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33화 (233/653)

우정 제도

"끄으···."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복부를 움켜쥐고 신음성을 삼켰다.

정신을 실로 아찔하게 하는 격통이 복부에서부터 퍼져나가 온몸을 휘감고 돌았다.

어찌나 그 고통의 강도가 심하던지, 그토록 정신이 강하던 노인 또한 견딜 수 없어 한동안 웅크리고 벌벌 떨어야만 했다.

"허어, 허억···."

이내, 고통의 파도가 멈추자, 노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어지러운 단령을 정돈하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의원을 불러오라!"

심양성에 있는 의원 하나가 남이의 부름을 받고 그에게 다가가 진찰을 했다.

노장의 손목을 짚고 맥박을 재던 의원이 이윽고 어두운 낯빛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기탄없이 말해주게."

의원이 무언가 머뭇거리는 것을 느꼈는지 남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몸에서 사기(邪氣)가 자라고 있으니, 당분간은 정양하시며 약탕을 드시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아뢰옵니다."

한숨을 삼킨 의원이 이실직고했다.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었으나 남이의 생기가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만약 세계에서 가장 명망 높은 고려의 의원을 데려다 놓고 진찰을 시킨다면, 그조차도 아주 정확하진 않겠지만 아마 복부 쪽의 중요한 장기―예를 들면 췌장 같은 곳―에 종양이 생긴 것 같다고 진맥을 하겠다.

하지만 이 조선의 의원은 그 정도로 의학에 조예가 깊진 않았다.

의원의 말을 들은 남이가 피식 웃었다.

"내, 그럴 형편이 되어 보이는가?"

"···송구합니다 대감."

송구할 게 뭐 있겠나. 세상이 이런 것을.

남이는 씁쓸하게 중얼거리고는 잠시 수염을 쓸어내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생에 미련은 없으나, 지금 죽는 것은 조선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금상은 차치하고, 이 심요의 백성들과 북방군에게는 더욱더.

적어도 고통이라도 줄여야만 제대로 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일단 탕약의 처방은 받겠네. 그러나 되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약을 지어 올려주게."

"예, 대감··· 하오나 탕약은 오직 일시적인 차도를 위한 것이니···."

"그대가 생각하기엔, 이 병이 제대로 된 정양을 한다고 해서 사라질 것 같은가?"

의원은 무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남이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다만 단령 위에 입을 두정갑을 갑옷걸이에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아. 내 두려운 건, 내 죽음이 헛되이 될까, 그뿐이야."

* * *

위기의 을축년(乙丑, CE 1505)이 어찌어찌 지나갔다.

을축몽란(乙丑蒙亂) 또한 결과적으로 볼 땐 조선의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지 북원이 공세를 물림에 따라 북방은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유일한 반원우군이라 할 수 있는 명의 천자가 멍청한 짓을 하다 잡힌 것도 그러했고.

게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가을이 되어 있었고, 파종조차 하지 못한 심요도는 어떠한 작물도 논과 밭에서 산출해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조정의 지원은 터무니없었다.

그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은 조정보다 오히려 저 남쪽의 고려구들.

잊을 만하면 야심한 밤에 나타나 아무렇지 않게 세곡을 주는 그들을 북방군은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맞이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 곡식도 결국 조선의 것이긴 했다. 그러나 주상이 과연 이만큼의 곡식을 북방군에게 주겠냐 물으면, 아무도 확언을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반면 남이를 길들이려고 했던 도체찰사 윤필상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혀를 찼다.

어디서 곡식이 샘솟는 연못이라도 발견했는지, 남이는 아직도 윤필상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알아서 먼저 적당히 숙이고 들어오면 도체찰사인 자신에게 북방군의 군령이 전부 다 귀속되고, 도원수 또한 자신의 지시를 받는 식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는데.

그는 예전부터도 너무 남이가 자신의 주장이 강하고 직설적이라 생각했다.

금상은 공을 크게 세운 무관을 경계하니 자신을 좀 낮춰도 되었는데 남이는 자신을 낮추기는커녕 국방을 강화하며 정병들이 마음 놓고 북방에 주둔하도록 무관과 장졸들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었다.

게다가 윤필상은 원래부터 문신들 특유의 생각으로 무신들을 무시하고 있었다.

무관들은 문자와 학문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병법을 문관들보다 잘 모르고, 따라서 군사주획(軍事籌劃)에 관해서는 문관이 더욱 뛰어나다고.

비록 남이는 종친 출신이라 학문을 깊게 배운 무관 중 하나였지만, 윤필상은 여전히 심수 대첩은 오직 구 할은 운이요, 일 할이 노력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말과 생각을 남이에게 보여주었다간, 그는 펄펄 뛰며 윤필상을 쳐죽일지도 몰랐다.

강대한 외적을 앞에 두고, 서로 내 공이니, 네 공이니, 누가 잘났느니, 누가 잘나서 질투와 위협을 느낀다느니 하는 이런 것들은 정말 하등 쓸모없는 심리적 소모였으며, 장수와 위정자로서는 해서 안 될 일이었으니까.

이런 도원수와 도체찰사의 군령권 다툼은 아주 짧은 정비의 시기에도 북방군에 큰 동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 몇 달간의 유예기간은 조선에겐 아무런 소득도 주지 않고 그저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이 시기는 소식이 지구 반대편으로 흘러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

* * *

개천 231년(CE 1506, 병인)

고려

창양

우정(郵政) 제도는 몹시 중요하다.

서신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락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게 하는 행위 자체는 일견 별 볼 일이 없어 보이지만, 국가적 관점에서 볼 때엔 더없이 중대한 문제였다.

관의 소식이야, 군함을 이용하거나 어찌 강압을 이용해서라도 오고 가는 배에 소식을 실어날라 보낼 수 있지만, 민간의 시시콜콜한 소식은 그렇지 못했다.

창양으로 상경(비록 남쪽에 있지만, 상경이라는 표현은 그대로 쓰였다)한 아들에게 부모가 안부를 물어보는 편지.

이러한 것들은 그동안 대체로 민간상선에 돈을 좀 주고 위탁하여 보냈었다.

그러나 국가의 규모와 연방 구성원들의 덩치가 커짐에 따라 순식간에 우정 체계의 수요가 공급을 아득히 초과하니 바야흐로 근대적 우정 제도의 도입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근대적의 기준은 사실 이상하긴 하겠다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적이라 불러야겠지.

여튼 개천 225년에 내무부의 주관하에 우정국이 만들어졌다.

내무부에선 또 자기들만 일을 떠안게 되었다고 눈물을 삼키는 모양.

상민으로서도 사실 잡다한 것 중에 대부분은 내무부 소관으로 밀어 넣고 있었기에 양심이 조금 찔리긴 했지만, 이 시대엔 아직 정보통신부나 그러한 현대적 부서를 만들기엔 무리가 있긴 했다.

어찌 되었든 우정국은 이후 3년간의 시범 운용을 한 뒤, 228년부터 전 연방의 구성원들이 모두 이용 가능하게 되었다.

위로는 황제와 시중으로부터, 아래로는 정말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상민은 자신의 앞으로 온 편지들을 살펴보았다.

이 편지들은 제각기 특별하게 건조된 우편 수송용 함선에 실려 이곳으로 왔다.

짐의 적재량보다는 속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한 우편 수송용 함선은 제도 창양과 수많은 도시들을 해운으로 이어주는 우정 제도의 핵심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내륙에 있는 도시들은 조금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직접 해당 지역의 우체국이 있는 해안도시로 가면 빨리 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마냥 긴 것은 아니었고, 아무리 북려에 있는 도시라도 편지를 보낸다면 짧게는 두 달이 못 되어, 길게는 세 달 안에 서로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우편선 말고도 다른 축이 있었다.

우정 제도의 핵심은 바로 이 우표라는 것에서 나왔다.

본래, 이전까지의 서신이라는 것은 제대로 된 규격과 규율 없이 그저 알음알음 보내지던 것이었다.

돈은 물론 보내는 사람이 대체로 내긴 했지만, 그것이 합당한 가격인지, 정말로 이 사람이 제대로 보낼 것이란 신뢰를 할 수 있는지, 심지어 우편을 뜯어보거나 엉뚱한 일에 쓰지는 않는지 보내는 사람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표가 도입됨으로써, 우정 제도에 수익성이라는 것이 명백히 생기기 시작하여 관이 이를 시작하자 우정의 3대 원칙, 즉 신속성과 저렴성, 정확성이 모두 보장받았다.

비밀성은 시대적 한계로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었기에 관이 보장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반인의 손에 맡기는 것보다야 훨씬 더 믿음직스럽기에 이도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상민도 막대한 초기 자금이 드는 우편선의 건조를 크게 지원했었다.

이 넓은 땅을 하나로 묶기 위해선, 우정 제도의 개혁이란 필수 불가결했으니까.

사람들이 서로 보지는 못하더라도 연락을 이어가고, 그렇게 해서 문화적 동질감까지 유지해나가는 것은 눈으로 전혀 관측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그 효과를 추산하기도 어려운 성질의 특성이었지만 연방 구성원의 이탈을 막으며 다소 이질적인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기본적인 끈이 되기도 한다.

물론 하나로는 부족해, 여러 가지의 끈이 더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우정 제도의 끈은 현시대에선 가장 질긴 끈 중 하나였다.

‘덕분에 딸의 서신도 이렇게 받게 되었구나.’

가장 위에는 앙주의 여왕, 마고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우편이 보였다.

국가기밀이 아닌 일반적인 황실의 소식도 이제는 우편선과 우정 제도를 통해 보내졌다.

특별히 밀봉해 보낸 보안행낭―황실의 인물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돈을 더 내면 받을 수 있었다―을 열자 그곳에는 금박으로 장식되고 그 위에는 흰 상아야자(Phytelephas Macrocarpa, 남려의 특산물이며 상아의 대체재이기도 했다) 열매 가루를 솔솔 뿌린 최고급 종이가 나왔다.

멀쩡한 인장으로 보아 할 때, 당연히 아무도 소속의 내용을 보지 않았겠지만 상민은 조심스럽게 한 번 더 이를 꼼꼼히 체크했다.

그리고는 봉투를 열어 서신을 읽어내렸다.

"······."

서신에는 고아한 필체로 적힌 고려글이 보였다.

[···자식은 하늘의 흰 구름을 보면서도 부모를 그리워한다지요···.]

애가 늙긴 늙었나 보다.

이제 그녀는 예순이 다 되었는데, 그 나이가 되니 가끔은 감성이 북받치는 모양.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이런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마고는 그녀 특유의 조심스러움을 가지고 있어 우편선에서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취급되는 보안행낭에 서신을 보내면서도 편지 안에서 상민을 특정할 수 있는 묘사를 빼버린 채 편지를 보내었다.

덕분에 은유와 비유가 가득했다.

그러나 상민은 자신이 그 편지를 받는 주체였고, 비유도 곧잘 알아들었기에 읽는 것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마고는 그녀의 어머니인 잔 이상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앙주의 어머니’로 불리지만, 그 앞에서는 오직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것이다.

"······."

킁.

사실 나이가 든 것은 상민이 더 많다.

그리고 자식 사랑은 아무리 그가 많은 자손을 가졌어도 그 애틋함의 총량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나 말 잘 듣고 귀여웠던 딸은 더더욱.

붉어진 눈가를 훔친 상민은 고개를 흔들어 예전의 추억이 자신을 완전히 잠식하는 것을 막았다.

이 자리의 엿같음은, 항상 이런 사적 감정을 업무에 지장이 되지 않게 칼과 같이 잘라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포도주나 마시면서 저녁때 다시 한번 딸의 편지를 보겠다 다짐한 상민은 다른 편지들을 살폈다.

그의 책상 앞에는 딸의 편지 말고도 전국 각지에서 온 편지들이 아직 한가득이었다.

고려는 관리해야 하는 곳이 참으로 광대했고 넓었다.

따라서 이런 백성들 간의 소통은 중요했다.

아무리 상민이라도 몸은 하나뿐이고 시간 또한 다른 이들과 동등하게 흘러가니 모든 이들의 서신을 전부 다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지역마다 어느 분량 이상의 서신은 무조건적으로 틈틈이 읽길 원했다.

신문고가 물리적 거리로 불가능한 제국이니, 이 마음의 편지는 중대장··· 아니 시중으로서는 무조건 읽어야만 하니까.

그래, 첫 편지부터 또 지랄이구나.

‘···탐관오리는 언제나 생길 수밖에 없지.’

아무리 고려가 관리들의 권위가 줄어들고, 역으로 시민의식이 성장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하나, 백성들을 착취하여 제 잇속을 챙기는 관리는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상민은 세필을 들어 서신을 보낸 자의 성명을 지워버리고 어사대와 사헌대에 이첩(移牒)하여 특별감사를 통해 해당 지역의 비위를 감찰케 한 뒤, 다음 편지를 살폈다.

그리고 서신에 적힌 한 문장을 보자마자 곧바로 뒷골이 땡기는 것을 느꼈다.

[대저 국가의 근본이란 무엇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