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35화 (235/653)

서벌계획

* * *

중서령과 경당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미 주전에 대한 여론은 확실시되고 있었다.

민족주의적 흐름이 제국을 파멸로 밀어 넣을 인종적 차별에서 역사를 비롯한 문화적 동질성으로 바뀐 것 자체는 상당히 괜찮고 긍정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몹시 내키지 않는 선택을 강요했다.

돈이 무지막지하게 지출되는데, 기대보상은 무형의 내면적 충족감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나름대로 뜻이 통하고 대체로 평화주의적이었던 상황 해건은 이미 건강과 노령의 이유로 개천 230년에 당시 태자였던 해선에게 양위를 표하고, 옛 타완틴수유의 수도 쿠스코에 위치한 황가의 별궁으로 가 태후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현황 해선은 삼별초 무장이자 태조 당사자인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지만, 그래도 생각 자체는 대중들과 비슷하거나 더 몰입한 감이 있었다.

자기 스스로가 쌍용지손이니까.

본래 선조나 부모님이 모욕을 받았을 때, 당사자 스스로는 별로 반응이 없더라도 자식은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냥 넘기기 어려운 면이 있으니까.

게다가 해선은 이제 서른하나의 원기 왕성한 나이였으니 그 말을 듣고 스스로가 피가 끓는 모양이었다.

정치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는 황제.

그들은 문화와 예술, 운동 등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해선은 서벌이라는 단어에 꽂혀버린 것 같았다.

황제, 관리들, 무장들, 고려와 연방에 살고 있는 백성들, 막 이주하는 조선인들, 역사적 맥락에는 별 관심 없지만 혹시 유학의 나라에 포교할 수 있을까 싶어 기회를 엿보는 종교계, 전쟁특수라는 절호의 기회를 잡길 원하는 상인들.

자신과 이제 경당의 소수파로 전락해버린 한 줌의 주화론자들을 제외한다면, 이 전쟁을 반대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따라서, 제아무리 이 제국의 건국자이며 아버지인 자신이라도 결국은 대중들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내가 너희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주긴 했구나.’

국가적 자긍심은 마치 마약과도 같지.

이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계속 공급하고 있는 번영이라는 마약에 취한 상태와 같았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이번 기회에 현실이 어떤 것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겠다.’

상민은 결단했다.

이래저래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휴일이 지난 화요일, 시중의 명령으로 군무부에 명령서가 하달되었다는 소식이 고려에 퍼져나갔다.

우편과 조보 등으로 이 소식을 들은 고려인들은 마침내 감격했다.

동정(東征)은 과거에 이미 완료한 상황,

이젠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서벌론마저 확실시되고 있었다.

* * *

물론, 이번 기회에 현실을 알려준다는 상민의 생각이 스스로 패배를 의도하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런 행위는 고려와 고려인들에 대한 이적행위.

벌어진 전쟁은 기필코 승리해야만 했다.

피로스의 승리라도, 단연코 피로스의 패배보다는 나으니까.

물론 고려는 한낱 에페이로스가 아니었고, 북원도 로마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대외원정을 치르고 준비하는 과정에 상당히 많은 경제적, 정치적 부담이 어깨에 지워졌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면, 맹목적인 대외정벌 및 팽창론에 대한 반대여론은 필히 생겨날 것이었다.

‘그때까진, 이 원정은 차라리 적극적으로 준비해야겠지.’

사실 이 원정도 국가적 결속력으로 볼 때는 측정할 수 없는 무형의 어마어마한 이득을 줄지도 몰랐다.

지금껏 잠재우려 시도했으나, 여전히 음지에 남아 이어져 내려오던 우생학의 논의는 뜬금없는 서벌론으로 인해 거의 완전히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이 희고 머리가 노랗거나 옅은 갈색인 유럽계 고려인들과 짙은 피부의 남려대륙 원주민계 고려인이 주먹을 쥐고 바투뭉케의 목을 잘라 옛 ‘선조’들에게 바치겠다고 방방 뛰고 있는 상황에서 우생학을 들먹일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 들어온 조선인들까지 호응하니, 국가 내부적인 결속력은 무척이나 증대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연방의 가파른 성장으로 피치 못하게 중앙과의 삐걱거림이 있었는데 이가 의외의 방향으로 해결되고 있는 셈이었다.

외부의 적은 내부를 단합하게 하니까.

군무부에 지시를 하달하고, 상민은 한 달 뒤 제국 최고 회의를 개최했다.

재무상서와 외무상서 등의 원정에 관련된 관리들뿐만 아니라 일군을 관리하는 장군들 또한 참석하니 수도가 한동안 북적였다.

경당파 관료 일부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이미 숭무감의 무장들은 전략적 식견이 풍부했고, 관리들 또한 명석했기 때문에 논의의 흐름은 뜬구름 잡는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중이 대외원정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라는 비답을 내려준 뒤부터 일선 부처들은 빠르게 최고 수준으로 격상된 이 원정 지원 업무부터 처리해놨기에 이미 대충 원정에 대한 초안이 작성되었을 것이다.

어딘가 뚱하고 못마땅한 표정(물론, 보이진 않았다.)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시중의 눈길 아래에서, 관리들과 무장들이 토론을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먼 거리에서 치러지는 원정이니, 그 숫자는 제한될 수밖에 없소이다."

재무상서가 몸이 달아있었는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따라서 일만 오천, 그 이상의 군세는 불가하오."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이 제각기 반대했다.

그들의 말을 듣던 군무상서가 의견을 취합하고는 입을 열었다.

"보포(步砲) 일만 오천으론 지극히 부족합니다. 게다가 저들은 기마로 유명한 민족이니 우리 또한 대기병 전력으로 적어도 만 이상의 군세가 필요합니다."

"말은 사람보다 수송하기 훨씬 버겁소. 만 필의 군마를 옮기는 것에 대체 얼마나 큰 수고로움이 들지 예상이 안 되는군. 게다가 장다름은 그 부속무장도 몹시 무거워 배에 탈 수 있는 숫자도 제한될 게요."

"어림도 없습니다. 일만 오천의 군세로 대체 수십만이 될지도 모르는 적의 공세를 물리치란 말씀이십니까? 저들은 아즈텍이나 누무누 같은 원주민 세력 정도가 아닙니다. 제국은 지금 역사상 가장 강력했었던 국가와 싸우려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북원에 대한 혐오감과는 별개로, 고려인들은 대원제국이 가졌던 강함을 충분히 인정했다.

강한 놈에게 쫓겨난 게 그나마 명예롭지, 약한 놈에게 쫓겨난 것이 명예롭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삼별초의 남려 도착 이후 벌어졌던 세계사의 흐름도 이제는 대소신료들과 식자들 정도는 확실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이들은 북원이라는 기필코 무너뜨려야 할 존재가 지금껏 마주했던 적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거대한 국가라는 것을 인지했다.

재무상서도 그 말에는 반박을 하지 못하겠는지 끙끙거렸다.

상서령이 중재를 시도했다.

"화포의 수를 늘리는 것은 어떤가?"

"보포 일만 오천의 비중에도 포병이 상당합니다. 하오나 현 교리상 고려의 군세란 것은 어디까지나 총병이 주가 되어야 합니다. 포병과 척탄병은 그를 보조하는 것이지 그것이 주가 된다면 유목민의 특성을 가진 적의 기마 공격에 취약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겠지···."

상서령과 군무상서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재무상서가 불쑥 말을 했다.

"이만."

"삼만."

"···이만 삼천."

"이만 팔천."

"야, 오재석이!"

현 군무상서와 재무상서는 나이 차이가 조금 있긴 했지만 서로 국자감의 동기였고 사적으로 친해 몇 번이고 술자리를 나누는 사이였다.

하지만 업무적 충돌은 그러한 우정에 가끔은 흠집을 내기도 하나 보다.

평소의 친분이 무색하게 으르렁대는 두 중년인을 바라보던 상민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재무, 지금 이 회의는 지극히 중대한 사항을 다루는 공적인 자리임을 잊지 마시게."

"···송구합니다, 당하."

재무상서는 군무상서와 멱살잡이라도 하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결국은 기존의 안에서 거의 7할에 달하는 병력이 증가한 이만 오천의 원정군 규모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군무상서가 재무상서의 눈치를 보더니, 위로랍시고 말을 꺼냈다.

"군사를 수송하는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사실, 조선인들의 이주에 쓰이는 플류트의 귀환 과정에 몇 차례 병사들을 실어 보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재무상서는 그를 쏘아보더니 툭 말을 뱉었다.

"그대는 탐라총독부로 가는 그 선단에 건량과 육포가 잔뜩 실려 가는 것을 잊었소? 병사를 그곳에 태워 보낸다면 그만큼의 식량이 탐라에 공급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니 이는 식량 보급에 있어서 치명적인 일일 것이오."

"···탐라의 구황작물 수확이 그것을 만회하지 않겠습니까?"

"기껏 그 작은 섬에서 얼마나 많은 작물이 자란다고 거진 정병 삼만과 만여 필의 군마를 먹여 살리겠는가? 거기 있는 조선인들을 먹여 살리는 것도 벅찰 것이네."

"배를 더 건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이, 뭐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나는가?"

하지만 군무상서는 재무상서의 말보다는 표정에 집중했다.

저 양반은 만약 정말로 불가하다면, 오히려 냉정한 표정으로 불가함의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성격이었지, 저렇게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치진 않았으니까.

계속되는 군무상서의 압박에, 결국 재무상서는 시중을 힐끔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황립 해문조선소와 청해조선소, 정앙조선소 및 남포조선소를 비롯해 심지어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조선소와 에이레의 이니스맥노튼 조선소에다가도 동시에 플류트 건조의 발주를 넣기로 결정했다.

"···알겠소. 어차피 배는 전후에도 많은 부분에 쓰이는 것이니··· 다만 전후 배는 재무부의 관할로 이관되어 민간에 매각할 것이오."

재무상서의 덕목은 쪼잔함에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래도 고려는 재무상서의 행동에도 드러나듯 이번 원정의 재정 자체에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진 않았다.

재정의 건실성도 건실성인데, 시중이 서벌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자 전국 수많은 곳에서 엄청난 성금이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

주인이 없는 맨땅, 태초의 건국부터 세계사적으로 유례없이 강력한 농자유전을 실시하고 조세법을 일관성 있게 징수하고 심지어 누진세의 개념도 도입하고 이백 년이 넘게 흐른 지금, 농부들은 대체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했고 이는 여유경제력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비싸진 않더라도 나름대로 문화를 향유하기도 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심지어 참여까지 원했다.

이번 일에 대해서 유난히 친황실적이며 보수적인 애향의식을 가진 그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십시일반이라고 일반 사람들의 조그마한 성금이 모이니 실로 엄청난 양의 전비가 된 것이다.

동시대 세상 어떤 나라가 나라 간의 전쟁에서 자발적으로 성금이 모이겠는가?

종교면 모를까.

‘정말 십자군이라도 가는 것 같군.’

몽골에 대한 복수의 열의는 유럽의 기독교 교인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종교적 열의에 못지않았다.

물론 성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순 없다.

그래서도 안 되었고.

선례란 중요하기에, 만약 온전히 성금에만 의지하게 된다면 후대의 멍청한 위정자들이 이 성금의 달콤한 맛에 중독되어 성금의 탈을 쓴 특별세금을 징수하는 추태를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했다.

상민은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미래에는 상당히 일반적이며 경제적으로 건전한(대체로) 방법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그 개념 자체가 다소 어색할 것이다.

최초의 주식회사의 설립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고려국채(高麗國債).

곧 중서성에서 첫 번째 국채의 발행이 논의될 것이었다.

황가의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고려의 조정, 특히 의회인 중서성 이름으로 발행되는 것이니만큼 이 당시 유럽의 나라에서 발행되는 군주의 사적 채무와는 격이 달랐다.

국가의 상환보증은 당연한 것이었고 발행절차도 대체로 엄격하며 공명하고 목적 또한 민의를 따른 공익(고려인들의 입장에서)의 수행에 있으니 상인들이 국채권을 마치 가장 신용도 높은 자산마냥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또한 세금보다 훨씬 민간의 저항이 적었고 긴급한 자금 동원능력이 뛰어났다.

채무불이행의 위험은 아예 없다 말하긴 힘들 것이지만, 현 고려가 여간해서 그럴 일도 없거니와 상민 자신도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둘 사람도 아니었으니, 마냥 틀린 생각도 아니겠지.

"두 부처는 실무자 간의 토의를 통해 정확한 예산을 책정하여 보고하라."

재무상서가 고개를 조아리고는 입을 열었다.

"저··· 당하, 혹시 이번 일로 포토시 광산의 채굴제한을 조금 완화하심이?"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아직 전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음에도, 빼어난 실무적 감각으로 본능적으로 통화량을 늘려 국가의 빚을 줄이려는 의도를 담은 재무상서의 말에 상민이 잠시 생각하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가상승률이 위험하지 않다면 한번 시도해볼 만했다.

‘상무부에 일러 시장의 동태를 면밀히 파악하라 해야겠군.’

지금으로서는 현명한 방법이긴 하나, 공개시장조작과 통화정책 모두는 만능의 치유법이 아니었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법.

경제정책은 세심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대신 재무는 앞으로 퇴청하기 전 한 시간만 나와 공부하고 가시게."

"······."

재무상서의 얼굴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다채롭게 변화했다.

뭐, 때가 되긴 했다.

이제 화폐가 완전하게 자리 잡고 전 세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생산량을 자랑하는 은광을 가지고 있으며 주식과 회사의 개념, 국채의 개념이 들어선 이 순간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바야흐로 개화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자신이 나아갈 길을 보여주긴 했지만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오직 제한적으로 가르쳤던 정치철학과 자연과학과는 달리 상민은 이번엔 스스로가 신하들에게 가르칠 것이 많다 느꼈다.

아무리 그가 명문대 출신이라 하나 석박사 과정은 아니었고 겨우 경제학 학사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상민은 경제학의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이미 상민은 틈틈이 많은 경제학적 지식을 책에 기록해 놓은 상태였다.

그 업적은, 국부론으로 대변되는 고전경제학의 시작으로부터 실로 한두 세기를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모든 지식은 때가 있기 마련이니 순차적으로 천천히 풀어야겠지만.

‘내가 다른 가명을 사용한다면, 나는 이 세상 최고의 경제학자라 불릴 수도 있겠군.’

재미는 있겠다만, 새로운 가명을 사용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니 좀 더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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