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49화 (249/653)

살수(2)

살수의 왜군과 조선 연합군에 화들짝 놀라 진채를 물린 바르수 볼라드의 보급대와 고난의 행군을 통해 마침내 평양으로 다다른 올로스 볼라드의 본대는 드디어 평양 북쪽의 숙천(肅川)에서 겨우 일군을 수습했다.

그러나 그들이 대면한 적은 전방을 봉쇄한 적뿐만이 아니었다.

올로스 볼라드는 황급히 후열에 척후를 보내 적을 찾으라 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척후가 귀환하여 남쪽에서 적병이 보인다 보고했고, 그다음 날 그 자신이 북상했던 방면에서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마치, 이 평원에 당도하길 기다렸다는 듯.

몽골군이 힘들게 행군을 할 때, 열린 바닷길을 통해 보급물자를 수송하는 고려군들은 불필요한 짐짝을 내버려 둔 채 간편하게 행군할 수 있었다.

행여 조선의 신료들이 다른 생각을 꾸밀까 한양에 남아있는 한 개의 보병연대와 개성의 포로들을 감시하는 한 개의 연대를 제외하곤 전 병력을 다시금 투입하였으니, 고려는 마치 빗자루를 쓸 듯 천천히 북원의 잔당들을 이 한곳으로 밀어 넣고 있는 셈이었다.

그보다 더 남쪽에서도 군대가 도달했다.

태자 이금이 이끄는 조선의 남방군은 피로에 찌든 데다 장비도 썩 좋지 않았지만 의기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높았고, 마야군들 또한 괜찮아 보였기에 이들마저 합류시킨 고려군은 거대한 회전을 준비했다.

북쪽은 왜군에 의해, 동쪽은 조선의 북방군에 의해, 남쪽과 서쪽 바다는 고려와 마야, 그리고 조선 남방군에 의해.

사면초가가 아니라 사면려가(四面麗歌)인 셈이었다.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군가만 불러제꼈을 뿐 원나라 사람들에게 원나라 음악을 들려주진 않았으니까.

원의 병력은 어찌 수습하다 보니 그래도 거의 십만에 육박하는 대군세.

그러나, 이번에는 고려 연합군 또한 그 숫자가 뒤지지 않았다.

거의 팔만에 달하는 대군이 모이니 양측이 합쳐 엄청난 숫자가 살수에 모인 것이다.

삽시간에 안주평야에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 소리, 비명 소리와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그리고 삼 일간의 혈전은 한쪽의 필연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후대에는 이 전투를 한반도 4대 대첩(살수, 귀주, 개성에 이어)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강은 그저 그 자리에서 도도히 흐를 뿐인데 또다시 피로 물드는 까닭은 오로지 어리석은 사람의 욕심 때문이라.”

역병이 발생할까 시신을 한곳에 모아 태우고 있는 고려군들 너머 살수를 바라보고 있던 진람은 자신을 부르는 부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사령관님! 전군의 지휘관이 지휘소에 모두 모였습니다.”

“알았다.”

성큼성큼 발을 옮겨 군 지휘소 막사로 가니, 막사의 입구 천을 들어 올린 진람의 눈앞에는 다툼을 벌이는 장수들이 있었다.

“역적의 씨앗이 북방의 부민들을 꼬드기고 군대를 사사로이 움직이니 마침내 그 흉계를 드러내었구나!”

“이 나라를 황폐화시킨 것은 이 나라 임금이다. 이 나라의 백성들을 죽인 것도 이 나라 임금이다. 반면 이 나라를 구한 것은 의군이요, 이 나라를 살린 것은 고려이다. 왕실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이 임금이냐?”

“네 이놈!”

“그러다 한 대 치겠다? 그래 어디 한번 쳐 보거라!”

“場を弁え給え(장소를 좀 가리시게).”

서로 자리에서 일어나 으르렁대고 있는 두 청년, 그리고 자리에 앉아 있지만, 몹시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눈싸움을 하고 있는 두 청년, 그리고 그저 한숨을 쉬고 있는 청년과 노인.

‘젊은것들이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구만.’

제각기 능력이 출중한 영걸들이었지만 이럴 때는 영락없이 혈기가 넘치는 청년이 틀림없었다.

진람은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 이백록의 멱살을 잡고 있던 이석보(시버오치피양구)가 머쓱한 얼굴로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 탁, 탁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구군복(具軍服)의 흰 옷깃을 쓸어내리며 정돈한 이백록도 제 자리에 앉았다.

눈싸움을 하고 있던 이금과 이자윤 또한 진람의 앞에서 계속 그 묘한 싸움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는지 눈길을 거두었다.

진람은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싸움이 가라앉았지만 역으로 불편한 침묵이 가득하자, 일단 농을 던져보았다.

“이(李)씨끼리 좀 잘들 지내 보오.”

이금은 당연히 조선의 국성인 전주 이씨.

그 휘하의 이백록은 덕수 이씨라 하였다.

반면 이자윤과 이자윤의 성씨를 공유하게 된 이석보는 양산 이씨(경원 이씨의 분파)이니 사실 한자만 같을 뿐 완전히 별개의 가문인 것이다.

““크흠…….””

“끙…….”

처참하게 실패한 농담 덕에 더욱 불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 진람은 일단 대립하는 두 세력을 제외한 나머지 세력에게 말을 먼저 걸었다.

일단 마야부터.

마야어는 진람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마야인 대부분이 고려어를 자신의 모국어 수준으로 능숙하게 했기에 통역이 없이도 의사소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례적으로 진람은 이 회담에 참석한 마야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전하.”

“아닙니다.”

현 마야의 카롬테는 무려 예순다섯의 나이에, 직접 노구를 끌고 이 조선 땅까지 왔다.

노령으로 인해 대부분의 전투는 휘하의 흑표범대에게 맡겼지만, 이곳까지 병사들과 같이 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마야의 사기는 도무지 꺾이지 않았던 것이다.

“…경이 약조했던 개성 성전(聖殿) 건립의 건은 아직 유효하지요?”

진람은 그 말에 이금을 힐끗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유효합니다. 마침 가옥이 상해 있어 도시의 재개발에 들어갈 것이니 적당한 부지를 선정하여 드리지요.”

진람의 확언에 카롬테의 얼굴이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우리 평생의 숙원이 이루어지는군요.”

마야가 개성에 건축할 이 거대한 성전의 이름은, ‘뿌리의 성전’이며, 마야의 새로운 성지가 될 것이었다.

“이 일이 끝나시면 루밀 키치파닐로 이어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황상의 은혜에 이 노구에 진귀한 땅을 얻어 특별한 광경을 하게 되었으니, 어찌 즐겁고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 과인 또한 이곳에서도 눈을 보았지만 루밀 키치파닐의 절경은 그보다도 대단하다니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비록 전쟁의 목적이지만 겨울철 조선에 와 눈이라는 실로 특별한 광경을 목도했던 카롬테는 육신의 나이보다 적어도 십 년은 젊어 보였다.

마야인들은 루밀 키치파닐(뉴질랜드)을 아주 좋아하고 있었다.

본래의 땅이 일 년 내내 너무 덥고 습하여 벌레(특히 모기)가 많고 홍수가 자주 나며 심지어 칼리나해를 지나친 태풍이 사사건건 괴롭히는 땅이라면, 이 머나먼 섬은 비록 거리가 멀더라도 시원하며 경치가 아름다웠다.

남섬과 북섬이 기후 차가 크게 날 정도로 섬도 좁지 않았다.

농사는 창양 평야나 북려 대평원마냥 크고 비옥하진 않더라도 본토보다 여건이 좋았으며, 넓은 초원이 있어 가축을 방목하기도 좋았다.

물론 그곳에는 호전성과 식인으로 이름 높은 원주민, 탕아타 훼누아(마오리)족이 있지만 적어도 마야인들에겐 별다른 문제는 아닌 듯싶었다.

“삿된 길로 빠진 자들을 계도하는 일이야 수없이 해 왔던 처지입니다. 쿠쿨칸께서 보우하시니 시간이 흐른다면 저들 또한 신성한 용을 섬기게 되겠지요.”

쇠약한 노년의 왕은 이 말을 하면서 알 수 없는 위압감을 진람에게 선사했다.

고려군 사령관과 마야의 신성왕이 그 이후로도 화목하게 떠들자, 이금과 이자윤, 그리고 오우치 요시오키의 눈에는 떨떠름한 표정이 지어졌다.

카롬테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늙은이는 이만 피로하여 들어가 볼 터이니, 귀공들께서는 이야기를 마저 나누도록 하세요.”

“예, 전하.”

카롬테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이금과 이자윤이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진람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진람은 이번엔 요시오키와 담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군은 평양에서 어느 정도 개인정비를 가진 후, 주코쿠로 갈 생각이오.”

“알겠습니다.”

“추후의 일은 아마고 놈들을 징벌한 이후에 다시 합시다.”

아마고는 최근 들어 본래의 남조 대신 북조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아예 고려와 반대되는 끈을 타기로 결정한 것처럼.

어리석은 선택이다.

고려는 이번 기회에 아마고 씨족을 박살 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살 낸 그들의 땅 이와미에는 고려의 은광이 들어설 것이고.

왜인과의 회담이라, 통역이 있었기에 그것을 들을 수밖에 없던 이금과 이자윤 측이 모두 놀랐다.

“장군, 북벌을 이어가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이백록이 주인을 대변한다는 듯 그리 물었다.

진람은 오우치와의 담소가 끊어지자, 조금은 불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조선의 복수를 대행하려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게다가 아직 그대의 주군은 뜻을 명확하게 밝히지도 않았지. 그대는 언행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군.”

차라리 고려의 입장에서 쓰이는 서벌을 말하든가.

조선이 고려의 제후국이 된다면 모를까, 이금은 아직 난해한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시중 또한 확전은 경계하라 말씀하셨지.

설사 장졸이 서벌을 이어가려는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괜히 시중에게 밉보이기 싫었다.

게다가 현재 고려는 납득할 만한 것들을 챙긴 상태였기에, 그토록 의기 높던 서벌군마저도 일부는 집으로 돌아가도 되지 않겠냐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항해만 두 달이 넘는 먼 땅에 오니 드디어 원정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다.

― 집 떠나면 개고생이야.

이번 전쟁에 참가했던 병사들은 후대에 고참병이 되어 이러한 말들을 남겨주겠지.

요시오키와의 환담이 끝나고, 요시오키도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가자 진람은 사방을 둘러보다 한숨을 쉬듯 이자윤에게 물었다.

“귀공께서 적병의 일부를 놓치셨다 들었소.”

“…….”

이자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무언의 긍정에 이금은 완전히 드러내진 않았으나 어딘가 기분이 좋아 보였고, 이백록은 대놓고 피식피식 웃어 재껴 이석보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진람은 재차 확인했다.

“바르수 볼라드라는 자는 무사히 북쪽으로 달아난 것이 틀림없소이까?”

“그렇습니다.”

진람은 완벽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바르수 볼라드라는 자의 생존능력보다 이자윤의 능력을 더 높이 취급하고 있었기에, 의외의 결과에 미간을 찌푸렸다.

“귀공께선 몇 번 그자를 상대해 보지 않으셨소?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건만…….”

그러나 이자윤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고개를 들고는 당당하게 진람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보내주었습니다. 사내의 약속은 약속이지요.”

“……?”

의외의 말에 진람이 눈을 치켜떴다.

“이곳에서 할 말은 아니니, 나중에 제 처소에 한번 들르시지요.”

그 말을 끝으로, 이자윤은 군막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석보도 황급히 그 뒤를 뒤따랐다.

고려군의 막사 내에서 하는 행동치고는 약간의 결례가 분명했지만, 진람은 저토록 당당하게 행동하는 이자윤의 태도에 큰 의문을 품고 일단 나중에 그의 처소에 들르기로 하고는 마침내 조선의 태자와 대면했다.

“조약은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해도 좋겠소?”

이미 마야의 카롬테에게 개성 성전의 건설 허가를 발행한 진람이니, 사실상 조약의 거절은 생각하지 않는 투가 분명했다.

“…예.”

이금 또한 긍정했다.

뭐 어찌하겠는가.

개성의 민심은 아예 조선을 버렸다.

또한, 고려가 조선에게 해준 일―종묘와 사직을 지키는 일― 또한 수식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은혜였다.

그래.

그날, 개성대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본 사림들이 이제 입에 담기 시작하는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만큼의 은혜(재조지은, 再造之恩)’처럼.

해달라면 해줘야 했다.

내주라면 내주어야 했다.

그렇기에 개성부는 고려의 땅이 될 것이었다.

“개성에는 아국의 자치정부가 들어설 것이오. 신벽란도에도 마찬가지이고.”

“…알겠습니다.”

사실, 개성 하나 내주는 것은 그래도 괜찮았다.

“결정을 내리셨소?”

“…예.”

고민을 하다 이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으려 하자 진람이 서둘러 만류했다.

“모든 맹선을 돌려주고 바닷길의 정상화를 허락할 테니, 태자께서는 모레 아침 배를 타고 가셔서 경복궁에서 의식을 준비하시구려.”

“알겠습니다.”

천조에게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조아리는 것도 할 수 있었다.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청산하라는 것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금은 단 한 가지는 절대 들어줄 수 없었다.

“어차피 천조를 받들어 모실 결단을 내렸으니 하는 말인데, 공께서도 내일 이후에 사사로이 소국의 백성을 납…아니 데려가지 마시지요.”

이금이 훗날 조선 왕이 되고, 마침내 천조 고려의 제후국이 된다면, 왕이니 적어도 진람보다는 서열상 위에 있는 것은 맞을 것이었다.

물론 실권의 문제는 다르긴 했지만.

진람 또한 호쾌히 대답했다.

“그러도록 하지요.”

그러나 해방선이 밤에 뜨지 않는다고, 백성들이 고려로 넘어가는 것을 쉽사리 단념하겠는가.

‘어차피, 개성의 출입을 금하는 법률은 지금 없고 앞으로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우리도 평상시에 인구를 가려 받을 수 있어 좋고, 조선 또한 흔들릴 때마다 개성과 탐라로 빠져나가는 유민들을 막을 수 없겠지.’

조선이 완벽하게 망하는 것은 고려도 바라지 않는다.

항구적인 인구공급원으로서의 역할은 다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고려의 조정은 이 독특한 관계를 가진 제후국을 실컷 두들겼으니 이젠 달래기로 마음먹은 상태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자들을 다룰 고삐는 여전히 필요했다.

외부적으로도 북방에 고삐가 하나 채워질 예정이지만, 내부적인 고삐 또한 있어야만 했다.

“태자께 좋은 소식이 있소이다.”

이금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왕께서 살아있소.”

어딘가 짓궂은 말을 하는 진람에 이금이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

대외적으로는 효자를 연기하고 있지만, 이미 부자 관계는 파탄이 나 있었기에, 이계의 생존은 이금에게는 정치적인 위기와 같았다.

“아, 걱정 마시구려, 부왕께선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닐 테니. 머리를 호되게 맞았는지, 반쯤 백치가 되었다오.”

“허…….”

이금은 진람의 그 말을 듣고 맥이 탁 풀린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실책을 저지른 것을 뒤늦게 인지했는지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들 된 자로서, 어찌… 부모의 비극에 나쁜 마음을… 품겠습니까? 다만 안도하여 하는 소리이니…….”

“뭐, 그렇다고 칩시다. 허나 기억하시오, 태자. 아국의 의사들은 이 세계에서 의학에 가장 빼어나니 어쩌면 부왕 전하의 의식을 다시금 또렷하게 만들지도 모르오.”

머리를 두들겨 맞은 백치를 다시금 원 상태로 되돌렸다는 경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으나, 허풍으로 태자에게 고삐를 채운 진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도 당당한 이자윤의 태도가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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