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바오(지도 첨부)
광영이 단순히 포르투갈 선원들의 잔인한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올라 그들을 전부 총살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유가 있었다.
마긴다나오의 수도 코타바토가 불에 탔다 하더라도, 원주민들 전부가 죽진 않았다.
난리를 피해 큰 섬 안쪽으로 도망간 자도 상당히 많아 보였다.
코타바토 바로 앞에 있는 모로만에서 포르투갈 함대를 박살 내고 이어서 살육을 자행한 자들을 곧바로 처형해버린 고려.
게다가 가지고 있는 군량을 구호물자로 조금 풀며 원주민들의 시신을 정중히 염하고 살아남은 여인들에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니 도망친 이들 또한 언덕과 들판 너머로 사태를 지켜보다 상황이 잠잠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하나둘씩 다시금 불타버린 도시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덕을 베풀어 현지 바랑가이의 동요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던 광영은 장경창을 불러 물었다.
"바스쿠 다 가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소?"
경창은 포르투갈인들을 총살하는 광경을 바라본 직후부터 위협을 느꼈는지 아니면 고려인들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묘하게 순순했다.
이번엔 경창의 조선인 선원이 대동하여 비교적 단순한 말들은 필담을 거치지 않고 즉시 통역이 가능했다.
"들어보다마다."
오랫동안의 해적 생활로, 장경창은 근방의 세력도에 대해 빠삭했다.
그리고 아무리 한미한 해적이라고 해도 바스쿠 다 가마에 대해서 못 들어 본 자는 없을 것이다.
근래에 어찌나 흉악한 짓거릴 자행하고 있는지.
"말라카 근처에서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세력이자 포도아 사략 해적들의 우두머리요. 일반적인 무역과 해적질 모두를 오가는 놈들이지."
바스쿠 다 가마는 잔혹했다.
그리고 잔혹한 만큼 유능했다.
동남아시아를 탐험한 뒤 인도 세력 비자야나가르의 끝 트리반드룸에 총독부를 세운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이후 포르투갈 왕실의 사략 면허를 발급받은 바스쿠 다 가마는 그의 함대를 이끌고 인도양을 거쳐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 해에 도달했다.
그리고는 말레이반도 끝에 있는 말라카 술탄국을 공격하여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조그마한 섬 싱가포라(테마섹이라는 현지 이름을 바꾸었다.)를 빼앗고 그 자리에 말라카 총독부를 만들어 현지 기틀을 다졌다.
그 시기가 무려 십여 년 전.
게다가 포르투갈 또한 서유럽회사나 북유럽회사 같은 고려의 주식회사를 본받아 포르투갈 동인도회사를 만드니 당금의 동인도의 이권은 포르투갈의 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래 최초의 회사를 만든 고려는 중앙집권에 상당한 집착이 있는 그들답게 통제할 수 없는 상인세력을 용인하지 않았다.
고려 조정은 행여나 지방에서 할거해 중앙 정부의 골칫덩어리로 전락할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북유럽회사와 서유럽회사의 권리를 애초부터 제한했다.
선제공격에 대한 제한적인 자위권을 제외한, 어떠한 사적 개척지나 항구를 소유할 수 없다고.
반면 포르투갈은 이미 너무 많은 해외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 모두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기에 마치 봉건 계약마냥 현지 세력의 재량을 상당히 많이 들어주었다.
동인도회사와 그에 소속된 현지의 총독들은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에 충성하고 일정한 재물을 바치는 한 그들 스스로 함대와 상단을 거느릴 수 있었으며 항구와 거점, 개척지를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당연스레 완전히 따로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존재했지만, 수많은 거리를 격하고 보고를 받는 행위를 생략한 이들은 현지 세력을 착취하며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강력한 강철 무구, 인도 끝의 트리반드룸에서 사들이는 질 좋은 초석과 대포.
포르투갈의 위세는 아무리 일개 회사라지만 인도의 중소 세력과 혹은 누산타라에 있는 술탄국들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내가 말레이반도 끝에 위치한 그들의 항구 싱가포라를 본 적은 없소. 그러나 세간의 사람들이 떠들기를 그들 항구의 요새는 십여 장의 벽돌로 튼튼하게 지어져 있다지. 또한 수 척의 큰 배들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고, 수백 척의 함대가 오가며 수만 명이 사는 거대한 곳이라더군."
옛 기록에 따르면 중원의 사람들은 허풍이 심하다 했다.
걸핏하면 호왈백만(號曰百萬)이라더니.
여지없는 허풍에 광영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광영 또한 큰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서양을 오갈 수 있는 후발주자들, 카스티야와 프랑스, 이탈리아는 제각기 무역 선단을 조금이나마 만들고 희망곶을 돌아 인도양으로 선단과 자본들, 인력들을 보냈으나 본국들의 강성함의 우열과는 다르게 현지의 세력들은 포르투갈에 최대한으로 잘 보여야 하는 입장에 불과했다.
고려도 마찬가지였다.
누산타라에서는 누산타라의 법도가 있으니까.
그러나 광영은 첫 만남부터 말라카 총독의 부하들로 보이는 사략 선단을 박살 내었다.
"흐음···."
딱히 지금 당장의 위기는 아니었다.
그것을 보고할 생존자도 없었으니까.
목격자도 없었···.
‘아니, 아직 있긴 하군.’
광영이 수상한 눈길로 장경창을 바라보자, 경창이 질겁하며 퇴거의 뜻을 밝혔다.
뭐 상관없다.
그와 고려인들의 제일 과제는 누산타라와 동인도 무역이 아닌 대(對)동아시아무역이었으니까.
‘그럼 마긴다나오의 처우는 어찌할까.’
사실 목격자는 장경창을 포함한 주나라 해적 잔당들 말고도 더 있었다.
코타바토에 살던 마긴다나오 바랑가이인들.
이들이 자신들의 친지와 가족들을 살해한 말라카 총독부에 고려의 비행을 밀고할 리는 없겠지만, 사실 광영은 자신들이 떠난 후 다시금 포르투갈인들이 이들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 걱정되었다.
너무 유약하다고?
그러나 시중께서 당부하신 제국의 긍지란 그런 것이다.
위대한 국격에 맞는 품격.
자신의 손에 놓인 보호 대상을 버리지 않는 것.
유럽인들의 기사도가 오직 같은 종교와 피부의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할 때, 고려 제국 군인들의 무사도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무신정권의 잔재로부터 태어난 현 고려는 똑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숭무감에서 철저하게 정신교육을 했었지.
그 교육은 국가와 황실에 대한 충정도 있었지만, 자국 백성에 대한 애민심과 사해(四海)의 백성들에 대한 자비심도 있었다.
물론 근래에 고려에는 우생학적 논리가 불어닥쳤다.
군부도 이를 온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선민당의 난에 크거나 작게라도 관련된 자들은 파직되었거나 좌천되었다.
그의 가문 자체가 온건파 경당에 속하다 보니 어떠한 접점도 있지 않아 그 여파에서 동떨어져 있던 광영은 덕분에 이제 겨우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순양함 세 척을 이끄는 제독이 될 수 있었지.
그는 한동안 고심하다, 이윽고 마긴다나오를 고려의 현지 협력세력으로 삼기로 했다.
사실 마닐라 항은 서쪽에서 오는 선단이 접근하기 좋은 지형이었지, 동쪽에서 오는 고려에겐 돌아가야 하는 지형에 있었다.
광영은 코타바토의 현지 지도자(예전 지도자는 저항을 하다 죽어있었으니, 급하게 새로 뽑은 것이 분명했다.)를 불러 제의를 했다.
이번에도 통역으로 끌려온 주나라 해적이 광영이 쓴 한자를 보더니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어설프게 의사소통을 했다.
"코타바토를 달라는 말은 아니네, 그저 우리는 근처에 있는 땅을 개발하여 고려의 독점항으로 만들고 싶다는 거야."
지금 막 지어낸 개념, 독점항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던 주나라 해적이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 * *
코타바토 동쪽, 작은 어촌마을 다바오(Davao)는 마긴다나오에 있는 바랑가이들이 드문드문 오갈 뿐 인적이 별로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입지 자체는 무척이나 좋았다.
항구적인 수원지 다바오강이 흐를 뿐만 아니라, 남쪽과 북쪽의 산들이 이 지역을 보호하듯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통할 수 있는 동과 남쪽은 바다였지만 다바오 바로 앞에는 꽤나 큰 섬이 있어 제대로 된 요새화가 진행된다면 함부로 내항을 공격할 수 없는 지형이었다.
게다가 북태평양 남부항로를 타고 동쪽에서 오는 고려의 무역 선단이 오기에도 좋으니, 실로 천혜의 지형이라 할 수 있었다.
광영은 이곳에 거점을 건설하기로 했다.
고려인들을 건너오게 만들어 유지할 식민지나 개척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고려인들이 만들어야 하는 조차지일지도 모른다.
맨땅에 지었으니 상당한 지분을 주장할 수 있는.
다행스럽게도 현지 세력은 무척이나 우호적이었다.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포르투갈인들이 자행한 학살의 영향을 받아서 그럴지도.
마긴다나오인들은 그들의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없을 것이 명백했을 피의 복수를 대신 해 준 고려인들에게 음식과 물 등을 대접했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고려인들이 다바오에 자리를 잡자 그들이 살던 코타바토를 떠나 다바오로 가려는 자들도 생겨났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현재 누산타라와 보르네오해, 톤도 제도 등지를 배회하며 온갖 약탈을 일삼는 포르투갈의 패악질에서 무사할 수 있는 방법을.
"날씨가 덥고 습하지만, 뭐 나름대로 경치도 좋고 기후도 괜찮구려."
광영은 자신의 옆에 온 중년인 지운학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곡도는 솔직한 말로 제대로 된 항구라 보기에도 어려웠다.
그리고 작은 섬의 특성상 크게 성장하기도 힘들었다.
마닐라 항에 기항할 수 없게 된 이상 어차피 대규모의 현지 항구를 개척해야 했기에 광영과 선원들은 전력을 다해 다바오에 고려식 건축물들을 지어나가기 시작했다.
벽돌을 굽고, 벌목을 한다.
항구의 접안시설을 만들고, 배후에는 농장과 주거지를 만들었다.
대장간도 벌써 생겨나 한창 풀무질을 하는 광경도 보였다.
"벼의 이모작이 충분히 가능한 기후입니다. 고려인이 온 이상, 식량문제는 빠르게 해결되겠지요."
강수량이 풍부하고, 일조량은 더욱 풍부하다.
낙후된 현지의 농업기술 대신 고려의 농법이 들어온다면 이곳은 빠르게 곡창지대로 변모할 수 있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곳에서 당분간 머무르실 게지요?"
"소장이 받은 조정으로부터의 명령은 무역로의 개척이지 무역이 아닙니다. 소장은 아마 당분간 다바오를 안정화시키고 포르투갈의 동태를 살피는 것에 주력해야 할 듯싶습니다."
마긴다나오가 현지 협력세력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북쪽에는 신원길의 항로에 적혀져 있던 유구국이라는 존재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현지의 곡창지대를 손에 넣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했기에 광영은 한동안 이곳에 있을 예정이었다.
운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받은 명령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주장할 처지가 못 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광영이 운을 떼었다.
"대곡도에 서신을 보내었으니 수송용 중범선으로 이루어진 지원 선단이 다바오로 도착할 것입니다. 이들 중 하나를 타고 조선으로 가보시지요. 마침 주나라 해적 중 하나가 조선 출신이라 하니 그에게 바닷길을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극형은 피했으나 파직되었고 실형을 언도받았으며 심지어 조선에 갈 때까지 배에서 노역을 해야 하는 신분이었지만 그에게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는 광영의 말에 운학이 감사함을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선민당원의 후원자에서 밀고자가 되어버린 운학.
그리고 금의호와 다른 두 배에는 선민당원 출신 선원들이 있었다.
물론 선민당원들도 전투병과도 아니고 온갖 궂은일을 하는 함 내 최하급 서열이었으니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진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 이러한 종류의 괴롭힘은 직접적인 신체의 결손을 초래하지 않고서도 사람을 병들게 만들 수 있었다.
광영은 그러한 운학을 조금 안타깝게 여겨 직접 금의호 선장의 방을 관리하는 직책을 내리고 그의 그물침대 또한 선장실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광영의 가문은 황상과 시중에 대해 충심이 깊었고 분류되기를 경당으로 분류되었다.
운학은 교당의 우두머리였고.
그러나 지금의 고려는 교당과 경당의 정쟁이 극심하지 않았고 같은 명문가로서 가지는 측은한 마음도 있었기에 어느 정도의 예우를 해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중서성의 의원은 일개 해군의 장수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직책이었으니까.
여튼 하루아침에 명문가의 가주에서 함 내 일개 선원이 된 운학은 겉보기엔 의도했던 예절교육이 잘 된 것 같았다.
운학이 그의 앞을 떠난 다음 곧바로 장경창이 광영을 찾아왔다.
주의 잔당들은 아직 가둬져 있었지만, 장경창 본인은 나름대로의 대접을 받고 살고 있었다.
"어찌, 마음을 정했소?"
"본인은 주나라의 마지막 후손이며, 대주 황제 장사덕의 적통이라 함부로 타인에 예속될 수 없소. 허나 고려와의 협력은 충분히 가능할 성싶군."
광영은 긍지 높은 제국해군이었으나, 그조차도 가끔은 더러운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르투갈을 위시한 유럽 세력들을 약화하고 술탄과 라자를 호칭하는 적대적인 현지 바랑가이들을 공격하거나 병탄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피가 흐를 것이다.
하지만 긍지 높은 부하들을 그런 일들에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목숨이 위험천만한 사략 해적질에 내보내기도 싫었다.
그런 면에서 장경창은 좋은 협력자가 될 성싶었다.
광영이 관찰한 면에서 경창은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인들마냥 인의의 탈을 벗어 던진 괴물은 아니었다.
또한 해적들답게 잔혹해야 할 때에는 충분히 잔혹했다.
게다가 이들의 손실은 어디까지나 남의 피였다.
그러나 광영은 아직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경창이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입을 열었다.
"주의 후손들이 얼마간 다바오 근처에 정착하려 하는데, 받아주시겠소?"
광영은 그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서로 간의 확실한 신뢰가 아직 없는 상황.
이들을 다시 풀어주고 함선을 쥐여주는 것에 대해 일말의 반대와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경창은 자신들의 가족을 인질로 삼으라 말하고 있었다.
‘이들의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긴 하겠지. 허나 우리로서는 잃을 식량보다 얻을 선원이 더욱 값질 터.’
저 쓰레기 같은 배는 폐기처분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주나라 해적들의 배를 흘깃 쳐다본 광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간이조선소와 대장간이 완공되면 대형선은 무리더라도 해적들이 쓸만한 협저선과 지백선 등은 건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주철대포와 화약이야 미주에서 주문하면 되겠고.
그전까지는 포르투갈에게서 나포한 대형 카라벨라와 카락을 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