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도 제도
선원들이 오래간만의 육지에서 성대한 연회를 즐길 사이, 함대의 수뇌부들은 따로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심상치가 않았다라?"
"예."
금의호를 이끌고 있는 선장 이광영은 꽤 젊은 장교였지만 이번에 새로 배정받은 1호 순양함의 선장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번 선민당의 난 때 휘말린 인사들은 군부에도 있었으니, 오히려 젊은 장교들에게는 기회가 되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대곡도에서 톤도 제도까지는 상당히 멀지요. 하지만, 포르투갈 놈들이 이곳까지 기웃거리는 것을 보면 유럽인들 또한 상당히 많이 진출한 모양입니다."
"그치들도 동인도 회사를 세우고 대아시아 무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니."
고려는 남아프리카의 무타파와 메리나(마다가스카르)를 간접적으로 지원하여 흑인 노예무역으로 대변되는 포르투갈의 남아프리카 침략을 일차적으로 저지하긴 했으나, 애초부터 이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마땅한 수요처도 없는(가장 큰 시장이어야 할 남북려대륙에서 노예제를 금지하고 있는 바람에) 흑인 노예라기보다는 동인도 지역의 향신료와 사치품들이었다.
게다가 포르투갈 또한 굳이 고려의 선교승을 핍박해 리스보아가 불타는 광경을 보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고.
그네들 스스로 카톨릭의 예수회(종교개혁에 대항하여 최근에 설립된 단체였다)를 선두로 사방에서 폭압적인 행패를 저지르고 있는 마당이니 선교승들을 핍박하면 똑같은 논리를 고려에게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또한 상당한 항해 잠재력이 있는 나라였다.
비록 세계일주의 영예는 고려의 프리머스 서컴데디스티메인 신원길에게 빼앗겼지만 동시대 1세대 개척자에 속하는 항해왕자 엔히크와 그의 탐험가 질 이아네스는 희망봉을 돌아, 그들의 숙원인 인도와의 항로를 설정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후, 인도의 동쪽으로도 눈길을 돌린 여러 탐험가들이 나왔고, 누산타라(인도네시아)에 있는 마자파힛 제국에 도착한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이후에는 고려가 탐험했던 호주와 길주에 도착한 이들도 있었더랬지.
비단 포르투갈뿐만이 아니었다.
고려가 유럽인들의 진출욕을 완벽하게 막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 그 넓은 남북려대륙의 패권을 최우선사항으로 여기는 고려는 예전부터 유럽인들의 인도 진출을 막기보다는 오히려 그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부추기는 감이 없지않아 있었다.
괜히 그들이 이탈리아에게 니카라오 운하의 자료를 주었겠는가.
아쉽게도, 현재 이탈리아는 오스만과 맘루크 간의 갈등으로 인해 운하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덕분에 포르투갈 말고도 이탈리아의 후원을 받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와 카스티야의 후원을 받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같은 동시대의 쟁쟁한 탐험가들은 전부 다 인도양을 건너 동남아시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고려가 대동양 서쪽에 대한 강력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지금, 탐험가들은 오로지 희망곶을 돌아 동쪽으로 나아가야만 했으니까.
"공격을 당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대곡도의 항구(말이 항구였지, 제대로 된 접안시설도 존재하지 않았다.)에 휘날리는 아국의 해군기를 보더니 놀란 듯 일단 꽁무니를 말았습죠."
"흐음···."
처음 포르투갈인들은 아마 대곡도에 걸린 깃발을 보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이 썩을 고려 놈들이 이제는 태평양을 건너 이곳까지 욕심을 부리는구나 하고.
그러나 지금의 고려는 그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인도양에 대한 탐욕은 전혀 없었고, 태평양에 대한 욕망 또한 제한적이었다.
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단 말에, 일단 광영은 안심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톤도 제도를 위시한 북태평양 항로의 개척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필요치 않은 분쟁은 피하라, 조정에서 그리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조정은 당분간은 전열함도 뭐도 지원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항로의 안정화 이후에도 고려의 '해군'은 직접 오지 않을 것이다.
민간 주도로 설립된 동아시아 회사의 무역선들만이 태평양을 일 년에 서너 번 오갈 것이었다.
* * *
금의호 선단은 대곡도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자신들이 스스로 고려에 귀부하길 원하는 섬의 주민들은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섬의 이름을 따라 식량도 넉넉지 않을 텐데, 대곡도인들은 구운 생선으로 연회를 열었고 섬의 아낙네들도 선원들과 흥겹게 불가에서 춤을 추었다.
물자적으로나 심적으로나 한 번 추스른 금의호 선단은 다다음 날 바로 서쪽으로 향했다.
칠천 개 섬들의 나라, 톤도 제도로.
놀랍지 않게도, 원역사의 필리핀은 처음부터 필리핀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곳을 처음 발견한 스페인인들이 자국의 국왕 펠리페 2세에서 따와 필리핀이라는 이름을 붙였기에 유럽의 열강들에게 그렇게 소개되었던 것이겠지.
섬의 사람들에겐 자국의 이름 유래 자체가 몹시 치욕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얄궂게도 그 이름은 먼 미래에서까지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었다.
그러나 현지 문화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었던 당대의 유럽인들과는 달리 고려는 자국으로 편입할 야망이 있는 땅을 제외한 곳에는 최대한 현지어를 차용한 지명을 붙여주었다.
전 세계에 이 제도의 존재를 알린 신원길의 2차 항해 이후, 이 제도는 제도에서 가장 강성했으며 고려 함대와 만났던 세력, 즉 톤도 왕국의 이름을 딴 톤도 제도로 고려와 유럽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었다.
톤도 왕국과 고려의 만남은 상당히 오래전에 있었다.
고려 조정의 국서와 선물을 전달한 신원길은 우호적인 첫 만남을 성사시키고는 여러 귀중한 종자들을 받는 성과까지 올렸다.
비슷한 기후의 남려에서 재배되는 설탕이 가장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겠지.
안타깝게도 그 외에 육두구와 정향 등의 중요한 향료의 종자도 얻었으나, 고려 내에선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 못했기에 재배지는 작았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유럽으로 수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찌 되었건 톤도 왕국과 고려의 첫 만남은 썩 괜찮았기에 금의호는 옛날 신원길이 기록했던 항로를 더듬어가며, 톤도의 수도인 마닐라로 향했다.
그리고 첫 만남부터, 포격을 받았다.
― 쾅
"침로 변경! 남남서! 빠르게 회피 기동하라!"
톤도 제도에서 가장 큰 루손섬의 북쪽을 지나 남하하며 마닐라 항에 다가간 금의호 선단이 재빨리 포격을 피하며 선체를 돌렸다.
"······."
물론 그들이 쓰는 화포란, 몹시 사정거리가 짧고 약하여 대수롭지 않았기에 지근거리에는커녕, 한참을 못 미쳐서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여타의 다른 원주민들과 달리 화포를 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젊다고 하나, 이광영은 생도 시절 무려 변흠규 제독의 아래에서 더블린 해전을 경험해본 사람.
빠르게 판단하여 항구에서 벗어난 그가 병사들을 진정시키며 부관을 불렀다.
"이해가 되지 않아. 보자마자 포격을 한다고?"
파도에 해군모 밑 앞머리가 조금 젖은 부관이 성을 내며 말했다.
"제독! 대응 포격을 실시합니까?"
거리상 중포는 적에게 맞지 않고 충분히 닿을 수 있었다.
"아니, 거리를 유지하고 관찰하겠다."
광영은 자신보다 겨우 세 살 아래인 마치 동생 같은 부관을 진정시키고는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길이를 늘이며 눈에 가져다 대었다.
"어째 항구의 분위기가 잔뜩 겁에 질린 것 같구나. 게다가 저들의 깃발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깃발이다. 포르투갈도, 카스티야도, 프랑스도, 이탈리아도 아니야."
인도양을 건너 이곳까지 올 수 있는 시도라도 할 수 있는 세력들을 일일이 열거해본 광영은 그 전부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깃발만으로 모든 것을 명백하게 판단할 순 없었다.
그러나, 저곳의 깃발은 당대 유럽과 고려의 기와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광영은 포격이 닿지 않을 먼 거리에서 천천히 마닐라 항에 있는 구조물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깃발은 물론이고 가옥이며, 배며.
과거 신원길이 묘사하며 그린 톤도 왕국의 풍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
이 모든 것은 단 한 가지로 귀결되고 있었다.
톤도 왕국은 이미 멸망했다는 것을.
광영과 금의호가 마닐라만 앞에서 대응책을 고심하며 빙빙 맴돌고 있을 때, 그들이 온 방향, 북쪽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다가왔다.
견시수가 고민에 빠져 있는 광영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북쪽에서 정체불명의 선단들이 다가옵니다!"
항구와 북쪽의 선단, 양측에서 공격받는다면 지형적 불리함을 안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광영은 배를 이끌고 서쪽으로 기동하며 먼바다로 나갔다.
북쪽에서 온 함대는 그런 고려 함대를 보고 멈칫하더니, 이윽고 기세를 올리며 다가왔다.
"총원 전투배치!"
"전투배치!"
광영은 함포와 소총을 준비하는 병사들 사이에 서서 부관에게 말했다.
"저 선박들이 뭘로 보이나?"
"캐러밸도, 카락도, 갤리온도 아닙니다."
"그렇지?"
유럽인들의 배야 충분히 익숙했다.
사실 고려의 함선들과 크게 다른 점도 없었고.
그러나 지금 저 앞에서 달려드는 열다섯 척의 배는 어딘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였다.
"이야기는 저들을 포박한 후에 하자고."
고려인들끼리 머리를 맞대어 봤자, 취합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광영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전투를 지시했다.
다섯 배가 넘는 수적인 불리함.
그러나, 그들이 이곳에 다가올수록 그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반대로 고려인들의 사기는 올랐다.
순양함이 아무리 전열함에 비해 약하고 기동성을 살린 군함이라 하나 선체 자체는 별다른 점이 없었으니 동시대 다른 배에 비해서는 상당한 크기와 능력을 지닌 배였다.
유럽인들 또한 최신예의 갤리온들만으로는 부족하여 후기 카락과 대형 캐러밸을 군용으로 쓰고 있는 이 마당에, 저 유럽인들도 아닌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쓰는 조잡한 배는 위험이라고 여겨지기도 힘들었다.
저 같잖은 승냥이들이 여러 척 달려든다고 해서 범이 고양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 * *
제대로 된 해전의 형식조차 갖추지 못한 채, 함포의 압도적인 우위를 통해 일방적으로 가해진 바다 위의 폭력은 적 함대 열 척을 수장시키고 다섯 척을 나포하는 결과로 귀결되었다.
금의호를 위시한 세 척의 순양함은 저들의 가소로운 함포가 조금 긁고 지나간 찰과상만을 입었을 뿐, 사상자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바다 위에서 자모포(子母砲, 불랑기포)라, 해전에 대해 큰 이해가 없는 자들이로구나."
고려에서는 육군에서 주로 쓰이는 소구형 화포인 자모포가 마치 주력포처럼 쓰이는 광경을 바라보던 광영이 혀를 찼다.
물론 요즘에는 전열함에서도 최상부 갑판의 난간에 선회자모포를 달아 소선과 백병전을 견제하자는 의견이 채용되었다지만, 기본적으로 배와 배의 싸움에서는 일정한 구경 이상의 함포여야 제 성능을 다했다.
자모포는 자포와 모포가 결합된 그 특유의 구조 덕분에 부식되기 쉬웠고, 내구성 또한 일반적인 전장식 대포보다는 훨씬 더 좋지 않아 사정거리와 구경의 한계점이 명확했다.
광영은 적선들이 침몰한 바다에서 하나둘씩 포로들을 건져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사람들이 고려 소총병들의 감시 아래, 갑판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이, 갑자기 꽤나 높은 지위에 있는 듯한 의복을 입은 사람의 시신이 끌려 나왔다.
적선의 선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몹시 크게 동요하더니 이윽고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기 시작했다.
"저자가 중요한 사람인 모양이구나."
시신이 입고 있는 옷도, 상당히 달랐다.
말로만 듣던 중원의 비단인가.
옷감을 만져보던 광영이 이채를 띠고는 뒤쪽을 향해 물었다.
"어찌, 살려볼 수 있겠는가?"
"물에 빠진 지 시간이 좀 흘렀다면 깨어나지 못할 것이지만 일단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갑판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함 내의 의무관을 맡고 있는 우락부락한 고려인 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걷어붙였다.
시신의 위에 올라탄 그는 남의 눈에는 사뭇 흉측하게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
적선의 선원들이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 핫 둘 셋 넷!
일정한 주기로 흉부를 압박한다.
곧게 뻗은 팔, 역으로 깍지를 낀 손바닥에 체중을 잔뜩 실어 거칠게.
무슨 행동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하는데.
시신의 흉부를 압박하던 행위를 갑자기 멈춘 우락부락한 고려인 의무관이 시신의 목와 입을 조절하더니, 이윽고 망측하게도 시신의 입을 탐하는 것이 아닌가.
포로들 중 일부는 총과 칼이 겨누어지고 있는 마당에도 화가 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 고려인 선원들에게 오금을 채이고는 다시금 쓰러지기도 했다.
― 후욱 후욱.
고려 내 응급처치술의 역사는 유구했다.
어떠한 도구의 개발도, 어떠한 기술의 발전도 필요가 없는, 그냥 두 손과 입만 있으면 행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원리.
건국 초, 태조께서 스스로 자신의 후궁 중 하나가 물놀이를 하다 의식을 잃었을 때 선보이셨다는 이 심폐소생술은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지.
여담으로 태조께선 이 심폐소생술 말고도 목이 막힐 때, 뒤에서 끌어안아 속의 내용물을 토해내게 하는 기도처치법(하임리히법) 또한 발명하셔서 어른들은 물론 많은 영아들의 생명까지도 구하셨다.
- 울컥
"쿨럭, 쿨럭."
부정적으로 놀란 적선의 선원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숨도 쉬지 않아 영락없이 시신으로 생각했던 자신들의 선장이 갑자기 물을 토해내며 신음성을 흘리자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