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08화 (208/653)

풍자와 해학, 관용(5)

그동안 루크레치아와 상민은 오래도록 토론했었다.

그들 부부는 탈춤에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상민은 아무래도 근본 자체가 그렇다 보니, 옛날부터 전래해 내려오던 문화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고.

루크레치아는 그와의 사이를 진전시켜주는 계기가 되었으니 더욱더.

그러나 둘 모두 탈춤 같은 현 고려의 조희류 놀이가 가진 구조적 한계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무대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곧 단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비단 조희류뿐만 아니라 현재 고려의 놀이패가 가진 성격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에, 대충 설비를 갖추기만 하면 된다.

그 이후 돌아다니는 관중들을 불러모으면 되고.

이렇게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이니 심지어 관람객들 중 대다수는 돈을 내지 않고 보는 자들이 많았다.

즐긴 사람들이 동전을 내밀지만, 즐기지 않은 사람은 휙 돌아서 가버리면 그만.

그리고 즐겼더라도, 돈을 내고 싶지 않은 얌체도 있었고.

상민의 기준에선 이는 썩 좋지 못했다.

물론 길거리 공연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었지만, 예술이 제대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활동할 ‘무대’가 따로 필요했다.

원 역사에서도 한국은 구한 말까지, 극장이라는 것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였다.

이유는 그도 몰랐다. 국가의 살림살이가 그렇게 가난했던 것인지 아니면 대단하신 유교적 사상 덕분인지.

덕분에 공연예술은 어느 정도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마당에 무슨 예술성을 따지겠는가?

그리고 흙바닥에서 어떤 재미있고 대단한 무대장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런 무대의 제약뿐만 아니라, 전승의 제약도 있었다.

명확한 대본이 아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까닭에 같은 놀이패가 선보이는 탈춤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즉흥연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실수를 할 여지가 많아지는 것이지.

무대의 전달력이 떨어지기도 했다.

장르의 제약도 있었다.

다시 탈춤을 예로 들어보면, 여러 짧은 마당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어떤 큰 서사적 줄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편의 일화들은 재미있었지만 긴 흐름을 가지는 극에 비해서는 서사성이 낮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놀이패는 너무나도 관객들과 친밀했다.

이는 탈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즉흥연극, 콤메디아에서도 관찰되는 현상.

제4의 벽, 그 존재 자체가 인지되지도 않는 불분명한 시대이니만큼 공연자와 관객의 경계선은 얇디얇았다.

물론 관객과의 호흡 역시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녔지만, 긴 서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나친 관객의 개입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상민이 원하는 것은.

전문적인 배우가 일정한 형식의 대본을 숙달하여 제대로 된 무대에서 긴 서사의 흐름을 선보이는 그런 무대.

상민이 원하는 가치관을 녹여낼 수 있는 그런 예술작품.

마치 예술연극, 뮤지컬 혹은 오페라 같은.

노래의 유무는 상관없었다.

장르야 세분화하여 전부 다 후원하면 되는 일이니까.

예종(睿宗) 해광이 꽃피운 고려의 음악은 해광의 붕어 이후에도 더욱 발전하고 있었다.

개량되고 있는 건반을 비롯한 여러 악기들은, 오페라나 뮤지컬에도 충분히 쓰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상민이 원하는 이런 수준 높은 무대는 필연적인 운명을 가졌다.

비싸고 고급지다는 것.

물론 상민은 자신이 지은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공연은 수익성을 따지지 않을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자선단체마냥 어중이떠중이들을 모두 들여보낸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리고 예술의 전당이 자리 잡은 이후에 퍼져나갈 사설 극장에서는 더욱 이런 풍조가 강화되겠지.

그러나 딱히 상관은 없었다.

상민은 창수놀이패가 선보이는 탈춤이 민중으로부터 꽤 괜찮은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을 보고받으며 생각했다.

이 나라를 이루는 대다수의 백성들, 농부들은 아직 그렇게까지 우생학에 빠져 있지 않았구나라고.

그들의 혈통 또한 우생학적으로 저급하다 판명될 수 있어서 그럴까.

하지만 상민은 한 가지는 확신했다.

그가 이백여 년간 피땀 흘리며 만든 고려라는 국가는 적어도 일반 백성들이 심각하게 굶주리고 착취되는 중세 봉건적 사회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어떤 북쪽의 돼지가 입에 달고 다녔다는 고깃국에 이밥을 먹을 수 있는 인민들의 생활 수준은 그보다 사백 년 전인 현 고려에서도 충분히 가능했다.

시대적 격차만큼이나 자연적 환경의 격차가 좀… 많이 있긴 했지만, 둘을 서로 상쇄하고 그냥 지도자 차이라고 하자.

배부르고 등 따숩게 살아가는 백성들은 굳이 증오와 차별이라는 논리를 받아들이며 머리에서 김을 내뿜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상민이 후원하는 무대가 노려야 할 사회적 계층은 자명했다.

발전하는 상업과, 태동하는 공업의 시대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할 자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사회의 중간 이상의 계급들, 즉 부르주아지라고 불리울 수 있는 계급들.

사실 유럽의 모든 군주가 부러워하는 지금의 고려에는 봉토를 가진 세습적이고 건방지며 국가 안위에 하등 쓸모가 없는 귀족이라는 존재가 없었다.

북려대륙의 군왕 가문을 예외로 하면.

삼별초 이전의 전조 고려 때부터 존재했던 상류층을 통칭하는 양반의 개념은 계속 이어지긴 했지만 면세나, 특혜, 지위, 봉토에 관한 편의는 아예 없었다.

관리가 문제를 일으켜 파직당하면, 그자는 일반 서민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

어쩌면 상업에 종사하는 이런 중인들이야말로 양반들보다 더욱더 항구적인 권력(돈)을 손에 쥐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예술의 전당같이 제대로 된 설비에서 하는 공연은, 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길거리 공연보다 더 위에 있는 사회적 계층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중상류층 사람들은 그동안 그들이 소비할 만한 고급스러운 문화에 목말라 있었으니 상민이 선도하는 문화에 영향을 받을 것이었고.

문제는 작품이다.

상민은 지난 삶에선 조금 빡빡한 인생을 살아왔던 터라 예술에 일가견이 있다고는 빈말로도 말하기 어려웠다.

완전히 담을 쌓고 오진 않았지만, 알고 있었던 지식도 남들이 다 알 법한 상식을 아는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관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공연을 기획하고 장면을 연출하고 노래를 선곡하는 등의 일은 상민이 할 수 있는 범주를 넘었을 것이다.

가뜩이나 시중의 엄청난 업무를 소화해야 하는 마당에.

그는 아내 루크레치아에게 전권을 위임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다행스럽게도 루크레치아는 예술에 대한 재능뿐만 아니라, 적성 또한 딱 그쪽과 알맞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무대를 준비하는 일이 무척이나 재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알아차린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달랐다.

루크레치아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을 바라보는 나이.

공연을 본 경험만 있었지, 다른 사회적 경험은 거의 없었다.

루크레치아는 자신의 곁에 이에 관한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전권을 위임받은 후 곧바로 창수놀이패를 불렀다.

특히나 그 탈놀이 공연을 기획했다던 꼭두의 딸, 하정을.

아버지 하종길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싶어 했던 하정 또한 이 일이 상당한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본래 조희는 애초부터 풍자를 이용한 놀이였고 아버지는 딸의 사회비판적 태도가 부담스러워 억제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터라 부녀관계는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독립할 나날을 꿈꾸고 있던 하정은 이번 줄을 꽉 잡기로 결정했다.

이 줄은 썩은 동아줄도 아니요, 퀘퀘한 냄새가 나는 밧줄도 아니었다.

제아무리 그녀의 풍자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관객들은 허튼짓을 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루크레치아와 하정은 곧 서로의 신분을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예당(藝堂, 예술의 전당의 줄임말)의 청명각은 곧 있으면 완공이다

상민은 최대한 빠르게 문화예술을 이용해 민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길 원했다.

덕분에 자원이 집중되는 예술의 전당,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극을 위한 청명각은 제일 높은 우선순위를 할당받아 다른 부속 건물들이 착공을 안 한 와중에도 가장 먼저 완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루크레치아의 방은 완전히 어질러져 있었다.

그 옆에서 방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퀭한 눈을 하고 있던 하정은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다.

상민은 그녀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다.

되도록 현시대의 세태를 반영한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지금 민간을 요란하게 하는 우생학적 논리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루크레치아가 처음 주문을 들었을 때, 그녀는 바로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녀와 상민처럼 인종도, 생김새도 다른 남녀 간의 사랑을 이용하자.

그녀 자신이 소위 말하는 열등한 유럽인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생각일지도 몰랐다.

상민 또한 그녀에게 그가 알고 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주 위대한 극작가에 의해 아직 쓰여지지도 않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의 줄거리를 알려주었다.

* * *

재능과 영감 덕분에 루크레치아는 금방 대략적인 줄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원본은 어딘가 조금 부족해 보였다.

“네가 보기엔 줄거리가 어때?”

하정은 루크레치아가 건넨 대본의 줄거리를 훑었다.

“재미가 있긴 한데….”

“한데?”

그녀가 쓴 것은 고려인 청년과 유럽인 처녀의 애틋한 사랑이 담긴 전형적인 이야기였다.

하정은 루크레치아의 표정을 보더니, 입을 계속 놀렸다.

하정은 말을 돌리는 것에 재주가 없었고 상당히 직설적인 여자였다.

“극에 긴박감이 없어요. 그냥 남녀가 나와 서로 사랑을 찬미하는 장면만 있는데 이 극에서 무슨 서사를 찾겠어요?”

“위기… 위기라….”

루크레치아는 종이 하나를 꺼내 슥슥 필기해 나갔다.

근데 무슨 위기를 넣지?

이탈리아같이 시뇨리아 가문들에 얽힌 이야기?

그러나 고려의 시민들이 그런 남의 나라 이야기에 공감하고 흥미로워 할까?

그녀가 쓴 수정본 줄거리를 받아든 하정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루크레치아는 분명히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

지적한 사항을 수정한 것에 불과하더라도 새로운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순식간에 써 내려가다니.

그러나 이번엔 새롭게 추가된 문제점이 한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아까에 비해 분명히 흥미로워진 면은 있어요. 그런데 독살, 암살, 간통, 전쟁, 강간, 화형… 이런 것은 좀 덜어내는 것이 어떨까요?”

수정본에는 혼란한 이탈리아반도의 정국을 헤쳐나왔던 보르지아 가문의 여식이 쓴 적나라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정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대체 바다 건너편의 유럽인들은 어떤 삶을 영위하고 있는 걸까.

고려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음지에서는 이런저런 음모가 돌아다니겠지만 적어도 저 정도로 혼란하진 않았다.

루크레치아는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정돈했다.

“그럼 대충 고려의 유명한 가문들에 대입해서 다듬어 봐야겠어. 그 사람들에 대해 좀 알려줘.”

“저도 잘 몰라요. 그 높은 분들… 아니, 마님보다야 낮겠지만… 하여튼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저희로서도 자주 접하기 힘드니까요. 탈놀이에서 우스꽝스런 흉내를 내는 것과, 아예 이렇게 제대로 된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죠.”

루크레치아는 앞으로 고려의 사교 모임에도 꼬박꼬박 참석해야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이제는 내가 괜히 위축당할 필요가 없어. 누가 뭐래도 난 시중의 아내인걸.’

“다음으로 개선해야 할 사항을 지적해줘.”

“제가 생각하기에….”

“…….”

루크레치아의 꾸준한 노력으로 극의 줄거리는 점점 가다듬어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여전히 한 가지 문제점은 해결되지 못했다.

“이 극의 주인공을 뽑아야 해.”

그녀는 하정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하정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저는… 정말 밑바닥에서 자라온 인생인데요? 이런 상류층의 어법과 행동, 태도 등을 잘 지킬 자신이 없어요.”

하정과 그녀의 남편 유남은 이 시대 대부분의 놀이패들과 같이 길거리에서 자라온 인생이다.

입은 걸쭉했으며 태도는 상스러웠다.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과, 우아함을 연기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

하정은 진심으로 그녀의 첫 번째 극에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하정은 지금 임신한 상태였다.

* * *

영락없이 궁지에 몰린 루크레치아는 평소 활발하게 대화의 흐름을 주도하는 식사 자리에서조차 멍하니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상민의 몸을 휘감고 있는 진득한 혈향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을 고신하는 일을 직접 참관했던 상민은 괜스레 씁쓸하고 울적한 마음이 들어 있는 상태.

예전 같았으면 이런 감정은 혼자 삭이고 말겠지만 루크레치아가 보여주는 생기발랄함은 이럴 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아내가 보여주는 멍한 모습에 상민은 먼저 이유부터 물어보아야만 했다.

“예절교육을 받은 연기자를 구해야 한다고 하셨소?”

실로 장황한 그녀의 고민을 들은 상민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잔을 들었다.

“흠… 그래, 마침 하나 만들어 줄 수 있겠군.”

아직 처형하기 직전이니까.

어찌 말이 좀 이상하다.

의문을 가득 담은 연갈색 눈을 바라보던 상민이 피식 웃었다.

“뜻대로 풀리지 않은 일이 있었소. 조금 더 기다리고 나중에 한 번에 뽑아버리려고 했던 감자 줄기라 생각해도 되겠군. 그러나 성급한 아가씨 하나가 일을 그르쳤지.”

엄밀히 말하자면 그르친 것은 아니긴 했다.

상민은 계속 입을 열었다.

“그녀의 부친이 저지른… 아니 저지르려 했던 죄는 실로 엄중하오. 내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혈육이 직접 밀고를 했으니 사문화되고 있는 연좌제가 적용되진 않겠지만 그 부친은 거의 살아날 수 없을 것이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상민의 입에서 드디어 짙은 혈향을 느낀 루크레치아가 살짝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부친이 죽지 않는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더랬소.”

다소 천박하게 느껴지는 일이라도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런 악독한 범죄자를 죽이지 않는 것은 상민의 성미가 아니었지만, 솔직히 해결할 방법은 많았다.

고려의 땅은 넓고, 범죄자를 짱박아 둘 곳도 많았다.

상민은 운명적으로 다가온 여주인공, 그리고 그녀를 붙잡으면 자연스럽게 따라올 남주인공을 떠올렸다.

“무대에서 선보이기엔 참으로 어울릴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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