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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52화 (252/653)

새로운 천명과 새로운 나라(2)

이렇게 요동치는 서쪽 초원의 정세를 이용하여 동쪽 초원을 빠르게 평정한 이자윤은 상당한 군세를 휘몰아 도읍지를 정하고 건국을 선포했다.

완벽한 반란.

조선으로서는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순간이었다.

심요와 함경, 그리고 함경 이북의 땅들이 순식간에 이자윤의 속할로 되니, 조선은 삽시간에 고려 공민왕 시절의 영토로 쪼그라들었다.

“용납할 수도, 용납해서도 아니 되옵니다!”

“저하! 저들을 징치해야 마땅한 줄 아뢰옵니다.”

북원은 조선의 만세 칭호를 금했고, 또한 관제의 격식을 다시금 원간섭기처럼 한 단계 내렸다.

북원이 패퇴하고 조선이 고려에게 사대를 하게 된 이상, 이 일이 다시 없던 일로 되길 바랐던 이금이었으나, 고려도 조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른 동맹국들에겐 상당히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는 고려가 조선에게만큼은 유난히 엄격하게 대하니, 인구를 빼 와야 한다는 고려의 첫 번째 목적을 모르는 조선의 식자들은 그저 전조 왕씨 고려의 국성 학살과 연관하여 응어리진 무언가가 있다고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제 전하 대신 저하로 불리는 이금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부왕 이계는 똥오줌도 제대로 못 가리는 처지.

따라서 세자인 자신이 대리청정을 하고 있지만, 왕과 세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기에 신하들의 목소리는 실로 짜증 날 정도로 드높았다.

“대체 어떤 수로 저들을 징치한단 말이오!”

안주대첩에서 실제로 이자윤이 조선의 북방군과 여진 기병들을 다루는 광경을 지켜보았던 이금이다.

심지어 자신의 명장인 이백록조차 끙끙거리다 결국 현 조선의 상황으로는 도무지 대적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니, 사실상 조선이 그들의 침략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황상께 다시 한번 원병을…!”

사림계로 분류되는 신하 하나가 머리를 땅에 찧으며 울부짖었다.

여기서 말하는 황상은 당연히 명의 경무제가 아닌, 고려의 황제, 해선이다.

재조지은을 다시 한번 부탁하라는 말에 이금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해결할 능력이 되지 않으면서, 어찌 이리 자존심만 강하단 말인가!’

이금도 이자윤을 싫어했다.

그러나 현실은 엄연히 냉정하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였다.

직접 보고 듣지는 못했지만 이자윤의 저런 행동에는 고려와 사전에 이야기를 나눈 바가 있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했다.

이 반역을 사주했다고까진 의심하지 않았지만, 고려가 조선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준다는 것은 별로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이금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좌의정 정광필이 신료들에게 그 사정을 설명했다.

영의정 이극돈은 병인년이 지나고 이 난리 통이 잠잠해지자 빠르게 건강을 잃어가고 있어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다.

일흔둘, 다시 털고 일어나기도 어려운 나이였다.

훈구는 빠르게 세력을 잃어가고, 이제는 조정이 사림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다.

정광필의 신랄한 말에 드디어 현실을 파악한 신료들이 말했다.

“…그래도 중재를 요청한다면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자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하나, 그 가호 수와 생산량을 조선에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여진의 유목민이 하나로 단결해 후금을 만드는 허황된 일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북방의 생산량은 삼남의 발끝에도 따라가지 못했으니까.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세자 이금이 제단을 깔고 흰색 옷을 입은 뒤 고려의 황제가 계신 남쪽을 향해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조아린 의식을 치른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개성을 넘겨준 일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상국으로서 번국의 난리를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 * *

이금의 중재 요청에, 고려는 잠시 뜸을 들이다 화답했다.

개성에 마련된 협상장에는 다시금 진람과 정광필, 이석보가 나왔다.

“심요와 화령은 허락할 수 없소이다!”

함흥이 위치한 화주, 즉 예전 원이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던 동북면의 땅은 조선으로서는 절대 뺏기지 않아야 할 아주 중요한 땅이었다.

이 땅은 달리 화령이라 불리기도 했지.

비록 주와 명의 패권 싸움 덕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라의 이름을 허락 맡아야 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가정해보면 엄연히 국호의 후보로 등록될 수도 있었던 곳.

이성계가 창업한 흥왕지지(興王之地)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이자윤이 그곳을 장악하고 있으니 정말로 왕이 흥하는 땅이 맞는 셈이었다.

이석보도 덜컥 화를 내었다.

여진 말이 많이 섞여 있어 통역이 필요하긴 했다.

“이미 그 두 곳의 땅은 형님을 따르는 지역이오! 매번 민심을 천심이라 하더니, 말하는 것은 탐욕스럽기 그지없구려!”

고려는 둘 사이를 중재했다.

둘 모두 으르렁대고 있긴 하지만, 속으로는 평화를 절실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일단, 조선은 나라가 완전히 황폐화된 터라 이 여파를 완전히 수습하려면 적어도 이금의 치세에는 꼼짝없이 내정에 매달려야 했다.

마찬가지로 이자윤 또한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있더라도 결국은 기반이 없는 무력단체 수준에 불과했다.

굶주림과 한파가 온다면, 빠르게 와해될 것이 분명한.

정말로 나라를 세우겠다면 수도를 중심으로 경기를 가꾸어 항구적인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농사와 목축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일단 체급과 정치적 중요성 자체는 아직 조선이 더 컸기에, 협정은 조선의 편의를 상당히 봐주는 쪽으로 흘러갔다.

심요 지방은 ‘민심’상 사실 이자윤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곳은 이미 북원에게 반쯤 초토화 당했고, 심요에 살고 있던 조선의 유민들은 이자윤과 그 무리를 따라 동으로 이동했으니 본래의 땅이 텅텅 비어버렸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게 된 것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니 결국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조선에겐 화령만큼이나 심요의 땅도 소중했다.

무종 이제의 업적이기도 했고, 또한 이자윤의 무리가 서해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는 방법이기도 했다.

북방의 무리라고 배를 못 만드는 것은 아니다.

왜구로 이름 높은 왜의 본토를 털어먹었던 여진구(여진족 해적)라는 말도 있었으니까.

서해에 진출할 수 있다면, 배를 통해 빠르게 수도를 타격할 수 있으니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야만 하는 것이다.

“심요와 화령은 조선에 속할 것이오. 다만 북청은 양보하시구려.”

“…….”

정광필은 마땅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사군과 북청, 그리고 북청 위의 척박한 함경북도의 땅만 내주었을 뿐, 조선으로서는 요지들을 전부 지켜낼 수 있었던 것.

의외로 이자윤의 세력 또한 이를 그렇게 반대하지 않았다.

역적이 북쪽에 나라를 세우는 것을 묵인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진전이었다.

게다가 이금은 그곳에서 한발 더 나아가 박살이 났던 이자윤의 가문의 신원을 복구해주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북쪽으로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비록 안주평야에서 상당한 감정적 마찰이 있었으나 이금은 개인의 불편한 감정에 대계를 그르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나라를 말아먹은 원흉이 경복궁의 한 전각에서 의식을 잃은 채, 하루하루 똥과 오줌을 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전조 왕씨를 박살 냈던 그 업보가 지금까지 있는데, 만약 그 응어리진 끈을 풀어내지 않으면 후세의 임금들 또한 두고두고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세자의 지시로 양산 이씨 이징옥계의 노비들은 무사히 풀려났다.

서로 얼싸안으며 북으로 향하는 그들과는 달리, 양산 이씨 중에서도 격렬하게 거부하는 자가 있었다.

“…우, 우리는 안 가면 안 되겠소?”

양산 이씨 중, 이징옥을 죽였던 형 이징석계와 동생 이징규계의 가문도 덤으로 이자윤에게 보내졌다.

이들은 형제를 죽인 공으로 제법 떵떵거리고 살아가고 있었지.

앞으로 어떠한 운명에 처할지는 모르겠으나 유교적 관습으로도 형제를 손수 죽인 가문들은 썩 보기 좋지 않았기에, 사림들조차 그들의 북송에는 침묵을 지켰다.

* * *

최종적으로 결정된 국경은 상당히 독특했다.

심요 지역은 다시금 조선의 땅으로.

그러나 이징옥이 개척했던 4군과 북청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나라의 땅이 되는 셈.

양국의 국경은 심요의 북동쪽을 본다면 동요하강과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渾江, 비류수)을 기준으로, 평안과 함경의 사이를 본다면 독로강(禿魯江)을 기준으로, 함흥과 북청 사이를 본다면 홍원현(洪原縣)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내천인 서대천(西大川)을 기준으로 하였다.

협의된 사항을 비석에 새겨 국경에 여럿 설치해 두니, 마침내 조선과 새로운 북방국의 갈등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자윤은 사태가 해결되자, 드디어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려 조정에서도 마침 답신이 왔다.

진도, 발해도, 부여도 아닌 옥저라는 국호였지만 상관없었다.

해씨 고려가 이 땅에 온 뒤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예맥한(濊貊韓)적 천하관에서 고려를 다시 칭할 국가는 존재하지 못한다.

원류(源流)인 부여조차도.

이자윤이 마침내 천하에 선포했다.

“이곳, 솔빈강(率賓江, 라즈돌나야강)에 이르러, 중경 솔빈부(中京 率賓府, 블라디보스토크, 혹은 아르툠)를 세워 도읍으로 정하고 이 주변을 경기로 정하니, 마땅히 옥저의 천년 도읍이 되리라!”

역적 이징옥의 손자이며, 조선의 명장 남이의 사위가 불과 서른도 되지 않는 나이에 국가를 창업하는 것에 성공했다.

상국으로부터 하사받은 국명과는 다르게, 도읍은 선택지가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두만강을 끼는 선택도 있겠지.

발해의 역사 속에는 동경 용원부라는 곳으로 기록된.

내륙지방에도 꽤 괜찮은 곳도 있더랬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했다.

일단 조선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선 안 되었다.

군사적 이유로 당연한 소리.

두 번째로는 신속한 오도리의 부족들은 물론이고 앞으로 건주여진을 온전히 흡수하고 동화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조선 땅이 아닌 곳에다 수도를 두는 상징적인 행위를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바다와의 접근성이 좋아야 했다.

이자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새로운 국가, 옥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고려와의 교류가 필수 불가결하다고.

고려는 강력한 해양세력이니 따라서 옥저 또한 바다와 친해져야 했다.

솔빈부에서 미타호(항카호) 주변부까지 빠르게 확장하여 농지를 최대한 확보한 옥저왕 이자윤은 진람이 준 감자를 심었다.

요리법 또한 알았으니 싹이 튼 감자를 먹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과연 진람의 호언장담대로 척박한 땅에서도 감자는 무럭무럭 자라니, 실로 대계를 논할 수 있는 작물임은 분명했다.

그래도 이자윤은 몹시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다시금 겨울을 바라보는 시점, 혹독한 겨울 전에 해야 할 일은 참으로 많았다.

감자를 심고 수확했다 하나, 식량은 여전히 부족했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인구도 여전히 정체되어 있었고.

도성의 성곽을 짓느라 궁성은 아직 짓지도 못한 채, 이자윤 또한 천막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을 정도.

그러나 이번 상황의 해결도 결국 천자의 은혜로 해결되었다.

매사에 침착한 이자윤조차도, 그의 천막 앞에 놓여진 궤짝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상께서 하사하시는 물품입니다.”

사실은 상민에 의해서 전해진 것들이지만, 어차피 황가의 돈 관리 또한 상민의 몫이었으니 황제의 씀씀이로 포장된 궤짝들 안에는 엄청난 양의 은이 들어 있었다.

나이는 젊지만 실로 온갖 일을 겪었던 탓에 표정을 함부로 드러내는 법이 없던 이자윤은 그답지 않게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이게 다 무엇이오?”

무엇인지는 눈이 있으니 다 알긴 하지만, 너무 당황하면 질문이 이상해지는 법이다.

“은 일만 관입니다.”

“…….”

동전도 아니었다.

은 일만 냥도 아니었다.

분명히 일만 관의 은이라 했다.

1관이 100냥이니, 눈앞의 재보는 은전으로만 백만 냥의 가치에 해당하는 것

이자윤 옆에 서 있던 옥저 신료 하나가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일단 사신이 기다리고 있으니 옷을 가다듬고 예의를 갖추어 하사품을 받은 이자윤은, 정신을 가다듬고 예를 취한 뒤에도 당혹스러운 얼굴만은 계속 유지했다.

돈을 받긴 받았는데, 사실 돈을 쓸 곳이 없다.

그토록 북원에 의해 황폐화가 되었더라도 조선의 한성부에는 십만이 넘는 사람이 다시금 돌아와 북적북적해지기 시작했다지.

그러나 원래부터 휑한 벌판이나 다름없던 솔빈부에는 이자윤을 따르는 옛 조선 북방군들과 심요의 난민들 그리고 오도리를 중심으로 한 여진족들이 제각기 움막 같은 것을 짓고 문명이 퇴화된 부락마냥 살아가고 있었다.

“아국의 물산은 아무것도 없는데, 은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사신으로 온 로베르는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그나마 이자윤은 옳은 선택을 내렸다.

이 척박한 땅은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기후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여름에는 살 만하지만, 겨울에는 실로 혹독한 곳이 이 북방의 땅이라는 곳이니까.

반면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는 좀 나았으며 바다를 통해 언제라도 무역을 열 수 있는 조건을 가지기도 했다.

사실 조선과의 무역도, 왜와의 무역도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오로지 고려에 기대는 감이 있긴 했지만.

“아국의 상단이 정기적으로 이곳을 오가지요. 그때마다 물건을 구입할 때, 은을 통해 대금을 지불하시면 됩니다.”

감자를 기르고 안정되게 재배할 때까지, 또한 벌목과 수렵 그리고 목축 등의 다른 요소들이 자리 잡을 때까지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던 옥저였다.

간단한 항구만 지어놓았을 뿐, 아직 성곽과 궁궐도 지으려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는데, 이 정도의 은이면 건국 초기의 성장이 상당히 편해질 것이 분명했다.

동아시아회사라는, 결코 작지 않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로베르조차도 은 일만 관이라는 단위의 재물을 눈앞에서 직접 본 적은 지금이 처음이니 말 다 했지.

미주로 가 만나 뵌 시중께선 ‘마셜 플랜’이니 뭐니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해할 수는 없었다.

사실상 고려는 실로 엄청난 특혜를 옥저에게 주고 있는 셈이었다.

전국옥새의 가격은 충분히 그 정도이긴 하지만,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선 그걸 몰랐으니 실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자윤은 정말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본래, 바로 옆 중원의 나라들과 행한 사대란 미묘한 관계였다.

중원의 나라들은 반도의 나라들이 굴복하는 것은 좋아했으나, 팽창하는 것은 극히 경계했다.

반도를 정복하다 천조가 박살이 난 경우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양국의 미묘한 신경전은, 아무리 천조와 제후의 관계라도 항상 존재하기 마련.

하지만, 고려는 완전히 달랐다.

정말로 영토가 맞부딪혀 생겨나는 여러 분쟁이 없는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다른 동맹국들(에이레, 마야, 네덜란드)보다 비슷하게, 혹은 조금 더 멀리 보고 투자를 하고 있는 셈인데 동아시아의 사대 문화에 익숙해 있었던 자들은 감격했다.

“상국의 은혜에 어찌 갚을 방도가 없겠소?”

그 말을 들은 로베르는 지나가듯 말했다.

“만약 광산의 개발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전하. 일정한 지분을 받는다면 초기 투자와 개발기술까지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자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 두리다.”

* * *

무자비한 붉은 군대는, 개성에서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다가 짐을 싸 귀향길에 올랐다.

귀향길에 가는 와중, 아마고 츠네히사의 주코쿠를 들르는 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북원이라는 거대한 맹수조차도 사냥당한 마당인데, 제아무리 서국 제일의 다이묘라는 아마고 츠네히사라도 감히 고려의 군세에 제대로 항거할 순 없었다.

왜인들은 환경상 기병조차 많이 육성할 수 없는 자들.

소수의 사무라이들만이 승마하여 검을 휘두르고 나머지는 거진 다 보군이었던 것이다.

왜국의 풍운아를 자처했던 아마고 츠네히사는 결국 불타는 성안에서 할복했다.

본래 모신 주군, 오우치 가문을 배신하고 권신이 된 ‘이즈모의 늑대’의 최후였다.

아마고 츠네히사가 직, 간접적으로 지배했던 주코쿠, 즉 옛 율령국(리츠료코쿠)상으로 나가토와 수오, 아키와 이와미, 이즈모와 빈고의 지역이 남조의 손에 다시금 확보되었다.

혼슈섬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던 남조는 단 한 번에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다.

아마고의 최후 이후, 사전의 약속대로 고려는 능도로 진군했다.

명분은 이미 충분히 있었다.

“왜… 왜들 이러시오!”

능도의 궁궐, 노토성에서 쉬고 있던 남왜왕은 앞바다인 아리아케해를 가득 메운 거대한 흑선들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심지어, 남왜왕을 호위하는 일부 무사들을 제외하고 쇼군의 통제를 받는 자들이 전부 무기를 내려놓자 남왜왕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붙잡혔다.

노토성을 세운 쿠틀룩테무르는 방어에 편집증적으로 설계된 왜 고유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북원의 양식대로 자신의 궁궐을 지었으니 수비하기에는 썩 좋지 않았다.

물론 왜 고유의 궁궐도 함포에는 쉽게 박살이 나는 고로 별 의미는 없었겠지만.

“사… 살려만 주시오!”

감히 황금씨족의 일파를 참칭했던 남왜왕이 고려인들에 의해 강제로 그 왕위에서 끌려 내려오니, 개천전(前) 2년(CE 1274) 쿠빌라이에 의해 천황의 이름을 상실했던 남왜왕은 비로소 고려에 의해 혈통마저 단절되게 되었다.

죽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남왜왕의 일가는 마침 성전을 다 짓고 남쪽으로 떠나려 하고 있던 마야군과 합류하여 루밀 키치파닐에서의 새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우치 요시오키의 시대가 열렸다.

아직은 왜왕 공위기를 통치하는 쇼군으로 계속 이어갈 것이지만, 차츰 도래인계를 받아들이면, 그 또한 당당히 왕으로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도 고려 천조에 입조해야 한다.’

이자윤이 그러했듯 요시오키 또한 안주대첩 이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병들어 신음하는 중원의 천하관에 기대기보다는, 고려가 주도하는 범(汎)예맥한계 천하관에 탑승해야 한다고.

이와미 은광의 지분을 많이 주고, 또한 다른 광산들에 대한 개발도 허락했지만 요시오키는 그런 경제적 관계보다도 더욱 나아가길 원했다.

“신, 대내의흥(오우치 요시오키의 한문 이름)이 엎드려 청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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