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천사(2)
넋 놓고 아낙들을 살펴본 조광조와 남곤은, 이윽고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망측스런…….”
조선이었다면 치도곤을 당할 일이었지만, 사절의 신분으로 상국의 지방 속령에 온 이상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기에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러났다.
유학적 가치관이 있던 터라, 둘은 상당히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라의 법도와 관습이 땅에 떨어진 것인가?”
조광조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가 위치한 항구의 끝에서 어부가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것이 보여 다가가 말했다.
“이보시오.”
나이가 들어 머리가 하얗게 센 어부 노인이 흘깃 둘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그물을 손질했다.
“저 처자들이 저렇게 흉한 꼴로 있는데, 아무도 뭐라 하는 이가 없소?”
“저 처자들이 그대들에게 죄라도 지었소?”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그대들은 대체 왜 저 처자들의 즐거움을 박탈하려는 게요?”
“아녀자가 저리 흉하게 돌아다니는 것은 미풍양속을 해치니 사특하고 천한 것이요, 보기 싫은 것이외다.”
“보기가 싫소? 그런 것치고는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던데.”
“…옛 성현께서 이르기를…….”
조광조는 어린아이나 배울 법한 소학의 내용을 다시 읊었다.
개인적으로 소학의 법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수신의 목적을 훌륭하게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기에 그 구절을 잊어버리지 않았었다.
상국의 백성이긴 하나, 그래도 한낱 어촌의 어부이니만큼 예와 인을 알지 못할 것이기에, 그는 어린아이를 계도하는 것마냥 입을 열었다.
“되었소, 영 모를 사람들 이야기나 하는구려.
사람이란 모두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인데, 그대들은 남에게 자신들의 사상을 강요하니 밉게 보지 않을 수가 있겠소?”
“…아니, 그것은…….”
“정념을 부정하지 마시오. 감성은 모든 행위의 근거라오. 악덕이 아닌 욕망은 미덕이니 그것이 성실이라오.”
노인은 어선에 그물을 던져넣고는 사라졌다.
* * *
개천 235년(CE 1510) 4월 9일.
안내인이 말한 나흘간의 휴식은 빠르게 지나갔다.
여러 나라의 조천사들은 다시금 배에 올랐다.
이번에는 뱃멀미가 조금 덜하길 기원하면서.
들었던 대로, 이번 행렬에는 고려의 시중이 동행했다.
조선으로 치면 영의정, 고려 최고의 권력자라 하였다.
영의정도 모자라, 삼정승을 전부 합친 사람이라 봐도 무방했다.
왜남조의 사절은 이를 천조의 쇼군과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달랑 한 척만 바다를 건너왔던 것과는 다르게, 고려의 시중이 도성으로 귀환하자, 그를 호위하는 다섯 척의 함선이 그 뒤를 따랐다.
겉면에 검은 안료를 칠한 것인지, 아니면 나무 자체가 어두운 빛깔을 띤 것인지, 한 면에만 무려 서른 개의 포문을 장착한 거함.
올라탄 병사는 네 국가의 사절단 인원수를 훌쩍 넘으며, 그것도 완편제가 아니라 한다.
네 나라의 사신은 이번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개성에도 가끔 오갔던 고려의 전함, 순양함조차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전함 다섯 척.
그들이 탄 대형 화물선의 크기와 웅장함이 상당히 바랠 정도로 저 군함의 존재 자체는 비상식의 범주 안에 있었다.
한때나마 고려와 대립각을 세웠던 조선은, 과거의 행동이 자고 있는 호랑이에게 조약돌을 던진 꼴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자각할 수 있었다.
잠결에 휘두른 앞발에 뼈가 부러졌지만, 한 번 더 던져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면 이번엔 포악한 입으로 목줄기를 물어뜯을 것이 분명했다.
조천사의 핵심 인물들이 시중의 초대를 받아 크고 화려한 함선, 새벽호에 건너가 식사와 함께 환담을 나눌 때, 조광조와 남곤은 초대받지 못한 채로 선실 안에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선실의 나무 들창을 열고 밖의 전열함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조광조는 다시금 시작되는 뱃멀미에 침상으로 돌아가 누워 있었다.
반면 남곤은 비좁은 선실의 서랍장 위에서 열심히 세필을 놀리고 있었다.
“뭘 하고 계십니까?”
“사행기를 쓰고 있네, 여기서 본 것들을 조선으로 돌아가 나눌 생각이야. 저하께도 바치고.”
“…좋은 생각이십니다.”
조광조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영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일 뿐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뱃멀미에도 조금 익숙해져 예전만큼 반쯤 실성한 채로 있지는 않아 남곤의 질문에 답할 여유는 되었다.
“효직, 그대는 상국의 문자를 배울 생각인가?”
남곤이 붓을 놀리며 그리 물었다.
상국의 문자는 실로 묘하여, 고려인이나 조선인의 말을 적는 것에 몹시 편했다.
한번 배우니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어 어리석고 똑똑한 것과는 상관없이 글을 적게 된 것이다.
또한, 세필에도 좋은 장점이 있었다.
한문이라 함은, 획수와 표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고려글은 오탈자가 나도 표음문자인 덕에 헷갈릴 여지가 적으니, 세필로 적기에 상당히 편했다.
비록 상국의 법도에 따라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꾸어 적어야 하는 불편함과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는 발음상의 차이(구개음화 등등)가 헷갈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애초에 언어라는 것은 부르기 쉬운 방면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고려글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언어의 경제성을 챙겨왔던 시점에서 건너왔기에 조선인으로서도 의아할 정도로 부르기 쉬웠다.
“당연히 배워야겠지요.”
조광조는 즉답했다.
일단 상국의 글자인 데다가, 읽기도 쓰기도 쉬우니 배우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 제도에 도착한다면 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것을 구해보도록 하세. 연서궁이라는 곳에서 출간한다는데, 가는 김에 그곳도 좀 둘러보고.”
“알겠습니다. 형님.”
* * *
남쪽으로 내려간 조천사 선단들은, 이윽고 중려대륙의 구분이 되는 코치미 반도 남부 쪽을 돌았다.
제일 먼저 마주한 곳은 칼리스코 공국.
마야를 제외한 중려대륙 2왕3공 중 가장 북부에 있는 곳이었으며 기후가 건조하고 척박해 가호 수가 그리 많지 않은 조그마한 소국이었다.
그 밑에는 중려의 국가 중 가장 강성한 퓨레페차 왕국과 지리적 입지로 두 왕국 간의 갈등 구도에서 이득을 누리는 요피진코 공국이 있었으며 가장 남쪽, 마야와의 국경에는 마야처럼 태평양과 대서양을 모두 오갈 수 있어 무역에 이점을 가진 투투테펙 공국이 존재했다.
황제 해선은 이번 기회에 고려의 번국들과 고려의 영향력을 받아 사실상 자치령 수준이 된 중려 국가들, 그리고 기타 다른 세력들을 모두 모아 한자리에서 보는 기회를 마련했다.
세력 과시의 의도가 분명했다.
제국이 주도하는 질서가 이렇게 광대하다는 것을 널리 홍보하려는 자리겠지.
황제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이었다.
따라서 마야만으로 직접 선박을 보낼 수 있는 투투테펙과 마야를 제외한 다른 중려의 국가들에서도 이번 동아시아의 조천사처럼 대국에 사신을 보내는 행렬을 꾸려 시중의 남하에 맞추어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삽시간에 행렬이 더 불어났다.
자세한 내막을 들은 동방 네 나라의 조천사는 어딘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마야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세력이 훨씬 약소하지만 다섯 국가가 더 있다.
군주의 총애를 얻어 후궁으로 든 여인으로 이들 나라를 비유하자면, 후궁이 되어 보니 자신과 같은 여인들이 이미 궁궐에 많이 있는 노릇이다.
알게 모르게 서로를 견제하고 있던 조선과 옥저의 사신단은 그 순간에는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다.
질투라는.
일행은 더 내려가, 마침내 니카라오 운하에 닿았다.
운하 자체야, 중원의 황조도 만든 것이니만큼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 운하는 중원의 대운하에 비해 길이도 짧았다.
그러나 말 그대로 낮은 산을 뚫어버린 공사현장, 즉 양옆에 잘려나간 산허리가 보이는 이곳은 단순히 강줄기를 긇어내었던 수준의 중원 운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견고하며 복잡했다.
조광조와 남곤이 물을 이용해 배의 고도를 조절하는 거대한 갑문의 운용에 감탄하며 바라볼 동안, 갑자기 배가 쭈욱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불지 않고, 돛을 전부 접은 상태인데, 어찌 그러나 옆을 보니, 큰 소리와 함게 웬 쇳덩이가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타 열심히 삽으로 숯과 같은 것을 퍼담고 있었는데 연유는 몰랐다.
거대한 배가 앞으로 쭉 나아가니, 마침내 큰 호수가 나왔고, 강을 따라 남하하니 다른 바다가 펼쳐졌다.
이 운하는 그 생김새보다도, 거대한 대양과 대양을 뚫어버렸다는 그 상징성이 대단한 것이다.
남곤은 서둘러 기술했다.
[황하와 회하, 그리고 장강을 잇는 중원의 대운하는 길이가 길지만 결국 강을 이은 것에 불과했으니, 산을 깎아 대양과 대양을 이은 천조의 운하에 감히 비할 바는 아닙니다.]
* * *
개천 235년(CE 1510) 4월 18일.
[조천사가 기주 서해안을 지나 전주에 도달하였습니다. 4월임에도 날씨가 무더워 살기는 좋지 않지만 여러 맛있는 과일이 나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의외의 사실을 들었는데, 상국에서는 학질이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역병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특효약마저 재배된다니, 이번 사행에 이 진귀한 약을 구해 왕실에 바치겠나이다.]
개천 235년(CE 1510) 5월 5일.
[조천사가 연죽곶이라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바로 앞에는 용경도라는 섬이 있는데, 수많은 양이들이 오고 가며 제 나라의 특산물들의 상국의 물건들과 교환하니 이 풍경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개천 235년(CE 1510) 5월 14일.
[조천사가 상국의 동해안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정은 많이 남아있다 하니, 이 광활함을 도저히 어찌 기술해 표현할지 실로 정신이 아득합니다.
상국의 동해안엔 현 천조의 줄기에서 떨어져 나와 서로 싸웠으나 패배하여 번국이 되었던 동예가 있었다 합니다.
허나, 같은 핏줄을 공유함에도 그 성정이 못되고 포악하여 배반하니 상국이 거대한 군세를 일으켜 마침내 징벌하여 흡수했다 하옵니다.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조선은 거리가 멀지만 경계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개천 235년(CE 1510) 5월 27일.
마침내 빌어먹을 바닷길이 끝났다.
이곳까지 온 거리만으로도 제국의 광대함을 충분히 익힐 수 있었다.
그러나 니카라오 운하를 거쳐 다시금 남려대륙의 동해안을 거쳐 마침내 창강의 하류, 태황강에 도착한 사신단들은 창강에서 보이는 주변 풍경에 놀라 해로 사행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도 없었다.
호위선들은 이미 해문에서 빠졌고 사행선들과 시중의 함선만 강을 거슬러 오르는 상황.
남곤과 조광조는 다른 사신들과 같이 하염없이 강 좌우측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미는 이미 끝난 지 오래.
이제는 오로지 이 순간을 두 눈으로 담고 싶었다.
그들이 보았던 조선 삼남의 농토는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대지였다.
끝없이 농경지들이 펼쳐져 있다.
지평선에 산은 보이지도 않는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건물들.
치수의 목적으로 설계된 것인지 다소 독특한 저수지들과 물길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것을 제한다면, 거의 모두가 다 농경지였다.
조선 땅 전체보다도 족히 두 배, 혹은 세 배는 큰 대평원.
여름이 다가오는 철, 이곳에 심어진 곡식들은 전부 다 파릇파릇하게 다가올 수확의 계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풍경 하나로, 드디어 제국의 잠재력을 깨달은 조광조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 * *
제도는 특이하게 성벽이 그리 높지 않다.
실제로 제도가 개발제한구역 너머로 계속 확장해 나가면서도 성벽을 세우는 일은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내성이 된, 옛 태조 시절부터 만들어진 성벽 이외에는 제1외성과 제2외성은 높이가 낮아 공성전 시 전술적 효용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화약의 시대.
성벽은 이미 도태된 과거의 잔재였으니 고려가 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일단, 도시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으니, 이곳을 전부 둘러싸는 성벽을 건축하는 일은 정말로 막대한 자금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창천궁은 창천궁만의 성곽과 엄중한 방어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이유로 높은 성벽 대신 군중에게 안정감을 주고 또한 미적인 아름다움을 부각하여 흰 벽돌을 쌓아 건축한 낮은 성벽은 시민들에게 적당한 안도감과 함께 아름다운 미관을 제공해 주었다.
창양의 강에 위치한 항구에서 나오니 넓게 펼쳐진 도로가 보였다.
고려의 중앙대로라 한다.
쇄석을 깔아 만든 다른 가도들과 달리, 도시 내의 중요 도로는 판석을 이용하여 건축되었으며, 울퉁불퉁하고 덜컹거리는 것이 적었다.
조선인들은 익숙하지 않은 마차에 올라 여전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의 양옆에 심어진 가로수 뒤에는, 표준적인 고려의 가옥이 있었는데, 대부분 3층에서 4층의 높이라 이런 복층 건물이 거의 없다시피 한 조선인들에게는 자못 충격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모든 건물이 죄다 벽돌을 올리고 지붕은 기와로 만드니 초가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의복을 잘 갖추어 입고 단정하며 얼굴이 깨끗했다.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를 자르는 관습을 가지고 있어 조선의 문신들은 처음에는 의아하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적어도 변발보다는 훨씬 나았고 보다 보니 시원한 것이 머리에 이도 없어 보였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머리를 자를 욕구는 전혀 없었지만, 새삼스럽게 갓 밑의 머리가 가려운 것을 느낀 조광조가 이윽고 무엇을 보고는 경호성읕 터트렸다.
번쩍한 것이 눈이 아플 정도였다.
“형님!”
다른 편 창에서 밖을 구경하고 있던 남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저것, 유리가 아닙니까?”
실로 투명한 판유리가 있는 건물, 간판으로 ‘메디치 은행’이라고 적힌 곳이 보였다.
둘의 의문에도 불구하고 마차는 달리는 터라 금방 뒤로 사라졌지만, 그 둘은 일반적인 백성이나 혹은 가게가 저 귀하디귀한 유리로 창을 장식했다는 것에 기겁해 있었다.
조선인들은 유리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이미 예전부터 그 기술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니 이제 유리창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리창이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에 기원했다.
먼지와 비바람을 막으면서도, 햇빛은 들여보내고 밖의 광경을 지켜볼 수 있는 것.
최초의 마판 유리는 로마의 시대부터 있었을 정도로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동시대의 유럽도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제조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
물론 여전히 마판 유리의 제조공법은 귀한 노동력과 동시에 섬세함까지 요구했기에 값비쌌다.
하지만 고려의 거리는 가호 수의 절반 이상이 어떻게든 유리 창문을 보유한 것으로 보였다.
상국의 백성들은 이미 먹고사는 문제만을 관심사로 두는 수준이 아닌 모양이다.
제각기 꾸며놓은 가옥들의 창문이 이리저리 번쩍번쩍, 눈이 아플 정도로 부셨다.
마차는 계속 달렸다.
향긋한 냄새가 풍겨왔다.
먹을거리를 전시한 가게들인데, 역시 이곳에서도 유리창이 있었다.
덕분에 가게 안쪽 길거리의 먼지가 음식에 닿지 않으니, 돌이 씹히는 불쾌한 경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상국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았다.
이곳, 저곳 그다음 곳을 둘러봐도.
소고기와 돼지고기, 양고기와 닭고기는 물론이고 물쥐나 꾸이 같은 다소 특이한 가축들의 고기가 꼬챙이에 꿰여 구워지고 있었다.
농사에 쓰이는 귀중한 소를 함부로 잡지 말라고 우금령을 내릴 정도였고 잡을 때마다도 관아에 신고를 해야 했던 조선이다.
돼지고기도 작고 볼품없어 잘 즐기지도 않았는데, 애초에 고려마냥 불교적 풍습이 있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양반이 아닌 민초들에게 육식이란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살기 급급하니 기껏해야 잔칫날에나 할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일 뿐.
‘그러나 이곳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길을 가다 점포에 들러 고기를 사 먹는구나.’
떡과 빵을 파는 곳, 국수를 파는 곳.
건락을 파는 곳과 주류를 파는 곳
아이들을 위한 과자를 파는 곳.
이 풍요로운 물산은 대체.
창 밖으로는 이제 창양 특유의 원형 광장과, 그곳에 세워진 개선문이 보였다.
정말로 머리를 들어 봐야 할 정도의 거대한 건축물.
그곳의 빈 자리에 새로운 조각을 넣는 모양인지 인부들이 높게 설치된 목재 구조물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보였다.
[또 한 번 제국이 승리했노라.]
[개성대첩과 안주대첩, 그리고 북원에 대한 고찰.]
[우리 고려인에게 반도의 의미란?]
조선에서는 그리도 값비싸다 여겨지는 종이가 여기서는 흔했으며 사람들은 이리저리 신문을 읽고 있다.
미주에서 만난 그 노인조차도, 말에 현기가 어려 있었지.
신선들인지 뭔지 모를 자들과, 상서롭다고 여겨지는 여러 동물들이 조각된 대리석으로 된 거대한 분수대와 폭포에선 물이 떨어진다.
남곤과 조광조는 이제는 더 이상 놀라지 않고, 그저 묵묵히 이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