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25화 (225/653)

조선(4)

국가의 쇠락이란, 참으로 다양한 요인에 의해 기원한다.

그것은 어쩌면 하늘이 내린 변덕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

비록 존재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만약 지극히 위대한 선견지명을 가진 불멸자가 국가를 직간접적으로 경영하지 않는 이상, 절대왕정이 가진 모순은 결국 군주에서 비롯되는 법이었다.

조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보위를 장남 이제에게 물려주고 뒤로 물러났다.

도중, 불가에 뜻이 있는 둘째를 제외하면 사실상 왕위계승서열 두 번째인 셋째 충녕대군 이도가 정체도 알 수 없는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지만, 형제간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겪어보았던 이방원은 사랑하는 아들이 떠난 것을 차라리 다행으로 여겼다.

무종(武宗) 이제의 치세는 괜찮았다.

당시 북방은 엄청난 혼란기였다.

주와 명이 자웅을 겨루고 있는 중원 강남의 세력과는 무관하게, 홍건적의 잔당들은 고려 말의 침입 이후에도 이리저리 사방을 들쑤시고 다녔었다.

북원 또한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연운 16주의 일부 성들이 함락당했으며 대도가 공격받기도 했었다.

게다가 몽골족의 세가 급격하게 위축되자, 그에 대한 반발로 여진의 무리가 드세어졌으며, 강력한 여진 천호들은 제각기 원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선의 국경을 사사로이 넘나들며 패악질을 부렸는데, 심요의 지역은 그야말로 쑥대밭이라 평가해도 되었을 것이었다.

이제는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하는 한편으로 회유하여 끌어들이니, 한동안 여진의 무리들은 잠잠해졌고 조선의 심요에 대한 지배력은 이후로 상당히 공고해졌다.

심요는 비록 반도에 가까워질수록 험준하게 변했고, 심요 자체도 쌀이 잘 길러지지 않는 기후에 속했지만 다른 작물을 기르기엔 충분했다.

결정적으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광대한 평야가 나오니, 이곳을 손에 넣는다면 조선은 강대한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을 테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의 후손들에게서 나왔다.

무종 이제의 업적과는 무관하게, 이제는 상당히 여색을 좋아한 임금이었다.

임금이 되고는 사람이 많이 바뀌어 태자 시절과는 달리 상당히 절제를 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많은 처첩들을 거거느렸다.

허물은 아니었다.

왕실의 종통을 유지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으니.

오히려 문제는 자식이 스스로 커가며 만들어버렸다 할 수 있겠지.

이제는 의정부찬성(議政府贊成) 김한로(金漢老)의 딸을 태자비로 들였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이개와 이찬을 포함한 2남 2녀를 보았다.

그들의 관계가 조금 더 좋았다면 정력적인 태자의 성정으로 보아 할 때 더 많은 아이를 볼 수 있었겠지만, 둘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다.

아니, 험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래 김한로는 청백리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사위가 임금이 된 이후부터는 하는 행동에 절제하는 바가 없었다.

이제는 태자 시절 심지어 선왕 이방원의 숙청으로부터 김한로를 보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장인을 도저히 볼 수가 없어, 그를 유배하고 마침내 사약을 내렸다.

그 이유를 들어 중전을 폐하진 않았다.

이제의 다른 여인들은 전부 그 출신이 천출인 기생들이라, 그녀들의 자손을 태자로 삼기에는 정치적 압력이 컸다.

그래서, 태자 이개(李豈)는 폐태자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제와 이개의 부자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지, 이제는 얼마 후부터 이개에게 국정의 많은 부분을 맡기고 자신은 여유로운 생활을 즐겼고 심지어 말년에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양위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조선의 다섯 번째 왕, 선종(宣宗) 이개는 아비를 닮아 몸이 절대 유약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예와 군략이 뛰어난 편이었다.

하지만 대항할 수조차 없는 병마―온역―는 건장한 장정이라도 삽시간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법.

이제는 자신을 빼닮은 장남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상왕의 신분으로 그의 손자인 이사종(李嗣宗)이 즉위하는 것을 지지하며 슬픔을 달랬다.

그러나 단종(端宗) 이사종의 나이는 불과 다섯 살.

이제 막 젖먹이를 벗어난 꼬마아이가 조정 내에 자신의 세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이사종 또한 출신이 중전 신씨가 아닌 첩실에서 나왔으니 든든한 외척이 없었다.

이사종의 불행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유일하게 어린 그를 지지해줄 할아버지는 장남의 죽음에 슬퍼 몸져누웠고 설상가상으로 숙부, 이찬(李璨)은 아주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동복형의 죽음을 슬퍼하는 척하면서도, 이후로 조카를 죽일 모략을 꾸몄다.

어린 이사종이 원인 모를 이유로 시름시름 앓아 자신보다도 먼저 죽음의 문턱을 넘자 이제는 극대노했고, 물증은 없으나 심증이 확실한 차남에게 증오를 드러냈다.

―네놈이 주상에게 궁합이 좋지 않은 감과 게를 주었던 것이 아니냐!

정말로 감과 게로 사람을 죽였는지, 혹은 독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상왕의 신분으로 차남을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유배 보냈다,

그리고는 먼저 떠난 중전 김씨 대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인 숙의 정씨에게서 본 흥안대군 이성(李晟)을 태자로 삼았다.

이제는 평소 이성을 매우 아꼈다.

이개보다도 사랑했을지도 몰랐다.

― 너는 나와 내 동생, 이도를 절반씩 닮았구나. 네 성정이 조금 더 침착해진다면 너는 필시 조선을 새롭게 세울 군주가 될 수 있는 재목일 게다.

상당한 반발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성을 즉위시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이제는 장남의 죽음과 아들의 만행으로 인한 급격한 심병(心病)에 시달린 탓인지 곧바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성이 조선의 일곱 번째 왕으로 등극했다.

* * *

폐주, 이성은 상당히 명민한 인물이었다.

비록 일 처리가 섬세하지는 못했지만, 대국적인 흐름을 보는 눈이 상당했다.

그의 어미 숙의 정씨는, 새로운 이름과 성을 하사받기 전에는 어리(於里)라는 이름을 가진 성도 없는 기생에 불과했다.

그것도 본래의 짝이 있었던.

어리는 중추원부사 곽선(郭璇)의 첩이었으나 이제가 왕태자 시절, 실로 조선 제일이라고 평할 수 있는 그녀의 미색에 반해 곽선에게서 강압적으로 빼앗은 인물이었다.

따라서 무종의 즉위 이후에도 후궁 책봉의 건에 대해 신하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진정으로 이 여인을 사랑했었고, 이성을 차기 왕으로 옹립하지 않으면 병마가 깃든 노구에 검을 뽑아 중신들의 목을 모조리 썰고 다니겠다는 발언까지 내뱉으며 상왕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이성은 자신 출신에 대한 흠결에 부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범인이라면 자격지심을 가지고 매사를 편협하게 행했겠지만, 그는 오히려 사회의 전반적인 개선을 꿈꾸었다.

‘이 사회는 조금 더 나은 곳으로 가야만 한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지 백 년이 흐른 지금.

조선은 건국 초의 청량함이 많이 가셔지고 있었다.

혁신과 발전의 분위기는 이제 희미해졌고 다른 권력자와 기득권이 자리를 이동하여 엉덩이를 눌러붙이고 있는 셈이었다.

이성은 발전을 꾀했다.

조선의 노비법은 고려 말기의 제도인 종모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방원이 한 번 종부법으로 바꾸었지만 그의 사후 무종 시절 다시금 종모법으로 바뀌었고 선종과 단종의 짧은 치세에도 이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태종의 종부법(從父法)을 다시 시행한다는 윤음을 내렸고, 성의(聖意)로는 심지어 부모 중 하나가 양인이면 자식 또한 양인이라는 일량즉량의 뜻까지 내비쳤다.

게다가 이성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려 후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토지제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했다.

은결을 색출하고, 함부로 양인들의 땅을 빼앗는 대지주들의 토지겸병을 막았으며, 정도전의 계민수전을 꿈꾸며 이해관계가 적은 심요의 땅에 처음으로 이를 실시했다.

종부법이야, 태종의 전례가 있다 보니 대신들은 격렬히 반대하면서도 완벽하게 논리를 틀어막을 수 없었지.

그러나, 토지개혁은 다른 문제였다.

이미 사대부들은 조선의 정치적인 권력자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권력자였기도 했으므로 토지개혁은 그들의 이권에 종부법 이상으로 타격을 입히는 행위였다.

―금상께서 실성하신 것이 틀림없다!

그들 사이에선 불경하게나마 이런 말까지 돌았다.

이성의 급진적 개혁정책의 방향은 지극히 올바른 곳을 향해 있었으나,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 배가 전복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성은 외교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주로 주나라에 대한 관계유지에 골몰했는데, 명과 주가 맞붙어 싸운 의창대전 이후로 주나라에 대한 지원을 해주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조선의 기본적인 대외관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주나라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이 그들을 도와준 만큼, 주 또한 조선을 몇 번 도와준 일이 있었기에.

그러나 조선의 희망과는 별개로, 이성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는 멸망해버렸다.

이후 이성은 주고후의 대학살에서 도망친 장씨 방계 일부의 망명을 받아들였는데, 그때 주고후가 얼마나 노했는지 주에게서 뺏은 선단에 병사를 실어 한양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위협까지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진 않았지만.

이성은 주의 멸망 이후 무언가 느낀 바가 있었는지 북원과 명 사이를 오가며 중립적 외교를 취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사대부들을 자극했다.

종부법과 계민수전 그리고 명과의 마찰.

심지어 야인인 해서와 왜남조를 지원해주며 낭비하는 국고.

거기에 출신성분의 미천함까지 합쳐지자, 신하들의 얼굴에는 서서히 음습한 기운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자극한 자는 유배되었던 이찬.

그렇게 하여, 계유년(癸酉, 1453)에 정난(靖難)이 일어난 것이었다.

* * *

에센이 태사가 되어 북원이 내부적으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보이자, 이성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이 둘도 없이 아끼는 장군 이징옥(李澄玉)과 그 군세를 북방에 내보냈다.

이찬은 그 틈을 타 그를 따르는 신하들과 정변을 일으켰다.

본래, 이성 또한 불순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나, 내금위의 전력을 보강하고 순라꾼을 늘리는 등의 충분한 대응을 했다 판단했다.

그러나 몇 번의 우연이 거듭되었고 하늘의 뜻을 얻었는지 이찬의 정변은 사대부들의 뜻을 등에 업고 빠르게 나아갔다.

이성은 도성 밖으로 달아나는 것에 성공했으나, 이징옥의 근처는커녕 황해까지 올라가지도 못하고 붙잡혔으며, 이내 이찬이 장악한 조정에 의해 폐위되어 유폐되었다.

끔찍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 조선의 일부 충신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항의했으나, 이찬은 이미 자신을 따르는 충분한 신료를 보유하고 있었다.

정난은 대군 한 사람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찬 또한 그가 철저한 신분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 사상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의 여론을 모을 수 있었기에 정난에 성공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들을 위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노비제는 다시금 종모법으로 회귀하였고 계민수전은 폐기되었으며, 대명사대적 외교관이 자리 잡혔다.

이찬은 심지어 망명했던 장씨 일가를 붙잡아 명에게 가져다 바치기도 했다.

그는 국고를 확충한다는 명분을 들며 해서와 왜남조에 대한 지원을 끊었고, 정변에서 도움이 된 공신들을 책봉하여 훈구(勳舊)라 불리는 무리들의 기틀을 만들어 내었다.

진정한 ‘유교적 이상향’을 만들 기반이 생긴 것이었다.

훈구는 환호했으며, 사림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들 또한 신분제를 동요케 하는 이성을 못마땅한 얼굴로 보고 있었기에.

국가를 걱정했던 일부 충신들은 산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부는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자신을 아끼고 지지하던 주군 이성이 폐위되자 극도로 분노해 심요의 정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심요에는 무종 이제가 조련하고 이성이 발전시킨 십만 대군이 온전히 있었는데,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조정은 순식간에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다.

높은 성도 소용이 없었다.

조선의 북방군은 천자와 지자, 현자총통과 같이 성을 무쓸모로 만드는 화포로 무장했으니.

이찬 또한 어쩔 줄 모르고 옥좌에 앉아 근심하다가 마침내 동래로 이어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려던 찰나였다.

그러나 도저히 해결방법이 없어 보이는 이 거대한 반란은 너무나 허탈하게 풀렸다.

평양성까지 거의 무혈로 짓쳐들어온 이징옥은 그곳에 진채를 세우고 병사들을 배불리 먹여 일전을 준비하려 했다.

그러나 왕을 참칭하는 이찬이 보낸 전령을 맞이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 형님···.

이징옥의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가 사절로 왔으니,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군막으로 그들을 인도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형제들의 손에 들린 단검이 이징옥을 마흔다섯 번 꿰뚫었다.

조선제일검이라 칭해지던 그는 그 와중에도 형제들의 두 목을 움켜쥐는 것에 성공했으나, 마지막까지 비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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