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5)
대원제국.
상도.
“그래서, 이게 답장이다?”
바투뭉케는 피식 웃었다.
“저 조그마한 땅을 가지니 조선인들의 콧대가 높아졌구나··· 바르수 볼라드!”
“예! 폐하!”
젊은 청년, 바투뭉케의 삼남 바르수 볼라드가 뛰어나와 부복했다.
“좌익 3투멘을 너에게 맡긴다. 너를 이제 칸이라 부를 것이니 네 휘하의 부대들을 이끌고 조선을 상대하라. 거기에 한족 놈들 십만을 붙여 줄 터이니, 그들을 화살받이로 써라.”
“···예! 황상의 명을 따릅니다!”
바투뭉케는 옥좌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함부로 공성전에 몰입하여 주요병력을 소모시키는 것은 자제하고, 적들의 배후로 짓쳐들어가 약탈하여 군량의 소모를 최소한으로 시행해라. 만약 저들이 뻔한 청야전략을 내온다면, 그저 요양 평원을 황폐화한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오라. 주공(主攻)은 제남이며 네 공세는 오로지 조공(助攻)이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바르수 볼라드가 신나서 뛰어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바투뭉케가 다시금 옥좌에 몸을 깊이 묻었다.
측근이 입을 열었다.
“명의 어린놈이 과연 조선을 구원하러 등껍질에서 목을 내밀겠습니까?”
“내밀어도 좋고, 안 내밀어도 좋다. 오지 않는다면, 조선을 쑥대밭으로 만들면 그만이지.”
“만약 저들이 나오면···.”
“그렇다면 천명을 되찾을 기회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나?”
바투뭉케는 껄껄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전의 바깥으로 나갔다.
상도에는 이미 어마어마한 숫자의 군대가 도달해 있었다.
상도의 궁궐이란 평상시엔 약간 휑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밖에 저 빼곡하게 모인 게르(ᠭᠡᠷ)들을 보라.
바투뭉케는 그들이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직하게 말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았다.
“짐을 믿고 따르라, 짐의 핏줄 속에는 칭기즈 칸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그의 치세, 예전 대원의 영북행성에 속해 있었던 부족들이 다시금 그의 깃발 아래에 모였다.
이들은 명의 건통제 주고후의 엄청난 공세에도 떨어질 듯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 대도(북경)를 보며 옛 대원대몽골국의 부활을 손에서 완전히 놓지 않았었다.
황금씨족의 권위 또한.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위대한 대칸이자 대원제국의 황제인 바투뭉케의 영향에 다시금 복종하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의 혈통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오이라트 출신의 권신이자 북원을 손에 쥐고 흔들었던 에센 태사(太師)조차도 끝끝내 이겨내지 못했지.
‘에센, 그대가 대원을 손에 넣으려 했다 하더라도, 그대는 핏줄에 흐르는 고귀함이 없는데 어찌 그럴 수 있었겠소?’
모두에게 버림받았었던 꼬마, 바투뭉케는 그의 감시에서 벗어나 있었던 덕분에 이렇게 다시금 재기에 성공했다.
오이라트와 나이만, 케레이트와 메르키트, 옹구트와 두글라트, 타타르와 준가르.
바투뭉케는 본래 자신이 이끌고 있던 6투멘과 더불어 복속된 이들을 섞어 12투멘을 만드니, 그 위세는 엄청났다.
유목민이란, 때로는 턱없이 많은 군사들을 한 번에 뽑아낼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말 위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그 말로서 전장을 누비기도 그만큼 쉬웠으니까.
게다가 화북에 자리한 그의 군세 또한 만만치 않으니, 원은 다시금 명과의 천명대전을 벌일 의향이 있었다.
* * *
그러나 다시금 자리에 돌아온 바투뭉케는 침음성을 삼켰다.
“빌어먹을 그 불랑기포···만 아니었다면 진작 제남을 떨어뜨렸을 텐데.”
예전 원나라에서도 화포는 존재했고 기술이 실전된 것도 아니었으니 지금도 대원에 화포와 화약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명처럼 저렇게 성곽에 불랑기포를 도배하다시피 하진 못했다.
게다가 그 광동행성과 절강행성이 있던 지역에서 오간다는 양이들에게서 화약을 구하는 것인지, 명은 상당히 많은 화약을 충분히 쟁여놓고 여유롭게 수성을 하고 있었다.
반면 대원이 양이들에게서 화약을 풍족하게 구할 방도는 없었다.
발해만은 조선과 명이 양쪽에서 틀어막고 있는 형세였으며, 양이들도 굳이 왜구들과 명의 해적들을 뚫고 북쪽으로 먼 거리를 와서 교역을 하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명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결국 조선을 거꾸러뜨려야 한다, 이 말인가.”
본래, 유목민의 왕조가 중원을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저 반도의 나라를 박살을 내든, 병합을 하든, 하다못해 사대의 예를 받든 결착을 내야 했다.
대원제국 또한 예전 고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들을 손에 꽉 쥐어야만 명을 얻을 수 있었다.
조선 또한 화약은 별로 없는 것이 분명했지만 그들 나름대로 괜찮은 화포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발해만을 뚫어버리는 것은 의미가 상당히 컸다.
뚫린 발해만에 군선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조선의 수군을 손에 넣는다면 수십 개의 근심이 사라지고, 대신 명을 공격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수십 개로 불어난다.
‘주공과 조공은,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마련이지.’
만약 명이 고개를 내밀지 않고 예전처럼 저 성에서 화포에 의지해 수성만을 꿈꾼다면, 바투뭉케는 대원제국의 모든 저력을 동원하여 다시금 조선을 짓밟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 * *
바르수 볼라드는 좌익 3투멘과 징병된 한족 군대 십만을 이끌고 심양에 도착했다.
투멘이라 함은, 만호(萬戶)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만 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개념보다 더욱 커져 사실상의 부족의 개념으로 불렸다.
좌익 3투멘은 차하르와 할하, 우량하이를 일컬었다.
이들 부족만 해도 거의 육만이 넘는 병사들을 징집할 수 있었고, 바르수볼라드가 칸의 위치에 오르면서 특별히 새로 편성한 오천 명의 케식을 합치면 거의 십칠만에 달하는 군세였다.
대원은 한때 거의 전 세계를 지배했던 만큼 아직까지도 공성전에 충분히 능하여, 수많은 회회포(트레뷰셋)와 조금이지만 화포까지 가지고 왔다.
바르수 볼라드가 보기엔, 심수 건너의 심양은 충분히 떨어뜨릴 수 있는 조그마한 조각배에 불과했다.
첫 번째 공방전은 계혜년 1월에 12일에 벌어졌다.
조선에겐 애석하게도 심수는 사람이 충분히 건너갈 수 있을 만큼 꽁꽁 얼었고 수위조차 상당히 낮아져 있었다.
남쪽에 새로 건축한 심양은 북쪽만큼이나 주변에 의지할 만한 산세가 아예 없었으니 당연히 평지성이었다.
비록 조금 내려가면 옛 고구려, 혹은 그 전의 국가들이 지은 백암성(白巌城)과 개모성(蓋牟城)등의 잔해가 남아 있었지만 쓰기에 어려울 만큼 폐허로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심양의 상징성이 대단하니 굳이 뒤로 가 수비하지도 않았고.
다만, 심양성은 건축이 끝난 이후에도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여 상당한 규모로 바뀌어 있었다.
거의 일곱 장 높이의 성곽은 전부가 다 돌로 되진 않았지만 상당한 방호력을 자랑했다.
― 콰앙
투석이 성으로 날아들어도 견고한 성채는 묵묵하게 버텼다.
바르수 볼라드는 썩 유능한 군재를 지니고 있진 않았지만 위대한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정도로 대단한 자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공성전은 철저하게 끌려온 한족들 위주의 병력을 소모시키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와아아!”
방어구와 무기는 변변찮았지만, 그래도 그 수가 워낙 많고 공성무기는 제대로 된 것이었기에, 남이와 그가 이끄는 조선군은 필사의 힘으로 막아내었다.
“쏴라!”
“모조리 도륙하라! 한 놈도 성벽 위에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그러나 심양의 결사 항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지 바르수 볼라드는 심양을 포위하면서, 별동대를 운용하여 심요도를 누비었다.
겨울이 왔고 대부분의 곡식은 성안으로 미리 옮겨놓은 상태였기에 약탈할 재물들이 많진 않았지만, 별동대는 받은 명령대로 충실하게 지역을 탈탈 털고, 민가를 불태우며 사람을 죽이고 납치했다.
남쪽이나 성안으로 피난하지 못한 백성들은 비참하게 들판에서 등이 갈라진 채 삶을 마감해야 했다.
당연히 남이도 이를 알고 있었다.
“정돈되지 못한 이 공세는 저들의 주력이 아니다.”
하루하루의 공성전마다 수천 명의 적군을 죽여냈고, 아군의 피해는 지금까지도 크지 않았다.
남이는 저들의 목적이 후방을 요란케 하고 성의 배후를 차단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절대적 병력이 적은 우리에게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남이가 만약, 보급과 화약무기 모두에 충실했으며 그 규모가 지금의 두 배에 달했던 몇십 년 전의 북방군을 손에 넣고 있었다면, 지금 저 북원의 군대는 역으로 밤마다 조선의 반격을 무서워하며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없어 영채를 수십 리 뒤로 물렸을 것이었다.
“도원수 대감, 그것도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속에 있는 말을 무심결에 꺼내었나 보았다.
힘든 격전을 치른 흔적이 잔뜩 남은 무구를 정돈하며 말하는 객장(客將)의 말에 남이는 다소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 앞에서 내가 못된 말을 했구나.”
“아닙니다, 대감.”
어린 시절부터 신분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젊은 청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준 그가 말했다.
“네 조부께선 조선 제일의 무인이요, 맹장이자 충신이었다. 너는 그것을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비장(裨將)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무예와 군략을 지니고 있는 남이에게서 조부의 칭찬을 받았지만, 그의 얼굴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저는 역적의 자손일 뿐입니다.”
“당금 시대에 역적은 행동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핑곗거리로 규정되기도 한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네 조부께서도 다시금 신원되실 수도 있겠지.”
청년은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두 눈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감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청년은 검을 움켜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선제일검이었던 조부의 유지를 받든 청년 또한 당금 조선에서 가장 강한 사내중 하나였으니, 외적이 활개 치는 것을 제 눈으로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가 쥐고 있는 검의 방향은 심양을 범하려는 북적에 향해 있었다.
지금은.
* * *
공성은 한 달 내내 지속되었다.
어찌어찌 야음을 틈타 심양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온 전령이 건넨 서신에는 조정에서 원군을 편성하여 북방으로 올려보내겠다는 희소식이 담겨 있었다.
다만, 도체찰사의 휘하에 있으니 둘이 알아서 잘하라는 내용도 같이 동봉되어 왔다.
군량과 무기도 그에게 대충 던져 주었으니 알아서 잘 받으라는 말에 남이는 어이가 없어 그만 껄껄 웃고 말았다.
도원수 남이가 받은 쌀쌀맞은 서신과는 반대로, 명국에 대한 조선의 서신은 다급하고 황망한 어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찌나 구구절절했는지, 낙락정에서 황음(荒淫)을 일삼던 명황제 주우철이 눈물을 보였을 정도였다.
“불쌍한 조선이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소, 태감?”
건통제 이후 아슬아슬했던 조명 관계는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천덕제와 영흥제 시기에는 둘의 사이가 몹시 온화해져 문화적, 사상적 교류도 활발하니, 명은 조선을 순이(順夷)라 부르며 특별한 오랑캐의 취급을 해주었다.
이후, 명의 혼란한 정국이 진행되며 왜남조의 입조가 끊기자, 사실상 의미 있는 조공국은 조선이 전부가 되었다.
게다가, 요즘 주우철은 낙락정의 궁녀들 중, 조선인 출신 궁녀에게 상당히 빠져 있었다
매일 밤 베개 대신 그녀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자는 주우철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반감보다는 호감을 드러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주우철이 울먹이자 낙락정의 궁녀들이 그의 눈치를 보다가 하나같이 고운 얼굴에 옥루를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주우철은 그만 그 광경에 자극받아 이제는 심지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신의 미천한 식견으로는 번국에 대한 지원을 해야 한다 생각하옵니다.”
“그래요?”
조선의 사절에게서 두둑한 은을 받았던 유근이 내키진 않는다는 어조가 분명했지만 그렇게 말하자, 주우철이 반색했다.
“바다 건너로 군량 삼만 석과 얼마간의 무기를 지원한다면···.”
그러나, 유근은 오랜만에 황제의 분노 섞인 옥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대명 황제의 씀씀이요?”
가끔 병신도 분노하면 무서울 때가 있다.
하물며 대명의 황제는 오죽하겠는가.
머리에 쓰고 있는 면류관이 장식은 아니었는 듯, 아주 찰나지간에 보여준 황제의 위엄에 낙락정의 후궁들과 사례태감 유근이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태감은 들으라!”
“예, 예, 폐하.”
바닥에 쓰러졌지만, 유근은 입술을 씰룩이며 주우철을 비웃고 있었다.
한 십만 석 가져다주려나?
아니면 국경의 장수들에게 변방을 공격하라 명하려나?
유근은 뭐가 되었든, 별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우철의 명령은 고자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짐이 직접 저 북원의 무리를 정벌코자 하니, 그대는 대명 천자의 친정을 직접 준비토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