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와 해학, 관용(7)
― 다그닥 다그닥.
교통정리가 얼추 끝나고 파견된 경관들과 마차를 몰던 마부들마저 한숨을 돌릴 때, 저 멀리 거대한 마차 두 대가 등장했다.
각 마차는 몸집이 거대한 검은 흑마 여덟 마리가 끌고 있었다.
말 한 필 한 필이, 장군급 장수가 타고 다녀야 할 법할 정도로 우람하고 힘이 넘쳤다.
마차를 끌기엔 과도할 정도로 강력한 힘.
그러나 말들에 의해 나아가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마차는 덩치 하나만큼은 말 여덟 필을 써야 할 정도로 대단했다.
마차는 사면 모두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안을 함부로 볼 수 없게 드리운 천조차도 청자색의 벨벳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게다가 마차 앞뒤에는 행렬이 어찌나 긴지.
고려 내에서 저렇게 행차할 때 대단위로 움직이는 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중 하나로 꼽힐 수 있는 시중은 공식 일정이 있을 때 기마경관의 호위를 받았다.
저렇게 근위대가 나서서 행렬을 호위하는 자는 명백하리라.
“황상 폐하 납시오!”
우렁우렁한 근위대장의 말에, 주차장에 있던 사람들이 제각기 예를 표했다.
위생상의 문제로 현 고려에서는 황상의 행차라도 땅바닥에 털썩 엎드리거나 그러진 않았다.
거, 오체투지한다고 충성심이 샘솟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정치권력적으로 황제는 이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기도 했고.
‘영조 시대 때는 과잉 충성을 한답시고 행차길의 묘비를 죄다 뽑아버렸다지.’
어휴.
상민은 주인의 입장에서 미리 와 현장을 한 번 둘러보고 있었기에, 황제의 행차에 직접 나와 그를 맞이했다.
이번 외유에는 황제와 중전뿐만 아니라 태자와 태자비까지 같이 대동했기에 행렬의 구성원이 참으로 많았다.
덕분에 근위대는 바짝 긴장하여 극장 안팎을 다시금 점검하고 있었다.
상민도 거의 일주일 전부터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점검했기에 털어도 지적할 사항이 얼마 없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우려 섞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보안 점검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상민과 해건은 천천히 청명각 외부와 지어지고 있는 다른 건물들을 한 바퀴 돌았다.
해건은 청명각 한 채도 충분히 거대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축물인데 그런 종류의 건물들이 정확히 세 개가 더 지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시중, 저곳은 무슨 용도로 쓰이는 건물이오?”
대소신료의 귀가 많은 공적인 자리, 상민은 황제뿐만 아니라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다른 신료들에게도 소개하듯 입을 열었다.
“저곳에 지어지고 있는 각은….”
― 오오….
상민의 설명을 들은 해건과 신료들이 나지막이 탄성을 내질렀다.
고려의 밤하늘에서 관측할 수 있는 별자리 중 가장 상징적인 남십자성의 배열을 본따 만들어지고 있는 나머지 세 건물들은 이미 지어진 오페라 하우스로 쓰이는 청명각 말고도 제각기 교향악단(오케스트라)이 쓸 건물, 놀이패의 나희류를 발전시켜 더욱더 복잡하고 화려한 곡예(서커스)를 공연할 건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아직은 자리를 잡지 못한 무용과 발레 같은 공연을 할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그밖에도 상징적인 네 건물에 비해 거대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규모가 꽤 있는 건물들이 많았다.
그림과 기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전시해 보여줄 미술관의 목적으로 쓰일 곳들.
해건은 상민의 설명을 듣고 어떤 감상에라도 젖은 듯 한참 동안 건물의 공사장을 바라보았다.
특히나 교향악단이 쓸 곳을.
“짐이 먼저 이런 생각을 해냈어야 했는데.”
이미 붕어한 예종(해광의 묘호)이 생전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는 상민이 오히려 해건보다 더 잘 알 것이다.
“선대제께서 챙기신 악공과 그들의 후인에 대해 지원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그들이 화려하게 꽃필 무대를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짐은 시중에게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 * *
내부의 보안 점검이 끝났는지 근위대장이 직접 해건에게 와 아뢰었다.
해건과 상민은 마침내 극장 안으로 향했다.
“호오….”
소소한 곳의 집치레가 다 끝나지 않았더라도, 관객들이 자주 오가는 곳과 중요한 곳은 전부 꼼꼼하게 마감을 한 상태.
황제와 황태자 부부가 청명각의 내부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했다.
황성에 사는 사람들인 만큼 이 정도 크기의 건축물은 딱히 놀랍진 않았다.
그러나 극장이라는 것은 생전 처음 보기에 그들은 연신 놀라며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저 등은 정말로 큰 무리등이군요.”
헬레나가 화려한 무리등(샹들리에)을 보고 감탄성을 내뱉었다.
유리공예가 절정에 이르고 있는 고려에서 만들었다고 선전이라도 하는 듯, 청명각의 입구에 설치된 무리등은 무려 예순네 개의 유리구 안에 초를 넣어 밝히는 등이었다.
유리구 하나하나가 청해 유리장인의 손길에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만큼 안에 들어있는 촛불이 현란하게 사방으로 반사되었다.
상민은 겨우 무리등 따위에 넋이 나갔는지 따라 들어오다 멈춘 대소신료들을 무시하고는 황가를 이끌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정면에 보이는 호화롭게 장식된 계단에는 이미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들이 붉은 제복을 입고 도열해 있었다.
― 내빈 여러분께서는 이 계단을 이용할 수 없으십니다.
― 왜죠?
― 이 공간은 오직 쌍용지손만 들어갈 수….
황제와 황태자 부부는 불편한 옷을 입을 수도 있는 중전과 태자비를 배려한 듯 다소 경사가 완만한 순백의 대리석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붉은 깔개가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활참나무로 만든 거대하고 단단한 문이 있었다.
황제가 도착한 것을 두 눈으로 본 근위대장이 직접 그 문을 열자 안에 있는 화려한 응접실 겸 대기실 겸 다과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푹신푹신한 안락의자들과 다과상들, 금박과 자개가 박힌 적강목 가구들.
황궁의 응접실을 떼 온 마냥 편안하고 호화스러운 공간의 왼쪽에는 큼지막한 화장실(용변을 보는)이, 오른쪽에는 정말로 화장을 고칠 수 있는 화장실이 있었다.
놀라운 것은, 드디어 상민이 이 건물에 최초로 수세식 변기를 설치했다는 것이었다.
비단 황가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상류층들의 안락함을 위해, 물통을 고지대에 배치한 뒤 상앗빛 도자기로 만든 변기에 구부러진 관을 설치하여 만든 수세식 변기는 처음 등장부터 악취와 위생 모두를 잡아버렸다.
이 변기는 결국 건물의 지하에 묻혀 있는 새 하수도를 따라 흐를 것이고, 창양의 본래 하수도와 만나 바다로 방류될 것이다.
하수도에 관해서도 또 한동안 흑역사가 있었지.
도시가 무지막지하게 커지면서, 사람들의 대소변과 생활오수들이 창강에 무절제하게 방류되자, 그토록 맑았던 창강도 삽시간에 오염되었다.
게다가 창강은 창양만 쓰는 물줄기도 아니었다.
창강은 몹시 넓은 강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똥오줌은 너무 많았다.
금호와 상주, 안성을 통해서 오는 물줄기는 이미 그 도시들의 오폐물들을 가득 실어나르고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하류에 사는 사람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고려는 또 거금을 들여 공사를 했다.
이미 건국 초부터 하수도 시설의 중요성은 상민에게는 몹시 중대한 상황이라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주요 도시는 죄다 하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강에 방류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오물이 창강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다 보니 하수도 자체를 전부 저 먼 거리에 있는 바다에 가져다 버려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
창강의 강줄기를 따라 나란히 만들어진 대(大)하수도는, 강변의 도시들의 오폐물들을 강에 버리지 않고 바다로 직접 투척할 수 있게 해주는 길고 긴 시설물이었다.
재무상서의 머리가 띵할 정도로 돈을 많이 지출해야 했지만 이 대하수도의 건축 이후, 창강변은 예전보다 놀라울 정도로 깨끗해졌으며 도시의 사람들을 위협하던 역병과 모기의 문제들도 다시금 수그러들었다.
직접 똥물을 투척당한 바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언젠가는 근대적 하수처리시설이 만들어지겠지.
시녀들을 대동하고 볼일을 보고 나온 중전 헬레나가, 시중의 앞이라 신경이 쓰이는가 싶다가도 금방 해건에게 다가가 뭐라 속삭였다.
발갛게 물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던 해건이 옅게 웃으며 상민에게 말했다.
“시중께서는 청명각의 화장실을 설계한 장인을 보내주시구려. 이런 좋은 기물들은 황궁에서도 쓰고 싶으니.”
“마땅히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 * *
상민이 드디어 응접실의 출입구와 정반대에 설치된 문을 열자, 일행은 열린 문 사이로 무대와 좌석들의 배열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 자신은 몇 번이고 이곳에 들러 진행 상황을 확인했었기 때문에 쉽게 설명을 할 수 있었다.
극장의 구조는 총 4층.
1층의 좌석들은 영화관에서나 볼 법한 일반적인 좌석들이 오와 열을 맞춰 알맞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2층과 3층, 그리고 4층은 칸이 나누어진 칸막이석(박스석)의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가운데의 칸막이석이 단연코 제일 화려했다.
일반적인 밋밋한 칸막이 대신 용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이곳에 앉을 사람의 신원을 증명했으며 마치 떠받들 듯 호랑이와 표범, 독수리 등의 영물이 장식된 난간 또한 인상적이었다.
난간 위에는 화려한 자줏빛의 벨벳 커튼이 설치되어 다른 자들의 시선을 차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유럽의 일반적인 왕립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로열박스라 여겨질 이 극장의 황실석(임페리얼 박스)은 앞으로도 일반적인 귀빈석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황가의 구성원과 정부 수반인 시중이나 쓸 수 있는 곳으로 남을 것이다.
내부 규모도 꽤 컸다.
여섯 명씩 다섯 줄, 아마 서른 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중 맨 앞열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두 좌석은 금과 옥, 그리고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좌석이었으며 주변의 다른 좌석들 또한 다른 일반석에 비해 훨씬 고급스러웠다.
해건과 헬레나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다가가자, 진작부터 사방의 칸막이석에 위치한 대소신료들이 전부 기립하더니 예를 올렸다.
손바닥을 들어 그들의 인사에 화답해주는 해건 대신 옆에 서 있던 태자 해선이 궁금한 듯 입을 가리고 상민에게 슬쩍 물었다.
“공연 자체는 부상들이 자리한 저곳이 이곳보다 더 잘 보이지 않겠습니까?”
뭐가 그리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지 제각기 칸막이석에 들어가 있는 관료들 대신, 부유한 상인들은 1층에 대부분 모여 편하게 관람을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무대와의 거리는 가깝지만 무대 자체의 높이도 있으니 이 층에서 보시는 것이 무대에 선 공연자들을 관찰하기에 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순수한 궁금증이었지 딱히 불만의 질문은 아니었나 보다.
게다가 아들의 질문을 들었는지 헬레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어미는 이곳이 좋구나.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어머니.”
해건과 헬레나가 용상에 자리하자, 상민이 해건의 왼쪽에, 태자 부부가 중전의 오른쪽에 앉았다.
태자비 나디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조금 생각하는 듯하더니 히잡의 대용인지 지금까지도 쓰고 있던 몽수를 슬그머니 벗었다.
짙은 색의 눈썹과 큰 눈이 인상적인 검은 머리의 이국적인 미녀가 불안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선이 그녀를 보고 웃으며 안심시키려는 듯 뭐라 귓속말을 하는 것이 보였다.
“극장이 성심에 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들다마다요, 참으로 좋습니다.”
권력을 이양한 황제.
자기 자신의 핏줄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은 어찌 보면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과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엘프와 드워프, 오크가 나오는 유명한 판타지 영화에서 등장하는 반지와 싸우는 난쟁이마냥.
이 시대, 고려만큼 재상에 전 군주권을 이양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동기는 오직 상민의 특수성에 달려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지구의 다른 나라들은 전부 군주의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에 비해 고려의 황제는 항상 공허함에 떨어야만 할 것이다.
권력 앞에서는 아들도, 아버지도 없었으니까.
해윤, 해광, 해건.
세 명의 후손 황제들이 어릴 적부터, 클 적까지 뒷바라지해 온 상민은 이들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을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 없이 지내야 한다니.
힘들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동일위계 능력주의 상속이니만큼 개개인의 자질과 인성은 나름대로 항상 괜찮았고, 이미 수십 년이 흘러 재상중심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황에서 다시금 절대황정으로 돌아가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대접받는다는 것을 항상 주지시켜야만 했다.
남북려를 아우르는 연방제국은 그로부터 기원한 황가의 혈통으로 유지되고 있는 거대한 체제니 황제의 정신적 만족감은 중요사항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해건은 상민이 무척이나 신경 쓴 임페리얼 박스에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동안 주변을 둘러본 해건이 무언가 발견했는지 피식 웃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근위대장마저도 멀찍이 떨어진 부분에서 경호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하게 말했다.
“현 고려의 정치구도가 딱 드러나는군요.”
부유한 상인들이 있는 1층의 구조는 딱히 관련이 없었다.
다만 황실석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에 모인 사람들의 성향이 비슷했다.
우측의 칸막이석들은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관료들과 의원들이 자리했고, 좌측의 칸막이석들은 반대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관료와 의원들이 있었다.
‘좌와 우의 개념인가.’
상민도 그 광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나중에는 세계사 교과서에 서술되기를, 좌우 개념의 기원이 창양에 설립된 예술의 전당의 좌석 배치에서 유래했다 할지도.
해건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교당(鮫黨)이 조금 타격을 입었겠지요.”
상민 또한 동의했다.
“연관되어 파직된 자가 적지 않았으니….”
토마스 제퍼슨이 썼다는 전통적 정치 개념의 매파와 비둘기파처럼, 고려의 보수파는 대외정책에 대한 강경한 성격을 해양생물에 빗대 교당(鮫黨, 상어당)이라 칭했고 고려의 진보파는 대외정책에 대한 타협적인 성격으로 경당(鯨黨, 고래당)이라 불렸다.
바다를 사랑하는 민족답다.
사실 정당정치의 태동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
상민은 이런 종류의 정치적 움직임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감정을 담아 지켜보고 있었지.
‘필연적이며, 건전한 과정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정치가 다원화되면서 중서성 의원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것에 제각기 한계를 느꼈다.
따라서 정치적 중립성을 못 박아둔 군부를 제외한 의원들과 관료들은 서로의 정치적 견해를 수렴하여 하나의 거시적인 입장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정치 스펙트럼상 우파로 분류될 교당은 대체로 증학(경험주의)에서 기원하였다고 볼 수 있겠고, 반대로 좌파로 분류될 경당은 합학(합리주의)에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겠지.
이들은 황제가 임명하는 시중의 아래에서 상서령과 중서령을 대표로 한 권력을 얻는 것이 최종의 목적이었으며, 그것을 위해 정쟁을 거듭했다.
정쟁이라고 항상 소모적이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변증법과 같은 유명한 철학 논리처럼, 반대의 논리는 합의를 이끌어내고 사회의 발전을 촉진하니까.
정체되어 있는 호수의 정치구조가 더욱 위험한 것이었지, 끊임없이 파도가 일어나는 바다의 물은 썩지 않았다.
어찌 보면 조선의 붕당이랑 비교할 수도 있겠다.
지금 존재하는지는 몰랐지만.
상민이 조선을 그렇게 좋게 바라보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초기 조선의 붕당정치는 전 세계에서 아주 온건한 정치구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의 보복을 유도하여 공포정치를 펼쳤던 숙종의 환국 이후에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변질되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조선에서 성리학으로 이러쿵저러쿵 입 논쟁을 벌일 때, 잉글랜드 의회에선 칼부림을 벌였을 정도였으니까.
상민은 숙종마냥 극단적인 환국을 유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최근의 일도 그 죄질에 비해 상당히 양호하게 처결되었고, 연루된 의원도 교당 중에서도 극단으로 치달았던 무리들인 터라(교당의 온건파들은 이들을 일컬어 선민당이라 따로 불렀으며 엮이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지운학과 몇 명의 의원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없었다.
게다가 상민의 중도성과 더불어, 조선의 붕당과 고려의 정당은 근본 자체가 달랐다.
오직 유학을 파고든 사대부만을 대변하는 조선의 붕당과 지방의 민의를 대변하는 고려의 정당을 비교하는 것은 고려의 정당에게 죄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어설픈 왕권을 이용해 왕좌에 대한 역모니 뭐니, 극단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조선에 비해, 고려는 사실상 황제의 실권은 없었고 시중이 모든 일을 총괄했다.
지금의 의원들과 관료들만 해도 차기 황제가 누가 될 것이냐에 대해선 그렇게 대단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상관이자 염원의 대상인 시중직이면 모를까.
거의 이백 하고도 오십 년이 넘게 묵은 능구렁이인 상민은 자신에 대한 정치적 모략을 분쇄할 충분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저 벌벌 떨고 있는 관료들과 의원들의 눈에는, 아마 자신이 빨리 늙어 죽길 원하는 마음가짐이 한껏 들어있겠지만, 미안하게도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다.
만약 자신이 때가 되어 물러나면?
그렇다면 정치적 공세는 실권자인 차기 시중에 쏠릴 테고 황제를 공격했다는 역모 논리 또한 존재하지 않을 테니 극단화될 가능성도 별로 없겠지.
둘은 계속 쑥덕거렸다.
무대의 준비는 이미 완료된 지 오래, 주변의 조명들도 무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둠 속에 잠겼다.
곧 있으면 공연이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헬레나가 해건을 향해 말했다.
“황상, 밖에 나가서 떠들면 안 되나요?”
구겨진 아내의 얼굴을 흠칫하며 바라본 해건이 금방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소이다 중전.”
상민은 쓴웃음을 지으며 해건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가려 했다.
― 탁.
“앗… 폐하를 뵙습니다.”
문을 엶과 동시에 안에서 금발의 여자가 툭 튀어나왔고, 상민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겼다.
상민은 바로 그 신분을 알아차렸는지 딱히 그녀를 내쫓지 않고, 안은 채로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고생이 많았소.”
“…고마워요.”
무대 준비와 진행 상황을 끝까지 확인했던 터라 지금 막 올라올 수 있었던 루크레치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자신을 안아 준 존재가 그녀의 남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생긋 웃어 보였다.
응접실로 향하는 남편과 황제, 그리고 황제에 의해서 얼떨결에 질질 끌려나가는 황태자 대신 황실석에 들어온 루크레치아가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중전과 태자비, 그리고 자신이라.
아주 어색한 조합이다.
루크레치아는 중전과 태자비에게 예를 갖추고는 약간 거리를 띄워 앉았다.
황후가 지금은 사교모임에 초대할 정도로 자신을 예뻐하지만, 처음에는 약간 쌀쌀맞게 대했다는 것은 아직도 마음에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늙은 중년의 중전을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다.
팔레올로고스의 명성은 그녀 자신이 잘 알았다.
진정한 로마의 후계자.
아무리 보르지아가 권력을 잡더라도 정당성은 그녀에게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는 정당성은 오직 과거에만 머무르니.
실제적인 권력을 쥔 보르지아가 새로운 로마의 주인이겠지.
헬레나가 시선을 느꼈는지, 나직하게 말했다.
혼잣말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국부인(國夫人, 1품 이상 관원의 처 혹은 어머니)께서는 조금 가까이 오시지요.”
“네, 전하.”
루크레치아는 살짝 놀랐지만, 이내 몸을 일으켰다.
“태자비도.”
“알겠사옵니다.”
나디아와 루크레치아는 그녀의 바로 옆에 다가가 앉았다.
비워진 용상에는 앉을 수 없어 루크레치아는 한 좌석 건너편에 있었으나 아까보다는 훨씬 가까웠다.
중전이 손을 뻗어 그녀들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우리들의 출신은 각기 다르지요. 국부인께서는 교황령에서 오셨고, 태자비는 마라케시에서 왔으니.”
“…….”
“허나 알아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들이 제각기 지닌 과거와는 별개로, 우리들은 이제 오직 한 가문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을요.”
나디아와 루크레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모습을 본 헬레나가 온화하게 웃었다.
특히나 그녀는 나디아의 손을 어루만졌다.
“경계하거나 걱정할 필요 없어요. 과거를 바다에 던져두고 온 이상, 이 사람은 힘이 닿는 곳까지 국부인과 태자비를 지지하고 응원할 것이니.”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의 술탄에 의해 멸망했다.
그때의 그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어찌 잊겠는가.
그라나다는, 이베리아의 레콩키스타에 의해 멸망했다.
그때의 그 처참한 심정을 어찌 잊겠는가.
그러나 헬레나는 나디아에게 말했다.
그것은 오직 과거.
지금 우리는 이제 고려 황실의 여인이라고.
둘 모두 고려에 의해 은혜를 받은 입장이니, 앞으로도 그 은혜를 갚아가자고.
나디아가 이윽고 한층 평온해진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녀들은 은은히 피어오르는 제충국 추출물 향기를 맡으며 본격적인 연극을 관람했다.
[작가의 말]
분량상 두 편 같은 한 편입니다. ㅎㅎ;
이번 주말에도 올리려 노력해 보겠습니다.
일요일날 산책하다 넘어져 무릎이 죄다 까졌고 허리가 살짝 다쳤습니다.
까져서 피나는 거야 뭐 아프긴 하지만 괜찮은데 허리가 삐끗하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네요.
오늘까지도 좀 그래서 침대에 누워서 타이핑 할 수 있는 눕서대?를 주문했습니다.
만족스러울지는 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청명각의 임페리얼 박스를 떠올리시려면 마드리드 왕립극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그리고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중에서도 구조 자체는 마린스키 극장의 로열 박스석과 제일 흡사할 듯합니다.
ps. 독자분들께 드리는 부탁.
이제 소설도 근대가 밝아오면서 정치를 다루기 시작해야 하는 만큼,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만큼의 정치적 서술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제 성향상 최대한 중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만, 어떤 입장에 너무 과다하게 몰입해주시지 않길 부탁드립니다.
댓글로 건전한 토론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다른 독자분들의 의견을 너무 공격하시는 것이나… 뭐 그런 것들 말이죠.
고려의 정당을 생각하실 때는 현 대한민국의 특정한 정당이 아니라 영국의 토리당과 휘그당을 떠올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