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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12화 (212/653)

태평양(2)

초창기 고려의 눈과 귀가 되어 수많은 곳에서 아주 고마운 역할을 했던 협저선(캐러밸)의 시대는 이제 쓸쓸하게 저물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배의 덩치가 중요해지는 시대이니만큼, 일부 지형에서의 기동성을 제외한 속도(모든 돛을 다 폈을 때), 화물 적재량, 함포 적재량 모두가 태생적으로 좋지 않은 협저선은 한계가 명확했다.

선체가 낮아 좌초와 침몰의 위험성도 컸고.

후기로 갈수록 크기도 커지고 넓어졌으며, 심지어는 돛대를 더 달아 사각돛을 더 차용한 대형 협저선이라는 과도기적 단계가 나왔지만, 아무리 봐도 평범한 중범선의 하위 호환이 명백하다는 사실만 증명해줬으니.

중범선의 제작이 완전히 자리 잡힌 이후에는 거의 건조되지 않았으며 건조되었던 배들도 노후화되어 바다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중범선 또한 그 용도에 맞게 나누어질 차례였다.

일단 화력의 정점으로 쓰이는 3단갑판 중범선, 즉 전열함은 건조를 할수록 더욱 거대하고, 무겁고, 강력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값비싼 청동대포와 엄청난 수의 선원들, 가득 찬 화약과 전쟁물자들.

한 척 한 척이, 자국에는 자긍심과 안온함을, 적국에게는 경외심과 두려움을 선사하는 최초의 전략무기.

만드는 것도 비쌌고, 전략적으로 운용하는 것도 비쌌으며, 하다못해 숨만 쉬고 있는 상황에서도 큰 금전이 나갔다.

이런 배들을 원양항로에 배치한다?

국가와 국가 간의 전면전이 있을 때나 둔중한 몸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전열함을 보내겠다는 말은 너무 위험성이 컸다.

대서양 위에서 마주한 거센 폭풍 때문에 전열함 한 척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상민이 급격한 복통과 두통을 호소하며 그날의 업무를 종친 일도 있었지.

고려로서도 지금 당장은 겨우 일 년에 2.5척을 건조해 나가는 수준인데.

이들은 정말로 자국의 가장 삼엄한 항구에서 철저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상민은 조금 더 함부로 막 굴릴 수 있는 배가 필요했다.

함부로 굴린다고 해서 너무 약한 것은 아닌.

기존의 전열함보다 크기가 작고 포갑판이 한 층 사라진 이 배(Frigate)는 호위함 또는 순양함이라는 명칭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사실은 거의 같은 배라 봐도 무방했지만, 전열함을 호위하여 전투에 나서는 함에는 호위함이라는 명칭이 붙었고 태평양에서 독자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함은 순양함이라는 명칭을 받았다.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적어도 호위함과 순양함은 동급의 함선이라 간주되었다.

가격은 의외로 저렴했다.

일단 배수량부터 전열함보다 적었으며, 갑판의 수도 적었고, 승무원의 수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약하냐 물으면, 바닷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저을 것이다.

전열함만큼은 절대 아니겠지만 충실하게 탑재된 함포는 적의 상선과 군선에 치명타를 가하기 충분했다.

해적들도 상부의 옹포를 한 대 맞아보면, 정신이 들 것이다.

빼어난 기동력으로, 측풍의 방향(웨더게이지)를 선점할 수 있어 전술적인 우위도 가능했으며, 다수의 군함과 마주했을 때 도망을 선택하기도 쉬웠다.

첫 번째 순양함은 제국 군함 금의(錦衣)호.

금의환향에서 이름을 따온 이름을 덕분에 그 용도는 사뭇 노골적이었다.

금의호를 포함한, 세 척의 배는 건조되자마자 편성되어 태평양으로 향했다.

고급선원들은 기존의 해군 소속인 자들이 주를 이루었고, 하급 선원들은 근래 도성에서 일어난 난리에 관련된 놈들이 잡혀 노역을 해야 했다.

운학도 이 무리에 껴 있었다.

금의호는 해문에서 출발해 동해안을 거쳐 니카라오로 향했다.

남부항로를 이용하지 않느냐고?

울부짖는 바다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소리였지, 남부항로 자체도 바닷길이 험하며 암초가 많아 상당히 오가기 힘들었다.

순양함이 아무리 기동성이 빼어난 선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군선의 입장에서나 그랬다.

덩치가 큰 대선은 대선만의 고충이 있는 것이다.

차라리 조금 멀게 돌아간다 해도 동해안을 타고 가 운하를 이용하는 것이 나았다.

순조롭게 니카라오의 큰 호수에 도착하면, 니카라오의 견인선들이 노를 저으며 배를 이동시킨다.

실로 짧은 거리에 불과했지만 바람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온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배를 움직인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여담으로, 전열함은 처음엔 운하조차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다.

화포란 화포를 전부 때려 박은 터라 배가 움직이는 것보다 견인선의 노잡이들의 어깨가 먼저 탈골될 조짐을 보였다.

겨우겨우 대포와 물자를 다른 배에 나누어 이동시키고 심지어 타고 있던 선원들마저 하선시키는 소란을 겪어서야 몇 척의 전열함들을 서해안함대에 편성할 수 있었지.

다행스럽게도 순양함들은 힘들지언정, 견인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운하를 염두에 두어 순양함 내부에도 조그맣게 노를 젓는 구역이 있기도 했고.

마침내 태평양으로 빠져나온 세 척의 배는 그동안 고려의 탐험가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갱신된 지도를 바라보며 북태평양 남부항로 향했다.

* * *

태평양에는 정말로 많은 섬이 있다.

적도를 기준으로 북과 남을 구분해본다면, 그동안 고려는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좋은 남태평양의 섬들을 먼저 발견해 놓았었다.

고려에 일대 파란을 불러온 이론의 배경이 되는 고종도와 남려대륙 서쪽으로 꽤 많이 나가야 도달할 수 있는 라파누이까지.

그중에는 유인도도 있었지만 무인도들도 상당히 많았다.

자생적으로 농업이 불가하여 섬의 경제가 굴러갈 수 없는 곳도 많았고.

이곳을 다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하와이조차도 유지비가 그렇게 많이 드는데.

고려인들은 그들답게 이 섬들에 선조들이 해왔던 것마냥 비석을 뿌리고 추후 영유권을 주장할 근거를 만들고 미련 없이 떠났다.

[본 섬은 개천 225년(서기 1500년을 병기했다), 대고려제국 탐험가(혹은 제독, 혹은 선장) 김 아무개가 발견한 영토로, 이후 신성한 고려의 법률에 의거, 섬의 영유권은 고려제국에 귀속되니···.]

고려글을 음각한 화강암 돌이 턱 놓이면, 이제 그 땅은 고려 땅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고려제국의 본토가 위치한 남려대륙 서해안 앞바다의 섬들에게 감히 함부로 영유권을 주장할 나라가 전 세계에 있겠냐마는.

유인도의 경우, 여타 다른 원주민들에 대한 동화정책을 실시하는 것과 같았다.

라파누이(이스터 섬)에 살던 원주민들처럼.

이 섬의 주민들은, 조금 독특했는데 모아이라 불리는 괴상한 석상을 쌓는 풍습을 가진 원주민들이 있었지.

땅속 깊이까지 묻은 이 거대한 석상을 운반하기 위해, 스스로 섬들의 나무를 잘라내며 섬의 환경을 박살 내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한창 대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부 고려의 학자들은 이곳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인간의 손을 닿지 않고 고립된 고종도가 진화론의 기틀을 만들었다면, 라파누이 섬의 존재는 환경보호론의 기틀을 만들었다 평가해도 될 것이었다.

어찌 되었던, 시기상 적절하게 만난 고려 세력 덕분에 섬의 원주민들은 파멸로 달려가던 것을 멈추고 고려의 식량지원을 받아 생존할 수 있었다.

물론 식량 값은, 원주민들의 동화라는 결과로 받을 것이다.

북태평양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했다.

탐욕스러운 고려인들은, 그냥 거대한 암초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땅마저도 함부로 내버려두지 않고 꼭꼭 들러 비석을 박아 놓았다.

북태평양을 횡단하는 길에는 섬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그중 중요하게 여겨지거나 인상 깊었던 섬들을 꼽아보자면 두 제도들이 있겠다.

첫 번째는 하와이와 그나마 가까운 제도로, 정말 수없이 많은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원주민들이 그 섬들을 오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카누 하나에 의지해, 바다를 휙휙 건너간다는 것이 정말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지만.

원주민들과 접촉한 탐험가들은 고려의 관습을 따라 그들의 말로 그들의 섬들을 일컫는 말(Jolet Jen Anij)에서 차용한 아니지 제도라 불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히 이 섬들엔 볼일이 없었다.

너무 자잘자잘한 섬들이 많은 제도(거의 천 개가 넘는)라, 저기에 전부 다 비석을 세우는 일은 조금 무리일 듯싶었다.

나중을 기약하기로 했다.

금의호 선원들의 시시덕거림을 뒤로한 채 멀어져가는 아니지 제도 다음으로 마주한 섬은, 바로 대곡 제도(괌, 북마리아나 제도)

하와이가 북태평양 동쪽의 전략적 요충지였다면, 대곡도(待穀島)를 위시한 대곡 제도는 북태평양의 서쪽의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저 대곡도가 왜 대곡도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아나?"

"모르겠는데 왜?"

"신원길 나으리 이후 최초의 탐험가들 중 일부가 표류해 정박한 곳이 이 제도라네. 곡식을 기다리다 못해 굶어 죽었단 이야기가 돌았고."

"···전부 다 죽었나?"

"전부 다 죽었지. 새하얀 백골이 될 때까지 어떠한 곡식도 섭취하지 못했으니까.

그리하여 곡식을 기다린다는 섬이라 명명을 했다더군."

유령이 씌인 섬이란 이야길세.

그가 뱃사람들에게 효과적인 괴담을 꺼내자, 모두가 소름이 끼치는지 팔을 문질렀다.

그러나 한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며 먼 해안가를 보더니 반문했다.

"···저기 멀쩡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의문을 제기한 자는, 금의호의 견시수로 눈이 무척이나 좋았다.

다른 선원들은 자연스럽게 괴담을 꺼낸 선원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치는 입만 열면 거짓부렁이를 내뱉으니··· 믿을 수가 있나."

허언을 떨던 선원은 주먹을 쥔 동료 선원들의 흉흉한 분노에 빠르게 하부의 갑판으로 도망갔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선원들의 소란을 보고 있던 제독 겸 금의호의 선장이 말을 꺼냈다.

"난파되어 곡식을 기다리는 섬이라는 작명은 맞네. 다만, 다른 점은 그 좌초된 탐험가들이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겠지. 다시금 고려로 돌아올 기회를 몇 번이고 얻었음에도 계속 섬에 남겠다 한 자들도 있었고."

"그렇습니까?"

그래도 선장이라고, 선원들은 아까와는 달리 전부 믿는 눈치였다.

선장도 허언증에 걸린 선원보다는 훨씬 신빙성 있는 자료를 보았었다.

"원주민들은 차모로 족이라 불리지. 꽤 많은 수를 자랑했지만 최근 몇 번의 기근으로 상당히 수가 줄어들었던 모양이야. 다행스럽게도 고려의 탐험가들이 가지고 있던 작물들을 파종하는 것엔 성공을 했지만···."

선장은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섬을 바라보았다.

고려의 배를 보았는지, 섬의 해안가에는 몇 명의 원주민들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섬에 남은 최초의 탐험가들 덕분인지 섬의 부족들은 고려에 상당히 우호적이라더군. 심지어 섬의 대족장은 최근에 들른 탐험가들에게 공식적으로 고려의 보호를 받길 원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저들 스스로가 예속되길 청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섬이라는 공간은 실로 답답하고 제한적이라 불규칙한 기근이 불어닥칠 때마다 어떤 도리 없이 굶어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저들은 그래도 태평양의 섬들에 살아가는 부족들 중에서도 상당히 온건한 방법을 선택한 편이었다.

몇몇 부족들은 고려인 탐험가들을 보자마자 공격하여 식인하려고 했다.

"앞으로 제국의 최서단이 될 곳에 온 것을 환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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