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40화 (240/653)

병인몽란(3)

정묘(丁卯, CE 1507)년 1월 21일.

유례없는 국난이 닥친 조선은 신음하고 있었다.

그래도 꼴에 천자국이랍시고 예전의 몽골이라는 국명을 쓰던 시대마냥 수레바퀴보다 더 큰 남성은 다 죽이라는 대학살까진 자행되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엄청난 피가 흘렀다.

약탈과 방화, 강간으로 지극히 혼란했다.

사람들은 원의 진군로에 있는 지역에서 빠져나와 산으로, 숲으로 섬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조선도 반격했다.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 적들에 맞서 싸웠다.

유학을 배운 유학자들도, 불교를 믿는 승려들도.

그리고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믿지 않더라도, 그저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을 지키기 위해 백성들도.

도망친 백성들도, 분노를 씹으며 다시금 대나무를 잘라 죽창을 만들고 흰 띠를 둘렀다.

이들은 강인했다.

그러나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나라의 임금이 추악한 꼴을 저질러, 서북과 심요의 민심을 얻었던 남이와 삼남의 민심을 얻었던 박형무를 죽였다.

조선의 두 명장을 허무하게 죽인 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버리고 강화로 도망가니 근왕(勤王)의 명분은 애초부터 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것은 분조를 이끌고 있는 태자 이금이 조령에서 버티며 항거하니 의군들의 명목이 제대로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조령에서 적들을 막아내고 있는 이금은 절망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요새의 수성 문제는 아니었다.

무종 시절, 조령에는 가장 남쪽에 위치해 왜구를 비롯한 남쪽의 적을 막는 곳을 주흘관, 중심에 위치하여 있는 곳을 조곡관, 그리고 행여나 국토를 밀고 내려오는 북적을 막을 곳을 조령관이라 하여, 험지에 세 관문이 설치되었다.

이들은 실로 천혜의 요새라 북쪽이든 남쪽이든 침략자들의 발걸음을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원의 군세는 조령관 앞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아직 수비군의 사기는 굳건했다.

“큰일입니다.”

피로 물든 조령관의 지휘부, 이금은 초췌해진 안색을 쓸며 말했다.

좌중의 무장들도 침음성을 삼켰다.

청주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한다.

오천여 명의 관병과 의군은 무려 도합 오만에 달하는 원의 군세에 맞서 오래도록 버티고 자신들의 두 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적병을 궤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었지만, 끝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청주목사와 의병장 셋 모두 아무도 생존하지 못했다.

그들의 전사도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이금은 분조(分朝)의 군세가 나아가 충주를 침으로써 적의 이목을 돌려 청주를 구원해야 하지 않겠나 주장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조령관을 나서 십만의 적과 마주하겠다는 선택지는 전혀 좋지 못했다.

무장들의 만류에 청주성의 일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다.

지금 닥친 문제는 또 다른 이유였다.

“적의 군세가 이곳 문경새재가 아닌 추풍령(秋風嶺)을 넘는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앞뒤로 포위되게 됩니다.”

소백산맥의 관문은 한 곳이 아니다.

비록 이곳 조령이 가장 가까운 핵심 요지라 했으나, 과거 백제와 신라를 잇는 추풍령과 육십령(六十嶺), 팔량치(八良峙) 등의 관문은 조금 멀더라도 조령보다도 더욱 통과하기 쉽기까지 했다.

북원 또한 금세 이 사실을 눈치채고 이곳에 조선군의 발목을 묶어놓은 채 우회하여 공략을 시도할지 몰랐다.

“전 병조참의 이거와 그 아들들이 의군을 이끌고 추풍령에서 항거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괜찮겠지요.”

병법에는 관심이 없는 신료 하나의 눈치 없는 말에, 몇몇 무장들이 딱딱하게 안색을 굳혔다.

그중 하나가 설명하듯 말했다.

“추풍령은 산세가 험준하지 않고 행로가 넓어, 대군이 그 우위를 점하기 쉽습니다.”

무장들은 불길한 뒷말까진 이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결국은 뚫려버릴 것이란 말과도 같았다.

“…내가 가겠습니다.”

“전하!”

“태자의 군기(軍旗)를 들고 소규모의 병력만을 대동해 직접 추풍령으로 향한다면 저들의 조공은 우리의 본대가 추풍령에 있는 줄 알고 쉬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고, 주공 또한 그 사실을 파악하는 것에 시간이 걸릴 겝니다. 그대들은 다만 이 조령을 굳건히 방어하세요.”

“지극히 위험하신 영지(令旨)십니다!”

스스로 사지에 나가겠다는 태자의 말에 좌중이 경악했다.

“어쩌겠습니까? 방법은 이것뿐이니, 다만 할 수밖에요.”

“…전하!”

물론 이금도 알고 있었다.

어떠한 병력의 증강 없이, 단순히 이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북원은 대규모 병력을 통해 원정을 하고 있지만, 어찌 되었든 보급로는 건재했고 경기와 황해, 충청의 북쪽을 대부분 손에 넣어 그곳에서 산출되는 곡식을 얻은 이점이 있었다.

청야전술은 심요도와 평안도의 북부에만 해당되었을 뿐, 그 남쪽에는 수확한 곡식이 많았으니까.

‘후방에서 저들의 보급을 끊을 별동대가 있었다면….’

만약 심요의 병사들이 성을 버리고 산속으로 달아나는 길을 택했다 하더라도, 끝까지 살아남아 후방을 교란했다면.

이금은 그러나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남이를 원망하진 않았다.

그가 마지막에 성에서 회전을 벌인 것도, 결국에는 그에게 온전히 믿음을 주지 못한 아버지의 책임이었다.

분조가 결성되기 전까지도 서자라 하나 엄연히 장남인 자신과, 총애하는 후궁에게서 난 이복동생의 사이를 저울질하며 끝까지 건저(建儲)문제를 미루어 조정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것도 아비였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있었다.

어느 순간, 남해의 바다가 잠잠해진 것.

물론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중앙조정으로 올려보내는 물자가 거의 없고 경상도 내에서 분조를 위해 소비되고 있는 상황이라 조운선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밤중에 백성을 납치하여 민심을 뒤숭숭하게 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

만약, 그 해방선이란 것들이 계속 들락날락한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그 배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었고 그렇다면 군의 기강 또한 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양패구상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고려구들의 행위를 씁쓸하게 평가한 이금이 말에 올랐다.

“가자꾸나, 이럇!”

* * *

정묘(丁卯, CE 1507)년 2월 4일.

청주에 이어 공주목도 함락한 원은 추풍령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진군해왔다.

태자, 그리고 전 병조참의 이거가 이끄는 일만 오천의 의병이 추풍령을 틀어막아 삼만이 넘는 적병들 중 오천을 주살하고 나머지를 패퇴시켰다.

그러나, 그 소식이 북쪽 조령에 있는 십만대군의 지휘관, 올로스 볼라드의 귀에 들어가니, 그는 군세를 나누어 절반을 맡기고 나머지 오만으로 추풍령으로 진군해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첫 번째 공세에 유시에 맞은 병조참의 이거가 사경을 헤매다 결국 사망하니, 의군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었다.

아마 이금은, 이 절망스러운 상황을 고려했을 때, 어쩌면 자진을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이백록(李百祿), 그만 아니었다면.

처음, 태자가 이거의 아들, 이백록을 보았을 때 그는 썩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일단 나이도 자신과 비슷했다.

그러나 하는 행위가 태자인 자신의 앞에서도 몹시 불순하였고, 국난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길 좋아했으며, 어조가 거칠고 예절이 없어 조선의 충신이자 청백리인 아비 이거나, 성품이 온화하고 조용한 이거의 장남 이백복(李百福)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금은 적병의 진군에 맞서, 칼을 휘두르고 의병들을 지휘하는 이백록의 모습에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쏴라! 저들이 살아서 이 고개를 넘지 못하도록 하라!”

신이라도 들린 듯, 한 필의 늙은 말을 타고 추풍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지휘를 하는 그 덕분에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의병들은 끝까지 조직력을 잃지 않고 거세게 저항하여 원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공세를 밀어냈었다.

의병들은 창조차 제대로 들고 있지 않았다.

대나무와 목창이 전부.

그러나 적재적소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화공과 낙석 등 다양한 방법으로 원을 상대하며 예비대를 운용해 좁은 길목에서 적병의 기동력과 수적 우위를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적장도 그 신묘한 전술에 혀를 내두르고는 지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며 군사를 물린 모양.

이 낮은 추풍령이 마치 강고한 조령과 같이 변모한 모습에, 이금은 진실로 탄복했다.

“풍암(楓巖, 이백록의 호), 그대는 진실로 이 조선의 맹공(孟珙)과 같구나.”

이백록은 멋쩍은 듯 웃었다.

“소생은 일개 서생에 불과하니 그런 극도의 찬사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거는 항상 조정에 충성을 다했던 문신인데 결국 이계의 성정에 의해 모욕을 받고 유배가 되었다.

심지어 지금 이렇게 의병을 이끌다 전사하니 평소 이백록이 임금에 대한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그리고 그 임금에 대한 불만은 당연히 태자를 향해 있었을 테고.

그러나 그는 짧은 순간이지만 이금과 몇 번 생사를 넘나들며 기존의 편견을 완전히 버린 모양이었다.

어느덧 어조는 공손해지고, 낯빛에 서린 불만도 이전으로 돌아왔으며 더 나아가 이금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고 맹세하니 이금은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어떠한 무공보다도 지금 이 젊은 명장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이 순간이 더욱 기꺼웠다.

“그러나, 소신은 전하를 위해 맹공을 뛰어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조선도 송의 운명을 밟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이백록 자신도 자신이 이렇게 엄청난 군략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껏 알지 못했다.

모범적인 유생이었던 형과는 달리 일찌감치 폐주를 폐위한 조정에 불만을 품어 과거를 포기했던 그는 낮에는 한량과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무예를 다듬었고 밤에는 성현의 말씀 대신 병법을 읽어 깨우치니 이런 국난에 오히려 이것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호언장담을 하는 이백록과 그것을 듣는 이금 모두, 이번 공세에 적을 패퇴시킨 기적이 다음번에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젠 화살이 없다.

사람도 많이 상했으며, 승전 이후의 일시적인 사기 진작도 곧 다할 것이다.

― 다그닥 다그닥

저 멀리, 전령이 급하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저렇게 전령이 급하게 뛰어오는 것은 대체로 그 가슴팍에 불길한 소식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금과 이백록 모두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령에 무슨 문제라도 일어났는가?

아니면 혹여, 전라도를 공격한다는 적의 다른 군세가 팔량치를 넘었는가?

이금은 순간적으로 전투의 피로와 절망감이 몰려와 다리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으나 도집을 땅에 찔러 끝까지 지탱했다.

그러나, 태자의 앞에까지 다가와 부복한 전령은 어딘가 정신이 없는 듯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전하! 그… 동래에, 괴선들이, 아니 괴선들은 아니고 조선의 맹선인데 고려구들이 빼앗은… 아니, 그 안에 탄 것은 고려구가 아니었고….”

“간략하게 고하거라!”

이백록이 호통을 치자, 전령이 눈을 질끈 감고 재빨리 말했다.

“동래 앞바다에 엄청난 수의 맹선이 떠 있습니다. 이 모두 마야국이라는 곳에서 왔다 했습니다!”

“…마야국?”

“예, 전하!”

* * *

마야는 태평양과 접해 있긴 했지만 대고려 무역을 위해 대부분의 선박을 칼리나해와 마야만에서 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땅덩어리 덕에 일차집결지인 미주에 집결해 군세를 점검해야 하고, 마야를 포함한 서벌군 모두의 보급까지 해야 하는 고려에 비해 마야는 전사들만 싣고 니카라오 운하를 통과하자마자 바로 범선의 뱃머리를 돌려 태평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마야인들의 대양 항해술은 썩 좋다 말하기 뭐했지만, 이번 파병의 지원을 위해 육분의와 경선의를 든 고려의 항해사들이 배마다 탑승해 있기에 항로를 정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가다가 비바람에 범선이 침몰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몇 번 있었다.

범선의 내구도가 그렇게 뛰어나진 못했던 것이다.

모두를 구출하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놀라운 사기를 유지했다.

쿠쿨칸이 나신 성지―개경―로 가는 여정.

가는 길조차 성스럽기 그지없는 고행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의 카롬테마저도 친정을 하고 있으니 마야의 전사들은 멀미를 참으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마침내 대곡도와 유구를 거쳐 탐라에 도착한 이들은 잠시간의 휴식을 취하고 보급을 마쳤다.

그리고는 거문도 인근에서 맹선으로 갈아타 조선의 땅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들은 감개무량하며 동래에 진입했다.

태자라는 인물이 허락을 해야 한다지만, 이미 이곳 동래는 텅텅 비어 있었다.

모든 육군을 전부 다 위로 올려 방어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조선은 사실상 삼남의 해안 방위를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기에.

그 고려구라는 존재가 오히려 왜구를 박살 내고 다녔으며 스스로는 육지에 침입하진 않으니 이런 똥배짱을 부리고 있는 셈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리랍니까? 텅텅 비어 보이는데 그냥 가면 안 됩니까?”

을씨년스러운 동래의 모습을 바라본 마야의 근위대라 불리는 흑표범대 전사가 그렇게 물었다.

근위대장, 첫 번째 맹렬한 표범이 부하를 꾸짖었다.

“카롬테께서 조선의 지도자에게 최대한 예의 있게 하라 하셨다. 너희들은 반대로 칵틀 루임에 함부로 발을 디디는 적이 있다면 기분이 좋겠느냐 나쁘겠느냐?”

“…나쁘겠지요.”

“그러니 좀 참아라.”

전사들은 무구를 쥐며 발을 굴렀다.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엣취!”

2월의 조선은, 열대지방에서 한평생 살아온 마야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추운 땅임은 확실해 보였다.

* * *

군악(軍樂)이란, 고려가 상당히 중요시하는 군대의 요소였다.

전열보병의 화력도 화력이고, 총기의 발전도 발전이지만, 전술의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사기였다.

주변에서 동료가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야 하는 것.

끝까지 옆의 전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형을 유지해가며 총을 쏘는 것.

그렇기 위해서는 군의 기강이 절대적으로 우선시되어야 했다.

고된 훈련과, 풍부한 실탄 사격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고려는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군악은 그러한 면에서, 아군의 사기를 더욱 끌어올리는 요소기도 했으며 반대로 적의 사기를 더욱 낮추는 효과를 가진 필수 병종이었다.

노래에 맞추어 행군하며 보폭을 일정하게 하여 전열을 유지하는 효과도 있었고.

전투 중에도 끊이지 않는 군악은 아군의 전투지속력을 현저하게 높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거듭된 승전을 쌓아간다면 마침내 그 군악은 아군의 사기진작과 더불어 적에게는 훨씬 큰 공포감이 되는 것이다.

마치 그 유명한 대영제국의 영국 척탄병 행진곡(British Grenadiers March)마냥.

전성기 대영제국의 레드코트가 진군할 때 피페(Fife)를 불고 드럼(Drum)을 두드리는 광경을 보며 적병들은 겁에 질려 덜덜거리며 총의 장전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추태를 보였지.

그리고 현재, 고려도 그들만의 행진곡이 있었다.

상민은 예당이 완공된 후 그곳에 속한 음악인들을 불러 하나의 멜로디를 제시하고(흥얼거리고), 이것을 정식 행진곡으로 작곡하고 그 행진곡을 군악대가 연주하기 편하게 바꾸어 달라는 요청을 차례로 내렸었다.

애초에 상민 자신이 그 특정한 음색을 몹시 잘 알고 있다 보니, 곡을 작곡하는 과정은 의외로 빠르고 쉬웠다.

그 와중에, 예당의 음악인들이 모두 상민을 지극히 찬탄했다.

시중의 아내가 고려 연기예술의 어머니라 불릴 만큼 뛰어나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시중 자신도 음악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게 되었던 것.

상민 자신은 음치까진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찬사를 들을 자격은 없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겸양 대신 행진곡의 작곡에 관여한 이들에게 큰 포상을 내렸다.

큰 포상만큼이나 만든 결과물도 몹시 흡족했다.

어쩐지 조금, 붉은 기운이 보이는 듯한 광경이 있지만.

제국의 붉은 군복에도 어울리겠지.

절대, 그가 ‘특정한 사상’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군대의 행진곡은 아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고양감을, 적에게는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민요를 개량한 영국의 행진곡이나 기타 유럽의 행진곡은 상민의 기준에서 낙제점을 받았다.

영국 척탄병 행진곡은 대영제국군이 무시무시하게 강력했기 때문에 공포의 존재가 되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가슴을 울리는 사내들의 노랫소리였다면 그 공포는 더욱 커졌을 것이었다.

영감은 애초부터 있었다.

그가 즐겨 하던 게임―지배하고 정복하라, 줄여서 C&C라 불렸다.―에서 나온 아주 유명한 멜로디였으니까.

전혀 한낱 게임사가 만든 곡답지 않았다.

동구권, 혹은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의 군악과 비슷한 웅장하고 사나운 운율.

그 운율은 상민 자신의 주관적인 평가이지만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행진곡들보다 더욱 중독성 있었으며, 무자비해 보였고, 심지어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섬뜩하기까지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군악의 본래 목적에는 너무나도 잘 부합된다.

상민은 확신했다.

이 행진곡이 고려 육군의 위대함과 맞물려 대영제국의 행진곡보다도 더욱 큰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고.

당연히 곡의 이름도 바뀌었다.

앞으로는 이것이 기존의 이름 대신,

제국 행진곡(Imperial March)이라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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