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11화 (211/653)

태평양

막이 열리고, 공연이 시작된 지도 어느 정도가 흘렀다.

세 명의 남자들은 한참을 떠들었는지, 조용한 틈을 타 문을 열고 다시금 자리에 와 앉았다.

뭉쳐있던 세 여자들도 다시금 옆으로 한 칸씩 띄워 앉았다.

해건은 줄거리가 궁금하여 중전에게 살짝 물어보려 했으나, 중전은 이미 거의 혼이 쏙 나갈 정도로 무대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모, 내가 결혼을 한다는 게 정말이야?”

무대에서는 탈놀이의 영향인지, 화장기법 대신 쓰이는 건지, 아니면 신분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얼굴의 윗부분만 가리는 가면을 쓴 여자가 연기를 하고 있었다.

― 끼이익

5층에 설치된 거울이 극장의 관계자에 의해 조작되고 이윽고 그녀에게 조명을 주었다.

그나저나, 거울의 경첩에 기름칠을 다시 꼼꼼하게 하도록 해야겠어.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극장 내부가 원체 조용하다 보니, 소리가 상대적으로 도드라졌다.

상민은 극장 안이 더워지거나 혹은 이산화탄소의 비중이 높아질까 우려하여 조명과 빛의 대부분이 외부에서 들어오도록 주문했다.

마치 등대마냥 외부에서 불을 피우고 이 불빛을 복잡한 거울을 이용해 극장 내부로 들어오게 하는 것.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거울과 이를 조작할 별도의 넓은 공간이 5층에 필요했지만, 덕분에 극장 안은 여전히 쾌적했다.

상민은 무대 위에 선 여주인공이자 고려 최초의 성악가라 불릴 지선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기준에서 지선희의 노래는 듣기에 좋았으나 예전 삶에서 들어보았던 한국과 외국의 위대한 성악가들과 비교한다면 조금은 초라했다.

지선희는 제의를 수락한 이후 성실하게 연습을 하긴 했지만, 성악은 대부분 재능의 영역이라 도달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현 고려는 그동안 대체로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한 음악, 즉 성악이 발달하지 못했다.

판소리 같은 한반도 전통의 성악적 음악은 아마 조선시대 중기에 들어가서야 제대로 자리 잡는 듯싶었고.

물론 유럽 또한 지금은 성가가 종교의 틀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

루크레치아의 말을 토대로 유추해보자면 7세기 시절의 그레고리오 성가 이후, 종교개혁과 현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야 이제 일상적인 희노애락을 노래에 담을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이제부터 상민의 후원을 받는 고려의 성악이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는 입장이라 봐도 무방하려나.

다행스럽게도 지선희의 노래는 훌륭한 아군이 있었다.

선천적이고 기교적 능력은 약간 부족할지라도, 그녀는 배경음악의 지원을 누렸다.

고려의 성악이 아직 걸음마를 디딘 갓난아기 수준에 불과했다면, 고려의 기악은 지난 삼십여 년간 제위에 올라 있었던 예종 해광의 음악적 업적 덕분에 엄청나게 발달한 상태.

해광은 상민이 대충 던진 한마디에 영감을 얻어 마침내 클라비코드를 개량하여 피아노의 원형을 만들어낸 인물.

게다가 기타 여러 가지 악기들을 규격에 맞게 일정한 음이 나올 수 있도록 정의하고 오선보의 악보와 그 기입법 또한 발달시키니 음악사로 따지면 아마 고려 최고의 군주라 평가받을 수 있겠다.

상민은 무대 바로 앞, 일반적인 객석보다도 다소 낮은 곳에서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교향악단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이 고려가극은 오페라 혹은 뮤지컬이라고 보기엔 음악의 비중이 상당히 적었다.

거의 음악과 노래가 있는 연극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리고 그 음악도 성악보다는 기악의 비중이 많았고.

앞으로는 점차 성악의 비중이 많아지겠지만.

지금 이 공연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일단 스토리가 탁월하다.

정말로.

‘선작(先作)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클리셰 덩어리인 작품은 위대한 혁신이요, 선지자가 되기 마련이니.’

작품의 내용뿐만일까.

지선희 또한 비교할 성악가가 동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듣기 좋을 정도면 합격선을 넘었고, 합격선을 넘으면 충분했다.

“로미오…!”

“오, 주리예(周璃隷). 당신을 볼 때면….”

그런데, 저 남주인공은 타고났는지 발성을 기가 막히게 잘한단 말이야.

이 피에르 의원의 삼남을 바라본 상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서도 서로 죽고는 못사는 사이인 남주인공 바르톨로메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선희와 함께하기 위해 스스로 예술의 전당에 들어왔다.

작 중, 선희는 본신의 이름과는 다른 가명으로 불리지만, 바르톨로메오는 자신의 이름을 딴 로미오라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 배우는 배역의 이름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극의 줄거리를 자신들의 상황에 대입하고 있었다.

이 극의 알파이자 오메가일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사이의 감정의 교류는 처음부터 오히려 절제를 청해야 할 정도로 충분했다.

그 혼신의 열연 덕분에 지금 주변을 슬쩍 둘러봐도, 관객들은 얼어붙은 듯 조용했다.

좌석을 고쳐앉는 소리,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조명을 조작하는 미세한 소리가 불편할 정도로.

그리고 사실 그 미세한 소리는 오직 자신만이 인지하는 부류의 소음이겠지.

상민은 지금의 이 침묵이 불호의 개념과는 상당히 먼 반응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 * *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귀부인들은 눈시울이 붉게 물든 채로, 대나무와 종이로 만든 접부채를 이용해 얼굴을 가리며 극장을 빠져나왔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음을 터트린 부인도 있었다.

위대한 걸작은 가끔 비극을 요구했다.

상민은 거의 반세기가 흘러야 비로소 태어날 셰익스피어에게 약간의 죄의식을 담아, 그의 작품의 흐름을 최대한으로 존중했다.

결말은 모두의 반응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고.

관료들은 아직도 극의 여운이 남아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부인들 대신, 조심스럽게 상민에게 와 고개를 숙이며 물어보았다.

“소… 송구하오나, 당하. 혹시 예당의 다음 공연이 언제 기획되어 있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아직은 계획에 잡힌 것이 없는 걸로 아오.”

풀이 죽은 채로 떠나는 사람들을 본 상민이 피식 웃었다.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해도, 피드백을 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

더욱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이들은 다시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의 호응이라면 다음 작도 빨리 만들어내야겠구나.’

다음 작은 생각해 놓은 것이 있다.

이 또한 유명한 작품, 노트르담 드 파리(노트르담의 꼽추)에서 영감을 얻었지.

줄거리는 얼추 기억이 나 금방 쓸 수 있었지만 제목이 문제인데.

‘해문의 시계탑으로 지어야 하나.’

상민이 고심에 빠져있을 동안, 주차장은 공연이 끝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부들에 의해 빠르게 비워지기 시작했다.

마차들과 부름차들이 빠져나가고 얼추 교통정리가 되자 드디어 황가의 인원들이 나타났다.

“좋은 공연 잘 봤습니다.”

처음 이곳에 올 땐 오직 나디아만 몽수를 쓰고 있었지만, 지금은 황후까지 몽수를 쓰고 있었다.

얼굴이 누구보다도 붉게 물든 헬레나가 눈물 자국을 훔쳤다.

“시중께서는 이 사람이 예당을 너무 자주 방문해도 노여워하지 않으시겠지요?”

“전하께서 오시는 것은 실로 이곳의 홍복(洪福)이니 전혀 개의치 마소서.”

상민이 선보인 한류는 신분을 가리지 않아 보였다.

이 시대에 걸맞게 고려풍이라고 해야 하나.

해건은 중전과 태자 부부를 마차로 보내며 슬그머니 말했다.

“근위대에 일러, 그자에게 자신의 딸과 인사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지운학을 말하는 것일 게다.

상민도 지금까지 몰랐고, 권유한 바도 전혀 아니었다.

뭐 어찌 되었든 나쁘진 않겠지만.

아버지를 밀고한 딸과 죄인이 된 아버지 간의 만남이 잘 풀렸으려나.

그러나 지금 해건의 표정으로만 판단해보면, 그렇게 또 나쁘게 풀리진 않은 모양이다.

“성상께서 홍사(鴻私)를 내리셨으니, 역당의 수괴 또한 울며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옵니다.”

딸 말고도 운학의 아들들은 죄다 최근의 사건과 연루되어 삭탈관직된 채로 택주나 파주, 기주 등지로 사민당했다.

인질들이 잡혀 있으니, 바다 위에서 딴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해건이 피식 웃었다.

“짐이 시중과 대기실에서 담소를 나누느라 아까 첫 부분을 놓쳐서 그러한데, 조만간 중전이 올 때 같이 행차하도록 하겠소.”

고려풍의 열기는 신분 말고, 성별도 딱히 가리지 않아 보였다.

연기자들의 피드백은 빨리 끝내야 할 듯싶었다.

“대명을 받았으니 준비하겠습니다.”

* * *

개천 225년 현재, 탐험가들은 북방의 영토와 태평양의 섬들에 대한 지도를 작성해 나가고 있었다.

북려의 북방이라면 크게 두 지역이 있겠지.

진주의 북쪽, 즉 대동양 부근의 지리는 서쪽보다 더 빠른 시간에 이미 밝혀져 있었고, 복잡한 해안선도 모두 지도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니카라오 운하가 뚫리며 태평양에 대한 접근성이 상당히 올라가자, 미주 북쪽의 북방 탐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주(寒州, 알래스카, 서캐나다)의 발견이 대표적.

대외관계를 맺어가고 있는 치누크족의 근거지, 즉 이제 다신 시애틀로 불리지 않을 곳을 기준으로 북쪽 지역은 한주라 명명되었다.

몹시 추운 지역이니만큼 이곳의 원주민들의 세력은 약했고, 또한 식량을 교역하면 상당히 온순해졌다.

다만 해안가에 딱 붙은 산맥이 험준해 내륙으로 진출하기 극히 어려웠다.

그래도 이 자원의 보고를 포기할 수는 없는 터라, 조정은 하이다(Haida)족이 사는 섬(Haida Gwaii)에 거점을 마련하라 지시했다.

한주는 앞으로 하이도라 불릴 이 섬을 기점으로 고려의 영향력 내에 들어갈 것이다.

하이도 서쪽으로 가면 더욱 춥고 위험해진다.

유빙이 많다고 해서 표빙해(漂氷海, 베링해)라 붙여지는 바다가 존재했으니.

이곳에는 범선에게 몹시 위험한 유빙들이 많아 북반구에 여름이 올 때나 제대로 된 탐사가 가능했다.

그래도 고려 내에는 죽음도 불사할 수 있을 만큼 불굴의 탐험가들이 충분히 많았고 오랜 노력 끝에 이곳의 지도까지도 파악한 탐험가들은 마침내 건너편의 대륙과의 경계선 즉 세계의 연결점(베링 해협)이라 불리는 곳마저도 발견해냈다.

“우리가 마침내 북려를 전부 관찰했구나.”

북극해마저 발견해내겠다는 소수의 미치광이 탐험가들을 제외하곤, 대다수의 탐험가들은 표빙해의 남서쪽이나 태평양의 섬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바야흐로 태평양에도 대항해시대가 도래했다.

* * *

하와이는 고려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선대제들과 시중들의 일관된 주장에 따라 이 섬에 대한 개척은 계속 유지되어왔지만, 섬의 유지에 너무나도 많은 금전이 들었다.

매번 미주의 의원들은 왜 자신들이 이 개똥 같은 섬을 계속 관리해야 하느냐고 중서성에 와서 신세 한탄을 했었지.

그러나 고려가 태평양에 눈길을 돌리자, 바야흐로 이 섬은 그동안 투자했던 노고의 곱절만큼을 고려에 되갚아주고 있었다.

하와이는 태평양의 거의 정중앙에 위치했다.

제도의 북쪽은 무시무시한 무풍지대의 영향권에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제도의 남쪽, 즉 하와이 본섬은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는 북태평양 남부순환항로에 있었다.

동아시아와 마주하기에는 실로 완벽한 전략적 거점이다.

북태평양 남부순환항로는 바람과 바다 전부 서쪽으로 향하는 상당히 빠른 바닷길.

수많은 돛을 단 고려의 범선들이 적도 윗부분을 흐르는 북적도 해류와 무역풍(적도 편동풍이라 부르기도 한다)을 탄다면 그 먼 거리를 질주하듯 나아갈 수 있었다.

탐험가들은 제대로 된 바닷길을 발견하느라 바다에서 굶어 죽기도 했었지.

그러다 생존자들 덕분에, 태평양의 바닷길은 고려인들에겐 꽤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도해볼 만한 시간이 흐른 것이다.

마닐라 갤리온 루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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