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천명과 새로운 나라(3)
왜의 민족성이 제대로 드러나는 시기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천하관이 산산이 조각났을 때였다.
첫 번째 진정한 ‘천하인’ 쿠빌라이 이후, 열도의 천하관은 산산조각났고 대륙과 반도의 정세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왜 자체의 민족성은 새로운 국면으로 크게 발전되었다.
왕씨 고려 또한, 여러 북적의 외침을 겪으며 고려 민족으로서의 통합성을 가진 것처럼, 왜인들은 스스로 야마토(大和, 倭의 독음은 모욕적이라 생각하여 스스로는 잘 쓰지 않았다.)의 정체성을 깨우쳤다.
오우치 요시오키가 마침내 상국의 비답을 받아 크게 결심을 하고 촌마게 대신 상투를 틀고(고려인들은 상투를 하지 않았음에도) 이름 또한 하사받은 부여의흥이라 쓰며, 더듬거리나마 고려어를 배워 병인몽란에 조선에서 피난했던 도래인들을 우대하자, 남조 쇼군의 통치력이 잘 닿지 않았던 각 지방(휴가, 오스미, 분고, 사쓰마, 이요, 도사 등)에서는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도래인 쇼군 놈이 드디어 실성을 했구나!”
“왕을 쫓아내고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를 더럽히다니!”
유전학적 정보나 언어학적 정보, 사학적 정보가 제한되니, 불만을 품은 다이묘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그 이면에는, 저 인간도 저렇게 주군을 배신하는데 자신이라고 해서 안 될 것이 무에 있겠느냐는 그런 생각도 적잖아 있었겠지.
하지만, 오히려 부여의흥은 그러한 상황을 반겼다.
예전에도 이들은 이미 쇼군의 뒤에서 꿍얼꿍얼 불만의 목소리를 내며 온갖 일에 훼방을 다 놓았었다.
그를 죽이려 자객을 보내기도 했고.
차라리 군대를 모아 이렇게 막부에 대항하는 것이 부여의흥으로서는 더 속 시원했고 처리하기도 편했다.
물론, 그런 생각의 이면에는 예전과는 다른 근거들이 있었다.
일단 북조의 상황이 혼란하다.
북조의 간레이직을 걸고 북조 최대 다이묘 가문 호소카와 가문이 내부에서 격렬하게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両細川の乱),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즈미는 개입조차 할 수 없었다.
부여의흥과 아시카가 요시즈미 모두 서로를 숙적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둘 모두 비슷한 공통점이 있었다.
쇼군이라는 것, 실로 꼴불견 같은 지위가 아닌가.
게다가 이제는 무력적으로 언제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자신의 본거지였던 히젠과 지쿠젠, 부젠, 그리고 이번에 확실히 장악한 능도 주변부(히고, 지쿠고)와 수오, 이와미 등의 주코쿠 율령국들을 합쳐보면, 구주의 다른 세력은 물론이고 시코쿠까지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와미에는 고려군이 떠나기 전, 은광을 지키기 위해 화포를 이용해 여러 방어시설을 증축한 후 일개 연대를 번갈아 주둔시키기로 결정한 덕분에 그의 돈줄에 대한 방어도 안전했다.
훗날 호사가들이 말하게 된 동방의 젊은 다섯 군웅 중 하나 즉 이자윤, 이금과 나란히 꼽히는 부여의흥은 일신의 능력도 결코 앞선 두 사람보다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다이묘들을 재정벌하기 시작했다.
* * *
이와미 은광은 부여의흥의 돈줄이기도 했지만, 고려 동아시아회사의 재정이기도 했다.
고려 동아시아회사는 이와미 은광에 정확히 사 할 구 푼의 지분을 가졌다.
부여의흥 또한 결국 혼란기가 끝나면 이자윤과 같은 길을 걸을 테니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광산 지분의 우세권을 주는 것이 당연했다.
“꽤나 많은 양이 산출됩니다.”
조선의 일이 마무리되자 다시금 회사로 돌아온 득팔이 신이 난다는 듯 쌓여 올려진 은괴를 보고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감히 광대한 포토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곳의 개발이 제한된 지금엔 이 정도의 은도 감사하게 여겨야 할 것이야.”
빌어먹을 아대륙 자원보호법.
로베르는 욕을 하다가도, 다시 눈을 들어 은광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은광으로 유명했지만, 연은분리법과 수은채취법을 가져온 고려인에 의해, 은광의 산출량은 직전년에 비해 열 배로 증가했다.
초기 산출량이 이런저런 이유로 예상보다 낮았던 터라, 앞으로도 증가할 여지는 많았다.
자신의 돈은 아니었지만, 무려 일만 관의 은을 옥저에게 준 이후 원인 모를 복통에 시달렸던 로베르는 오랜만에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옥저의 은도 결국 다시금 고려로 회수될 것이 분명하니.’
고려가 현물이 요긴한 옥저에게 왜 괜히 은을 하사하였겠는가.
건국 초부터 파탄 난 외교 관계를 자랑하는 옥저는 북원과의 교류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은 물론 왜북조 및 조선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따라서 유일한 상인들인 고려 상인들이 옥저의 경제권을 확실히 장악하고, 또한 번국에서 더욱 원활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포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포석은 회사의 돈으로 돌아올 것이고.
“호재에 호재가 거듭해서 들이닥치니, 우리도 이제 서유럽회사와 북유럽회사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까진 아니다.”
이와미 은광 하나로 저런 말을 할 순 없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온 새로운 소식도 이와미 은광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한 호재였기에 겸양의 말을 하면서도 로베르의 귀에 입이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덜란드가 차지한 파푸아섬 서쪽에는 섬들이 상당히 많았다.
고려는 조약을 철저하게 지키라며 파푸아섬을 일부 뜯어먹은 욕심 많은 프랑스와는 달리 제국경도 서경 150도를 기준으로 경도에 걸친 섬은 네덜란드의 지배권을 인정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곳에 그들의 여왕과 왕의 이름을 따서 마리해(솔로몬해)니, 딱히 한자 뜻이 아닌 김홍의 이름을 따서 홍해(비스마르크해)니 하는 이름을 붙였다고도 했지.
어쨌든 마리해의 동쪽에는 섬들이 상당히 많았다.
변변치 않은 문명으로 대형 카누를 만들어 바다를 누비며 섬 몇 개를 장악했던 신기한 해상 부족, 통가(Tuʻi Tonga)가 다스리는 지역들도 있었고.
사람 하나 살지 않는 작은 섬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그곳들보다 북쪽에 위치한 작은 섬 하나가 바로 동아시아회사의 미래를 결정짓게 되었다.
“섬 하나가 전부 와누(구아노)라니… 실로 보물 그 자체인 섬이 아닙니까?”
고려는 초석이 매우 흔하다.
서해안의 유명한 초석 산지, 아타카마 사막을 제하고도 건조한 사곡의 해안가를 따라 새똥이 오랜 기간 굳어 형성한 와누가 상당히 많았으며 그 양은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와누는 화약 말고도, 비료의 원료이기도 했다.
형편없이 망가진 땅이라도 와누를 뿌리고 나면 다시금 벼와 밀, 심지어 하도 지력을 빨아먹어 악명 높은 옥수수마저도 계속 기를 수 있는 땅이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은 고려인들 또한 와누를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자원도 결국은 소모될 운명이다.
파먹은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 존재했지만, 시중의 마음에는 그것도 들지 않았던 모양.
아대륙 자원보호법이 있기 전부터도, 역대 시중들은 와누의 무분별한 사용과 그로 인한 도덕적 해이를 경계했다.
―스스로 농업 기술의 개발에 의존하지 않고, 와누에 의존하는 국가는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또한 이 광대한 농토에 무분별하게 와누를 뿌린다면 음용할 하천이 오염되고 마침내 와누 또한 고갈될 것이 분명하니, 그때 가서 무릎을 치며 후회해도 늦는 법이다.
지금 와서 결정했다면 모를까, 과거부터 결정된 사항이었으니 농민들도 불만은 딱히 없었다.
“이 섬의 와누는 이제 우리 회사 것이다. 우리 회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나 나우루의 발견으로 인해 새로운 길이 열렸다.
* * *
엄밀히 따지면 고려의 포로는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고려인들이 아직까지 신병을 붙잡고 있었던 까닭에, 전(前) 명 황제 주우철은 새장에서 풀려났을 뿐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또한 이제는 체념이라도 한 듯, 묵묵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고 어떠한 요구사항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바투뭉케에게 잡힌 것보다, 고려에게 포획되어 있는 상황이 훨씬 더 나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터라, 주우철이 고려의 진면목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그 수모를 준 강대한 바투뭉케가 이들에 의해 죽고 그 아들마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주우철은 그의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화려하게 마련된 개성의 거처 안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돌아간다면 그는 과거의 과오를 딛고 다시금 새롭게 일신하여 더욱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강력한 수난을 겪으며 드디어 이전까지의 행동들이 정말로 중원의 천자로서 실로 수치스러웠다는 것을 드디어 깨닫게 된 주우철은 하루하루 다짐을 곱씹었다.
‘장자는 정와불가이어해(井蛙不可以語海,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라 했었다. 그 개구리가 꼭 짐과 같지 않은가.’
‘돌아가면, 반드시 더 나은 통치를 하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결심과는 반대로 중원에서는 새로운 나쁜 소식이 퍼져나갔다.
그의 사촌 동생이 새롭게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이미 그의 나라는 그를 버렸던 것이다.
“이… 이런 몹쓸 놈들!”
사로잡힌 이후, 반쯤 죽은 듯이 지냈던 주우철이 격한 분노를 토한 것도 그것이 처음이었다.
신료들과 자신이 아껴주었던 사촌 동생이 저지른 배신.
비록, 오래된 유교적 논리로는 학정을 펼친 군주에 대한 반정을 긍정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보다도 더욱더 현세의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배신자들에 대해 복수를 다짐해도 당장, 이 거처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데 무엇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그가 절망에 휩싸여, 매일매일 술을 찾을 때 고려인 관리 하나가 다가왔다.
고려 조정에 의해 개성의 부총독으로 임명된 자는 단단히 걸어 잠긴 주우철의 거처 문을 열어주었다.
“폐하께선 석방되셨습니다.”
“…그것이 정말이오?”
명과 고려는 아직 제대로 된 교류가 없었기에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상민은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리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주우철의 정치적 값어치는, 그가 명 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 발휘된다.
남명에 경무제 주우민이 즉위한 이상, 주우철의 가치는 이제 소실될 것이었으니 차라리 상민은 어떠한 조건을 달지 않고 그를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살아있는 황제가 두 명이라면, 명은 큰 혼란에 빠지겠지.
상민의 속셈과는 별개로 주우철은 감격했다.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 편안한 침상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결국 자유였기에.
그는 실로 오래간만에 맛보는 자유에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고려의 황제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시오.”
천명을 이었다 주장하는 명의 천자로서는 실로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주우철이 고려가 제공한 맹선을 타고 남명의 경사로 돌아오자, 그를 반긴 것은 옥좌 위에 앉은 주우민의 싸늘한 눈초리와 당혹스러워하는 조정 신료들의 얼굴이었다.
“…형님께서 오셨다. 편안한 곳에 뫼시거라.”
주우민의 말에 순식간에 붙잡힌 주우철은 끌려가며 사촌 동생에게 꾸지람을 했으나 다시금 명의 한 전각에 유폐되었다.
말이 태상황이지 아예 골칫덩어리 그 자체로 취급하여 냉대는 이전보다 심해지니, 상당히 대우를 해주었던 고려는 물론이고 심지어 바투뭉케에 사로잡혔을 때보다 더욱 좋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
전각은 낡아 거미가 줄을 치고 있었고, 주는 음식은 개나 먹을 듯했으며 옷가지는 거렁뱅이와 같았다.
그래도 주우철이 무사히 귀환하자, 명 조정은 둘로 나뉘었다.
안 그래도 이리저리 권신들에게 휘둘리는 주우민을 싫어하는 청류(淸流)들은 중전 출신의 막강한 정통성을 가진 태상황을 지지했다.
주우민이 형을 더욱 핍박할수록 그런 여론이 커졌다.
하지만 청류는 소수에다가 힘이 약했고, 주우철의 업보가 있다 보니 그 여론은 어디까지나 한계에 부닥쳐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반전되었다.
명의 위기는 또다시 외부로부터 기원했다.
이번에는 고려에 의해 대칸이 죽고 명보다 더 심각한 혼란으로 빠져든 북원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 * *
바스쿠 다 가마.
마흔일곱 살의 이 입지전적인 인물은, 포르투갈의 유복한 가문에서 촉망받는 아이로 태어났다.
카스티야가 주도하던 산티아고 기사단이 고려에 의해 반쯤 와해되고 이제 그 주도권을 포르투갈이 가져오게 된 후로 산티아고 기사단에 입적하기도 했었던 이 젊은 청년은 완전왕으로 칭송받는 포르투갈의 주앙 2세의 명령하에 동인도제도로 떠나는 여정에 올랐다.
당시, 이미 포르투갈은 엔히크에 의해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인도까지 가는 항로를 개척한 상황.
동인도제도마저도 바르톨로뮤 디아스에 의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바스쿠가 받은 명령은 탐험보다도 더 힘든 여정이었다.
무려, 이 머나먼 땅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라는 명령.
비록 포르투갈인들이 근방의 잡스러운 국가들, 부족들, 그리고 해적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기와 화약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끔찍할 정도로 덥고 짜증 나는 곳은 항상 그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그러나 그는 버텨냈다.
마침내 주앙 2세가 죽고 아폰수 6세가 즉위할 때, 이곳에서 거의 본국과 맞먹는 패권을 형성한 바스쿠는 인성은 둘째 치고 능력만큼은 대단했다.
유럽의 시골에서도 그 위명이 널리 퍼질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일단, 뒤늦은 후발주자들이 한 놈씩 왔다는 것이 그러했다.
카스티야며, 이탈리아며.
그리고 그 빌어먹을 고려까지.
동인도제도 구석구석까지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스쿠마저도 고려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는 밤에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결국 포르투갈도 거스를 수 없는 중재, 즉 교황에 의한 카디스 조약을 맺었을 때, 바스쿠는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를 인정했다.
고려인들이 공고한 조약을 어길 일은 없을 테니, 사략함대를 통해 고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을 털어먹을 꿍꿍이를 하고 있었으니까.
실제로도 쏠쏠한 이득을 보았고.
하지만 두 번째 위기는 차원이 달랐다.
남의 상선에 대한 사략 행위는 기분 좋은 이득이긴 했지만, 항구적인 부의 원천은 아니었다.
게다가 고려와 친한 국가들은 죄다 태평양 건너편에서 오고 있으니 먹잇감으로 삼기에도 부적절했고.
당연하게도 항구적인 부는 대부분 대중국무역으로부터 나왔다.
그런 순간에 명이 해금을 실시하고, 다시금 포르투갈로부터 마카오를 빼앗는다?
바스쿠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횡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