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38화 (238/653)

병인몽란

병인년(CE 1506) 10월 17일.

당초 예상했던 대원 군세의 공격은, 본래 병인년 초에 이루어질 것이라 공표되었지만 점령당한 화북지역의 안정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회수 이북, 근래에 점령된 곳에서는 이리저리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번 원의 지배에서 벗어난 한족 지방 유력가들은 다시 원의 밑으로 들어가길 거부하며 봉기를 일으켰다.

병인년 말이 되어 겨우 이들을 진압하고 제대로 추수를 한 바투뭉케는 우익 3투멘, 즉 투메드와 오르도스, 융셰부를 맏아들 투루 볼라드에게 맡기며 화북에 남겨둬 명의 전력을 경계하도록 하고 자신은 올로스 볼라드와 바르수 볼라드, 아르수 볼라드 등의 자식과 함께 좌익 3투멘과 복속된 6투멘, 총 아홉 투멘을 이끌어 조선으로 향했다.

차하르와 할하, 우량하이, 오이라트와 나이만, 케레이트와 메르키트, 옹구트와 두글라트의 투멘이 전부 모이니 실로 대원제국의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몽골군의 군세만 거의 십오만.

제각기 말을 능숙하게 다루며 초원을 누비는 전사이니 당대의 기준으론 실로 정병이라 할 수 있겠지.

게다가 한족 포로 및 끌려 나온 징집병들의 수는 그보다 많았다.

연운 16주뿐만 아니라 화북을 집어삼킨 대원제국은 얼마든지 이러한 한족 징집병들을 운용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절대 정예군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창 한 자루를 들려주고 머릿수만 채운 병사였으니.

그렇다 해도 총 군세의 숫자를 다 합쳐보면 사십만.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많아, 중원인 특유의 허풍을 섞으면 호왈 백만에 달하는 군세가 조선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 너에게 다시금 좌익 3투멘과 한병 십만을 줄 테니 이번에도 심양의 발을 묶어라.

발을 묶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기에, 그는 바르수 볼라드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었다.

혹시 그가 독단적으로 난동을 부릴까 걱정해, 쌍둥이 동생 아르수 볼라드를 붙여놓기도 했다.

― 예 폐하!

바투뭉케는 냉철한 지휘관이었다.

심양에서 항거하는 조선군 장수가 대단히 정석적이며 강고하게 방어를 하는 명장이라는 것을 들은 그는 굳이 심양을 통과하지 않았다.

심수는 길고, 먼 북방이 아니더라도 남쪽으로 통과하면 되니까.

만약, 도체찰사 윤필상이 안시성에 와 굳게 걸어 잠가 심양과 연대하여 농성을 했다면 바투뭉케는 초장부터 머리가 아파지는 환경에 놓였겠지만, 멍청한 조선군은 왜인지 심수의 하류에는 별 병사들을 주둔시키지 않았다.

어차피 조선이라는 나라도 다른 나라와 같이 임금을 붙잡는다면 항복을 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최단 노선을 잡아 빠르게 한양으로 공세를 나섰다.

* * *

병인년 11월 12일.

마침내 북원의 선봉대겸 조공이 심양에 닿았다.

병력 자체는 저번의 공세보다 비슷하거나 적었다.

그러나, 이번의 공세는 첫 번째와 비교가 불가능했다.

제남을 점령한 북원군은 미처 명군이 도망가며 회수하지 못한 수십 문의 불랑기포와 화약을 손에 넣은 상황.

그리고 그 제남에 있던 화포들이 분리되어 지금 이 심양성의 공성전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병인년 11월 22일.

무려 열흘 동안 적들의 엄청난 공세를 받아내었던 심양성이지만, 결국은 평지성인 데다 불랑기포에서 쏘아대는 화포가 그들의 성문을 수없이 두드리니, 나무로 된 대문은 이제 형체도 알 수 없이 파괴되어 있었다.

남은 것은 오직 그 뒤에 수많은 잡동사니를 쌓아 올린 어설픈 방벽뿐.

이 어둠이 가신다면, 다음 공세는 필히 성을 떨어뜨릴 것이었다.

사실 열흘 동안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역시 총통을 쏠 수 있었던 것이 크겠지.

고려가 제공해 준 화약 덕분에.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한계에 도달했다.

한밤중, 침묵과 어둠에 잠긴 심양성에서 두 명의 장수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꼭 나가셔야 하옵니까.”

“이대로 우리가 심양에만 안주해 있다면 성은 물론 조선에도 어떠한 희망이 없단다.”

북원이 심양을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계획은 너무나도 명약관화했다.

게다가 이제는 포위되어버린 까닭에 심수를 통해 ‘고려’의 지원조차 기대할 수 없는 상황.

지금 남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허나, 바르수 볼라드라는 자도 이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다만 우리를 묶어두는 것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나아가 야습을 한다면, 저들은 분명 대비된 상태일 것이고 저들이 원하는 바를 우리 스스로가 들어주게 되는 꼴입니다.”

“그렇겠지… 그러나 결국은 나아가 깨뜨려야 한다.”

“대감….”

“상황이 잘못되면 너는 야음을 통해 살아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네 살길을 모색해라. 너는 젊고 군략과 무예가 빼어나니 위기의 순간에도 좋은 수를 내어 훗날을 도모할 수 있을 게다.”

게다가 내 사위이기도 하지 않느냐.

남이가 짐짓 웃으며 그의 어깨를 쳤다.

“내가 죽는다면, 너는 동쪽으로 가거라. 오로(五老, 오녀산성)도, 흑구(黑溝, 흑구산성)도 좋다. 더 멀리 나아가 백두를 거처 경성(鏡城)으로 가는 것도 좋겠지. 다만 이 나라가 망하거든, 너는 그저 백성을 위하는 길을 택하거라.”

청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선이 망할 것이라 보십니까?”

“세상일은 모르는 법이지. 너는 저 고려의 국명을 스스로 들먹이는 자들을 만나는 생각을 지금까지 해본 적이 있었느냐?”

그렇긴 하지요.

그 와중에도 두 무장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자윤(紫玧)아.”

“예, 장인어른.”

“너는 조선이라는 이름에 얽매이지 말거라. 그 이름이 이 땅의 백성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정작 적색 단령 위에 걸쳐 입은 두정갑을 입고 있는 남이 자신은 스스로의 마지막을 조선의 무장으로 장식할 결의를 품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이자윤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대답조차 듣지 않은 남이는 심양성에 오직 오천의 군세만 남겨두라 명령하고는 말 위에 올라 성의 남문을 열라 지시했다.

병인년 11월 23일.

도원수 남이가 전사하다.

객장 이자윤 외 칠천여 명의 생존자가 동으로 달아나다.

병인년 11월 25일.

오골성 관아.

북쪽에서 안 좋은 소식이 도달했다.

바투뭉케의 사남, 아르수 볼라드를 포함해 거의 육만에 달하는 수많은 병졸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아비의 귀에 도달했다.

“썩어버릴 놈!”

소금에 절여져 보내진 남이의 수급을 발로 찬 바투뭉케는 그날 밤 몇 방울의 눈물을 술잔 속으로 흘려보낸 뒤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동생을 잃었지만 그래도 남이를 죽이고 심양을 떨어뜨리는 것에 성공한 바르수 볼라드를 치하하고는 후방의 안정과 보급로를 맡겼다.

대원의 본대는 이미 심요를 통과했었다.

주공이 처음으로 조선군과 마주친 곳은 오골성.

엄청난 군세가 몰아닥친 오골성은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한 개의 비루한 조각배와 같았다.

평지성이라 하나 개보수가 오래도록 잘 되어있고 지휘관의 역량이 뛰어나며 화약 무기를 쓰고 있는 심양성에 비해 오골성은 산성이라는 이점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과거 고씨 고려(고구려)의 치세 이후로 오골산성은 제대로 정비된 적도 딱히 없었으며 근래에 들어와 부랴부랴 보수를 한 부분마저도 제대로 착공되지 않았다.

대원의 강력한 공세에 오골성은 사흘 만에 북원의 손에 떨어졌다.

도체찰사 윤필상은 평소 남이를 견제하며 조선의 군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게 만든 원흉이었지만, 그 마지막에 이르러선 항복하는 추태를 보이지 않으니 스스로 오골성의 관아에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오골성에 남아있는 오만의 조선군은 달아난 삼천여 명의 군세 이외에는 전부 죽었고 성안의 신민들도 죽거나 사로잡혔다.

공성전으로 손실된 병력을 추스르고 있던 바투뭉케는 아들의 비보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군세를 이끌어 남하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병인년 11월 26일.

북원의 군세가 압록을 넘었다.

병인년 11월 29일.

북원이 의주를 떨어뜨렸다.

병인년 12월 1일.

북원이 안주를 함락했다.

병인년 12월 4일.

조선 조정은 파직되어 유배된 전 도원수 박형무를 불러들여 평양을 방비토록 했다.

병인년 12월 9일.

박형무와 일만 오천의 결사대가 평양에서 분전하다 전멸하다.

병인년 12월 12일.

황주와 맹산, 신계, 평산이 모두 함락되다.

북원의 군세가 경기에 도착하다.

* * *

“서… 서둘러라!”

경복궁은 난리도 아니었다.

윤필상의 자결과 박형무의 전사 소식이 당도한 한양은 북원이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이미 거대한 혼돈에 빠져 아비규환의 꼴과 같았다.

병사들도 제자리를 지키는 자가 드물었다.

나라가 이 꼴이 되니 한밤에 도주하는 자가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그러한 병사들을 추포할 역량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궁 내도 마찬가지.

비명을 지르지만 않았을 뿐, 거의 울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나인들이며, 내시들이 우왕좌왕했다.

궁인들이 짐을 챙기랴, 뭐를 하랴, 수없이 지체되는 꼴을 보던 내금위장이 이계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폐하, 어서 몽진(蒙塵)을 서두르시지요, 적병이 임진강에 도착한다면, 강화로 이어(移御)하실 기회조차 사라지게 되옵니다!”

“……강화 또한 마냥 안전한 곳은 아니지 않는가?”

“…폐하! 고려구들이 바다를 횡행한다 하나, 거의 이 년이 다 되어가도록 충청 위를 올라와 공격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당장은 북적들이 더욱 기세가 흉험하니 마땅히 추후의 고민거리로 남겨두시고 빠르게 이어하시는 것이 맞겠사옵니다!”

“…어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을꼬.”

이계가 자책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도 한참 늦어 있었다.

임금의 한탄에 신료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폐하!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시옵소서! 어서 빨리 몽진을 하시옵소서!”

“태… 태자는?”

평상시 이계와 그의 서장자이자 태자인 이금(李昑)은 조금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지경이 되고 보니 태자가 걱정이라도 되는 듯 그가 머리를 쑥 내밀고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이금에게 분조를 이끌고 삼남으로 가 저항을 계속하라 명을 했으니, 사지로 내몬 것과 같았다.

“태자는 무탈할 겝니다. 폐하, 어서 가마에 오르시지요.”

태후와 중전이 길을 독촉하자, 이계는 흘깃 도성을 바라보고 서둘러 가마에 올랐다.

“…강화가 삼남보다야 안전하겠지?”

역시나, 태자를 아껴 말을 꺼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몽진을 할 강화가 태자가 갈 삼남보다 더 안전한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다.

― 병신 새끼.

지난날, 부하가 홧김에 내뱉은 주어 없는 말을 떠올린 내금위장이 몇 번 헛기침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북원의 군세가 수군 하나 변변치 못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상황이옵니다.”

“…….”

사실, 고려에게 대차게 수군을 말아먹은 조선도 그랬다.

그래도 내금위장은 꿋꿋하게 임금을 위로했다.

“반면 아국은 적어도 경기수영과 황해수영, 충청수영의 맹선들이 비교적 건재하니 강화를 틀어막을 수는 있을 것이옵니다.”

이계는 결정을 내렸다.

자칫하면 도망가지도 못하고 남한산성 같은 곳에 갇혀 손가락만 빨 수도 있었다.

도주하는 것만큼은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을 한 이계였기에 진작 한강에 조운선을 대 놓은 상황이었다.

임금의 윤허를 얻은 몽진 행렬이 돈의문을 넘어 배가 있는 한강으로 향했다.

도성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 있었다.

모두 봇짐을 메고, 아이들을 챙기며 남쪽으로 향하는 광경이 정말 나라가 망할 징조가 따로 없었다.

“길을 비켜라!”

그러나 백성들은 무엇에라도 홀린 듯 어가의 옆에 다가와 엎드려 울었다.

“아이고 아이고!”

“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구구절절한 아픔이 배어 나오는 탄식.

임금을 호종하는 나인과 내관들, 신료들이 제각기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그러나 가마 안에 있던 이계는 길을 막고 저 난리를 피우는 백성들에 몽진이 늦어질까 저어해 발을 올리고 손을 저어 내금위장을 불렀다.

입술을 깨문 내금위장이 무장들에게 손짓했다.

“썩 물러서지 못할까? 내 너희들을 베어야 비키겠느냐?”

흉흉한 얼굴을 한 무장들과 병사들이 사방을 휘젓자, 그제서야 백성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 깃든 슬픔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탁

병사를 맞추지는 않았지만, 창을 들고 있는 병사의 발 앞에 돌멩이가 떨어졌다.

“썩 꺼지거라! 이 못난 것들아!”

병사들이 말한 것이 아니었다.

“너희가 나라를 말아먹었다, 돼지 같은 놈들!”

병사들이 서둘러 어가를 모욕한 사람을 찾았으나, 밀집한 군중 모두 눈에 불을 켜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졸지에 병사들의 기세가 먼저 수그러들었다.

“용주야, 용주, 네놈은 용주(庸主)야!”

“폐주만도 못한 놈! 네가 조선의 임금이냐! 육시럴 놈!”

어가 안에서 입술을 깨물고 그 소리를 듣던 이계가 다시금 행렬을 재촉했다.

성저십리(城底十里)를 통과하여 삼개나루(마포나루라고도 불렸다)에 도착한 이계는 미리 와 대기하고 있던 맹선에 올랐다.

평소, 마포나루는 새우젓 비린내가 잔뜩 풍기는 활기찬 나루터였지만, 지금은 텅텅 비어 있는 을씨년스러운 곳과 같았다.

한강을 도하하려는 자들은 배가 한 척도 없는 이곳에 굳이 오지 않겠지.

이계는 강화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병인년 12월 10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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