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05화 (205/653)

풍자와 해학, 관용(2)

2막이 시작되었다.

―탁

경쾌한 소리가 났다.

“여기 보소, 여기 보소!”

무대에 오른 남정네 한 명이 외쳤다.

괄괄한 목소리, 흡입력이 있었다.

준비시간이 끝나고 약간 부산스러워진 관중들의 이목을 돌리는 것에 성공한 사내가 흥겹게 춤을 추었다.

“날씨 참 좋소! 이렇게 좋은 날인데 춤이나 한바탕 실컷 추다 가야겠다!”

얼굴에는 나무로 된 탈을 쓰고 있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탈은 색깔이 조금 더 다채로워진 것을 빼고는 정말 예전에 보았던 하회탈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코!”

그가 발을 짐짓 헛디뎠다.

얼마나 실감 나는지, 정말로 바닥에 돌부리라도 있는 줄 알았다.

“걱정 마소, 내 눈은 멀쩡하니.”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보다 더 눈이 고약한 것은, 주인이란 놈의 낯짝에 달린 눈이지.”

그를 따라 나온 자는 어딘가 조금 표정이 괴상한 탈을 쓰고 있었다.

그 사내는 과장되게 화를 내는 품으로 허리에 손을 올리고 부채로 불룩 튀어나온 자신의 배를 탁탁 쳤다.

극 중 배역으로는 첫 번째로 등장한 사내의 주인인 것 같았다.

종과 주인이 아니라, 아마 행랑아범과 주인일 것이다.

“뭐야아?”

“아 어찌 들으시오, 하늘 높은 관리들이 있다는 재무부의 낭중직에 걸맞게 풍채가 대단하시다, 이 말이었소!”

행랑아범이 후다닥 변명을 하는 것인데, 어조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양반과 천것이라는 절대적인 신분의 차이보다는 그저 주인과 행랑아범이라는 사회적 계층의 차이.

상민은 자신이 보았었던 예전의 탈춤에서의 짓궂은 장난이 오히려 더욱 부각되는 것을 느꼈다.

행랑아범은 다시금 제4의 벽을 깨트리며 관객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귀엣말이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입 옆에 가져다 붙인 손 모양만 그렇지, 말의 성량은 전혀 줄어들지가 않아 관객들이 전부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보소, 저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꼬락서니를. 내 저 번쩍번쩍한 얼굴은 기대도 안 해!(그는 상민의 얼굴에 쓰여 있는 위압적인 백금 가면을 가리켰다.) 그래도 적당히 사람같이 생겼어야지.”

상전을 직접적으로 지목하는 관중들 사이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민 또한 실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어쩌고 저째?”

역시나, 귀엣말을 들었는 듯, 주인이 역정을 내자, 이번에는 행랑아범이 오히려 주인의 곁으로 다가가 속닥거렸다.

“아 어찌 듣는가 모르겠네, 저런 번뜩이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가면이 뭔 소용이겠소? 사내라면 모름지기 관직에 나가 출세를 하는 것이 꿈인데, 한갓 부상(富商)이(이번에도 행랑아범은 상민을 가리켰다.) 감히 대고려국의 낭중에 비할 바 있겠소?”

“네 말이 참으로 맞다, 맞아!”

그 말을 들은 정녕당의 하인들이 자지러졌다.

낭중은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위직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정녕당의 주인, 시중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조참이 일어나면 상민은 저런 ‘실무자급’ 관리들은 신경조차 쓸 시간이 없다.

업무적인 잘못이 있을 때는 시중은 그보다 훨씬 더 윗선인 상서령을 까지 한참 밑으로 거슬러 내려가 직접 지적을 하지는 못한다.

그게 관료제니까.

이후 그 상서령은 상서를 까고, 상서는 시랑을 까고, 시랑이 그제서야 낭중을 까야 하는 내리갈굼이 벌어지겠지만.

― 꼬옥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웃는 와중, 상민은 슬그머니 자신의 오른손을 잡는 피부의 촉감을 느꼈다.

유일하게 웃지 못하고 있는 사람.

루크레치아는 속사포처럼 쏘아지는 무대 위 탈을 쓴 재인들의 말 중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큰 손을 잡는 부드럽고 작은 손을 떨쳐내는 대신, 상민은 나지막하게 해설을 해 주었다.

“방금 저 사람이 했던 말은….”

“…….”

익숙하게 접했던 다른 언어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어는 한창 공부하고 있는 상태라 동시통역은 불가능했지만, 루크레치아는 교황을 아버지로 둔 덕에 상당한 라틴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둘은 고려의 극을 보며, 라틴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상민의 친절한 해설 덕에 루크레치아도 비로소 극의 흐름과 농담을 이해하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행랑아범역을 맡은 사내와 주인댁의 실랑이가 끝이 나자, 한참을 빈정대던 행랑아범은 이제 극의 해설자가 되어 주인댁의 행동을 비판했다.

일그러진 탈의 얼굴만큼이나 우스꽝스런 기행을 일삼는 주인댁은, 높은 사회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음이 도드라지는 행동을 보였다.

어리석은 행동과 음탕한 행동을 하면서도, 애써 바깥과 관객들에게는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그중 화룡점정은 고려인의 차별에 대한 풍자였다.

주인댁은 자신의 집 앞에 있는 흰 가면(피부색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을 쓴 거지 소년을 무시하고 발로 찼다.

재무부 산하 조직인 의창(義倉)이 전조의 임무를 그대로 유지하며 도성의 거지나 빈곤한 자들에 대한 구휼을 관할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재무부 낭중 주인댁의 행동은 실로 모순적이었다.

“아 고년, 피부가 마치 잘 까진 복숭아와 같구나. 그러나저러나 내 말을 들어봐라. 내로 말하면 이 고려의 지체 높은 재무부의 관리라, 권세와 금전이 모두 있는데, 너와 네 동생을 못 사겠느냐? 내가 이 돈이란 것으로 너를 사 보겠느니라, 옜다 돈을 받아라, 여기 돈을 받아라!”

새롭게 등장한 소년의 누이.

극이 시작하기 전, 멀리서 볼 땐 이 광대는 놀이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 같았었는데.

그러나 그녀는 극 중 역할에서는 대사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표정은 달랐지만 색깔 자체는 쓰러진 소년과 똑같은 가면을 쓴 그녀는 잠시 바닥에 떨어진 돈과 복부를 움켜쥐고 쓰러진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덩실거리며 돈을 주웠다.

돈을 주워 신이 난다는 춤사위.

그러나 어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나 처량하게 춤을 잘 추는지 관객들은 그 춤사위에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악역, 주인댁은 더욱 우스꽝스럽게 거지 소년의 누이 곁을 빙빙 맴돌더니 이윽고 외설스럽게 허리를 튕겼다.

“어이쿠, 잘 먹는구나. 그렇게 잘 먹을 수만 있다면 내 이 실한 물건까지도 먹어라!”

소년을 경멸하며 발로 찬 그가 똑같은 피부색을 가진 백인 소년의 누이에겐 욕망을 느끼고 지금의 남려대륙에서는 볼 수도 없는 상상 속의 과일, 복숭아에 비교하며 끌고 사라지는 행동은 처음에는 웃음을 짓게 만들었지만, 뒤로는 묘하게 찝찝한 구석을 남겼다.

진작부터 민간의 탈춤이 상당한 수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상민은 별로 큰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상민의 가감 없는 해설을 들은 루크레치아는 실로 어질어질한지, 이마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순간, 상민의 머릿속에는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선명한 빛줄기가 보였다.

다소 독특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보며 너털웃음을 짓던 상민의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분이 상해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니었다.

빛줄기 뒤에는 마치 천둥처럼 떠오르는 영감들이 있었다.

풍자와 해학.

이 탈놀이는 이들이 살아가는 현 사회에 대한 풍자를 적절한 웃음으로 승화하면서 큰 거부감 없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별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분명히 어떤 주제를 마음속 깊은 곳에 남겨둔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자신은 이미 저 문제를 몹시 중차대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 별 반응이 없었던 것이지, 다른 사람들은?

평소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거부감 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 그리고 문화를 통한 전달과 호소.’

상민은 슬쩍 옆을 바라보았다.

정녕당의 하인들은 제각기 주인댁을 욕하고, 소녀를 동정했다.

아마 상민이 같이 관람하고 있지 않았다면, 극 중에 몰입하여 주인댁에게 야유라도 퍼부었을 기세.

‘문화의 힘은, 어쩌면 총과 화약보다 강하다.’

장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억지나 강요, 그리고 딱딱하게 계획된 교육으로 잘 바뀌지 않는다.

지식을 알려줄 수는 있겠지.

그러나 민중들의 가치관이라는 것은 실로 복잡한 것이라, 관에서 의도한 대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

하지만 상민은 방금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게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실마리는 다소 엉뚱한 곳에 있었다.

황금을 비롯한 경제적 역량도, 대포와 총으로 대변되는 군사적 역량도 아닌.

저 나무로 된 탈에서.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 * *

저녁이 되자 공연은 끝났다.

시중 부부가 호종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배웅한 놀이패는 드디어 끝났다며 숨죽인 환호성을 질렀다.

그 와중, 꼭두 종길은 딸아이를 따로 불러 크게 화를 내었다.

“정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꺼낸 것이냐?”

“…어찌 되었든 잘 끝났잖아?”

정아는 뒤풀이를 허락한 시중의 지시로 주변의 하인들이 간이 연회장을 설치하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리 가축이 흔한 고려라지만, 이 인원이 전부 포식을 할 정도로 넉넉하게 돼지를 잡으라는 시중의 말은 상당히 달콤했다.

어쩌면 손에 들린 금화 주머니보다도.

그러나 하종길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모양.

그의 분노는 어찌 보면 당연했다.

표현을 다소 절제하겠다며 그를 안심시켰던 그녀가 오히려 민감한 주제를 건드렸으니.

탈춤은 여러 가지 상황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지 소년과 누이가 나오는 것은 하나의 극에 불과했다.

극은 모두 일곱 가지.

문제가 된 것은 국자감에 입학한 신진 관료 하나가 조강지처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다가 큰 망신을 당하고, 결국 조강지처 또한 다른 남자와 놀아난다는 내용을 담은 극이었다.

사회자는 거지 소년의 누이로 나왔었던 하정 자신이 직접 조강지처가 되어 해설을 보았다.

그녀는 부채로 시중 부부를 가리키며 말했었지.

―여보소, 퇴청하고 왔는데 젊고 아리따운 아내가 다른 놈팽이와 침상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꼴을 보기 싫다면, 지금 잡은 두 손을 꼭 놓지 말아야 할 거요.

시중 부부에게 직접 훈계를 하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던 하종길은 마치 오장육부가 전부 다 튀어나오는 것마냥 크게 놀라 뒷목을 잡았었다.

“우리 모두가 위험에 처할 수가 있었다. 모두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거늘! 그런 민감한 말은 하지 말….”

“그게, 우리가 보여주는 놀이야? 불편한 말은 하지 않는 거?”

하정은 허리에 손을 얹고 뾰족하게 소리를 질렀다.

“정말 사람을 웃기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접근하면 안 되지. 해학도, 풍자도 없는 탈춤이 무슨 탈춤인데?”

“너 정말… 이제는 결혼까지 한 마당에!”

하종길은 그녀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딸아이에 대한 걱정에 가슴을 두들겼다.

그녀 또한 아버지로서의 걱정을 느꼈는지 한숨을 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빠. 당하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시라는 걸 잘 알잖아.”

“…너무 결과론적인 이야기었다.”

“게다가 황상께서 직접 시중 내외의 사이를 진작시켜 달라고 하셨던 것은 그새 잊었어?”

“…그래도 너무 위험한 접근방식이었다.”

“위험하긴 하겠지. 근데 효과는 좋을 거야.”

종길은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아비는 오늘의 일을 없던 걸로 할 수는 없다. 넌 한동안 근신하고 있어라. 네 탈놀이패도 마찬가지고.”

“알았어.”

하정은 샐쭉한 표정을 지었으나, 담담하게 그녀에게 내려진 처분을 받아들이고는 자리로 돌아가 도축되어 구워지려 하는 돼지들을 바라보며 뒤풀이를 즐겼다.

* * *

밖에서는 다소 시끄러운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

그러나 상민과 루크레치아는 정녕당 안에 들어온 지 오래.

이들 부부는 만찬장에서 오래간만에 대화를 지속하고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한창 그가 해설해 주었던 탈춤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는지 연신 재잘거렸다.

“좋은 구경을 했어요. 정말.”

“다소 화가 나진 않으셨소?”

아무리 극 중에서라지만 루크레치아가 바람이 날 수 있을 거라는 풍자는, 지금까지 잡아 본 남자 손이라곤 상민이 전부인 그녀의 순수성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기독교적 가치관도 있을 텐데.

물론 역사를 알고 있던 상민은 아주, 아주 살짝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 했지만.

그러나 루크레치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콤메디아(Commedia)가 다 그렇죠. 짓궂지만 무대가 끝난 다음에는 모두 사라질 말이니까요.”

상민은 갑자기 든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이탈리아에서의 즉흥연극이란 어땠소?”

“고려와 몹시 비슷해요. 우리의 축제는 탈춤처럼 생동감이 있죠.”

그녀는 젓가락을 뻗어 생선전 하나를 집었다.

“그때만큼은 종교적 풍자도, 권력에 대한 풍자도 가능해요. 정도만 잘 조절할 수 있다면 이교도적 언행도 가능하고요.”

“즉흥연극은 이 탈춤보다는 조금 더 실사적이라 해야 할까요? 직접 검을 들고 무대에 오르는 연기자들도 있고, 전투를 과장해서 보여주는 그런 장면도 있죠.”

“…오호.”

“콤메디아는 종류가 많아요. 탈춤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하는 콤메디아도 있고, 지체가 높은 사람들에게 하는 콤메디아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격식을 갖춘 극장이라는 설비를 가지고 그곳에서 공연하는 추세였어요.”

“고대 로마나 그리스의 원형극장처럼 말이오?”

“네.”

루크레치아는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러나 상민은 그 떠드는 모습보다도 그녀가 가진 해박한 지식에 상당히 놀랐다.

안목 또한 상당하다.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 로마에 있었던 루크레치아는 연극을 비롯한 실로 많은 것들을 경험했겠지.

상민은 그녀가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작품과 작품의 가치를 구별할 정도의 높은 안목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리… 아니 오라버니의 가문 보르자의 후원을 받는 콤메디아 델라르테는 로마에서 상당히 유명했어요. 번듯한 극장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루크레치아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었다.

상민은 그녀에게 몹시 복잡한 의미를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란 놈은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군.

그러나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모든 계획의 관리자로 적합한 인물을 그녀 말고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당신, 나랑 일 하나 합시다.”

이별의 제안은 꺼낼 수가 없다.

대신 상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동업의 제안이었다.

[작가의 말]

본문에 나온 극은 봉산탈춤 취발이춤과 양반말뚝이춤, 하회탈춤 중마당편을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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