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3)
대명(大明)의 경사(京師).
북으로 올라가던 장강이 물길을 굽이쳐 다시금 동쪽으로 나아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도시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수많은 군웅들의 주목을 받았던 곳이었다.
진의 영정이 중원을 일통하고 본래 금릉(金陵)이었던 이름을 천자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여 말릉(末陵)으로 바꾼 이후부터 금릉은 동오 시절의 건업(建業), 동진의 건강(建康)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었다.
육조(六朝) 시절, 많은 지배자들이 금릉을 그네들 왕조들의 수도로 삼은 까닭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던 이곳은 후경의 난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 이후의 왕조들에게선 중히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이 금릉을 손에 넣고 도시의 이름을 응천부(應天府)로 고치며, 중원 통일의 대업의 기틀을 닦으니 다시금 일국의 수도로 기능하게 되었다.
대주의 장사덕이 주원장을 몰아내고 응천부를 차지했을 때에도 응천부에는 명에 우호적인 사람이 많았었고, 다시금 대명이 권토중래를 성공했을 때에도 친주반명(親周反明)의 성격이 강한 강소성 내에서 유일하게 친명의 영향이 있었으니 건통제 주고후가 다시금 이곳을 수도로 삼고 경사(京師)라 이름 붙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당금 경사의 궁궐은 본래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그저 황궁(皇宮)으로 칭해지다 성종(成宗) 천덕제(天德帝) 주첨역(朱瞻域)이 태조 홍무제의 유지를 받들어 홍무제의 효릉(孝陵)과 세종 영락제의 능 장릉(長陵)을 궁궐 북동쪽에 위치한 종산에 이장한 뒤로, 종산에 황금색과 자색의 신묘한 기운이 보인다 하여 산의 이름을 자금산(紫金山)으로 바꾼 이후 궁궐 또한 자금성(紫金城)이라 불리게 되었다.
자금산 옆에는 일반 백성의 출입을 금할 정도로 아름다운 황가금지(皇家禁地)인 금릉에서 가장 큰 호수인 현무호(玄武湖)가 존재했고, 남쪽에는 장강의 물결을 끌어다 쓴 두꺼운 해자가 존재했으니, 자금성은 금릉이라는 옥토에 위치하더라도 실로 전술적인 요충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금성은 무척이나 넓고 화려했으며, 그곳을 둘러싼 드높은 성벽과 경사의 정문(正門), 중화문(中華門) 안으로 보이는 경사의 대내(大內) 또한 선제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대명의 찬란한 치세를 반영하는 듯 번화하고 북적였다.
그러나 현 대명의 식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이 화려함에 속지 않았다.
지금 대명의 융성함은 성종과 인종의 묘호에서 따온 성인의 치(成仁之治)의 유산이었지, 당금의 황상이 국정을 제대로 돌보아 만든 번영은 아니었다.
인종 영흥제(永興帝) 주기욱(朱祁旭)이 장수하다 붕어하고, 당시 영흥제에 의해 책봉되었던 태자 주견양과 그 후손들이 마침 경사에 돈 역병으로 인해 요절하자 명은 진왕 주견결(朱見結)의 장남 주우철(朱祐哲)을 황제로 맞이하게 되었지만, 제위에 오른 주우철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에 불과했다.
당연하게도 다섯 살의 어린 황제는 궁 안팎으로 의지할 세력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외척들과 권신들 그리고 탐욕스러운 숙부들이 제위를 호시탐탐 노리니,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던 주우철은 세종 영락제 이후 권한이 강화된 환관들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이후 무사히 성년이 되어 친정을 할 시기가 되었음에도 주우철은 당시 태감 유순(劉順) 등을 여전히 총애했으며, 유순의 노령사 이후에는 그의 양자인 유근(劉瑾)에게 크게 의지했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선을 잘 지키며 무사히 황제를 성년까지 지켜낸 전 태감 유순과는 다르게 유근은 상당히 권력에 대한 욕망이 있는 자였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황제의 총기를 흐리는 일도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그는 천하의 절경이라는 현무호 가운데에 위치한 네 개의 섬에다 다리를 잇고 그곳들에 화려한 전각과 값비싼 외국의 사치품들을 채워 넣은 뒤 미색이 출중한 여인들을 각지에서 뽑아 채우고 황제에게 진상했다.
그 사치스러움과 요사스러움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주우철은 그곳을 낙락정(樂樂亭)이라 명명한 뒤 내리(內裏, 천자의 거처)를 버리고 그곳에서 숙식을 모두 해결하며 여인들의 품속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유근은 또한 황제에게 끊임없이 밀교의 방중술과 각종 양기를 북돋는 음식을 대령하는 등 주우철의 색탐을 부추겼다.
황제가 주색잡기에 골몰하는 동안 유근은 사례태감(司禮太監)이라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관직을 사사로이 매매하고 국고를 낭비하였으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잔혹하게 숙청했다.
세간 사람들이 유근과 그를 따르는 환관 일당들이 포악한 맹수에 빗대어 팔호(八虎)라 불렸을 정도였으니, 그의 악명은 실로 천하에 자자했던 것이다.
식자들은 셋만 모여도 그러한 환관의 행패를 욕을 했다.
"빌어먹을 고자 놈이 황상께 하나라 걸왕과 상나라 주왕(夏桀殷紂)의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직접 만들어 대령하니, 천하가 혼란에 빠지고 외적들이 사사로이 아국의 항구를 오가도 저지하는 바가 전혀 없네. 북로(北虜)와 동왜(東倭)가 호시탐탐 대명을 노리는 바, 이제는 번국(藩國) 조선마저 누란지위(累卵之勢)에 빠져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천하가 쇠할 징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쉿, 이 사람아 조심하게, 동서창(東西廠, 동창과 서창, 환관의 정보기관)의 고자들과 결탁한 놈들이 어디서 듣고 있을지 몰라!"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타국을 오랑캐라 여기는 명나라 사람들은 유근이 경사와 가까운 항구, 영파를 온갖 외적들이 오가게 내버려 두고 심지어 광주(廣州, 광저우)의 앞에 위치한 작은 섬(마카오)까지 포도아에게 내주자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말이 무역으로 대명의 국고를 채운다는 논리였지, 그 모든 것이 황상의 총기를 흐리기 위한 서역의 사치품들을 들여오고 자신의 뒷주머니를 두둑하게 불릴 목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자 놈의 만행은 익히 알고 있지만, 영파를 개항함으로써 아국의 국고가 부유해진 것은 틀림없네, 옛 주의 성세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실로 이해가 되는 바야."
"그대는 대(大)중화가 외적들에 의해 놀아나는 꼴을 봐야 하겠나?"
"저 외적이라는 것들이 제각기 앞다투어 우리의 앞에 와 머리를 조아리고 공물을 바치는 것인데, 사대하는 바에 화답하여 하사품을 내주는 것이 그리 아까운가? 또한 선제들께선 그들을 가까이하지 말라 하셨지만, 또한 주의 성세를 경계 삼아 너무 멀리 두지도 말라라는 유지를 내리셨으니 그 유지에 따라 그저 무역을 하는 것이 그리 불만인가?"
"이 사람이!"
"좀 그만 싸우게! 그대 둘이 싸우면 어디 이 대명의 황상께서 정심(正心)이 드시나?"
절친한 친우들의 싸움을 말린 다른 남자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만날 때마다 서로 의견이 달라 싸우는 놈들이지만, 하도 싸운 덕에 말리는 것에도 도가 터 버렸다.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은 남자를 향해,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한 사내가 화제를 돌리려 입을 열었다.
"자네들, 영파에 기항한 흑선(黑船)들을 보았나?"
흑선이라 함은, 방수의 목적인지 겉을 검게 칠한 양이들의 대선을 말하는 것일 터다.
요 근래 영파에서 자주 목격되어 강소에 사는 사람 치고 들어보지 못한 자들은 없을 것이다.
사내들은 금방 호기심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포도아의 이양선(異樣船)을 말하는 겐가? 본 적은 없네."
"마침 궁금하군, 그 배가 그리 크고 사납게 생겼던가?"
주제를 돌리는 것엔 성공한 모양.
운을 띄운 사내가 친우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크기는 물론이고 정교함과 단단함 또한 조선(鳥船)이나 복선은 따라잡을 수가 없어 보이더군."
한바탕 성질을 내었던 사내가 여전히 툴툴거리며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양이들이 그렇게 큰 배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싶어 보였다.
"그까짓 양이(洋夷)들의 배가 뭐라고. 결국 천하의 패권 싸움은 강대한 내륙의 군세에 의해 얻어지는 것일세."
수군으로 유명했던 주 또한 결국은 명의 정병에 의해 몰락했으니 그의 말은 일견 타당했다.
그러나 아까 언쟁을 벌였던 사내는 여전히 양이를 무시하는 친우의 발언에 콧방귀를 끼며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결국 아국이 제남에서 북원의 군세를 저지하고 있는 이유도 양이의 화포를 도입한 덕분이 아닌가?"
"······."
또 시작이군.
아까 중재를 한 사내가 머리를 감싸며 또다시 언쟁을 벌이려는 친우들의 말문을 비집고 들어가려 했으나, 아까 전까지만 해도 양이를 무시하며 역정을 내었던 사내도 이번 말에는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부언의 여지가 없으니까.
산동에 위치한 태산(泰山)은 중원의 역사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산이다.
진의 영정 이후 역대 중원을 통일했던 황조들은 전부 태산에서 봉선(封禪)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자신이 적법하게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선포했었다.
따라서 주고후가 수십만 정병을 이끌고 친정에 나서 이곳을 확보한 것은 무척이나 잘한 일이었다.
그 이후 무리를 하여 대도를 공략하다 전사를 해 버린 것이 문제였지.
북원 태사(太師) 에센(Esen) 이후 즉위한 현 북원의 황제 바투뭉케(Batumongke)가 주우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로 뛰어난 치세를 펼치는 지금, 설상가상으로 심지어 황하가 태산의 하부로 흐르게 되어 강을 이용한 방어의 이점을 누릴 수 없는 상황에서 태산 북부의 요지, 제남(濟南)에서 북원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포도아에서 도입한 불랑기포의 능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터.
당금의 명은 이 화포에 매료되어, 수백 문의 불랑기포를 제남을 비롯한 북원에 접한 요새에 배치한 상황이었다.
양이의 화포가 없었으면 아마 명은 주우철의 치세 끝으로 멸망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세 사람의 토론은 계속 이어졌다.
다혈질적인 성격 덕분인지 끊임없이 술을 들이켜 이제는 인사불성이 된 친우를 노복을 불러 집으로 데려가라 한 뒤 사내 둘은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려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이 실로 어두컴컴하구나."
말과는 다르게 하늘에는 부서지는 듯한 별빛이 사방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광경은 실로 아름다웠지만 친우는 반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혼탁하고 혼탁하여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서애(西涯, 이동양의 호) 어르신과 석재(石齋, 양정화의 호) 어르신마저도 유근 그놈에 의해 모함을 받아 한직으로 좌천되니, 정녕 지금의 대명에 희망이라는 것이 있는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네. 유근의 치세 또한 머지않아 끝날 터, 양명(陽明), 그대와 같은 재자들은 역량이 출중하니 오직 다가올 시대에 준비하여 마음을 올바르게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경서를 읽어 정설(正說, 주자학)을 깨우치게 된다면 결국 주머니 안의 송곳처럼 빛을 발하게 되겠지."
흠잡을 것이 없는 말이긴 하다.
"···그래, 그래야지."
양명이라 불린 사내는 그 말을 듣고 미묘하게 웃을 뿐이었다.
당금 조정의 어지러움이 그 주자학을 이용한 간신배들의 혹세무민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그는 친우의 말에는 일부분 동의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논쟁을 이어가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영파에 기항한 흑선이 아직도 있다 하던가?"
양명은 아까부터 친우가 흑선에 대해 한 말이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그가 위치한 절강성에 있는 영파이니만큼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포도아의 배는 자주 볼 수 있겠고, 아주 최근에 미국(美國)이라는 곳에서 입항한 배는 떠났는지 모르겠군."
"그래?"
그는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양명이라는 호를 가진 사내, 왕수인(王守仁)은 술이 깨는 즉시 행장을 꾸려 영파를 한번 돌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운이 좋다면, 양이들의 서책 몇 권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그의 뇌리를 가득 채운 고민들을 해결할 지혜를 어쩌면 오랑캐들에게서 구할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대명천하를 잠식하고 있는 간신들이 주자학을 교조화하여 남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격물궁리(格物窮理)라, 주자학은 뿌리부터 잘못되었다.’
남송 이후 원과 명초를 거쳐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던 주자학은 이제 그 혁신성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오직 정설을 최고로 여기며 성현의 말씀을 상대화하지 않았다.
주자학은 주자학에 대한 주석서, 주자학을 위한 학문만을 인정할 뿐, 다른 개념과 이치에 대해서는 모조리 사문난적이라 표하고 있는 상황.
황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탓에, 학문 자체가 내포한 혁신과 도덕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것이 수와 당의 시류였던 훈고학(訓?學)에서 대체 얼마나 발전했다 말을 할 수 있을까?
다음 날 아침, 왕수인은 조촐한 행낭을 꾸리고 영파로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