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
원의 땅으로부터 요심과 평안도, 그리고 황해를 거쳐 경기까지의 보급선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은 바르수 볼라드는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숙적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동생을 잃었으나 남이를 죽이는 것엔 성공하여 칭찬을 받았지만, 그 휘하의 무장, 이자윤이라는 자가 성의 물자를 싹 챙기고선 병력과 패잔병들을 인솔하여 동쪽으로 사라지더니 수많은 산을 넘어 함경도로 갔다 한다.
겨울철에 대체 그런 미친 짓을 어찌 성공시켰는지는 모르는 일이나, 그는 북청(北靑)에서 재정비를 하여 무방비가 된 함경도를 다시금 가다듬었다.
현재, 대원제국은 고려를 침공하기에 앞서, 여진족에게 협력을 구했던 상태였다.
이미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있는 해서여진의 전사들은 몽골의 군대로 편입되었으나 독자적인 세력을 이끌고 있는 건주의 여진 만호들과 천호들은 제각기 알아서 일군을 이끌고 조선의 동쪽을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다.
적어도 함흥까지는 점령을 해 주어야, 조선을 압박하기가 더욱 쉬워지고 묘향산의 승병들 등 태백산맥에 숨어 있는 의병들 또한 그 세력을 크게 잃을 것이었다.
실제로 처음 이 군세는 큰 공적을 거두었다.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는 이들을 막다 전사했고, 함경남도의 병마절도사는 적들이 오기도 전에 겁에 질려 도망쳤으니까.
그러나 혼란에 휩싸인 이 빈 땅에 새로운 사람이 오니, 순식간에 민심이 잡혔다.
― 그분의 손자가 오셨다!
심요의 병마절도사로 있기 전, 이자윤의 조부 이징옥은 함경에서 군무를 보기도 했고 여진족들을 수없이 많이 패퇴시켰다.
4군이라 불리는 여연과 우예, 자성과 무창을 개척했으며, 온성과 경원, 종성과, 회령, 부령과 경흥을 점령해 6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요새를 건설하려는 시도도 했다.
비록 6진은 이찬의 시기에 다시금 여진의 손에 넘어갔지만 4군은 아직도 건재하니, 아마 이자윤은 선대로부터 배운 그 익숙한 지리를 통해 활로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심양에서 출발한 칠천의 정병들은 북청까지 오는 동안 오백이나 죽었지만, 남아있는 함경도의 군세 오천을 수습하니 일만이 넘는 대군이 된 것.
함경도 또한 심요만큼은 아니더라도 북방의 군세와 빈번히 접촉하는 지역이니만큼 상당히 정예했다.
마지막으로 그 자신 또한 무시무시한 능력을 자랑했다.
전세를 읽는 능력도 탁월한 데다가 무용도 초인적이니 심양성 방어전에서 몽골군이 맞이했던 공포가 여진족들에게도 공평하게 쏟아졌다.
그리고 건주여진들은 몽골 정도의 적이 아니었고.
“내가 바로 역적 이징옥의 손자 이자윤이다!”
거대한 외침과 함께 돌격하여 월도 한 자루로 삼백의 적병을 베어버리니 이징옥의 이름 석 자라면 벌벌 떨던 여진족들은 그 길로 군채를 삼십 리나 뒤로 물려야만 했다.
실로 그 무용이 조부 이징옥도,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도 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 땅을 침범한 이상, 너나 네 아비는 무사히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게다.]
남이가 목이 베어지기 직전 했던 저주 같은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돈 바르수 볼라드는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 * *
―터벅 터벅.
기괴한 모습을 한 전령이 바르수 볼라드가 있는 평양성에 당도했다.
아니, 전령으로 추정되는 자는 이미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고, 다만 그 말만 터벅터벅 위로 걸어 올라온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몸을 칭칭 말에 결박했는지 끊지 않고서야 풀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고정된 밧줄을 풀자, 전령의 시신과 함께 찢어낸 옷조각과 고풍스러운 목함 하나가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무어라 쓰여 있느냐?”
“투…투루라 쓰여 있습니다.”
죽은 전령의 복장으로 보았을 때, 대칸을 호종하는 케식이 분명했고 또한 피로 쓴 옷조각에 적힌 맏형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바르수 볼라드는 주변을 물리고 목함만을 가지고 막사에 갔다.
“…….”
바르수 볼라드는 떨리는 손길로 목함을 닫았다.
그의 안목으로는 약간 깨져있고 그을려 있으며 해독하기 어려운 전서(篆書)로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이라 쓰인 이 옥새가 후진(後晉)의 사후 무려 육백 년 동안 소실되었던 바로 그 전국옥새(傳國玉璽)라는 것을 알아차리진 못했다.
그러나 이토록 은은하고 고아한 도장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기에 바르수 볼라드는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무언가 큰일이 일어났다.
눈치 하난 빠른 바르수 볼라드였기에 그는 지금 이 상황이 황제에 대한 변고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게다가 아버지는 무려 옥새로 추정되는 신물을 큰형에게 주려고 하는 모양이다.
본래라면 이 케식은 바투뭉케의 황후이자 형제들의 어머니인 만두카이 하툰에게 도달할 때까지 죽어도 이 말을 함구했었겠지만, 자신이 폐를 관통당하여 죽어가는 와중에 그런 고민을 할 여유는 없었다.
덕분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바르수 볼라드는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차기 대칸의 자리는 공정한 경쟁을 하신다 하셨잖습니까? 큰형은 제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장남을 우대하시는 겁니까?”
본래 몽골의 관습법이기도 했지만 오고타이 칸 이후 후대의 툴루이계인 세첸 칸(쿠빌라이 칸)이 즉위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더욱 강조한 말자상속제는 자식들 간의 경쟁을 부추기기도 했다.
이러한 황위 계승의 갈등은 잘만 이용한다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으나, 이렇게 중심을 잡아 줄 사람이 없게 된다면 큰 위기에 봉착하기 마련.
대칸의 자리는 아무리 동복동생들이라 하더라도 권력에 눈이 먼 자가 있다면 형제의 우애를 깨트리기에 충분했으니까.
“아버지! 오이라트부의 내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지로 걸어 들어간 것도 저였고, 원정 때마다 이곳저곳으로 불려 궂은일을 한 것도 저였습니다. 투루 형님과 올로스 형님은 매번 뒤에서 그를 관찰하거나 혹은 완전히 이긴 상태에서 공훈을 챙겼지만, 저는 항상 가장 험한 곳에서 공적을 쌓아 왔습니다. 지금까지 하셨던 말씀은 전부 다 거짓이란 말씀이십니까?”
듣는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에 대한 걱정보다도, 배신감이 더 크게 든 바르수 볼라드는 분노에 옥새를 함째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퍼뜩 놀라, 다시금 함을 챙겼다.
“…….”
함을 꼭 부여잡은 채로, 생각에 골몰하던 바르수 볼라드는 난처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빌어먹을, 너무도 많은 자들이 보고 들었다.”
죽은 전령, 아니 케식의 몰골이 너무 괴상하여, 수많은 몽골병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었다.
게다가 투루라는 이름 또한 상당히 많은 수가 들었지.
만약 자신이 이 목함에서 옥새를 꺼내 스스로 천명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방금의 일을 목격해 의문을 품고 있을 것이 분명한 자신의 부하들이 이를 미심쩍게 여기거나 맏형에게 가 고자질을 할 것이 뻔했다.
그러면 자신은 대칸의 유언도 따르지 않고, 칸의 자리에 욕심내는 꼴불견이 되어버리는 것이지.
어머니, 만두카이 하툰조차 자신을 미워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가 통솔하고 있는 투멘들은, 대칸을 따르는 것이지 바르수 볼라드를 따르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
차라리 아버지가 유언과 이 옥새를 남겨두지 않았다면 그는 초원의 법칙에 따라 투루에게 도전할 수 있을 텐데.
한동안 옥새를 노려보던 바르수 볼라드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을 결정하기에 앞서,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척후를 보내라! 대칸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보아야겠다!”
* * *
청주와 충주를 점령하고 조령과 추풍령을 두드리던 올로스 볼라드는, 적들의 저항이 거세자 공세를 그리 강하게 진행하지 않았다.
어차피 한양에 있는 바투뭉케 또한 굳이 병사들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하고 있었으니 조선왕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그 답신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 아버지가 케식 삼천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올로스 볼라드는 아버지의 음성을 영원히 다시 듣지 못했다.
“아버지!”
싸늘히 식은 주검 앞에 무릎을 꿇은 올로스 볼라드가 오열하자, 케식들이 마지막 유언을 말했다.
“군세를 모아 적을 한 번 강하게 깨트리고 빠르게 북쪽으로 회군하여 바르수 볼라드 칸과 합류해 퇴각하라 하셨습니다.”
“…….”
올로스 볼라드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길로 케식을 바라보았다.
“네놈들은 대칸께서 이렇게 돌아가셨는데 퇴각을 운운한단 말이냐!”
“전하! 저들은 마귀의 군대이옵니다! 대적할 수 없으니 다만 초원의 법도에 따라 적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훗날을 기약하소서!”
“듣기 싫다! 너희들의 말에 따르면 불과 이만이 좀 넘는 병력이 전부였지 않느냐! 대체 무엇을 어찌 보좌했길래 이런 꼬라지가 되었느냐 이 말이야!”
“모든 작전은 대칸께서 직접 내리셨습니다. 군사의 운용도, 병법의 묘리도 무엇도 이치에 어긋난 것이 없었으니 이치에 어긋난 것은 오로지 적의 흉악함이 전부입니다!”
올로스 볼라드는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아버지의 군재는 자신과 비교할 수 없다.
만약 아버지가 직접 전략을 짜시고 이렇게 패배했던 것이라면, 그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지금 그는 상당히 난처한 상태였다.
십만의 병사는 말이 십만이지, 이미 조금씩 소실되어 대략 이 할이 넘는 수가 줄어있었다.
마야 놈들.
괴상망측한 국명만큼이나 괴상망측한 전술을 구사해대는 그놈들은 산악과 숲에서만큼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존재와 같았다.
날씨가 풀리니, 그 악명은 훨씬 더 심해졌고.
그리고 마야 놈들보다 훨씬 더 악독한 존재도 있었다.
충주에 두창이 퍼졌다.
이 빌어먹을 전염병은 항상 전란의 시기에 정복자와 피정복민을 가리지 않고 고통을 선사한다.
안 그래도 아버지께 피두선귀(避痘先歸)를 여쭈려고 했었지.
“…좋다. 길을 열어라. 북쪽으로 나아가겠다.”
북쪽의 동생과 합류한다면,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 *
그러나 올로스 볼라드의 퇴각로는 상상 이상으로 험준했다.
경기지방이 그 붉은 마귀의 군대에게 장악당한 이상, 퇴로를 뚫기 위해서는 다른 쪽의 길을 개척해야 했다.
올로스 볼라드는 충주에서 원주, 원주에서 춘천으로, 춘천에서 철원으로 향하는 길을 탔다.
태백산맥과 가까운 만큼, 상당히 험하고 끔찍한 여정이었다.
길은 봇짐 상인 정도나 오갈 정도로 비좁아 원의 군세는 길게 늘어서야 했다.
게다가 사방이 산이었으니, 길게 늘어진 군세는 너무나도 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기습이다!”
― 파바박
의병들은 화살을 한 차례 쏟아붓고는 멀찍이 달아났다.
비록 패퇴하는 행렬이지만, 그 수가 많고 하나하나가 싸움에 능한 자들이라 정면에서 맞붙으면 의병들이 크게 상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거듭된 공격으로 인해 안 그래도 험한 길을 올라가며 지친 북원의 병졸들에게는 너무나도 성가시고 짜증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습격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기습입니다!”
어둠을 틈타 불화살과 돌이 떨어졌다.
야습은 주간의 기습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밤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북원의 군세는 낮에 꾸벅꾸벅 졸다 발을 헛디뎌 낙오되기도 하고, 주간의 기습에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이 첫째로 목적했던 철원에 도착했을 때엔, 본래 팔만이 넘었던 군세가 삼분지 일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고된 여정과, 충주에서 옮았던 두창의 확산으로 상당히 많은 수가 죽었던 것.
두창에 걸린 자들을 모두 죽이는 극단의 조치를 내린 덕에 역병은 잠잠해졌지만, 그의 부대에도 있는 한병과 여진족들은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사방으로 달아났다.
올로스 볼라드는 그 와중에도 아버지의 관을 들고 꿋꿋하게 북쪽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이제는 추격이 없습니다.”
부하가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는 길이 다소 평탄하여, 대군을 운용하기 괜찮았고 기습 또한 미리 대비하기 쉬워 보였다.
그러나 올로스 볼라드는 오히려 그것이 더욱 짜증이 났다.
“패퇴했던 케식들의 말에 따르면, 고려는 엄청난 기병대를 가지고 있다지. 그 기병대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우리를 충분히 뒤쫓을 수 있었을 텐데.”
보란 듯이 호통을 치는 올로스 볼라드의 모습에 바투뭉케의 케식들이 분노했으나, 주군을 지키지도 못했다는 원죄를 떠안았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이 지긋지긋한 조선의 산악에서 벗어나 드디어 목적했던 평양에 도달한 올로스 볼라드는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형제의 얼굴이 공포에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