마리아에 빗대어 조각한 대리석 석상을 바쳤는데, 이를 파나기아(Παναγία)상이라 했다.

훗날, 피에타와 다비드상에 이은 그의 세 걸작 조각상 중 하나였다.

조각은 외부인에겐 잘 공개가 되지 않았기에 사신단이 사사로이 볼 수는 없었지만, 천장화만으로 이곳의 모든 사람들의 찬탄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남이의 아들이자, 현 옥저 왕의 외척이며 이번 옥저의 사절로 온 남용태(南聳泰)는 자신의 먼 친척인 남곤을 불러놓고 취기가 돋은 것이 분명한 얼굴로 말했다.

“요순우탕의 치는 오직 퀘퀘한 고문에 적혀 있을 뿐이라지만, 려현제(麗賢帝, 고려 황제들)들의 치세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곳이 어찌 실존하는 동천(洞天)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전국옥새가 이곳에 오고, 또한 우리들이 옥황(玉皇)의 조정에 입조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실로 그러합니다.”

불편한 양국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같은 가문이라는 유대감 덕분인지 죽이 잘 맞는 두 남씨가 술 한 잔에 고개를 들어 천장화를 살펴보고, 고개를 내려 고기를 집어 씹은 뒤 다시금 천장화를 살펴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