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와 해학, 관용(6)
황성 내, 근위병력의 연병장에는 거의 백 명에 달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당에 앉아 있었다.
평상시라면 이곳은 비번인 근위대의 체력 단련이나 혹은 사열을 받는 장소로 쓰이겠지만, 오늘은 그 용도가 사뭇 달랐다.
이곳을 뛰어야 할 근위대들은 전부 흉흉한 기색을 한 채, 도검과 총을 들고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주변과는 어울리지 않는 죄수용 흰 면복을 입은 자들이 전부 나무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부나방 같은 이들은 항상 있었지만 이번의 일은 여타 다른 난(亂)과는 조금 달랐다.
그 안에는 역시나 추악한 개인의 욕망이 있을지라도 과정을 보면 단순한 중세 봉건적 권력다툼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생각 혹은 이념(理念)을 이용한 근대적 정쟁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 맞았다.
정치와 민심의 흐름 또한 이제 근대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근위대가 묻는 말에, 상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당 중 하나의 자백을 받았으니 그에 걸맞는 처결을 내려야지. 이들은 백성들을 겁박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 중서성의 의원에 대한 암살 모략을 꾸몄으며, 또한 감히 종통을 모욕하는 말을 공공연하게 했으니 이 죄는 오로지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할 것이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근위대원들이 의자에서 선민당원들을 떼어냈다.
어찌나 모진 고문을 받았는지, 죄다 하체의 힘이 완전히 풀려 제 스스로 일어나지 못했다.
일부는 부축해 세우자 피가 섞인 대소변을 뿌려대는 인간도 있었다.
지금은 추한 꼴을 보이고 있지만, 죽음 자체는 깔끔할 것이다.
상민은 잔혹한 것에 익숙했지만 그것을 좋아하진 않았다.
마치 축제마냥 즐기던 화려한 거열형과 참수, 그리고 기타 수많은 피가 흐르는 처형 방법들을 딱히 권장하지도 않았다.
발전하는 사회상을 보면 극형 자체는 조금은 미개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고.
그래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처형은 간결한 교수형이었다.
사실 시신이 훼손되면 합법적으로 해부를 할 어린 의학 꿈나무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적어져서 그렇게 하긴 했지만.
박도상이라는 희대의 미치광이 과학자 또한 지금까지 그대로의 운명을 맞겠지.
고려 이곳저곳에서 끔찍한 일을 저지른 그 역시 사후에도 그 죄를 갚아나가야 할 것이었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떠나갈 것이다
선민당의 수뇌부급 인사들과 우두머리, 안정균 또한.
한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죄수들이 끌려나가고, 근위대가 연병장의 형틀을 치우는 광경이 보였다.
어떤 병사 하나가 형틀에 묻은 대소변을 치우며 나지막하게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과 몇 분 만에, 연병장은 다시금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마냥 그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저 땅이야 금방 치울 수 있지만 사건의 흔적 자체를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난과는 달리 이번 난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연관되어 있었기에 이날의 상황은 역사에 적힐 것이고, 후대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사건이 될 것이었다.
상민은 문득 다른 생각이 났다.
‘이제는 나의, 그리고 가면의 시대도 끝이 다가오는구나.’
물론 이런 생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꽤 먼 과거부터 그는 스스로의 정치에 대해 출구전략을 생각하고 있었다.
중서성의 의회화는 물론 중서령의 선출직화도 그가 의도한 것이었으니까.
‘거의’ 완벽한 전제정치를 할 수 있음에도, 그가 양보했던 것인데 일부 멍청한 자들은 그 호의를 다른 의미로 해석하곤 하지.
씁쓸하긴 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완벽한 전제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마저도.
그리고 불멸자인 자신이기에 더욱더 그렇게 생각했다.
제국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자신이라는 보모는 아이가 성장하여 성년이 되면 뒤로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그가 보기에 이 아이는 이제 청소년기에 들어갔고 몇십 년만 지나면 성인이 될 나이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다.’
이 청소년의 사춘기가 끝날 때까진 부모는 아직 그 옆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어깨와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차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느껴지는 무게를 애써 버티며 다시금 국문장에 시선을 돌렸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람에게로.
“당하께선… 이… 사람을… 죽이지 않을… 생각이시오?”
모진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중년인, 지운학의 메마른 입에서 희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신을 통해 자백을 얻어 낸 당사자인 그는 여전히 연병장 맨 앞에 남아있었다.
“그대의 자백 덕분에 선민당원을 전부 뿌리 뽑을 수 있게 되었잖은가?”
“…하… 굳이… 소신의 자백은… 필요…….”
― 컥, 크흑
그가 핏덩이를 왈칵 뱉었다.
“없으셨을 터인데….”
사실 고문도 필요 없긴 했다.
이 시대, 그의 경쟁자들은 건국 초부터 만들어진 은밀한 정보총국의 역량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 존재 자체도 극비 중 극비로 여겨지는 상민의 직속 여의국은 더욱더.
행동을 조심한다고 했겠지만, 운학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저택에 심어진 여의국의 정보원들의 신원을 단 한 명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상민은 병사 하나에게 그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주라 일렀다.
타는듯한 갈증을 해결한 운학이 다소 또렷해진 발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굳이 소신이 그 자백을 했다 하신 것은 대체 무슨 연유이신 겁니까.”
고문은, 정신력이 강한 자들 또한 입을 열게 만든다지만 운학은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굳이 그의 자백을 얻어내는 구차한 일은 필요가 없긴 했다.
한 번에 잡아 올릴 그물을 넓게 펼치고 있는 도중, 운학의 딸이 스스로 아비를 경찰청에 밀고해버리는 바람에 선민당원의 일부는 음지로 숨어버렸지만 그들은 이제 역모의 주체자로 몰려 영원히 양지로 나올 수 없을 것이었다.
황실에 대한 모욕을 했다 선전했으니 일반 사람들도 그들을 괴물 보듯 쳐다볼 것이고.
더군다나 지운학은 선민당원과 그 패거리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역모의 주체였다.
깔끔하게 죽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상민은 어떠한 정보도 얻어내지 못했음에도 굳이 그의 자백을 받아내었다 공표했다.
정치적으로 거세된 운학은 이제, 선민당원의 후원자에서 그들을 배신한 배반자로 낙인찍히기까지 했다.
운학은 이 모든 움직임이 자신을 살려두기 위한 포석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굳이?
운학은 상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와 그의 아내 사이에 오간 대화를 알 수 없었으니 더욱더.
그러나 상민은 비단 루크레치아의 부탁과는 별개로 그를 살려둬야 하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상민은 조금 착잡한 얼굴로 운학을 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항상 말해왔었지. 나는 다르다, 나는 더 낫다. 나만이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흐….”
운학은 구구절절한 해명 대신 실소를 터트렸다.
“허나, 운학아, 이놈아. 네가 정말 달랐다면, 내 어찌 너를 중히 쓰지 않았겠느냐?”
운학이 이놈아. 너의 6대조 봉정이는 정말 영특한 아이였다. 너의 5대조 송경이도 충성스럽고 똑똑한 아이였지.
내 손에 그 아이들이 남긴 후손의 피를 묻혀야겠느냐?
“값싼 동정심으로 소신을 살리신 게라면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운학은 상민을 노려보며 말했다.
“역대 시중들께선 전부 이런 일에 대해선 강경하게 대응하셨지요. 시중께서 일을 제대로 끝내기 위해선, 이 사람 또한 목을 매달아야 합니다.”
상민 또한 부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해건은 그에게 말했었다.
그 또한 중서성 의원이니, 사형은 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중서성 의원을 겨냥한 음모는 역모에 준할 정도로 중대한 사항이었지만, 황실과 국가수반을 겨냥한 역모(逆謀) 자체는 아니었다.
― 소손은 후대의 의원들이 이 일을 선례 삼아 누명을 씌워 서로의 목숨을 빼앗을까 경계심이 드옵니다. 그의 목숨은 빼앗지 마소서.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해건은 상민이 이제 서서히 시중의 권력을 분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건은 이번 일의 처리에 대해선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고, 오히려 상민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해건은 상민 이후 고려의 전권을 쥐게 될 시중들에 의한 정치적 숙청의 가능성 또한 경계해야 했다.
중서성 의원들은 필수적인 권리를 보장받아야 했다.
과거의 상민이 아무리 국회의원들의 특권을 좋지 않게 여겼어도 그들이 만약 그러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면 그나마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동남아나 남미(남려가 아닌)의 독재국가가 되었을 테니까.
사형과 무기징역을 비롯한 다른 형벌들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 그리하겠습니다.
그래서 상민 또한 확실하게 대답했다.
꽤나 온건하게 처결된 이번 선민당원의 난은 붙잡힌 수만 거의 이천에 달하는 선민당원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수뇌부 백여 명만 죽었을 뿐, 많은 피가 흐르진 않았다.
대부분은 전부 이 시대 최악의 기피직업인 배의 최하급 선원이 되어 바다에 나가 혹사당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놈 또한.
운학의 질문에는 대답을 해줘야겠지.
“네가 가야만 하는 곳이 있다.”
문화고 나발이고.
상민은 우생학의 마지막 잔재를 끊어버리기 위한 최고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네가 생각하는 가장 고귀해야 하는 나라로 보내주겠다. 그곳을 가 직접 네 눈으로 똑똑히 관찰하거라. 우등한 고려인이라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개소리인지.”
태평양의 지도는 이제 꽤 많이 파악된 지 오래.
그동안은 경제적 여건 때문에라도 세계 일주 이후 그곳을 다시 횡단하려는 마음을 가지진 않았겠지만.
지금은 굳이 그 경제적 여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들을 보낼 이유가 생겼다.
겸사겸사 앞으로 중요하게 작용할 마닐라 항로를 개척하기도 하고 말이야.
“조선으로 가라. 그곳에 가면 아둔한 너 또한 깨닫는 바가 있겠지.”
상민은 그답지 않게 약간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다.
이 시대, 상민이라는 불세출의 지도자를 얻지 못했고 심지어 이도라는 위대한 인물마저도 보냈던 조선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지는 명백했다.
이도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이방원 또한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던 것 같았다.
고려, 그리고 조선인들이 요동에 가지는 열망은 대단했으니까.
그러나 상민은 심양이라는 실로 조그마한 땅덩어리보다는 이도가 구축했던 언어적, 그리고 과학적 업적이 훨씬 더 대단하다 생각했다.
그 땅, 현 고려의 일개 군만 못하다.
게다가 이도가 없는 조선이라?
글쎄.
* * *
어마어마한 피바람에 도성에 불었다.
이번 선민당원의 난에 알게 모르게 연관된 사람은 엄청나게 많았다.
백여 명이 처형당했으며, 이천 명의 사람들은 모두 끌려가 강제로 배에서 노역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다행스럽게도 연루자의 규모에 비해 생각보다 피가 많이 흐르지 않아, 사람들의 심적인 동요는 적었다.
그래도 도성이 뒤숭숭한 상황, 상민은 이 분위기를 수습하고 또한 의도했던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청명각의 완공을 서둘렀다.
개천 226년, 소소한 집치레(인테리어)를 제외한 청명각의 건축이 끝났다.
조보와 각종 매체들로 그 전부터 선전을 했던 덕에 226년 12월 15일의 저녁은 거리에 오가는 마차들로 붐볐다.
그리고 그 붐비는 마차들의 종착지는 대부분 예술의 전당이었다.
마차 주차장에서 고관들이 모여 삼삼오오 도성과 정치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다른 한 곳에서는 그들과 대동하여 이 자리에 온 부인들도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교적 사상으로 여성들의 대외활동이 상당히 제약되었던 반도와는 달리, 현 고려는 여성들의 사교적 역할 또한 중요했다.
이들은 제각기 정구 모임이나, 다과회 등의 사교적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남편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어울리는 부인의 모임이 달라졌으나, 반대로 어울리는 부인의 모임에 따라 남편의 정치적 입장이 바뀌는 경우도 드물진 않았다.
오늘, 이 부인들의 기분은 그다지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이렇게 중요한 자리는 필연적으로 그녀들의 가문이 가진 권력과 부를 자랑하는 자리가 되었고, 상당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았으니까.
옷과 장신구과 같은 사치품들.
고려는 오히려 고위층의 소비를 촉진시키면 모를까, 근검절약의 정신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이 나라는 전혀 가난한 국가가 아니었고 사치품을 통해서라도 경제의 흐름은 계속 유지되어야 했다.
그리고 사치품은 필연적으로 기술의 상승을 불러오기 마련이니까.
제각기 몸에 단 장신구와 의복을 은근히 비교하며 입에 발린 칭찬을 하고 있던 여인들은 이윽고 서로 간의 정탐이 끝났는지 무언의 합의를 이루고 주제를 바꾸었다.
하루아침에 몰락한 지씨 가문의 상황은 이미 하도 많이 떠들어서 지겹다.
그럴 바엔 오늘의 이야기를 하자는 생각이 여인들의 머리에 떠오른 모양이다.
“오늘 관람할 것이 뭐라고 했지요?”
“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놀이패들이 하는 놀음과 비슷하다고 들었어요.”
아직 여인들은 공연의 내용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흥. 그런 경박한 놀음이 뭐 이렇게 중요하다고 닦달이었는지?”
“부군께서도 그러셨나요? 우리 그이도 오늘 아침부터 마차를 미리 준비해 놔라, 뭘 해라 얼마나 야단법석이었는지 몰라요.”
한동안 부인들은 남편에 대한 뒷담에 열을 올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오늘 무조건 예술의 전당에 가야 한다고 말했었다.
역모의 피바람이 한바탕 불어온 도성, 시중이 주최한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간 큰 위인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정치라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부인들은 남편들의 호들갑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오늘 볼 공연의 내용이 실망스럽다면, 남편들은 한동안 침대에서 상당한 괴로움을 겪어야만 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