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07화 (207/653)

풍자와 해학, 관용(4)

담배.

북려와 남려 전역에 자생하는 이 식물은, 건국 초부터 시작된 근절운동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박멸되진 않았다.

아니 박멸되긴 했었다.

북려로 진출하기 전, 고려 조정은 내방에 있는 해악을 유도하는 마약성 식물들에 대한 삼엄한 정책을 펼쳤고, 대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죄악의 작물 중 가장 선두에 꼽히는 코카잎 또한 그 범주 아래 있었으니 농무부에서 연구 대상으로 기르는 조금의 분량을 제외하고는 주변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험지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면 찾기야 찾겠지만 적어도 양식으로 재배되는 분량은 거의,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수틀리면 의원이나 법관, 관리, 심지어 방계 황족의 목도 그 자리에서 쳐버릴 수 있다는 법무부(정보총국에서 법무부 산하로 이동되었다) 소속 마약단속국의 위세는 그토록 무지막지했으니까.

하지만 근절에 성공한 코카잎과는 달리 담뱃잎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남려가 아닌 북중려에서.

타완틴수유와 쿠스코, 그리고 태동산맥 등지에서 재배된 담배의 양은 솔직한 말로 이 대륙의 담배 생산량 중 정말 작은 비중을 차지했다.

중려대륙의 마야와 아즈텍, 그리고 북려대륙의 원주민들은 남려대륙의 원주민들보다 훨씬 더 많은 담배를 기르고 피워대고 있었으니까.

본래 고려에서는 담배의 소비와 생산 모두 불법이었다.

그러나 북려의 원주민 통합 과정에서, 이미 담배문화가 깊이 들어가 있었던 현지 샤먼들의 관습을 존중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소비 자체는 합법이 되었다.

내방의 신민들에게 역차별을 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고려 조정도 코카잎과 그 밖의 위험한 마약성 식물들을 단속하기도 버거운 크기의 땅덩어리에, 이미 기존에 널리 퍼져 있던 담뱃잎까지 단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판매 목적의 재배는 불법이었다.

땅을 황폐화시키는 식물 중에서도 악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담배란 것은, 주변의 땅을 오염시켜 다른 작물들의 생장에 방해가 되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고려 내방에서 생산될 수도 없었고 가뜩이나 노동 인건비도 비싼 환경에서 담배는 금값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시점 고려에 유통되는 담뱃잎은 퓨레페차나 틀락스칼라 같은 중려의 국가들이나 마야, 니카라오 자치령 등지에서 재배되는 것을 수입하는 것일 테다.

이렇게 비싼 담배를 굳이 돈을 주고 사서 피운다?

아무리 그래도 담배가 그 정도로 중독성 있진 않았다.

서민들이 피울 동기는 전혀 없었으니 오직 부유층 일부의 기호품일 뿐이었다.

그런 고로, 조정의 입장에선 큰 세금도 매기기 쉬웠고.

서민들이 잘 피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긴 했다.

국초부터 교육시킨 덕에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여러 지식들은 아직도 유효했다.

이제 사람들은 담배를 만병통치약은커녕 건강에 유해한 것이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애연가가 발기부전이 된다는 사실은 사내들의 경각심을 자극했다.

덕분에 담배 시장은 어느 순간부터 성장을 멈추고 고착화되어 있었다.

중려대륙의 담배 생산자들은 유럽 시장을 겨냥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고려는 더 이상 성장할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이제 남성성이 별로 쓸모가 없게 되었거나 나이가 많은 고위층은 담배를 피워대었다.

일반적인 백성들이 누릴 수 없는 그런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이유일지도 몰랐다.

담배의 형태는 대체로 곰방대(파이프)라 불리는 기구를 이용하는 방법과, 나뭇잎을 말아 싼 것을 피우는 방법 두 가지가 있었다.

천박한 북려 샤먼들이 쓰는 곰방대를 이용하기 싫었던 사람들은 고급스럽게 싼 담배를 직접 피우는 것을 선호했다.

두툼한 담배는 마야식으로 시가(Cikar)라 불리기도 했으며 독한 만큼 애호가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중년인, 지운학 또한 마찬가지.

그는 집을 떠나 모처로 온 뒤 한동안 담배를 뻑뻑 피워대었다.

그의 딸과 아내의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한동안 보이던 그는 이윽고 연기와 함께 말을 토해냈다.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방 안 가득 찬 독한 담배 연기가 그의 쓰린 속을 대변했다.

그의 앞에 서 있던 복면인이 어떠한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운학은 혀를 차며 담배를 담배가위로 잘라냈다.

“내, 중서령 선거 전까지 일을 끝내놓으려 했건만.”

운학은 다가오는 중서령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자 중 한 명.

일생일대의 기회를 맞은 인물이었다.

개천 200년을 맞아 시중은 중서령에 대한 선거권을 중서성 의원들에게 양도했다.

이후 이들은 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의장을 선출할 수 있었다.

개천 225년, 다섯 번의 임기가 흐른 지금은 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된 세 명의 중서령이 집권했었다.

뜻깊은 일이었다.

연임이 가능한 5년 임기의 중서령은 어찌 보면 시중이 직접 임명하는 집법령과 상서령보다 더욱더 의미가 있었으니까.

의원직 자체가 지방에서 직접 선출된다는 것을 보면, 중서령이야말로 진정한 민의(民意)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황실이 고귀하고, 시중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다.

민의의 대변자라는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실로 상징적.

분명히 시중직의 권한은 조금씩 분산되고 있었다.

정책을 입법함에 있어, 중서성의 여론을 수렴하는 단계는 이제 공식화되었다.

무소불위했던 어사대와 사헌대 또한 중서성 의원들에 의해 견제를 받았다.

그 정도를 넘어, 이제 중서성은 심지어 시중까지도 묘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중서령의 선출직화는 가면정치(假面政治)로 칭해지는 고려의 현재 정계 상황에 환멸을 느끼는 자들에겐 큰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까진 너무 권력이 편중되어 있었다.

정체를 잘 파악하기도 힘든 위대한 시중들의 역사는 지극히 찬란하고 찬란했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다.

그 정체가 단 한 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은 항상 의문을 품었다.

저들은 누구이며, 대체 어디서 왔는가.

방계 황족이라는 사람도 있었으며, 거대한 상인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시답잖은 소리로 도깨비와 같은 존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죽어서까지 영원히 대동양을 수호하신다는 유지를 남기신 태조께서 환생하셨다는 자들도 있었고.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문은 시중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다.

대체 그들 자신들은 왜 저 자리에 올라가지 못하는가?

바로 이것이지.

역대로 시중은 모두 최고의 권력자임과 동시에 최고의 부자였다.

저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그들도 마찬가지가 되지 않겠는가?

도달할 수 없는 권력의 최상층에 대한 욕망은 정치인들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종류의 욕망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부나방처럼 저 자리를 탐하려 했었지.

그러나 모두 날개가 타 죽어버렸다.

묘한 사고나 병으로 죽었다지만, 운학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도 아닌 태양의 빛 그 자체가 이들의 날개를 태웠다는 것을.

시중직을 탐낸 자들 중에는 능력이 출중한 자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운학이 보기엔 그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났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어차피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허나 나는 다르다.’

지운학은 그렇게 생각했다.

운학이 생각하기엔, 백성들은 멍청하고 어리석었다.

그들은 단순히 배가 부르고 등이 따듯하면 만족하는 돼지 같은 가축에 불과했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는 다르다.’

그러나, 이런 가축들도 차츰 시간이 변하면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낮아진 종이의 가격.

읽기 쉬운 언어와 보급된 활자 매체들.

조보와 책들, 논문들.

글도 못 쓸 정도의 무지렁이 백성들은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인에게 딱 맞는 고려글은 그토록 배우기 쉬웠다.

저기 태동산맥의 깊은 산골짜기에 살아가는 노인네조차도, 건국 초부터 이어진 교육의 혜택을 받아 손주에게 간단한 서신을 써서 보낼 수 있을 정도.

젊은이들 또한 이제 삼삼오오 모여 음담패설을 일삼다가도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을 입 밖으로 공공연하게 떠드는 그런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가축들은 여전히 어리석었지만, 이제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을 만큼은 똑똑해진 상황.

운학은 이 가축들의 꼬리에 불을 붙여 한 방향으로 맹렬하게 질주시키길 원했다.

그렇게 된다면, 견고한 저 나무 목책 또한 어쩌면 무너질 수도 있을 테니까.

그 불은, 우생학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불이 붙은 가축들은 선민당 놈들이지.

어떠한 이해관계가 아닌, 실제로 특정한 사상을 가지고 세뇌되어 있는 이들은 그의 패로 딱 알맞았다.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광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들은 고문과 협박에도 입을 열지 않을 만큼 열성적인 미친놈들이었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복면인의 말에, 운학은 한동안 장고에 빠졌다가 이윽고 씹어뱉듯 말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내게도 다음은 없다.”

오 년의 임기.

그리고 대체로 중서령은 한 번 임기를 무사히 마치면 연임되곤 한다.

십 년의 세월 후를 기약한다는 것은, 아무리 중서성의 실세 지운학이라 하더라도 큰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 내가 중서령에 선출되지 못한다면, 이 피에르 그놈은 우리에게 계속 정치적 공격을 해올 것이 분명하겠지.”

심지어 중도의 송흠덕이 중서령에 오른다 하더라도.

이 피에르가 그와 선민당원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어떤 종류의 심증은 분명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서성에 감도는 우생학적 논리와 정책을 지지하는 당의 수장이 바로 운학이었으니까.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운학은 책상을 두드렸다.

도성에서 무언가를 할 그런 여건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추밀원 휘하의 정보국과 어사대, 사헌대, 경찰청 전부가 그를 바라볼 텐데.

“이 피에르가 앙주로 가는 때를 노려라. 오직 바다만 그 사건의 증인이 될 수 있게.”

중서성 의원 또한 자신의 권역을 가끔 들러야 한다.

그는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앙주 출신, 중서령 선거와 동시에 치러지는 의원직 선거 전에 한 번은 자신의 권역을 돌아볼 것이 분명했다.

당선이 확실시되더라도.

“어디까지 가능합니까?”

복면인의 물음에 지운학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필요하다면, 죽여도 좋다. 다만 어떤 흔적도 남지 않게.”

“예.”

뒤로 몇 걸음 공손하게 물러난 복면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운학은 담배 대신 설탕을 잔뜩 넣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제국은 약해. 너무나도 유하고 약해빠졌어. 강자면 강자답게 이 세상을 발아래에 두고 호령해도 되는 것이야.”

운학은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미래의 고려가, 세계 제일의 패권국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이.

그리고 그가 역대로 재임했던 그 어떤 시중들보다도 더욱 업무를 잘할 수 있다는 자신이.

* * *

루크레치아의 인생은 창수놀이패를 관람한 그날 이후 완전하게 달라졌다.

일단 그녀는 상민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그는 예전이 무색하게 거리를 두지 않았다.

이젠 침실도 따로 쓰지도 않았다.

첫날밤 이후 완전히 끊겼던 육체적인 관계도 다시 시작되었다.

이 생활이 얼마나 좋았는지, 심지어 아침잠이 극도로 많은 그녀가 가끔 먼저 일어나 옷을 입는 남편의 나체를 실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몰래 깨어날 정도였다.

상민은 오히려 예전에 그녀에게 홀대했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지, 몇 가지 선물을 주기도 했다.

마야라는 나라에서 드물게 채굴된다는 흠 없는 특등 경옥으로 만든 장신구들과 옷들.

그리고 화려한 그녀의 전용 마차까지.

남편뿐만 아니라, 황제와 황후도 몹시 기뻐했다.

왜인지는 몰랐다.

어찌 되었든 부부 사이가 좋아진 것을 축하한다며 황후에게도 값비싼 염료를 선물받았으니 대외적으로도 그녀는 정녕당의 안주인으로 인정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루크레치아는 상민의 마음이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볼 때, 여전히 그의 눈동자 뒤에서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젊은 남녀가 서로를 바라볼 때 생기는 열정은 오직 그녀의 눈동자에서만 불타오르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의욕을 잃지 않았다.

희망조차 없었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꼭 완벽하게 내 남자로 만들고 말겠어.’

그를 자신의 품 안에 넣어 조종하거나 그럴 거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버지나 체사레의 명령은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진작 지워진 지 오래.

고려말로, 출가외인이라 한다지.

사랑에 빠진 사람은 확연하게 변한다.

처음 올 때부터 있었던 얼굴에 덧씌워진 가식도, 연기도 이제는 사라졌다.

그녀는 정말로 아내로서 남편에게 완전히 사랑받길 원했다.

단순한 인정만이 아닌.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야 했다.

이탈리아와 로마의 주인, 보르자 가문의 딸로서, 그녀는 이 땅에 문화적 리나시타(Rinascita)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가졌다.

사실 리나시타 혹은 르네상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몰랐지만, 이를 상민의 말을 빌리자면 문예부흥(文藝復興)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문예부흥, 그리고 창양 남부에 지어지고 있는 거대한 건축물, ‘예술의 전당’.

그녀는 처음 그 공사장에 들렀을 때엔 기가 막혀 한동안 말을 못 할 정도였다.

고려의 주요 건축물들이 대체로 남려대륙의 포부와 기상을 자랑하듯 크고 넓으며 웅장하게 설계되었다 하더라도, 개인이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건축한 건축물들은 거의 없었다.

창천궁은 고려의 법궁이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고, 연서궁 또한 고려의 학술기관인 만큼 국비로 지어졌다.

황립 중앙 경기장은 이름처럼 황실과 종친회, 그리고 여러 유명 인사들의 후원으로 건축되었고.

반면 예술의 전당은 정말로 개인이 땅부터 건물까지 전부 돈을 쏟아부어 만들고 있는 사업이었다.

온 기독교 사회의 금을 끌어모았던 교황조차도 저런 공사(비슷한 규모의 성 베드로 성당을 비교하자면)를 쩔쩔매며 진행하는 판인데 그녀의 남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 올해는 지출이 좀 많겠어, 라고 혼잣말을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심지어 예술성을 따지기 위해 건축 설계를 공모하기도 했으며, 내구성을 위해 원자재에 돈을 아끼지 않아, 동급의 다른 건축보다도 더욱 값비쌀 텐데.

듣기로는 고려에서 가장 큰 군함을 건조할 비용의 열 배가 들어갔다 한다.

그동안 집 안에만 있어 남편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상민은 오히려 그녀에게 공을 돌렸다.

“돈을 벌고 쓰는 일은 내겐 무척 쉬운 일이오. 그러나 세상에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있지.”

그게 뭐죠?

혹시 제 사랑인가요?

루크레치아의 바람과는 다르게 상민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예술 그 자체.”

그는 그녀에게 부탁했다.

“당신은 우리가 예전에 나누었던 토론대로 무대 위에서 선보일 작품을 만들어 주셔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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