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14화 (214/653)

톤도 제도(2)

사람이 죽다 살아났다.

심폐소생술이라는 하늘이 놀랄 기적을 목도한 적선의 선원들이 경악하여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심지어 누군가는 합장을 할 때, 고려인들은 능숙하게 의식을 차린 선장을 이광영의 선장실로 옮기고 체온을 따뜻하게 유지할 담요와 뜨끈한 죽을 가져다주었다.

깨어난 선장은 한동안 추위에 덜덜 떨었지만, 이내 고려인들 덕에 기운을 차렸다.

고맙다는 말을 표현하기 전에, 그는 의식이 돌아올 끝자락에 보인 광경에 분노와 수치심이 뒤섞인 얼굴로 선장실에 모인 광영과 고려군 장교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면 좀 불쾌한데."

자신의 입술을 허락도 없이 훔친 우락부락한 고려인 의원에 분노를 한 것일까, 아니면 함대를 박살 낸 것에 분노를 표하고 있는 것일까.

뭐가 어찌 되었든, 지금 저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조금 더 감사히, 긍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것조차 모두 광영의 관대함에 기원하고 있었으니까.

몇 번이고 자신의 입술을 문지른 그가 이윽고 한숨을 내쉬더니 체념을 한 듯 인사를 올렸다.

자신의 목숨이 결국은 눈앞의 사람들에 의해 구명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모양.

"[email protected]#$^"

왼손 네 손가락을 모으고 쭉 펴 손바닥을 이룬 뒤, 오른손의 주먹과 맞부딪히는 의례.

포권(包拳)례.

직접 한 번도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반도인에게서 유래한 고려의 인사문화와는 동떨어져 있더라도, 이들은 아주 먼 과거 고려와 상당히 많이 교류했던 자들이니까.

중원인들이 맞았다.

광영은 마침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를 했다.

그는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유먹과 종이를 가져왔다.

― 슥 슥

검은 기름에 세필을 콕 찍어 빠르게 무언가를 적어 내리는 광경을 보고 있던 적의 선장은 이윽고 완성된 문장에 다소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최근 고려에서 한자의 입지가 다소 줄어들고 있다지만, 먼 미래에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려글이 아닌 고려어 중 많은 부분이 한자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오히려 일상적으로 쓰이는 고려글 덕분에 한자는 학문과 다른 분야에서 라틴어와 그 입지를 경쟁하며 다져나가고 있었다.

동양의 라틴어라 할 수 있는 한자로 이루어지는 필담의 제의에, 적선의 중년인 선장 역시 이에 화답했다.

물기 어린 소매를 턴 그가 세필에 손을 뻗어 질문에 대답했다.

― 그대는 누구고, 어디에서 오셨소?

― 본인은 대주(大周)의 남해도독(南海都督), 장경창(張景彰)이라 하오.

한때, 명과 북원과 함께 중원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주의 마지막 후예가 고려와 접했다.

* * *

고려 제국이 남려에서 승천을 꿈꾸고 있을 때, 이미 중원의 흐름은 빠르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천하란 비록 중원에 불과했을지라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있었던 곳이니만큼 중원이 곧 천하라는 생각을 해도 무방했었을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고, 그토록 강성한 성세를 자랑하던 원이 마침내 몰락하자 강남에서는 홍건적과 백련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한족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곽자흥과 한림아, 진우량, 주원장, 명옥진, 장사성, 방국진 등의 반군들이 사방에서 난립했다.

원은 이미 남쪽에 대해선 어떠한 통제를 할 수 없는 상황.

군웅들은 다가오는 패권을 위해 서로를 공격하여 흡수해 나갔다.

중원의 흐름을 바꾸었단 평가를 받는 파양호 대전에서 숙적 진우량(陳友諒)을 대파하고 천하일통을 꿈꾼 주원장은 바로 다음에 들이친 장사성과 고려, 남조 연합군에게 대패하여 근거지 안휘성과 응천부(남경)를 잃고 서쪽으로 도망갔다.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겼지만 결국 진우량의 전사로 공백지가 된 호북 일부와 중경, 호남성을 토대로 다시금 기틀을 다진 그는 명옥진의 명하를 무력으로 흡수했으며, 사천과 운남 정벌까지 성공시키며 파촉을 아우를 수 있었다.

전투에서는 패배했을지 몰라도, 도망가며 수많은 백성들을 강제로 끌고 간 덕에 인구의 숫자는 꽤나 괜찮았고 익주의 분지 자체도 썩 나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썩 나쁘지 않았다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지, 명은 주보다 한참은 국력이 아래인 상황이었다.

기반이었던 강소와 절강을 토대로, 안휘와 복건, 강서, 광동, 하남, 심지어 산동을 장악한 대주의 위세는 엄청났으며, 금방이라도 북원과 명을 밀어내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는 듯싶었다.

공민왕의 고려 또한 반원의 기치를 내세우며 북원을 같이 압박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북원은 아직 저력이 있었다.

아직 연운 16주를 비롯한 하북과 산서, 섬서를 장악하고 있는 그들은 쉽게 몰락하지 않았고 도리어 명과의 암묵적인 동맹을 맺어 북쪽과 서쪽에서 주를 압박했다.

대주는 조급함을 느껴 군세를 휘몰아 명을 공격했으나, 그들이 자신 있는 해전이 아닌 육전을 벌이는 덕에 의창에서 당대의 명장 서달에게 대패하였다.

이후에도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모두 허무하게 낭비한 주는 결국 새롭게 등극한 황제들의 역량 차이에 의해 국가 간의 차이가 더욱 좁혀지기 시작했다.

주원장 사후 명의 황제로 등극한 영락제(永樂帝) 주체(朱?)는 장사덕 사후 주의 황제로 등극한 강평제(强平帝) 장용(張聳)과 비교할 수 없는 호걸이었으며, 마침내 아버지가 파양호에서 잃어버린 천하의 흐름을 다시금 움켜잡을 수 있었다.

강서와 광동, 복건, 하남, 호북 서쪽을 차례로 점령한 주체 이후 등극한 명의 군주, 건통제(建統帝) 주고후(朱高煦)는 마침내 주를 멸망시키고 강남을 온전하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당신이 그래서 주의 황손이라는 것이오?

― 그렇소.

그가 여봐란듯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지만, 광영은 같잖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단 사실확인부터.

광영은 다시 한번 그의 옷가지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일부는 바다에 떠내려갔고, 일부는 전투 덕에 찢겨지거나 피가 묻었지만 아까 느꼈던 대로, 옷 재질 자체는 최상등급의 비단이 분명했다.

고려 자체적으로는 거금을 주고서라도 구할 수 없어 오히려 비단길을 이용한 유럽의 상인들에게나 구해야 하는.

다른 꾀죄죄한 선원들에 비하면 질이 달랐다.

황족은 모르겠지만 높은 지위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였다.

궁금증이 다시 피어올랐다.

― 당신의 말에 따르면 주는 멸망했다는데 그대와 그대의 무리는 어디에서 살아왔던 것이오?

너 어디 사냐, 하고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 주는 사람은 드물다.

장경창 또한 마찬가지.

해적질을 하고 있는 놈에게 해적근거지가 어디냐 하면 누가 대답하겠는가.

그러나 대답이 없어도 사실관계를 유추하기란 뻔했다.

입을 꾹 닫고 있는 그를 바라보던 광영이 지도를 보여주었다.

신원길의 시대에 딱 한 번 왔을 뿐인데 몹시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

눈앞에 지도를 들이민 광영은 마치 약 올리듯 손가락을 빙빙 돌리다, 어느 한 점을 찍었다.

― 이곳인가?

대만(臺灣).

존재 자체야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원주민의 이름에서 따온 섬의 음차어인 대만 또한.

그리고 신원길 본인도 이곳을 들르며, 대주의 영토가 확실하다고 기록을 남겼으니.

장경창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여, 이광영이 반문했다.

― 옛날, 아국의 탐험가가 그대의 나라를 들른 적이 있소. 그때, 분명히 대만은 대주의 영역이라 들었건만?

육지에서 쫓겨난 자들이 향할 곳은 명백했다.

그러나 경창은 이제는 숫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가 진정하길 기다린 광영이 답변을 재촉하자, 경창은 손을 뻗어 천천히 대만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해 나갔다.

* * *

명은 그동안 해양세력과 별다른 관계가 없었다.

파양호는 넓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내륙의 호수. 바다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패배하여 쫓겨난 파촉의 땅은 산악지대의 고원이었지.

명의 황제들과 신하들은 곰곰이 생각했다.

끝도 없이 쏟아져 오는 주의 저 부유함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정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남왜와 고려, 주의 삼각무역.

고려의 한선(韓船)은 이미 원의 왜국정벌기부터 유명했다.

원의 배가 험한 대양의 파도에 박살이 날 때도 끄덕이 없었다는 일화는 파양호에서도 다시금 그 진가를 증명했었다.

게다가 남왜의 이와미 광산에서 나오는 은은 주의 경제가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었고.

게다가 몹시 다혈질인 건통제 주고후는 천하 통일 이후에도 주의 잔당들이 대만에 근거지를 세워 남동 해안가를 약탈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어떠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해적들의 대응에 그저 고개를 돌리는 방식(해금령)을 택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주고후는 대만에 들어선 후주(後周)를 정벌하는 것을 택했다.

명의 함선 건조는 딱히 낙후되지도, 그렇다고 우수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물에 뜨긴 떴다.

고려의 한선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복건성의 복선(福船)과 광동의 광선(廣船), 절강성의 조선(鳥船) 등은 대양항해가 아닌 대만을 오가는 것에는 충분했다.

통일 직후, 용솟음치는 국초의 저력을 가지고 있던 명은 곧바로 거대한 대함대를 만들어 대만을 점령하고, 도망쳐 온 후주의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

도망쳐온 바다의 근거지까지 빼앗긴 후주의 마지막 잔재세력들은 이제 더 남하하여 톤도 제도에 들어온 모양.

"······."

― 훌쩍

가문과 백성들이 주고후에게 잔혹하게 도살당한 원한을 한바탕 빼곡히 적어 내린 경창의 종이를 읽은 광영이, 너무나 많은 정보들은 일단 책상 한켠으로 밀어 넣고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 그래서 톤도 제도의 마닐라는 그대들이 점거한 것이오?

경창은 톤도 제도가 이 칠천 개의 섬들이 위치한 제도라는 것을 몇 번의 설명 끝에 이해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 이곳은 오직 우리들의 노략···질 목표였지 점거한 곳은 아니오.

성이 난 듯, 이곳으로 오는 폼이 사실은 고려의 선단을 노린 것이 아니라, 마닐라 항을 노린 것인 셈인가.

광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 저곳은 현재, 명의 조공국 방가시(方可時, 팡가시난) 왕국의 영역. 우리와는 적대적인 세력이오.

― 방가시? 저자들이 톤도를 멸망시켰나?

― 그대가 말하는 톤도 왕국이 이 항구의 전 주인이라면 그 말이 맞는 셈이겠지.

주고후 사후, 즉위한 천덕제와 영흥제에 이르러서는 명은 해양 조공국의 감합무역(勘合貿易)도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복잡했다.

지금 이 짤막한 필담으로 파악하기에는 너무 한계가 뚜렷했다.

일단 장경창은 더없이 귀중한 포로라 이제부턴 더 공을 들여 대접을 하는 것이 맞겠다 싶었다.

‘명이라···.’

얄궂게 얽혔지만 일단 경창과 그 해적 무리들을 적당히 잘 대접하라 이르고 축객령을 내린 광영이 슬그머니 품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냈다.

시중이 직접 건넨 이 비밀 서신은 남들과 같이 볼 수는 없었다.

― 중원을 점거한 세력을 확인하라, 가능하다면 그 나라의 지금까지의 연호와 황제들의 휘까지도.

‘일단 이것은 확인했고.’

금의호는 선체를 돌려 마닐라 항에서 멀어져 갔다.

숭무감에서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말이 있지.

즉 적항을 향해 공격을 하는 것은 엄청난 수적 우위가 아닌 이상 자살행위와 다름없다고.

아무리 경제적인 여건을 살려 건조한 순양함이라지만 자신의 관직 명운이 달린 한 척 한 척 소중한 배들이었기에 광영은 무력 해법보다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톤도 제도 서쪽으로 천천히 남하했다.

해안선이 차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하다.

해적들이 활개 칠 수 있는 전형적인 지형.

남쪽의 누산타라 또한 이에 못지않은 미친 지형이라더니.

‘바야흐로 대해적시대가 이곳에서 열렸다는 유럽인들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군.’

경창은 끝까지 자신이 이끄는 후주의 후예들(좋게 말해서 후주의 후예들이었지 영락없는 해적 잔당이었다.)이 머무는 은거지를 말해주지 않았기에 광영은 다른 현지 협력자들을 물색하고 있었다.

루손섬과 정 반대에 있는 곳.

톤도 제도의 북쪽이 명의 입김을 받았다면, 남쪽은 덜하겠지.

이런 생각으로 내려온 곳엔, 마침 새로운 나라가 고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기는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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