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50화 (250/653)

제사

조선의 북방군과 남방군은 많은 완충지대, 즉 마야와 남왜군, 고려군의 군막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정반대편에 떨어져 있었다.

‘역시나 대단하구나.’

유교적 질서하에서, 국가의 병사였다는 사람들이 본디 섬기던 주군을 배반하고 새로운 주군을 섬기는 일은 상당히 힘들다.

중앙조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때도, 제후들은 협천자를 하길 원했지, 창업을 하려는 시도까지 하는 자들은 많이 없었다.

그리고, 성공한 자들은 죄다 일세의 영웅이라 불리게 되었고.

비록, 조선이 북원에 의해 거의 망할 꼴이 되었음에도 원래 작은 나라라 조정의 영향력은 다시금 빠르게 국토에 뻗고 있었다.

하지만, 이자윤은 그 가운데에서 이미 남이와 그의 사후에는 이자윤을 따르는 심요의 난민들은 물론 조선 조정에 크게 실망하여 돌아선 함경의 민심을 통해 자신의 기반을 다시금 마련하고 있었다.

함경은 이성계의 주 무대.

그러니 이씨 왕조에서 상당히 중요한 곳이기도 하여 꽤나 신경을 많이 썼다고 들었다.

하지만 결국 조정의 무능함은 이곳 변방이 사사건건 여진에 의해 약탈당하는 꼴을 일으키고야 말았고, 이들은 다시금 예전과 같이 자신들을 제대로 지켜 줄 사람을 필요로 했던 것이 분명했다.

사민정책으로 위로 끌려온 자들도 조정을 썩 좋아하지 않겠고.

이자윤의 천막으로 간 진람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이자윤을 호종하는 병사 하나가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천막의 문을 열었다.

“누추한 곳까지 오셨으니 차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이자윤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자신의 천막 안에서 서서 이리저리 거닐고 있다가, 진람이 방문하자 그를 탁상으로 안내했다.

탁상을 두고 마주 본 이자윤의 얼굴은 한층 편해 보였다.

“아까는 결례가 많았습니다. 아직 어려 속의 감정을 완전히 절제하지 못하는 추태를 보였으니, 장군께서는 용서하여 주시지요.”

진람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 용서를 받았다.

이금 본인이 직접적으로 한 일은 아니지만, 이씨 왕조는 이자윤의 원수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역적 몰이하여 참혹하게 죽이고, 일가를 완전히 풍비박산 냈으니 자다가도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연좌제를 가혹할 정도로, 그리고 추할 정도로 하고 있었다.

이징옥 같은 누명을 받은 반역자의 일가 중 남자를 사사하고, 여자들은 고관대작들에게 노비로 하사했다.

아비와 형, 삼촌과 남동생과 사촌들은 전부 다 끔찍하게 죽고 어미나 이모, 누이, 사촌 여동생들은 원수의 집안에서 온갖 정신적, 육체적 희롱을 당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니 반역(모함의 결과로 생겨난)의 대가는 참으로 혹독했던 것이다.

이자윤이 이금 앞에서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

고려도 국가적 중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연좌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가장 최근의 누구만 봐도 그 가족들의 생명을 거두지 않았고 이미 폐지된 노비로 핍박하지도 않았다.

단지 한적한 곳에 개척을 하라 보내니, 당사자야 힘들겠지만 아마 가장 온건한 벌을 내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잠시 누군가를 떠올린 진람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공… 아니 전하께서 이 사람을 따로 보자고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이자윤에 대한 창업 제의는 대외적으로, 특히 조선에게는 비밀이라 수뇌부들이 모인 곳에서는 적당히 대했지만, 이자윤은 전투가 끝나자마자 그 제의를 수락했으니 진람 또한 제대로 된 격식을 이자윤 앞에서 갖춰야만 했다.

‘이해가 가지 않아. 시중께서는 대체 왜 이런 수고를 구태여…….’

이자윤의 능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창업의 건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 척박하고 추운 땅에서 대체 어떻게 국가를 세워 조선과 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중원과 저 멀리서 거대한 땅을 일으켜 정복해 온다는 서쪽의 무리(대체 어느 국가를 말하는지 몰랐다.)를 견제한다는 것인지.

그러나 까라면 까야 했다.

정치적 대전략은 시중과 조정의 대신들이 논하는 것이지, 일선 사령관은 군사적 전략을 짜는 것에나 집중해야 했다.

이자윤은 탁상 위에 있는 상자를 한두 번 쓰다듬더니 이윽고 단호한 손짓으로 그것을 열어 진람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대원제국 황실의 옥새입니다.”

“……!”

그제서야 모든 일의 전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던 진람이 신음성을 흘렸다.

“바르수 볼라드가 목숨을 대가로 협상한 게로군요?”

“예.”

“전하께서 이것을 저에게 보여주신 까닭은?”

“이러한 신물은 격에 맞는 자가 소유해야 하니 어찌 한낱 변방국의 제후가 천자지새를 품에 안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황상께 진상하오니, 부디 아국을 기특하게 여겨주시라 전해 주십시오.”

바르수 볼라드에게서 옥새를 처음 얻었을 때 든 탐욕과 야욕은 이미 마음 정리를 끝낸 이자윤의 얼굴에서는 이제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진람은 옥새를 끌어당겨 천천히 살펴보았다.

백옥.

따라서 색깔은 고려에서 최고로 취급한다는 경옥의 녹색과는 달리 흰색이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세월을 머금은 귀물이 가진 알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자윤은 옥새를 바치면서도 그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람은 오히려 그러한 그의 태도에서 상당한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제법 멀리 볼 줄 아는구나.’

당장 이 자리에서, 옥새를 마치 판매한다는 듯 협상을 하였다면, 자신은 물론 고려 조정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을 것이다.

한낱 돌 쪼가리에 심력을 쏟지 말자는 의견도 나오겠지.

그러나, 대원제국의 상징이라는 옥새를 황상에게 진상한다는 형식으로 바친 이상, 고려의 황제는 그 대가로 상당한 하사품을 내려줄 것이었다.

그것이 강대국의 위엄이니까.

이 건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적 의견도 반영하지 않겠다 스스로 다짐한 진람은 감사를 표하며 옥새를 챙겼다.

직접 보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여 이것이 사기극이라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황상께 바치기 전에 일부 학자들을 불러 이것의 진위를 조사하기로 한 진람은 이자윤과 다음 문제를 논의했다.

“조선은 한동안 운신의 폭이 크게 제한될 것입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적어도 몇 년간은 대외적 활동을 아예 할 여력이 없겠지요. 전하께서는 그 기간을 알차게 쓰셔야 할 겁니다.”

“예.”

“기회를 틈타 칭왕을 하세요. 분쟁이 일어난다면 아국은 조선과 전하의 나라 양측에 중재를 할 겁니다.”

“…정식 국호는 언제쯤 하사받겠습니까?”

“조정에 장계를 올렸으니, 금방 답신이 돌아올 겁니다.”

그동안, 이자윤은 조선을 계속 흔들어 놓아야 했다.

이들이 더욱 절박하게 고려에 매달리도록.

“귀국에게 선물을 드리지요. 이것은 옥새와 무관한 것입니다.”

진람은 포획한 물자 중 일부를 이자윤에게 넘겨주었다.

만여 필의 몽고마 중 절반을.

도합 거의 이십만에 달하는 몽골군의 병장기 중 삼분의 일을.

그리고 육 개월 치 식량을.

“그 식량 안에는 감자도 포함되어 있지요. 그것의 특성과 농사법에 대해 상세히 아는 자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녕 그 작물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감히 전하께 장담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끝없는 팽창에는 비옥한 토지를 요구하는 주력 작물들 말고도 척박한 곳에서 잘 자라는 감자와 고구마가 엄청난 활약을 했었다.

진람은 물론이고 고려인이라면 모두 공감하겠지만, 이 시대 무장들은 한낱 작물이 나라를 구원한다고 잘 믿지 않는 모양이다.

‘흙에서 자라 볼품없는 줄기를 캐 먹으니, 믿겨지지가 않겠지.’

그러나 사실이다.

일만 명의 정병보다, 오히려 이 작은 감자 하나가 더욱 큰일을 할 것이다.

고려는 어차피 유럽에 감자가 전파된 이상, 동아시아에도 결국은 이것들이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감출 이유는 전혀 없었고, 차라리 에이레의 경우처럼 그들에게 우호적인 국가에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 판단했기에 이러한 작물을 전해주는 것에 미련은 없었다.

“말은 끌고 가신다니 그리 알겠고, 나머지 물자들은 배를 통해 직접 보내드리지요.”

* * *

그 후로 진람은 여러 일을 처리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람을 구해보았다.

“학자들을 불러모아 이것의 진위를 가릴 수 있겠습니까?”

세공기술은 무척이나 빼어났지만, 어딘가 상당히 투박한 면(시대적으로)이 있어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꼬부랑거리는 한자도 무슨 글씨인지 알아먹기 힘드니, 그는 중원의 학자들을 불러모으기로 했다.

조선의 학자들이야, 중원의 옥새를 본 적도, 관심을 가질 이유도 있겠는가.

한창 개성과 신벽란도에 동아시아회사의 건물을 세우느라 분주히 오가고 있던 로베르는, 그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다.

“마침 적당한 자가 있군요.”

로베르의 지시로 지운학이 개성에 발을 디뎠다.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던 터라 이전보다 더욱 살이 빠진 얼굴이었으나, 과거 날카롭고 불순하며 오만했던 눈빛은 상당히 바뀌어 어딘가 허허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진람은 애매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옥새에 대한 설명을 들은 운학이 곧바로 이름을 꺼냈다.

“영파에 있을 때, 벗을 여럿 사귀어 두었습니다. 양명과 같은 학자들을 초빙한다면 가능할 성싶습니다.”

“알겠소.”

중원의 학자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생겼다.

그러나, 진람은 축객령을 내리는 대신 지운학을 계속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운학은 말 대신 자신의 행낭에서 주섬주섬 한 권의 책을 꺼내었다.

“어리석은 과거에 생각했던 것들, 그리고 지금 와서 깨닫게 된 것들을 정리한 책입니다.”

“……?”

의문을 표하는 진람의 얼굴에, 지운학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중께 전달해 주십사 하고 드리는 겝니다.”

그렇다고 지운학의 유배 생활이 풀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단 진람은 책 또한 서랍에 넣었다.

* * *

개성.

현릉(顯陵)은, 개성 서북쪽에 위치한 태조 왕건의 능이다.

일전에 신원길과 항해사들이 한 번 들러 현릉에 배알한 적이 있었다.

국가의 공식 일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 고려의 황제였던 해윤은 상당한 만족감을 표했었다.

하물며 지금은 어떤가.

이제부턴 고려의 땅이나 다름없게 된 이곳에서 고려의 군악대가 장엄한 황실 예식의 예악을 연주했다.

전쟁이 갓 끝났음에도 상다리가 휘어지는 제사상이 올라왔다.

고기와 생선, 채소와 여러 열매들, 과거의 고려와 현재의 조선에서는 보기 힘든 다소 이국적인 음식들까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맛있는 음식들 옆에는 향기로운 술이 놓였다.

그 제삿상 앞에는 고려의 사령관과 연대급 지휘관들, 그리고 다바오―탐라―개성 총독과 동아시아회사 사장이 모여 몹시 공손한 행동으로 절을 하니, 과거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전조 고려에 대한 대중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분명한 자국의 뿌리가 분명했다.

서벌을 주장하며 여기까지 와서 선조들의 복수를 할 만큼 계승의식이 뛰어났지.

그러나 전조의 국성 왕씨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들어보자면 일단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심각하게 무능했으니까.

그래서 일반적인 고려인들은 결국 전조 왕씨 고려가 무너졌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성계의 자손들에게도 적대감 같은 것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대중적인 인식과는 달리, 황실의 인식은 좀 달랐다.

정통성을 따라 이어져 내려오는 왕건의 혈통은 몹시 존중받아야 했다.

현종의 혈통 또한.

그러니 황상과 선황께선 분명히 몹시 흡족해 하실 것이다.

특히 제삿상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저 '물건' 덕에.

이 화려하고 대단하며 향기로운 제사상 옆에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끔찍한 물건이 하나 있었다.

소금에 절여진 수급이 나무함에 들어 있었던 것.

무엇이 그리도 원통한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그 머리는 잘려진 목의 단면에서 핏물이 이리저리 튀어 변발이 흉하게 풀어헤쳐진 머리에 엉켜 있어 실로 끔찍한 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바라보며 끔찍하다 여겨 눈을 돌리지 않았다.

“선대의 조종(祖宗)에게 후손이 구적 수괴의 수급을 바치옵니다.”

핏줄에 흐르는 혈통적(대외적인) 근거로 이 제사를 앞장서 주관하게 된 동아시아회사 로베르 드 아르크가 앞장서 제문을 읊으니, 참배객들은 제국의 법도에 따라 전조의 황제(라 인식했다.)에게 다섯 번 절을 하였다.

마찬가지로 직계 조상 현종의 선릉(宣陵)에게도 참배를 한 뒤, 진람이 서벌의 승리를 천명하니 무려 276년에 달한 전쟁은 고려의 승리로 막을 내린 것이다.

환호성과 만세 소리가 개성에 가득했다.

선릉은 신원길이 참배한 후 아직도 제대로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때 당시 묘지기에게 준 돈도 있었지만, 전쟁통에 몸을 피했을 것이다.

이제는 제대로 공사를 하기 위해 인부들이 고용되었고, 능은 대대적으로 정비되어 판석이 깔리고 옛 고려의 예법에 따라 장식물들 배치하니 한결 더 위엄차졌다.

“사실상 북원이 무너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사 후 연대장 중 몇 명이 공사장의 인부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는 진람에게 다가와 약간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하였다.

“대도라도 진격을 해야…….”

그러나 진람은 가차없이 그들의 말을 끊었다.

“시중께서는 하루빨리 이 원정을 끝내길 바라시네.”

“…그렇습니까?”

연대장들의 불만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하하, 오랜만에 처자식들을 볼 수가 있게 되었군요.”

“수괴의 목을 잘라 제사를 지냈으면, 이미 충분히 했다 봅니다. 병사들 또한 이제 피로가 쌓였으니, 얼마간 이 개성 땅에서 조금 휴양하다 본국으로 가면 되겠지요.”

“당하께서도 미주에서 군의 보급을 처리하시고 계시니, 상당히 피로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군의 승리는 안정된 보급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번 승리는 과연 당하께서 오 할을 이루신 것이나 다름없지요.”

시중의 뜻이 그러하다면야 당연히 따라야지요.

아직 선민당원 숙청의 여파는 여전해 보였다.

* * *

남명에는 거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 북원의 대칸이 죽었다.

그토록 무시무시하며, 공포스러웠던 존재.

화북을 완전히 박살을 내어, 다시금 구적들의 손아귀에서 신음하게 만든 존재.

바투뭉케가 죽었단다.

처음, 경사의 명 조정에서는 이를 믿지 못했다.

아니, 믿을 수가 있겠는가?

자신들의 사십만 대군조차 북원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고작 절반 미만의 병력만이 회수 남쪽으로 도망쳐 왔는데, 북원의 사십만 대군(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이 고려에 의해 거의 씨몰살을 당하고, 바투뭉케의 사남, 바르수 볼라드만 간신히 몸을 피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게다가, 명의 전 황제 주우철 또한 이제는 고려의 전리품이 되었다 한다.

“이를 어쩌면 좋겠소?”

명의 성군, 인종 주기욱은 태자를 병으로 잃었지만, 후계를 차남인 진왕 주견결의 자식들로 지정한 뒤 붕어했다.

그 이후, 주우철이 즉위하며 조정이 이 꼬라지가 났지만, 인종의 잘못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중전에게서 태어난 진왕 주견결을 제외하면 죄다 후궁에서 태어난 아들들이라 일단 위신이 약했으니까.

주기욱은 주우철의 어린 시절만 보았으니, 귀여운 손자가 그리 멍청한 행동을 할지 몰랐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주우철이 북원의 바투뭉케의 포로가 되자, 명 조정은 상당한 혼란에 빠져 있다가 북원이 조선을 침략하며 정신이 팔린 최근에 들어서 인종의 칠남, 혜왕 주견성의 아들, 주우민을 새롭게 제위에 올렸다.

연호에 따라 경무제(景武帝)라 불릴 주우민의 치세가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주우민 또한 그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다.

그가 비록 타락한 환관에게 눈이 가려진 것은 아니었으나, 선제의 잘못이 워낙 크다 보니 새롭게 즉위한 황제 또한 국정을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옹립한 자칭 명의 충신들이 대부분 국사를 정했다.

안정된 신권통치라면 또 모를까, 충신들 내부에서도 파벌이 갈리니, 명 조정은 이리저리 싸움박질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장 크게는, 유근의 처형 이후 명의 대외 무역 관계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이 있었다.

일부의 사람들은 유근이 행했던 일이라 하나, 대외 무역은 항구와 더 나아가 국고를 부강하게 하고 새로운 문물을 특화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 말했지만, 그에 반하는 사람들은 사지가 찢겨 죽은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환관과 무능한 선제가 시행했다는 정책 한 가지만 보고 양이들과의 무역을 반대하자는 의견이 컸다.

마침내 주우민이 황실과 자신의 권위 문제로 인해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손을 거드니, 영파를 비롯하여 항구들은 다시금 문을 닫았다.

감합 또한 이제 갱신되지 않으니, 양이들의 상단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명을 보고 상당히 당혹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고려라는 자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신료들 중 하나가 나섰다.

“그들의 국명에 따라 예전의 고려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아직 확실히 판명된 바는 없으나, 사사로이 천조를 참칭한다는 것에서 몹시 불순한 무리들이 틀림없습니다.”

“조선 또한 그들에 휘말려 고려에 입조하였다 합니다. 태자라는 자가 멀쩡히 부왕이 살아있는데 그리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니, 동이 또한 이치와 법도를 모두 버린 것입니다.”

“…말만 하지 말고, 무슨 대책이 있소이까?”

그러나 명의 신료들은 그 말에는 입을 다물었다.

“…….”

북원을 박살 낸 군대를 대체 무엇으로 막는단 말인가?

하지만 명의 신료들이 고려를 적대시하는 것과 별개로, 민간의 여론은 현격히 달랐다.

“아니, 미국이라는 곳과 고려라는 곳은 다른 곳이라니까?”

“나는 하루에 시가 하나를 피지 못하면 정말 못 살겠네.”

“자네도 그런가?”

“시가를 피울 때마다, 활력이 돋고 업무에 집중이 잘되며 기분도 개운해지니 어찌 그런 약재를 수입하는 것을 막는단 말인가?”

상인들은 삼삼오오 그리 모여 떠들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나서는 이들도 많았다.

이미 걸어 잠긴 영파 말고, 다른 한적한 해안가에서 명의 상인들과 동아시아 상단이 거래했다.

동아시아 상단뿐만일까.

양이들의 상단도 기회를 틈타 암상들과 연결되니 명의 해안가는 혼란 그 자체였다.

이미 대만과 해남도(海南島, 하이난섬)는 아예 암상들이 오고 가는 곳이 되어버릴 정도였으니.

이 와중에, 명의 함대가 암상을 토벌하다가 대만과 해남의 민가에 큰 피해를 저지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유학자들 중 일부에서도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커져 갔다.

이 유학자들이란 것들은 본래, 중화질서를 신봉하는 자들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중화란 만물의 으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곳은 모조리 미개하다는 사상적 가치관이 자리 잡힌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상한 소문이 퍼져나갔다.

왕양명이란 다소 생소한 학자에 의해 퍼져나간 이 소문은 일견 너무나도 허황되었지만, 너무나도 구체적이었다.

― 전국옥새가 발견되었다!

이자윤과 진람이 철석같이 대원제국의 옥새라 생각했던 것은 오히려 그 진가를 무의식중에 깎아내리는 행동이었다.

전국옥새(傳國玉璽).

진정한 천명을 상징하는 신물.

그 가치는 적어도 이 동아시아의 세상에서는 기독교 문화권의 성배와 다름없었다.

중원에는 거대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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